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리처드 포스터 지음, 정성묵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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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에는 교회에 가고, 예배와 기도, 찬양을 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하나님과 자신만의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사소할 수도 있고, 생사를 가르게 된 중차대한 문제였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간직하게 된 그러한 스토리는 한 사람의 신앙인을 지탱해주고, 믿음에서 멀어졌을 때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함을 강조했었는데, 신앙의 처음 반석을 세우는데 그러한 개인적인 만남 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필요함을 말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 없어 매번 곁길로 가기 일쑤이고,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했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2:4-5a)는 책망이 곧 내게 주어지는 책망이 되곤 합니다. 결국 신앙의 반석을 멋지게 세웠지만, 그 반석위에 멋지게 집을 짓지 못하고, 어찌할 바 몰라 짓다가 허물곤 하는 것이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은 바로 신앙의 여정에서 자신의 집을 짓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와 그리 살기 위해 필요한 영적 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멋진 신앙의 집을 짓기 위한 뼈대와 벽을 견고히 세울 재료들, 그리고 내부를 내실있고 멋지게 장식할 가구들과 장식품들.....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집을 지을 것인지를 안내해 주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리스천은 성경을 먹고 산다. 인간의 몸이 음식에서 영양분을 얻는다면 거룩한 공동체는 성경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크리스천은 단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 삶 속에서 소화시킨다. 다시 말해, 성경은 사랑의 행위, 냉수 한 그릇, 온 세상을 향한 선교, 치유와 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행하는 정의, 아버지를 향해 뻗은 예배의 손길, 아들과 함께 씻긴 발로 변형된다'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어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뼈대는 성경 말씀임을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영적 훈련의 기본은 바로 성경을 먹는 것, 배우거나 연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소화시켜서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성경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기 위한 자세와 훈련-노력이 아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훈련의 주권을 우리 자신이 가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나와 함께 하려느냐?'는 하나님의 초대에 믿음으로 응하는 일련의 과정에 필요한 영적훈련의 방법과 과정들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뼈대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고, 집 내부를 적절한 가구와 장식품들로 채우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할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송을 드리거나 감사를 드릴 때, 그 자리에 내 자신만 있고 정작 하나님이 소외될 때가 없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참뜻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서 내 자신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을 읽는 동안 내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서 많은 부끄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군더더기가 붙은 것을, 말씀과 어긋나는 많은 상황들을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이라고 합리화시키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조그맣게 쌓은 성경지식과 신앙의 연수를 은연중에 내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고 있는 모습이 비치기도 합니다. 내 삶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들어와 함께 거하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 민감한 삶이 되기를 훈련해야 할 이유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나와 함께 하겠느냐?"는 하나님의 초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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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 전 세계 고난의 현장에서 만난 은혜의 이야기들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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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흔히 사람들이 묻는 것은 하나님이 왜 더 강한 힘으로 더 직접 개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그토록 엄청난 해를 입히도록 그냥 두는가? 왜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가? 몇 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과거에는 강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오래가는 신앙이 생기지 않았다. 지상의 강국들이 배운 것처럼, 힘과 자유는 껄끄러운 짝이며 하나를 강조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작아지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자유 쪽으로 기우신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확실한 답은 모른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을 잠깐씩 언뜻 볼 수 있을 뿐이다. - p347~348,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게 무슨 소용인가'에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식의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창조주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묻고 그 대답을 구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악하고 부도덕한 행위들 앞에서,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전쟁의 소식과 폭력과 살인을 알리는 소식들 속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는 크고 작은 불행이나 아픔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미를 묻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는 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상황에서 가끔씩은 하나님이 악행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눈에 볼수 있게 강력한 징벌을 보이셨으면 좋겠고 내가 어려울 때 나타나셔서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주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끔씩이라도 성경에 나타났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던 기적을 내 가족이나 벗들에게도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한다면 아마도 신앙생활은 훨씬 더 편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훨씬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젠 그런 모습으로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군대 삼으셨던 것처럼 자신의 육적인 군대를 내세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시지도 않으시고,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셨던 현존하는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때보다 더 많은 순간들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십니까?' 또는 저자의 질문처럼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그때-구약의 시대-처럼 우리에게 응답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시는 듯이 그리 곁에 조용히 기다리며 지켜보시고 계실 뿐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열 편의 이야기와 강연들 속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얻은 이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비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아마도 저자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런 만남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나만의 스토리가 생긴다는 것, 그것이 곧 인격적인 만남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중요한 부분은 아닐는지..... 

 요즈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에 인기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창조주의 존재나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서적들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관심을 끌고는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행크 데이비스의 '양복을 입은  원시인' 역시 그런 흐름의 하나를 이루는 내용이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보았을 때, 최근의 추세는 과학으로 증명 불가한 미신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의 일부 영역에 국한된 부위가 자극되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일축하는 경향인 듯 합니다. 결국은 영적인 면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남겨진 물질적인 세상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고서는 그곳에는 관련된 흔적은 있지만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증명 가능한 사실은 없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다만 인간의 나약함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에서 종교나 신과 관련된 영역이 활성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종교와 창조주의 의미 또는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또한 이성적인 사람들의 자세로 강요(?)되곤 합니다. 또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부정적인 인종차별, 전쟁과 살인 등을 이야기하지만, 창조주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상을 강요하던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 교회가 다른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 인권을 실현시켜주었고 아픔을 싸메고 더 나은 삶으로 인도했던 이야기들은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버리고는 합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화해나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했던 총기난사 사건의 치유 등은 바로 과학을 등에 업고 종교를 공격하던 이들에게 대한 믿는 이들의 대답의 일부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를 조용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신앙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저자는 열 가지 사례들을 통해 자신이 체험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예수님이 보이셨던 삶의 모범이 실천된 곳,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넘치고 은혜와 사랑이 물같이 흐르던 곳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총기 난사의 공포에 떨고 있던 버지니아 공대와 공산 세력의 억압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흥왕해 가는 중국의 가정교회, 가족들에게서마저 버림받은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모임과 C.S. 루이스를 삶을 기리던 케임브리지의 모임, 엄격한 규율을 가진 온실 속의 신학교 학생들과 인종차별과 학살의 벽을 넘어 화해를 이룬 남아공의 현장, 지역사회를 섬기는 멤피스의 교회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동의 사역자들, 그리고 시카고의 중독자들의 삶과 인도의 불가촉 천민들이 삶속에 넘쳐 흐르는 은혜와 사랑,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와 공의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손길..... 바로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일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 깨어 있어서 교회가 '죄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빚이 더 필요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 압제자와 압제받는 사람 모두에게 언제라도 은혜가 흘러나가는 곳, (교회가) 바로 그런 곳으로 소문'이 나게 되고, 그러한 은혜의 체험이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더 많은 대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독자들과 성매매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삶을 지배하고 파멸시키는 악의 위력과 그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수십 편의 가슴 절절한 사연을 들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회의론자들도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한때 밑바닥까지 추락했으나 이제 자기를 구원해 준 은혜가 하나님한테서 왔다고 믿는 사람들-의 변화의 사연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그분은 나를 성노예와 마약중독에서 건져내셨다." '하나님은 내게 삶을 되찾아주셨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삶의 변화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겠지만, 한나절 동안 그런 이야기를 여남은 편씩 듣노라면 이성적인 논거가 곧잘 무색해진다. 예수님은 신학적 '증거'를 제시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냥 열심히 삶을 변화시키셨을 뿐이다. -p345,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 게 무슨 소용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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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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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복을 입은 원시인'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의 주된 논점은 현대인들이 과학의 발전으로 다양한 풍요를 누리면서도 삶의 중요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미신이나 근거없는 믿음, 종교 등을 떨쳐내버리지 못하고 그 영향력 아래서 삶의 평온함을 구걸(?)하고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합니다. 인류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외모와 내면을 모두 갖추게 되었지만, 발전한 현대의 과학적 성취나 환경을 따라가지 못한 인간 내면의 부적응이 고스란히 남아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신을 이야기하고, 종교적인 믿음의 중요성을 굳게 신봉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점을 치거나 기도를 올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저자는 원시인류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발전시킨 내적인 메카니즘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원시 논리'라고 정의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특정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거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외부의 힘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고 자동적으로 그 인과관계를 탐지하려는 자세, 심리학에서 인지적 지름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발견법 (Heuristics)', 둥근 지구를 우리의 지각이 편평하게 느끼는 것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지각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 일상적인 언어생활이나 삶속에 숨어있는 미신의 흔적 - 어려운 일에서 벗어났을 때 무심코 내뱉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등-, 출판계를 강타했던 '시크릿' 열풍 등이 저자가 열거하는 '우리 안의 원시 논리'의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러한 원시 논리의 영향으로 인한 우리 삶의 사소한 왜곡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원시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에 대한 교육과 회의주의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모든 사물을 의인화 시키는 경향이나 우리에게 인기를 얻은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창조 신화 등을 우리 안에 내재한 원시 논리의 영향아래 나타난 자연스런 그늘이라고 말하는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먼저는 저자 자신이 독자 서문에서 언급한 '진화 심리학'이고,  그 다음은 진화론을 근간으로 하는 '과학주의', 그리고 좀더 범위를 확장한다면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과 종교를 비롯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해 낼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미신 또는 비합리적인 것, 원시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는 분명 세상을 물질로만 이루어진 곳으로 판단하고, 과학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설명해 낼 수 있다는 확신속에, 심리학에 진화라는 관점을 도입해서 실증적인 과학의 뼈대를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밝혀내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인간의 마음이나 신의 영역에 대한 것들까지 어느정도 과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하는 글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그러한 모습은 과학 또는 자신이 말하는 진화 심리학에 대한 자신감 또는 당당함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원시 논리에 사로잡힌 현대인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관점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목적성이 없다는 것, 즉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존재 의미가 없다는 것도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영혼과 정신, 신과 초자연적인 능력 등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것들은 미신적인 믿음 또는 원시적인 인간의 잔재일 뿐이라는 주장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의미를 느끼는 스토리를 빼버리고, 무미건조한 물질의 덩어리만 남겨 놓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이러한 주장의 바탕위에 본성을 뛰어넘고 원시논리를 극복하라는 설득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와 설명을 찾고 자신에게 닥친 행운과 불행에 대한 초자연적인 설명을 구하려는 인간 본성에 확연히 역행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인간 본성이 가장 강렬하게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러한 충돌의 가장 심대한 싸움터는 창조론과 무신론이 맞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다른 미신이나 현상들도 원시 논리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하고는 있지만,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미신이라고 지적하며 극복하기를 주장하는 부분은 종교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무신론을 주창하는 책들의 뒤를 잇고 있다고 감히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의 원시논리에 대한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고, 원시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간이 성공적으로 생존해 있다는 점이나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믿음의 과학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독자로서 느끼는 가장 큰 논점은 저자의 주장이 자연적이거나 물리적인 현상자체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인 접근을 배제하고 과학주의에 입각한 유물론적인 인간관에 근거한 가치판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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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2
김호동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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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화 시대'나 '지구촌 시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일이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지구상의 가고 싶은 곳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누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밀접하게 얽혀서 돌아가고 있음을, 그리고 현재를 사는 누구라도 그런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누구나 당연시하는 그런 사실들이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생각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이리 당연하게 여겨진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을, 그런 사치는 과학과 통신과 교통 수단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시간과 공간적으로 '하나의 지구' 또는 '하나의 세계'라는 개념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발전,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의 발전이 우리에게 안겨준 이동이나 정보 전달의 신속함에 함께 묻어오는 현실감이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생활 환경이 자연스럽게 그런 개념에 녹아들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세계사라는 측면에서도 그런 시간과 공간 개념의 확장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립된 각 지역의 개별적인 역사나 문명을 모아서 퍼즐 맞추기 식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세계(사)가  발전하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고립된 각 지역이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사)'를 이루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과 그 이후는 분명 인류 역사에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통합된 세계(사)의 시작을 몽골제국의 출현에서 찾고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수많은 나라와 문명, 제국들이 명멸하였던 역사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즉 유라시아 각 지역이 그 이전의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몽골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견해에 대해, 실크로드와 몽골제국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몽골제국 영향하에서 이루어진 세계지도와 세계사의 출현 과정을 독자들에게 차분히 설명하며 설득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장에서는 실크로드를 '동서간의 단순한 교역로'서의 단선적인 면에서 파악하지 않고, 동서간의 교류와 더불어 '남북으로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에 이루어진 역동적인 관계'속에서 이해해야 함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사 전개과정의 한 축으로서의 유목민-일반적으로 '군사적으로는 강력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후진적'이라고 여겨진-에 대한 정당한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칭기스 칸에 의한 몽골제국의 탄생과 응징과 약탈을 주로하는 유목국가의 성격에서 벗어나 초원지대와 농경지대를 정복하여 지배하는 제국으로의 변화, 그리고 제국의 급격한 팽창의 결과로 빗어진 제국의 분열 -저자는 전통적인 몽골제국의 4개의 칸국으로의 분열이라는 관점을 수용하지 않고 각 울루스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긴 했지만 '대몽골 울루스'라는 제국적 연대감과 일체성을 보존하고 있는 울루스들의 복합체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단일한 정치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동서 대교류를 '팍스 몽골리카'로 표현하면서, 그러한 방대한 교류의 근간이 된 역참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민족을 등용하고 각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고 소통을 위한 각 언어와 문자에 대한 사전 편찬 등을 통해서 유라시아 지역의 여러 전통들을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은을 근간으로 한 화폐경제의 통합하여 원거리 교역과 여행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고, 실제로 마르코 폴로, 랍반 사우마, 이븐 바투타 등의 동양과 서양으로의 대여행은 상대지역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4장은 세계사의 시작으로서의 몽골제국을 논하고 있는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등을 이루어 낸 '대항해 시대'의 시작은 팍스 몽골리카라는 몽골제국에 의한 동서 대교류에 편승하여 나타난 마르코 폴로 등의 '대여행 시대'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관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공간적인 차원에서 세계관의 확대를 의미하는 정확한 세계지도의 출현과정과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세계관의 확대를 의미하는 라시드 앗 딘이 편찬한 '최초의 세계사' <집사>라는 책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유럽 또는 서양 중심적인 세계의 역사를 배우고 그러한 시각에서 씌여진 세계사를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는 그리스와 로마제국, 중세의 유럽과 신대륙의 발견, 근대의 산업혁명, 1차 및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근간은 모조리 서양 중심의 역사가 차지하고 있고, 중화를 기치로 삼는 중국의 역사마저도 세계사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변두리로 생각될 정도입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 또는 강한 자의 기록'이라는 냉정한 사실을 생각하면, 비록 한때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현재는 겨우 나라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몽골제국의 역사를 아무도 세계사의 중심에 두고 합당한 대우를 해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자의 세계사의 시작으로서의 몽골제국의 역사에 대한 이 책의 고찰은 그리 경시되고 왜곡되어 온 인류 역사의 숨겨진 진실의 한 조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비록 저자가 말한 모두 다가 사실인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쌓이고 또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시각을 잃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더 많이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유럽을 질적으로 도약시켰지만,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정화 함대의 원정은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세계사의 중심축을 유럽에 넘겨주고 말았던 엇갈린 운명 또한, 몽골제국의 지배와 제국의 소멸 이후 출현한 유목국가들과의 충돌과정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륙지향적인 정책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는 분석은 몽골 제국이 남긴 세계사의 가장 큰 명암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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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도덕이란 무엇인가'가 아닌 <왜 도덕인가>라는 제목 -원제는 Essay on Morality in politics-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 책은 도덕의 근원을 탐구하거나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철학적인 책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도덕적 가치가 현대의 우리에게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 그리고 공동체나 정치 분야에서 다양한 도덕적 요구들을 아우르고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우리들의 자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실용(?)적인 면을 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저자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서 다시 이 책을 대할 터인데, 읽기 전에 유념할 점은 두 책 모두 우리에게 '정의' 또는 '도덕'이라는 의미심장한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서술, 내용의 구성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구슬을 잘 꿰어서 엮은 목걸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완성도나 전체적인 내용의 충실함 면에서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인기를 얻은 목걸이를 서둘러 모방해서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는 면이 있으니까요. 물론 도덕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부족한 면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자에 비해서 많이 불편하고 어려움을 느낀 것은 분명 그런 부족함에서 기이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부 '도덕이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저자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표출되는 문제들을 통해서 도덕적 가치가 우리의 실생활에 적극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권사업을 시행하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정책이 도박을 장려하는 것이나 매춘을 행하는 것과 도덕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는가?,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통한 소수인종의 특혜 또는 다수에 속하는 개인의 피해는 정당한가? 낙태와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가? 정치인의 거짓말을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것이가? 등을 통해서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들여다보며 올바른 도덕적 판단과 실천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각 분야에서 대하게 되는 도덕적 현안들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실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부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에서는 밀의 공리주의에서 시작하여 칸트의 자유주의와 존 듀이 및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계보를 따라 그들의 사상에 기초한 자유주의 정치이론들을 소개하고 각각이 지닌 장점과 부족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이론을 비판하는 저자의 관점은 시민의식과 시민의 덕목을 강조하고 공정한 시민사회의 생성을 역설하는 공동체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3부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에서는 공리주의 이후 여러 모양의 자유주의를 견지해 온 미국의 정치가 활력을 잃고 외면당하는데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가치에 대한 갈증과 정치활동의 주축이 되는 시민사회와 공동체들이 파괴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중요한 원인으로 경제의 팽창과 더불어 그것을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고 경제 우선주의적인 사고에 매몰된 정치와 더불어 공공장소에서 도덕적/종교적 논의를 외면하는 정치의 가치 중립적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데, 공적인 장소에서 도덕적 종교적 논의를 서로가 당당하게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도덕적인 가치가 소통하는 공적장소 및 공동체 의식의 회복, 공동체의 관점에서의 경제구조의 개혁 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는 이 책의 주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던졌던 공정성과 정의라는 주제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저자 나름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와 평등, 개인과 국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진보와 보수, 발전과 분배의 균형, 종교간의 갈등이나 지역간의 갈등 등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극심한 논쟁을 일으키고 분열과 후유증을 남기는 주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그런 문제들의 저변에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분명 이전의 정의에 대한 화두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는 면에서 반갑게 펼쳐볼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가움과 무관하게 도덕적 가치나 도덕 자체를 논하는 근원적인 내용들에 들어서면, 이러한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무척이나 난해하다는, 한편으로는 저자가 말하는 용어들 자체를 이해하면서 따라 가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 처음 가졌던 반가움이 절반쯤은 절망(?)으로 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어려움은 아마도 내가 받았던 교육이나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깊이있는 배움과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사실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내용의 많은 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서 저자가 말한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그리고 저자가 선호하는 공동체주의 등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각각이 견지하는 가치관의 기본적인 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의견대립과 갈등을 훨씬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로간의 대화의 장을 통해서 헤쳐나갈 수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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