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빌 브라이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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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희극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단시들만이 전해졌다면, 그를 아주 검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우리는 그를 우아한 사람, 지적인 사람, 철학적인 사람, 우울한 사람, 책략에 능한 사람, 신경질적인 사람, 쾌활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등으로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로서 셰익스피어는 이 모두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p27~28,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찾아서> 중에서 

 '깔끔하게 턱수염을 기른, 머리가 벗겨졌지만 그리 못생기지 않은 40대 남자..... 왼쪽 귀에 금귀고리를 달고..... 표정은 자신감이 넘치고 매우 호쾌하다. 이 남자는 당신의 아내나 다 자란 딸을 가볍게 맡길 만한 남자는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로 알고 있는 '챈도스 초상화'에 대한 작가의 설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생존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무도 그가 진짜 셰익스피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다만 그리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지요. 셰익스피어의 초상으로 알려진 작품은 두가지가 더 있다고 합니다. 1623년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 First Folio-의 권두화로 실린 동판화-드뢰샤웃 판화-와 그의 유해가 묻혀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벽으로 된 셰익스피어 기념물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채색된 실물대의 조상인데, 두가지 모두 셰익스피어의 사후에 그린 것으로 솜씨가 별로 좋지 않았던 화가들에 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한눈에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라고 알고 있는 그림은, 실은 신빙성이 높지 않은 작품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을 모두가 그렇게 믿고 서로에게 말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100여년 전의 명성황후의 모습과 사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일어나고는 하는 논란을 생각해 보면, 400여년 전의 셰익스피어의 모습에 대한 논란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역사적인 자료로 당연시하며 존중하는 것들의 허술함 대해서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묘한 것은 우리가 그의 초상을 보면 즉시 그가 셰익스피어임을 알아보지만, 실상 우리는 그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애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는 잘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이 책은 이처럼 어설픈 초상화 세개를 가지고 누구나 그리 믿게 된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듯이, 우리가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빈약한 몇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그의 완벽한 생애를 무리하게 재생해 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제 알려진 사실보다 더 많아져버린 추측과 억측들, 그리고 그것들이 사실처럼 호도되어 버린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어떤 것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이야기되고 있기에,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상상을 가미한 사람들의 추측인지가 헛갈리는 것이 사실이기에, 실제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셰익스피어의 일생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사실과 추측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구분해 나가며, 현재까지의 자료에 근거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처음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들을 분명히 인정하고, 타당성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 또한 충분히 남겨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와는 별개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는 다양한 작품이 실제로 남아 있으니-실제 원작인지, 가필되거나 고쳐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실제 셰익스피어의 생애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풍요로운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그의 생애 자체보다는 더 다채로운 이야기들과 평가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출생에서 죽음-1564~1616-까지를 다루는 앞부분-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보다는  마지막 9장의 '이색 주장을 펴는 사람들'편을 가장 흥미롭게 읽을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담은 부분인데, 베이컨이나 옥스퍼드 백작 등이 실제 저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셰익스피어가 죽고나서 200여년 동안 그의 저작에 대해서 의심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800년대 초반 델리아 베이컨이라는 미국 여성의 알수 없는 확신에서 시작된 셰익스피어가 진짜 작가가 아니라는 집착에 사로잡힌 연구의 결과가 뜻하지 않게 베이컨 저작설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였고, 그러한 주장이 일종의 종교처럼 번지며 소문이 소문을 낳는 과정을 거쳐 진실인양 확대 재생산 되고 있음을 추적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셰익스피어를 대신할  후보자로 베이컨에서 시작된 명단은 옥스퍼드 백작, 크리스토퍼 말로, 펨브로크 백작부인 메리 시드니 등을 거쳐 이제는 그 수가 50여명에 이른다고 하니, 호사가들의 실없음에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실제 현재 우리가 접하는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분명 400여년전에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적인 작가였던 인간 셰익스피어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타 다른 주장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초상을 보며 셰익스피어라고 느끼듯이 그가 남긴 작품들과 그의 생애의 흔적들은 그가 분명 위대한 작가였고, 그러한 작품을 남길 만한 재능과 환경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초상속의 셰익스피어를 아는 것이 실제 셰익스피어를 아는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듯이, 우리가 접하고 인정하는 셰익스피어의 명성과 탁월함이라는 것도 400여년 전에 존재했던 인간 셰익스피어 자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라는 명성과 탁월함 속에는 400여년의 세월동안 그의 작품을 보존하고 정리하고, 시대에 맞게 이리저리 다듬고,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탁월함과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서 알린 수많은 학자들과 연극인들,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의 연극에 열광할 줄 알았던 관객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한 영광의 근본 바탕은 물론 400년전 실존했던 스트랫퍼드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인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겠지요. 이 책은 우리가 아는 영광의 관을 쓰고 있는 셰익스피어라는 신화적인 인물이 만들어지기 전의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을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바탕 위에서 이제는 그의 작품들의 탁월함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한 문헌은 그 시대에 그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있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실 우리는 그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어떤 극작가보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6, 데이비드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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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일기 - 절망의 수용소에서 쓴 웃음과 희망의 일기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윤소영 옮김 / 막내집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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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나는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보다 낫거나 못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이 전쟁에 말려들었다. 처음에는 독일의 동맹군인 이탈리아 군인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독일군의 이탈리아 포로가 되어 버렸다. 1943년에는 영국군과 미군이 우리 집을 폭격하더니, 1945년에는 그들이 수용소에서 나를 풀어주고 깡통 우유와 통조림 수프를 선물로 주었다. 이게내 이야기의 전부이다. 흔해빠진 이야기 속에서, 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떨어진 개암 껍데기 같은 존재였다. 아무런 훈장이나 메달도 없이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나는 승리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이 소용돌이를 헤쳐 나왔으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친구인 나 자신을 재발견했으니까 말이다. -p9-10, <사용설명서> 중에서 

 조반니노 과레스끼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시리즈나 <까칠한 가족>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 만의 독특한 유머와 웃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접하면서도, 비록 수용소에서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발한 웃음과 유머를 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저자의 기질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다는 성급한 기대가 앞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나, 현실을 억누르는 수용소에서의 절망적인 상황은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고, 또한 그 안에서 살아남는 다른 방식을 터득하도록 만드나 봅니다. 배고픔과 고립과 절망,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곁에 두고 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결코 잃지 않으려고 웃음과 유머를 찾고 있지만, 그런 삶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이야기 뒤에 담긴 어두움의 흔적들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아무런 전리품도 없이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절망속에서도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더 소중한 자신을 찾은 승리자'의 모습을 독자로서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작품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웃음과 즐거움보다 더 의미있는 것들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보고 느낄 만한 도량이 되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1945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와서, 1943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독일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공책에 '자신이 했던 일과 하지 못했던 일, 그리고 보고 생각한 모든 것'을 적은 방대한 메모에 살을 붙여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저자는 '하지만 그때 정리한 원본과 그 복사본을 모두 난로에 던져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메모 일부를 그대로 정리한 것이 이 책이라면서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모습 속에서 작가로서의 저자의 고집스러운 면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썼던 정리된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의 어둡고 절망스런 순간을 헤쳐 나왔던 기록의 생생함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자신과 동료들은 결코 짐승처럼 살지 않았다고, 야만의 현장에서 자신들은 문명을 세우고 민주주의를 건설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저자의 자부심의 근원에 한발 더 다가서서, 삶을 긍정하고 희망을 키우는 노력들에 박수를 보내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여보고자 하는 공감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배고파! 배고프다고! 나는 배가 고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망들과 아침 풍경에, 내 위장이 품고 있는 소망과 아침 풍경이 더해진다.'-p79 / '시간의 흐름, 삶, 죽음, 저 철조망 너머 세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길가 한 귀퉁이에 버려진 것만 같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멀어져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p90 / '최소한의 음식과 담배꽁초로 이루어진 비참하고 의미없는 이런 날들 속에서 유일하고 활동적이고,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꿈일 것이다. 꿈을 꾸어야 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몰랐던 가치를 찾아내고,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p68/ '그들이 사흘에 한 번씩 쥐여주는 감자 몇 알에는 이제 벌레처럼 축축하고 잿빛이 도는 긴 싹이 나 있다. 봄이 왔나보다'-p67.... / '하지만 진리는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견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 생각해주고, 어떻게 자유로워져야 하는지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봐야 소용없다...... 자갈길에서 튀어나온 돌멩이처럼, 집단적인 공동 사고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자기 안에서 양심을 찾아야 한 다. 그리고 도덕적 개념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을 당신 자신이 지닌 의식의 체로 걸러내어 각각의 거짓을 가려내고, 진리를 찾아내야만 한다.'-p167-168 

 배고픔절망 속에서 을 잃지 않고 희망의 싹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진리를 찾아 진정한 자유로움에 도달하기 위해, 내면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가장 내밀한 이야기..... 바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아무런 꾸밈없이 민낯으로 독자에게 다가서며 안겨주는 삶의 진짜 모습입니다. 저자가 겪은 18개월의 삶은, 똑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도 언젠가 한번쯤은 삶의 모퉁이에서 만나게 될,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뒤로 물러설지도 모를 그런 악몽의 일부는 아닐는지.....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꿈과 희망, 진리와 자유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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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셰익스피어 How To Read 시리즈
니콜러스 로일 지음, 이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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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것입니다.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또한 널리 읽히기도 하지만, 각 작품에 대한 이해나 해석 또한 알려지고 읽힌 만큼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라, 그러한 다양함이 결국 의욕을 가지고 덤벼드는 나를 이내 기가 질리게(?) 하고는 합니다. 그저 수수하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즐거움을 느끼기 보다는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의욕이 앞선 때문이겠지요. 별반 다져진 기초가 없는데, 그래도 대가의 작품을 읽은 척이라도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니, 결국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초보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읽는 즐거움마저도 누리지 못하고 고꾸라질 수 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앞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번역본이 아닌 영어로 된 원문을 읽어야만 제대로된 작품감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번역을 하기는 하지만, 언어가 바뀌는 순간, 셰익스피어가 영어를 통해 꾸몄던 세밀한 말이나 단어의 배열을 통한 말장난이나 숨은 의미, 그리고 음율 등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가지 의미는 전달할 수 있겠지만, 말을 통해서 그 배후에 이중 삼중으로 숨겨진 말의 의미는 전달되지 않으니 번역본을 읽는 것은 셰익스피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에 역자가 의도하고 이해한 부분만을 읽고 이해한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영어를 웬만큼 한다는 사람들도 원저작을 제대로 읽고 그 숨겨진 작가의 의도까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도 하니, 다른 언어를 쓰는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번역본이라도 감지덕지하며 자꾸, 자꾸 읽을 수밖에요..... 

 제목만 보면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 대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안내서로 느껴집니다. 실제로 저자의 의도는 독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생생하게 읽어 낼 수 있는 방법, 즉 셰익스리어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니까, 분명 독자들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영어 원서를 우리말로 옮긴 책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번역서로 읽는 것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점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자도 후기에 그러한 아이러니를 이리 토로하고 있습니다. '<How to read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의 원문의 말맛을 깨우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실력이라면 독자 여러분이 이 <How to read 셰익스피어>를 번역본으로 읽고 있을까? 이 책 역시 원문으로 읽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역자의 말대로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고 그의 위대함을 엿볼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자는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실력은 안되지만, 그 말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이 책과 함께 원전을 곁에 두고, 이 책에서 인용된 원전 부분을 먼저 읽고 저자의 설명에 귀기울여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 후에 번역본으로 온전한 작품 전체를 대하고, 여력이 생긴다면 온전한 원전 읽기를 시도해 보기를..... 

 번역본으로서 이 책을 대한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신선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가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룬 천재임을 인정하고, 그가 사용한 언어의 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가 제안한, 실마리가 되는 단어 하나로 작품 전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실타래 같이 얽힌 언어의 마법을 풀어보는 방식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이는 듯 합니다. 톡톡 튀는 재치꾼-베니스의 상인-, 환영-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랑에 흔들리는-좋으실 대로-, 벙어리들-햄릿-, 눈을 멀게하다-오셀로-, 안전한-맥베스-, 끄덕임-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등 일곱 작품 속에서 각각 단 하나의 단어만을 끄집어내서 전체를 꿰뚫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셰익스피어를 이해하는 탁월한 방식을 하나 깨우치게 된다고나 할까요....  부족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자꾸 자꾸 읽을 수 있는, 단어를 통한 좀 더 풍성한 상차림의 방식을 배웠다는 즐거움을 주는 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언제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제하에, 즉 움직임, 몸짓, 만들기, 행위 하기의 전제하에 해석되어야 한다. 앞으로 명확하게 보여주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렬한 느낌은 그가 언어를 사랑한다는 느낌이다. 말을 가지고, 그리고 말이 초래할 수 있는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은 제 생명이 따로 있거나 기계적인 힘이 있는 듯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작은 검색 엔진이며, 참견쟁이 꼬마 도깨비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기이한 생물 같다. -p12,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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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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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은 보편적 가치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당위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인권을 당위적 가치로 생각하는 데에는 인권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 또는 '하늘이 부여한 권리'로 정의한 채, 현실에 바탕을 둔 시민권을 통해 인권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인권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들의 가치를 정당화한다면, 시민권은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제도다. 따라서 인권이라는 당위적 가치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시민권을 통해 인간의 삶을 개선할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p11-12, <왜 인권인가> 중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인권이라는 가치가 이론적으로는 여느 선진 민주국가에 뒤지지 않을 만큼 보편적인 가치로 존중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권을 '모든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라고 정의한다면, 이러한 개념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개념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즉 개별적인 사건에 적용하다보면- 우리 사회 내에서도 수많은 갈등이 유발되고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또한 인권이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일례로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이 잡혔을 때, 범인의 얼굴을 가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범죄자로 추정되지만 아직 실형을 선고받지 않은 한 사람의 인권과 그 외 다수의 알 권리라는 측면에서 시끄러운 논쟁을 일으킨 적이 두어번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이 보행권을 요구하면 시위를 했던 적도 있었고,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는 시집온 여성들이나 그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인 화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대하면서 우리 대부분은 '인권'이라는 당위적인 측면에서는 찬성하고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한 인권의 보장이나, 인권의 보장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멍해지는 것 또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인권 개념의 발전과 다양한 측면에서의 인권의 개념과 의미를 다루고 있어서,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익히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권의 개념을 시민권의 발전 과정과 연관시켜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당위적 가치로서 주장되고 인정되는 인권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각자의 개인들에게 실현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이 시민권이었음을 주지시키고, 시민권 개념의 발전과 확장이 곧 사상가들의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인권이라는 개념이 현실화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권 또는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에서 발전된 도덕적, 당위적, 추상적 차원의 인권이 시민권을 통해 제도적, 법적, 현실적으로 보장될 수 있었고, 이러한 시민권 개념의 발전은 다시 인권에 대한 이해와 논의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안티고네>에서 시작된 고대의 자연법 사상을 시작으로,  고대의 시민권 사상, 근대의 인권 및 시민권 사상의 발전, 현대에 이르러 탄생하고 발전한 사회권과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다문화 시민권과 미래의 지구 시민권에 대한 구상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이 다루는 인권에 대한 내용 중, 국가가 자기나라의 국민에게 보장하는 시민권이라는 측면에서의 인권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한데, 특정 공동체의 집단적 특징을 인지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집단 인지적 시민권' 개념은 인종적 소수자,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과 연관된 문제로 기존이 시민권이 바탕을 둔 '개인적 보편주의를 뛰어넘어 자유와 보편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부당한 불평등을 줄여 사회 통합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평등권의 침해 및 큰 틀안에서의 공동체의 와해의 우려 등으로 인한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인 듯 합니다. 또한 집단 인지적 시민권 개념의 하나인 '다문화 시민권'과 현재 국가로 한정되어 있는 시민권의 영역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한 '지구 시민권'의 개념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국가 또는 민족으로 한정된 우리의 인식의 틀이 완전히 깨어져야 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간에, 이러한 인권 및 시민권 사상의 발전 및 제도적 발전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든든한 바탕이 되고, 또한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찾아갈 수 있는 좋은 안내자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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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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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두 원수의 숙명적인 몸에서/ 별들이 훼방 놓은 두 연인이 태어났고/ 그들은 불운하고 불쌍하게 파멸하여/ 부모들의 싸움을 죽음으로 묻었도다./ 죽음표가 붙은 이 사랑의 두려운 여정과/ 계속되는 부모들의 격렬한 분노를/ 자식들의 최후밖엔 아무것도 못막는데.... -머리말/해설자 

 1599년에 출판된 제2사절판의 표지 제목으로 쓰였다는 '참으로 빼어나고 구슬픈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아마도 이 극을 읽거나 본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구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극의 처음에 해설자가 등장하여 읊는 머리말에 담긴 내용대로 원수의 집안이라는 숙명을 품에 안고 태어난 로미오와 줄리엣은, 별들의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마음의 열정과 영혼의 순전함을 다 불사르고자 하지만, 두 가문의 싸움속에서 발생하는 불운에 떠밀려서 불쌍하게 파멸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두 가문의 원한은 화해의 악수로 바뀌게 되고,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본으로 우러러 보이게 되지만, 이 극을 대하는 독자 또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음 한 구석에 사랑의 아련한 아픔이 남겨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감정일 것 같습니다. 빼어나고 아름답지만 구슬픈, 맑고 순수하지만 슬픔에 닿아있는 그러한 느낌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또한 그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감정은, 두 연인의 죽음이 없었다면, 죽음에 이르는 기대와 절망의 과정이 없었다면, 그리고 두 집안의 원한에 찬 적대적인 행위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생겨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일지도 모르는 것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극속에 담긴 아이러니는 저자가 해설을 통해서 역설하는 사랑의 '모순어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갓 열세 살이 되는 소녀와 그보다 많아야 두세 살이 위였을 소년의 사랑. 현대인의 시선으로 굳이 그들의 나이를 통해서 이 극의 전개과정을 되짚는다면 철부지들의 불장난 정도로 취급될 수도 있을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순수한 사랑의 원형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현실에서 이루어 보고픈 모델이 되었습니다. 친구 머큐쇼를 죽음으로 내몬 티볼트에 대한 성급한 결투와 살인, 줄리엣의 죽음의 소식에 신중하지 못하고 자살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로미오의 모습이 미숙한 젊은이의 감정 조절 실패라고 책망되지 않고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평가되고, 첫 눈에 반해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을 지키려고 죽음도 불사하는 줄리엣의 모습을 세상 경험이 일천한 열세 살  꼬마 숙녀의 맹목적인 사랑으로 폄하하지 않고 순수한 사랑의 원형으로 우러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현실에서는 가질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은 아닐는지..... 정말로 줄리엣처럼 부모의 강력한 권유를 무시하고 파리스와 같은 멋진 신사를 내치고 첫사랑을 지키려던 사람의 이야기가 가끔씩은 들려오기도 하고, 자신의 사랑을 죽음으로 증명하려 한 젊은이의 이야기도 가끔씩 회자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꿈으로만 담겨 있는 바람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는지..... 냉정하고 삭막한 평가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오면 그들의 사랑을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들의 철없는 사랑 이야기쯤으로 치부하지는 않을는지..... 하지만 다른 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요. 그들의 사랑을 아름답고 빼어난 구슬픈 이야기로 부르는 것에는..... 

 사랑의 가벼운 날개로 벽을 날아 넘었죠. 돌로 지은 장애물은 사랑은 못 내치고, 사랑은 할 수 있는 일이면 과감히 하니까요. -로미오, 2막 2장 

 오, 로미오,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 인가요?.... -줄리엣, 2막 2장 

 아낌없는 내 마음을 바다처럼 끝이 없고, 사랑 또한 같이 깊어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생겨나요. -줄리엣, 2막 2장 

 애통은 사랑의 표시지만, 지나치면 언제나 지각없단 표시란다. -캐풀렛 부인, 3막 5장 

 이 금은 네 것이다. 네가 아니 팔려했던 시시한 이 약보다 영혼에겐 더 나쁜 독이고 더 많은 살인을 이 역겨운 세상에 저지르지. 내가 독을 판 것이지, 넌 내게 판 게 없어..... 자, 독이 아닌 치료제여, 줄리엣의 무덤으로 함께가자. -로미오, 5막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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