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 스트리트
산드라 시스네로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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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름한 집은 안 된다. 뒷골목에 있는 공동주택도 안 된다. 남자들을 위한 집도 안 되고 아빠의 집도 안 된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집. 나를 위한 현관과 나만을 위한 베개와 예쁜 진홍색 페투니아가 있는...... 내 책들과 내 삶의 이야기들이 있는...... . 침대 밑에는 늘 내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누구도 내 평화를 흔들어 대지 않는...... 따라다니며 주워야 할, 남들이 버린 너절한 쓰레기도 없는...... . 언제나 눈처럼 조용한 집. 나만을 위한 공간. 시를 쓰기전의 깨끗한 종이 같은...... . - 나만의 집-

 아빠가 복권을 살 때마다 말씀하시고, 엄마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꿈을 꾸듯 들려 주시던 그러한 집..... 아마도 주인공 에스페란자는 두 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러한 '나만의 집'을 상상하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권에 그들의 꿈을 담아야 하는 가장의 모습이 암시하듯이, 이 가족은 그러한 집을 가질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저곳 여러번의 이사를 하다가 드디어 이 가족이 말하는 진짜 '우리 집'이 마련된 곳은 바로 망고 스트리트의 빨간 집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꿈꾸던 물도 잘 나오고 수도관도 멀쩡한 집, 텔리비젼 속의 멋진 저택처럼 멋진 계단도 있고 지하실도 있고, 욕실도 세 개쯤 있어 순서를 정해 목욕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그런 집은 아니었지만, 수녀님에게 그리고 교장 선생님에게 집을 알려주려고 손가락으로 가르키려할 때면 한편으로는 얼굴이 화끈거리기까지 하는 집이었지만, 비록 현관앞 계단이 너무 비좁고 창문은 너무 작아 답답하고 집 주변에 깨진 벽돌들이 널브러져 있는, 앞마당 같은 건 없고 시시한 가로수 몇그루와 조그만 차고에 욕실도 하나요 침실도 하나밖에 없는 집이었지만 에스페란자의 모든 가족에게 진짜 '우리 집'은 그 망고 스트리트이 작은 빨간 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복권을 사면서 소망을 품고, 어머니는 이야기 속에 꿈을 담고, 에스페란자 역시 '나만의 집'을 그리며 그리 생활하겠지만, 그러한 소망과 꿈과 바람을 담고 있는 현실은 멕시코 이주민들이 모여살고 있는 허름한 망고 스트리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에스페란자는 그 공간에서 친구를 만나고 사람을 사귀고 가족과 부대끼며 마음과 영혼과 정신이 성숙해져 갑니다. 때로는 가슴 아픈 사연들과 절망스런 모습들 가운데서, 때로는 정겨운 모습들 가운데서, 그리고 가끔씩은 소망과 웃음이 담긴 사연들 속에서......

 저자가 에스페란자를 통해서 말하는 망고 스트리트는 아마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우리네 옛 집과 길과 골목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스페란자가 '나는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 받았지만, 창가의 자리만은 물려받지 않겠다'고 자신의 또렷한 자아를 깨닫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살이의 이치를 알아가고, 또한 자신의 가슴속에 꿈을  키워가는 자람의 공간이었던 망고 스트리트는 바로 우리가 그리 간직하며 자랐던 우리네 집과 동네, 길과 골목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에스페란자가 마지막에 '그들은 내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났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남겨 두고 온 그들을 위해, 떠날 수 없는 그들을 위해, 돌아오기 위해 떠났다는 것을...... .' 이라고 말하였듯이, 우리가 남기고 온 그곳도 매번 우리의 추억의 샘을 자극해 돌아가고픈 곳이 되어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망고 스트리트와 그곳의 빨간집은 에스페란자가 그리도 벗어나기를 원하였던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에스페란자가 자라고 꿈을 꾸게 한 근간이 되어준 없어서는 안될 곳이었다는 아이러니도 함께 담고 있는 그런 곳이요, 나중에라도 영혼이 쉼을 바랄 때 등기대어 쉬고 싶은 추억이라는 공간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지요. 장소와 지명과 사람이 서로 바뀌어 있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당신의 망고 스트리트는 어디십니까?...... ^^

 참고로 역자 후기를 보면 이 책이 산문시라고 불릴 만큼 문체가 아름답다는 소개글이 있는데, 앞에 언급한 '나만의 집'같은 경우는 번역된 글을 읽어도 그러한 맛을 느낄 수 있지만, 다른 많은 글들에서는 그러한 맛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먼저는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한계로 인함이겠지요. 그런 면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어느 정도 언어에 대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원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면이 있어 마지막에 사족을 붙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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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섯 살이 되면
프레드 엡스타인·조수아 호르비츠 지음, 이경남 옮김 / 한언출판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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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인 프레드 엡스타인 박사는 소아외과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어린 환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으로, 자신의 생애의 대부분을 소아종양환자를 치료하고, 더 나은 새로운 치료법들을 개발하고 시도하며 보낸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의 바탕이 된 소아환자들의 이야기는 그의 이러한 경력이나 업적 때문에 씌여진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그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심각한 뇌출혈을 입고, 한달여의 기나긴 혼수 상태를 이겨내고, 과거에는 자신이 치료했던 바로 그 어린이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의연하게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며 전진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던 그러한 재활치료 과정에서 씌여진 것입니다. 그의 경험에 더하여 인생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자신이 치료하며 살폈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신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치료자가 되어주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 뒤에 씌여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환자들에 대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온전히 그들의 아픔과 절망, 눈물과 웃음과 희망까지도 보듬어주는 넉넉한 치료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몸으로는 이미 예전의 프레드 엡스타인이 아니지만, 자신의 일생과 그 일생에 보태졌던 소아 환자들과의 관계속에서 더 큰 용기와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아마 그러한 이야기가 그가 진정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면요, 두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거예요.' 저자가 25년전, 지금과 비교하면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치료하던 나오미라는 아이가 수술후에 힘겹게 몸을 가누며 침대에서 일어나서 저자에게 처음 한 말입니다. 당시 나오미는 네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두개의 뇌동맥에 싸여있는 종양이 있었고, 그 두개의 동맥중 하나가 터져서 혼수상태로 병원에 실려 온 상태에서 수술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리 말하는 나오미를 보면서 저자는 그가 내일도 이리 살아있을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나오미는 매일 저자에게 다섯 살이 되면 하고 싶은 새로운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면요..... 틱택도 게임에서 오빠를 이길 거예요./..... 운동화 끈을 두 겹으로 묶는 법을 배울 거예요!/..... 나도 오빠처럼 만화책을 읽을 거예요./..... 줄넘기를 배울 거예요. 뒤로 넘는 법도요.' 매일 회진 온 저자를 보고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오미는 그리 자신의 소망을 말하였습니다. 비록 어린이라도 느낄 법한 생명의 위험속에서도 그렇게 '긍정적인 다짐과 희망적인 결심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소중한 자산이 되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그러한 장애물을 뛰어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해 가는지를 저자의 눈앞에서 가르치고 보여 준 것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많은 소아 환자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깨달음과 믿음의 연장입니다. 아이들에게 숨겨진 무한한 용기와 희망, 회복력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니까요....

 또 한가지 책속 이야기중에 언급하고 싶은 환자 이야기는 크리스 램버트라는 악성 뇌종양으로 수술과 화학요법을 반복하였지만, 결국은 생명을 구할 수 없었던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나오미에게서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린 환자들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한 저자가, 각고의 노력으로 성공과 명예를 얻어가며, 그것들의 달콤함에 취하고 오만해지던 순간에 크리스의 어머니에게서 날아온 편지가 있었습니다. 크리스가 죽기 2주전에 썼던 시가 적힌 편지였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죽음이 가까이 왔습니다. /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애원합니다. / 따뜻한 손으로 떨리는 제 손을 잡아 주세요......' 크리스를 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던 저자는 그 편지 앞에서 자신은 그 아이를 놓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사랑을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나는 그때 애타게 나를 부르는 크리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몹시 후회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아이들이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할 때 나는 얼마나 많이 귀를 막고 있었을까요?' 완벽한 의학 기술자가 되기 위해 앞으로만 달려왔던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아이들에게 훌륭한 의술을 가진 능력있는 의사가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환자를 살린다는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긴 심오한 일이라는 자각을 한 것이지요. 아마도 이러한 자각은 저자와 같은 의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사람에 대한 애정과 손내밀어 잡아 줄수 있는 따뜻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자가 자신이 다루었던 환자들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며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린 환자들을 생각하며 쓴 것들입니다.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여정 속에서 씌여진 이야기들 속에는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깨달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지혜, 두려움에 과감히 맞서는 진정한 용기, 희망을 꿈꾸게 하는 우리 안의 기적, 마음속에 숨어 있는 위대한 의지, 그리고 죽음과 눈물 속에서 피어나는 끝없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어린 환자들에 대한 감탄과 찬사는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처지에서 스승이 되어 준 아이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독자들에게는, 역경을 이겨내고 위대한 용기와 희망이 담긴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 어린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삶에 대한 의지와 회복력에 대한 진솔한 나눔에의 초대가 아닐까 합니다. 저자의 긴 이야기는, 갈수록 현실적이 되고 자기 능력에 대한 벽을 쌓아가는 어른들에게 자신의 질병 앞에서 용감하고 당당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리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일곱 번 넘어졌다면, 여덟 번 일어나세요!' 그러면 다섯살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나오미가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용기는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판단하는 일이다

-Ambrose Red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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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환상동화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은경 옮김, 이애림 외 그림 / 이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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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그리고 우리의 전래 동화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의 동화책을 대할 때면 거의 항상 일정한 틀 -권선징악, 고진감래 등-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아이들에게 세상살이의 교훈이나 어른들이 그리되기를 바라는 -하지만 이기적 욕심과 교만 등으로 결코 이루지 못한- 바람이 투영된 선하고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씩은 그러한 경향에 대한 패러디를 통해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이야기들이 등장 - 흑설공주, 아기 늑대 세마리와 못된 돼지 등- 하기도 하지만, 많은 아이들에게 읽히는 고전이나 전래동화에서 창작동화에 이르기까지 교훈이나 가르침의 내용만이 조금 다양해졌지 그러한 경향은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들에 비해서는 요즈음의 창작동화들은 훨씬 현실적인 감각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교훈과 가르침이라는 지향점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을 긍정하고 세상의 밝고 희망에 싸인 모습을 기대하며 배워가는 것이 분명 잘못된 것은 아닐터이고, 그러한 것들을 무작정 비판코자 하는 것은 대책없는 또 다른 편협함을 낳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무작정 비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동화들과 균형을 이루는, 세상의 보이는 현실이나 숨겨져서 표면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가면을 들춰주는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게 되고 그런 균형추의 역할을 수행해 줄만한 동화책이 바로 오스카 와일드의 환상동화와 같은 이야기들이지 않을까 합니다.

 책에 실린 아홉편의 동화에는 지금까지의 동화 이야기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시각을 지닌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결국은 선하거나 깨달음을 얻게 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존재로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선하지도 그렇다고 반드시 악한 것도 아닌 두가지 얼굴 모두를 지닌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또한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공주와 왕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도식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파괴와 버려짐으로 그리고 때로는 선한 자의 실패와 악한 자의 이득으로 결말이 나기도 합니다. 즉 우리의 삶속에 나타난 그러한 부조리함들을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녹여 놓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들은 항상 선하거나 포근한 것이 아니어서 별아이처럼 극단적인 이기심을 보이다가도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한 이후에는 또한 그 누구보다 더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거인처럼 이기적인 마음에 정원을 폐쇄하지만 이내 자신의 잘못을 체험을 통해서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자각에 이르기도 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진 행복한 왕자의 겉모습을 찬양하던 이들이 모든 화려함을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서 행복한 왕자의 동상의 몰골이 흉해졌을때 냉랭히 돌아서는 천박한 인간정신에 대한 조소와 그런 왕자의 버려진 심장을 선택하는 신의 손길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지르는 시원한 발차기가 아닐는지.....

 무엇보다도 아홉편의 동화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구성을 이루는 작은 이야기들은 충분히 동화적인 상상력과 발랄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이야기 꾸러미들이 한덩어리의 큰 이야기로 꾸며져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아니면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사람과 그들이 사는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복한 왕자에서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왕자의 따뜻한 심장보다는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황금으로 꾸며진 외양을 더 찬양하는 시대, 인어를 사랑한 어부처럼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을 때 주어지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이 비일비재한 사회, 한스의 어리석음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용하기만 하고서도 그의 장례식에서까지 그 뻔뻔함을 버리지 못한 방앗간 주인의 창창한 삶과 한스의 억울한 죽음으로 대별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의 모양이라는 것에 대한 통렬한 비꼼 등은 어른들이 보아도 충분히 흥미와 자신에 대한 자각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목은 환상 동화였지만 환상과 이야기 속에 세상살이의 현실더 생생하게 담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화라고 해도 옳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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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펭귄클래식 4
조지 오웰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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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개의 목소리가 분노에 차서 소리치고 있었는데, 모두 똑같았다. 그러자 돼지들의 얼굴에 일어났던 변화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밖에 있던 동물들은 돼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돼지로, 그리고 다시 돼지에서 인간으로 눈을 돌렸지만, 이미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위대한 동물들의 농장을 이루어 완성했다고 선언한 혁명의 말미를 장식하는 결론적인 모습입니다. 자신들을 착취하던 인간을 몰아내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이루어가고자 했던 동물들이 창밖에서 들여다보는 혁명 지도부였던 돼지들의 모습입니다. 투쟁과 거부의 대상이었던 인간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셔대는 것부터-아니 이전에 그들의 혁명을 간구하던 정신은 이미 말살된지 오래지요-가 그러한 혁명의 소멸과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돼지들-지도부-은 인간들과 똑같이 이제는 착취와 속임과 억압의 주체가 되어서 나머지 동물들을 이용해 먹는 또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이러한 결론은 결국 혁명과 변혁의 역사와 지도자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 창밖에서 지도부인 돼지들을 바라보는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쩌면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혁명, 배반되지 않을 꿈에 대한 길고도 험난한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싶은 고뇌에 찬 자기 반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장원농장의 동물들에게 어느 날, 생산은 하지 않고 자신들을 이용하여 생산한 것들을 빼앗아 소비하는 인간의 압제와 폭정을 벗어나 동물들이 자유를 누리고 자신의 생산물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자각하라는 수퇘지 메이저 영감의 연설이 울려 퍼집니다. 영감이 꿈속에서 보았다던 그 내용은 바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요, 무지를 일깨우는 한줄기 빛이 됩니다. 돼지들은 혁명을 위한 조직을 꾸리고, 교육을 시작하고, 순수한 혁명을 위한 동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힘을 모은 동물들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인간들을 몰아내고 농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혁명의 시작일 뿐, 완전한 혁명의 완성을 바랐지만 결국은 변절과 반역으로 점철되는 지난한 배반의 시간이 이후로 펼쳐집니다. 인간들의 재탈환을 위한 침입을 막아내고, 인간없이 스스로 농장을 일구어가기 위한 노동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동물들은 자신들의 세상에 대한 꿈을 부여잡고 묵묵히 혁명을 지지하고 견디어 갑니다. 하지만, 인간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혁명의 변절은 내부의 분열과 구성원-특히 지도부-의 타락과 변절에서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스노볼의 축출과 반동으로의 추락, 돼지들의 특권화와 일반동물로부터의 분리를 통해서 그러한 변절과 타락의 역사가 동물농장 내부에서도 진행됩니다. 처음 혁명을 시작하고 동물농장을 시작했을 때 내걸었던 7계명이 지도부의 편의에 의해서 슬그머니 고쳐지고 동물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세뇌시키는 행위가 반복되는 과정은 바로 혁명의 변절, 권력을 가지게 된 자들의 변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의 숙소를 폐쇄하면서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고 했던 계명이 돼지들을 구분하여 숙소를 인간들의 숙소로 옮기면서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침대보를 깔고 자면 안 된다'로 남몰래 바뀌고, 술을 마시고 휘청거리던 지도부는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계명을 '어떤 동물도 너무 많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로 슬그머니 바꾸어 놓습니다. 또한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던 계명은 나폴레옹의 권력강화를 위한 숙청의 과정에서 많은 동물들을 처형하게 되었을 때는 '어떤 동물도 이유없이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로 고쳐지고, '두발로 걷는 자는 누구든 적이다'는 계명은 돼지들이 두발로 걷기를 연습하기 시작하면서는 '네발은 좋고, 두발은 더 좋다!'는 찬양가로 바뀌게 되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계명에는 사족이 붙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궤변이 덧붙여집니다. 지도자 나폴레옹은 동지가 아닌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무'가 되어버렸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동물들의 목숨을 파리 죽이듯 다루기도 하고, 돼지들은 다른 동물과 구별된 존재로서 특권을 누리며, 인간과 다름없이 다른 동물들을 착취하고 이용하여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는, 혁명으로 극복해야 했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압제자가 되어버린 모습으로 우화는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이미 알려졌듯이 이 우화의 내용은 러시아 혁명으로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스탈린과 그의 부하들의 배반에 대한 통렬한 비꼼과 비판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자의 의도도 상당부분 거기에 맞추어져 있었던 듯 합니다. 정당한 사회주의 운동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우크라이나 판의 서문에 말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이 우화속에 담긴 비판 의식과 일깨움이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동감을 일으키고, 반성과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크고 작은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변명과 변절의 역사에 대한 기억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꼭 혁명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매번 변화와 개혁을 외치던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이 결국은 우화속의 돼지들이 걸었던 길과 똑같은 길을 반복했던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들이 변화와 개혁의 원칙을 왜곡하거나 수정할 때마다 슬그머니 동원했던 변명과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뇌까렸던 화려한 수사에 대한 기억들이 이 우화를 통해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재연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당시에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의 깃발을 내걸었을 이 내용이 이리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곁에 고전으로 남아있는 것은, 시간을 거듭하면서 변화는 인간의 역사속에서도 여전히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는 나와 우리 사회, 우리 나라와 지구상의 여러 국가의 생생한 현실을 담은 이야기라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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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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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사진속의 다랭이 논둑을, 하늘을 배경삼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내 삶에서 사라져 버렸던 옛 추억들을 다시금 퍼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책장 하나하나를 넘기면서, 이내 내 유년과 청소년기의 생활속에 오롯이 배어있는 잊었던 진한 삶의 향기를  다시금 맡아 보게 됩니다. 거기엔 땀냄새가 짙게 배어있고, 흙냄새와 자연의 냄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이지만, 화장품의 은은한 향기나 향수의 도도한 내음과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너무도 소중한 것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순간 내 삶의 한 구석에서 나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내 기억에서 마저 한쪽 구석으로 내팽개쳐진,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라곤 되지 않을듯이 보였던 그것들이, 오늘 이책을 펼쳐들자 고스란히 마음속에 되살아납니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을땐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들이 어린시절 내 삶에 묵묵히 쌓여 내 삶의 근간이 되고 기둥이 되어서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소중한 것들임을 새삼스러이 알게 됩니다.   

 달 밝은 밤에 수박 한덩이 썰어 놓고 곁에는 모깃불을 놓고 친척들과 함께 둘러앉았던 원두막,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장터에 따라 나섰다가 호미며 낫을 고르는 틈에서 댕강거리며 쇠를 다듬던 대장장이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화덕의 쇳덩어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대장간, 시퍼렇던 보리밭과 보리된장국, 이웃이 빤히 들여다 보이던 돌담이나 흙담, 가을마다 새로 옷을 입곤하던 초가지붕과 굼벵이들, 봉숭아가 곱게 피던 장독대, 항상 헐렁거리던 검정 고무신과 어린 나를 갈 때마다 속을 썩히던 연탄, 방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신기하기 그지없던 재봉틀과 가끔씩 밥(?)주는 것을 잊어버려서 일을 멈추고 선잠을 자고는 하던 괘종시계, 밤을 밝히던 초롱불과 그 빛에 문에 일렁거리던 사람 그림자, 항상 변함없는 반찬과 보리밥이 담겨 있던 누런 양은 도시락 -겨울에는 차가워진 밥을 조각내어 몇번만에 먹나 친구들과 내기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갔던 이발소의 높은 의자와 아이를 앉히던 판자,  그리고 무섭게 생긴 면도날을 가죽에 갈아 뒷마무리를 하던 이발사 아저씨, 어른들은 잘도 하는데 어린 나는 아무리 해도 알곡이 골라지질 않던 키질,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받아오던 막걸리를 오는 길에 슬쩍 한모금 했던 기억, 맨날 입석 밖에 타본 적이 없는 완행열차와 시골역의 나무의자, 음악시간을 그래도 음악시간답게 만들어 주었던 풍금, 1년에  한번 가기도 힘들었던 시골극장의 퀘퀘한 내음, 유난히 사납게 달려들어서 항상 쇠줄에 묶여 있던 조그마한 누렁이, 짚으로 정성스럽게 싼 달걀꾸러미.... 저자가 사진에 담고 글로 말한 것들이 모양새는 약간씩 다르지만 그것들이 곧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나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살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것들, 추억속의 것들이 되어버렸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지금보다도 '그때가 더 행복했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잊고 지내던 내 뿌리의 한쪽끝에 다시금 맞닿은 그러한 감상때문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보다는 더 불편하고 배를 곯던 시절이긴 하였지만 말입니다.

 책속에 담긴 이야기와 사진들을 보며, 다시금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가 지금은 어떤 사정에 처해 있든지, 마음 한구석은 참으로 따뜻해지고, 위로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자신들이 웃고 울고, 서로 돕고 나누던 삶이, 저자의 맛갈스러운 글과 사진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삶의 어느 순간에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 속에 담긴 사라지고 잊혀져 간 것들은 곧 우리가 살던 과거의 분신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 하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지금의 여러가지 것들이 그들이 자라서 되돌아볼 때 쯤이면 지금 내가 아쉬워하는 것들과 같은 모습의 것들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닌텐도 게임과 아파트, 컴퓨터와 여러 장난감, KTX 기차와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들마저도 아이들이 자라서 되돌아보게 되는 그때는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원두막이나 초가집, 완행열차 등과 같은 마음이 듬뿍담긴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함이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결국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세대의 과거는 아이들에겐 잘 알지못하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우리에겐 지금 현대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아이들의 미래에는 사라져가는 아쉬운 것이 되고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또 알지 못하는 과거가 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런 의미에서는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다 남겨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는지.... 어찌되었든 내 아이들이 다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이 내 마음속에 남아서 내 삶을 살찌우는 것만으로도 난 이리 행복하답니다. 이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되새겨준 사람이 있고, 책이 있고, 또한 행복을 퍼올릴수 있는 행복한 기억들이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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