생명전쟁 - 생명 연구의 최전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윌리엄 F. 루미스 지음, 조은경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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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과학 그 중에서도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황우석 박사 사건이 먼저 떠오를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염색체가 제거된 사람의 난자에 체세포의 핵을 투입해서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발표가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다른 선진국에 앞서서 우리나라가 이 분야에서 첨단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에, 불치병이 곧 치료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그러한 성공이 가져올 경제적인 이익이 어떤 것인가 등에 대해서 열광하였으니까요. 사건의 결말은 엉뚱하게도 논문이 조작되었고 우리 대부분은 백일몽 속에서 몇 개월을 헤메었다는 허망함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낯설기만 하던 난자에 체세포를 집어넣는 기술에 대해서, 그리고 줄기세포와 그것을 이용한 질병의 치료 등에 대해서 이해하고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지식의 이해못지 않게 우리들에게 일어난 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지닌 몇몇 도덕적인 문제들이 지적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면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일깨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이란 것이 단순히 남들보다 기술 경쟁에 앞서서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는 수단이 아니고, 그에 대한 연구는 모든 면에서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난자와 정자의 조작이나 유전자 조작 등 생명 현상에 대해 인위적인 조작을 가할 때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한계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 문제라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윤리적, 도덕적 또는 정치적인 면에서의 생명 현상에 대한 논란을 논하는 책은 아닙니다.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순전히 생물학적인 관점-개인적으로는 도덕이나 윤리, 정치적인 생각이 배제된 순전한 생물학적인 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생물학적 사실에 근거한 관점이라는 의미-에서 생명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그러한 생명에 대한 현대의 조작, 그리고 생명의 미래에 대해서까지 저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 및 유전학 등의 발전으로 생명체에 대한 이해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각종 생식세포나 유전자에 대한 조작, 생명의 발생과정에 대한 인위적인 관여가 가능해진 현대에 이르러서는 낙태나 안락사, 인공수정과 같은 문제 외에도 배아줄기세포, 유전자 치료, 유전자 조작 식물에 대한 논란이 있고, 결국 언젠가는 인간복제라는 문제도 논란거리가 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1장에서 4장까지에서 저자는 생명의 가치, 인공수정, 배아줄기세포, 유전자 조작 및 인간 게놈 정보 등, 생물학의 첨단분야에서 야기되는 생명윤리에 대한 논란들을 생물학적인 사실들에 근거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앞부분의 4개의 장이 이 책이 가진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후의 5장의 '사회생물학', 6장의 '의식'과 뇌, 사고와 기억, 7장의 '생명들의 사회학적 게임'에 대한 부분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생물학이라는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접해보지 못해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과도한 주제의 확장으로 인해 산만함, 또는 단편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8장의 '생명의 기원에서 인간의 진화까지'의 내용은 진화론이 생명의 탄생에서 현재까지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불완전하거나 추측에 의한 부분들까지도 완벽하게 사실처럼 -아직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이어서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있어 불편함마저 느껴집니다. 9장의 '소멸할 것인가 생존할 것인가'에서는 생물학자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인류공동체를 위한 생물학을 이용한 생활개선, 지구 오염과 인구 팽창에 대한 위기감의 표현과 이에 대한 대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세계 인구를 현재의 1/3 수준으로까지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구 증가가 가져온 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짚어보게 하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지구 오염과 인구 팽창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저자만큼의 혜안이 없기에 순전히 한 개인의 느낌으로 치부할 수 밖에 없겠지만..... - 

 낙태나 안락사 문제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중요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정답을 말할 수 없는 문제이고, 한편으로는 여러 특별한 각각의 상황이 존재하기에 하나의 대답을 만들기가 힘든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인 사실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러한 문제에 접근한다면 좀더 나은 논쟁을 할 수가 있고, 또한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유와 설득하기 위한 기회를 더 가질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배아줄기세포, 유전자 치료, 인간게놈의 활용, 인류의 지속을 위한 미래의 계획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쟁의 현장에도 종교적인 신념이나 윤리 도덕적 판단,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기위한 정치적인 판단에 이르기까지 올바른 판단을 위한 근저에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인 사실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언급하는 생명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은 매우 유용하고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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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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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에 대한 넓은 지식과 혜안을 담은 저술들로 일반인들에게 다른 여느 유명 과학자 못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인기를 얻은 저자의 능력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이 책을 읽는 시간 내내 마음 한쪽에 들어앉아있는 불편함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과학적 탐구의 여정을 통해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면밀하게 따져본다면 저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라는 생각을,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신의 존재나 종교의 역할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의미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자는 이 우주를 지탱하고 물리학적인 현상들이 유지되는 세상의 배후에 있는 단순한 법칙이라는 의미를 신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은 그 존재를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나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창조물들의 세상에 간섭하는 신의 존재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물리법칙들은 증명이 가능하지만 종교에서 주장하는 그리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체험하는 그런 신의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는 동일하게 증명되지 않는 주관적인 것들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화학물질들이 그러한 종교적인 체험들과 비슷한 경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단지 일상적이지 않은 -또는 비정상적인- 자극이나 반응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적어도 과학자로서 그리고 그러한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저술들로 일반인들을 과학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으로서의 관점에서 저자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물론 완곡한 어법으로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어떤 과학적인 증거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그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않았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1985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자연 신학에 대한 기퍼드 강연'의 기록을 엮은 이 책은 저자의 이력에 어울릴만하게 우주에 대한 지금까지의 축적된 방대한 과학적인 사실들을 통해서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강연을 통해서 광대한 우주와 그 안에 담긴 우리 은하계와 태양계, 그리고 그 방대한 세계에서 밝고 푸른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위에 하찮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창조와 신의 존재, 우리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한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인으로서의 견해가 아닌 철저하게 관찰과 증명가능한 과학적 사실들에 입각한 관점에서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런 관점에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종교가 말하는 그런 신의 증거는 우주 어느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관점은 철저히 과학적인 것들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히 물질적인 면을 고수한다는 점도 지적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7강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강의 내용에서 언급한 종교적 체험과 약물 등을 사용한 경험의 유사성에 대한 이야기나 심령술이나 영혼, 정신세계에 대한 언급을 보면 그 모든 것을 물질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거나 물질적인 증거가 없는 주관적인 의견에 불과하므로 과학적으로 논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여과없이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과학이 다룰 수 있는 물질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논의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별들을 보면서 경이를 느끼지만 그것이 우주 자체의 광활함과 그 체계를 유지하는 법칙들의 정교함 그리고 우리 지구와 생명으로서의 인간 자신에 대한 미미함 등에 대한 느낌으로서의 경이로움이지 그러한 천지만물을 만든 존재, 그러한 것들의 운행을 간섭하는 존재, 그리고 지구의 인간들에게 인격적인 교재를 원하는 그러한 존재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경이로움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시대까지 서양에서는 종교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고, 모든 사람이 그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되려고 했던 종교는 그에 반하는 명백한 과학적인 사실들이 확인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권위있는 자리를 과학에 물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가 말하는 우주론은 그냥 신화 취급을 하지만 과학이 발견해서 발표하는 블랙홀이니 우주의 팽창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뢰의 눈길을 보내며 경이롭게 받아들입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누가 보더라도 확연하게 증명되고 설명될 수 있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지지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중세에 종교가 과학을 말살하려고 하였듯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역으로 과학이 종교를 반박하고 그 중심에 있는 신의 존재에 대한 공격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과학적인 입장에서 저자처럼 신의 존재에 대해서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에 대한 신 -하나님-의 계시를 특별계시와 자연계시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성경이라는 경전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을 특별계시라고 하고 우리 주위의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경이로움 등에 담긴 것이 바로 자연계시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이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행했던 '기퍼드 강연'은 바로 자연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명사들의 강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으로 보아 저자는 자연계시라는 측면에서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신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지점에서 과학지식을 어느 지점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과학이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분명 타당한 부분들이 있고, 과학의 탐구 분야가 넓어질수록 종교가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은 더 좁아질 것이고, 한편으로는 창조론에 이은 지적설계론이 종교에 대한 과학의 이러한 공격에 대항하는 것은 알지만, 철저한 과학자와 종교인 사이에는 서로 논쟁하기에는 좀더 근원적인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이 '왜'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가? 또는 과학적 방법론이 신의 존재를 탐구할 수 있는 것인가? 중세의 종교가 그러했듯이 앞으로는 과학이 모든 것들 설명할 수 있다는 권위를 내세우며 그러한 권위를 인간사의 모든 면에서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의 질문에 종교와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는 것, 사물과 세상을 다루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이 무척이나 성공적인 방법론이기는 하지만, 다른 여러 가능성들을 희생하면서 이룩한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성공적인 체계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가능성의 의미는 진화론에서 인간이나 영장류가 손가락이 여덟개나 열두개가 아닌 열개를 가진 존재로 진화했다는 사실에 담긴 그러한 의미에서의 가능성의 의미와 과학이 오로지 물질적인 것, 측정 가능한 것 등 만을 탐구영역으로 삼아 발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등의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의미있는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의 여러 가능성 중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성공적인 체계화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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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 누구나 한번은 꼭 가봐야 할 대한민국 핵심 여행지, 개정증보판
이두영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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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이라는 제목과 '누구나 한번은 꼭 가봐야 할.....'이라는 부제가 평소라면 여행서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휴가철이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럼 어디 한번.....'이라는 심보로 이 책을 드는 내게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옛말을 천성적으로 받들고(?) 사는 나로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여러 여행지들에 대한 멋스러운 감흥이나 찬탄들이 매번 '그저 그런데....'라는 평범함으로 끝난 적이 여러 번인데, 그 이유를 곰곰히 따져볼라치면, 여행에 필요한 약간 고조된 감성지수의 부족, 작은 것도 크게 부풀릴 줄 아는 허풍 능력의 결여,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이해를 위한 사전 지식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부족 등등... 여러가지 단점들과 더불어 일상을 떨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즐길 줄 아는 여유로움의 결여가 문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 여행지 33곳을 바다와 산과 강과 꽃이라는 네 가지의 주제아래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곳당 6-8페이지의 분량으로 멋지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사진들과 마음이 담긴 글, 그리고 간단하게 주변 볼거리, 맛집, 숙박에 대한 정보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읽는 이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 책을 소개서 삼아 나설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다시 곰곰히 따져 보면 저자가 이만큼의 소개를 하려고 발품을 팔았다면 조금 과장한다면 적어도 한 곳당 십여번은 길을 따라가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소개하는 여행지의 멋과 정을 맛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내 너무 간단하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웁니다. 그리고 여행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의 느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느끼고 그 안에서 멋과 맛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이곳에서 이런 맛과 멋을 보았소'라고 소개해 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 준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저자가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한다고 할 만큼 자신있게 소개해 주는 여행지들을 내 발로 찾아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느끼고, 그 안에서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추억과 느낌을 만들어 낸다면, 그때서야 저자가 말하는 한번은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나같은 사람이 일년에 두번쯤 여행을 나선다고 해도 저자가 소개한 곳을 모두 갈려면 십오년이고 1년에 한곳씩이라면 30여년이니, 정말 죽기전에야 다 가볼수 있을만큼 많은 곳이라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물론 저자는 그런 의미로 제목을 붙이진 않았겠지만.....^^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여행지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보고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알 수 있기를 바랐겠지만, 아마도 33곳 모두를 자신처럼 훑고 다니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무작정 자신이 소개하는 여행지를 보러 다니는 것 보다는 읽는 이들이 자신의 책을 통해 소개받은 한두곳의 여행지를 통해서 독자 자신만의 멋과 향을 느끼고 배워서, 저자가 소개하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가 아닌 독자 스스로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들을 하나, 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더 바라지 않을까 하는 조금 엉뚱하기는 하지만, 나름 진지한 결론을 내려봅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만의 멋진 곳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닥 멋진 곳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삶의 기억과 추억들이 얽힌 곳이라면 그곳은 그 누구의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낯선 여행지를 그냥 한번 훑고서 판단하는 것은 여행의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초보자의 눈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담긴 것들의 낯섦이 사그라들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이해될 때까지 머물기도 하고 다시 찾아보기도 하는 여유로움 속에 아마도 모든 사람이 원하는 멋진 여행지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번 여름은 바로 그런 자세로 저자가 소개하는 여행지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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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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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무언가 대단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대단히 현학적인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 대단한 행동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평범한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비슷한 감정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교육감 선거를 통해서 진보적인(?) 분들이 여럿 당선되면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논란이 된 '학생인권'이라는 것도 뭔가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고, 또한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단한 행동을 해야 하고 특별한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이가 어느정도 든 세대에게는 권리를 찾는 것, 또는 누군가의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은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서 독재권력에 맞서 피를 흘리던 시절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러한 기억이 결국 인권이라는 말에 그러한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과 부담을 덧씌워 놓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담스러움을 말하는 것이 여러 부류의 사회적인 약자들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의 가치를 폄하하는 생각에서의 표현은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니 권리, 자유를 언급할 때, 우리의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인권이란 뭔가 대단한 것이라는, 그리고 뭔가 대단한 변화를 가져와서 불안함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쉽게 용납하고 인정할 수도 있는 사실에 대해서 다수자 또는 권력을 지닌 편에서 너무 경직되고 완고한 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입니다. 물론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 중요한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의 심리적 장벽이 인권의 문제를 다룰 때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그런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서였는지, 이 책에서는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엄숙하고 딱딱한 법이나 철학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우리가 훨씬 쉽게 받아들이고 다가설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권의 정신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으로,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가 말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권이 출발점이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고 상대편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라는 말은 어렵게 대단한 일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던 인권에 대해서 우리가 훨씬 부드럽게 다가 설수 있는 것, 내가 하는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도 있는 것, 그리고 매일 매일의 내 생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제도적인 틀이 중요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와 관계된 문제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내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장애인들이 선진국처럼 차별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고, 노동자들이나 사회적 빈곤층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온전히 주장하고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의 대단한 변화를 의미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은 사회 구성원 각각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아주 단순하지만 성숙하고 고귀하기도 한 삶의 자세를 익히고 실천하는 데 있다는 말은 결국 국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사회 구성원 각각의 성숙한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비약하자면 사회 각 구성원의 삶의 성숙도가 곧 한 사회나 국가의 인권지수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검열과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의 문제, 제노싸이드의 9가지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모두가 한두번은 우리 사회의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거나 매스컴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사안들이기도 한 이 주제들은 한편으로는 세상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있을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서, 교육받은 환경이나 자란 환경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성수자 인권과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완고한 편이고, 나머지 주제에 대해서도 저자가 말하는 정도까지의 권리의 허용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는 문제들도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의견의 대립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 정신외에 서로 대립할 때는 '약자의 입장에서 우선'이라는 성숙함을 요구합니다. 다수자나 권력이 있는 이들에게는 단순한 불편함이나 거부감으로 끝나는 문제들이 소수자나 약자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이르게 하는 심각함을 지닌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일리가 있는 의견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인권에 대한 문제들은 포괄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나 자신의 성숙함 또는 건강함에 대한 질문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느끼지 못했던 내가 처한 자리에서의 무감각하고 개념없음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게도 만듭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내 주위에 없기 -없다고 믿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성적소수자들, 아주 자랑스럽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군말않고 남자답게(?) 다녀온 군대에 대한 기억으로 인한 것일 양심적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상당히 완고한 생각은 분명 역지사지하는 자세,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저자의 의견처럼 이런 문제들이 매스컴을 통한 이슈가 아닌 내 이웃이나 동료, 가족의 문제였다면 훨씬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취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먼저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권에 대한 여러 문제들은 여전히 나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대단한 문제들로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내게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가르쳐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은, 나의 일상에서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 그래도 이해가 안되고 무시하고 싶을 때는 약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매스컴을 오르내리는 인권문제가 대단해 보인다면 내 삶속에서 이런 태도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기대하는 더 건강하고 바람직한 우리 공동체에 대한 소망이 훨씬 더 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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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민음사 모던 클래식 29
알레산드로 보파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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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코비츠와 그의 여자 친구 -또는 부인- 리우바, 그리고 친구 로페즈, 페트로빅, 주코틱과 라라가 등장하는 스무편의 짧은 이야기..... 하지만 이 소설에는 형식과 전개 방식에서의 뚜렷한 특색이 있습니다. 기존의 소설이 일반적으로 고정된 등장인물 -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사람이 번갈아 등장할 수도 있겠고, 반드시 주인공이 사람이 아닐수도 있지만^^- 에 대한 시간과 공간 또는 심리적인 변화 등을 기반으로 형성된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반면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비스코비츠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유지되는 것은 이름과 이야기에 등장하는 역할의 중요함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 이야기에 등장하던 비스코비츠는 뒤따르는 이야기에서는 더 이상 앞에서 언급된 비스코비츠가 아니고 그의 동료들도 더 이상 앞 이야기의 그들이 아니니까요. 처음에 비스코비츠는 겨울잠쥐로 등장해서 들쥐로서의 꿈과 욕망을 간직하며 살아가지만, 뒤따르는 이야기에서는 느림보 달팽이로, 그리고 이어서는 사마귀와 되새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어 가며 등장하고..... 마지막에서는 세균에서 진화해서 완성된 동물로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스무편의 이야기에 스무가지의 동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비스코비츠는 일관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기 보다는 자신의 모습이 된 각각의 동물의 생태에 얽매이고 충실하게 적응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마귀로 태어난 이야기에서는 사랑의 결말로 여느 수컷 사마귀처럼 암컷에게 잡아먹히고, 되새가 된 이야기에서는 결혼하기 위해서 집을 만들고 결혼해서 알 -새끼-을 가지게 되지만 뻐꾸기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상어로 등장한 이야기에서는 자식에게 잡아먹히고, 전갈로 등장한 이야기에서는 꼬리와 집게로 살생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독곤충의 모습 등 각각의 동물의 생태에 충실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자웅이체 번식을 거부하고 자웅동체 번식을 이루어내는 달팽이, 자신의 약점을 권력을 잡기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개미, 춤을 통해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돼지, 재산을 모으고 권력을 탐하는 쇠똥구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등에서는 동물의 생태를 따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생태(?)를 그대로 옮긴듯 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성의 특이함과 이야기들의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들을 한권의 소설로 다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 스무개의 이야기를 읽은 혼란스러움보다는 무언가 이야기들의 일관된 주제를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닐것 같습니다. 이솝 우화를 읽고 뭔가 교훈적인 가르침을 얻었다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분명 의인화된 동물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우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동물들에 대한 매우 세밀한 생태를 표현했다는 사실감으로 인한 호소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만,  그 부분도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수는 있겠지만 뭔가 그럴 듯하다는 느낌의 본질은 아닐 것 같습니다.....  

 ..... "장하구나, 너는 이제 동물이다. 하지만 아직 네게는 배울 게 남아있단다." "....?" "죽음이다, 비스코." "농담하지 마세요." "이제 너는 병원체가 아니다, 비스코. 동물은 죽는단다."  "잠깐..... 모든 걸..... 단념하는 건가요?" "그래, 모든 것을."..... 세균에서 시작하여 동물로 진화하여 진짜 생명의 시작에 대한 기대를 품는 순간, 비스코비츠에게 어떤 목소리는 '너는 동물이고 아직 배울게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동물은 죽는다는 것, 모든 것을 단념해야 하는 순간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임을 가르치며 이야기는 끝나고 있습니다. 황홀한 사랑을 꿈꾸던 겨울잠쥐 비스코비츠도, 자웅동체의 사랑을 이룬 달팽이 비스코비츠도, 부와 권력을 이룬 돼지 비스코비츠도, 되새와 상어와 사마귀와 쇠똥구리의 모습을 가졌던 비스코비츠도 결국을 죽는다는 것, 죽음이란 결국 후손을 통해 하나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는 하겠지만 개체로서의 단절,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하고자하는 모든 욕심과 행위와 의도를 단념하고 태어났던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에 대한 이러한 일깨움은, 땅 위 한구석을 차지하며 살 수 있었던 생명체로서의 의미와 한계를 깨닫고 감사하고 겸허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아닐는지..... 여러 동물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비스코비치를 통해서 표현된 우리의 일상속에 담긴 다양한 삶의 모습과 '결국 죽는다'는 마지막의 대화속에 담긴 일깨움을 통해서 마주하게 되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철학적이기도 한 '난 누구일까?'라는 의문은 작가가 비스코비츠를 통해서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 한데 네 이야기를 읽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지?' .....' 비스코비치! 난 누구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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