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 시에서 배우는 삶과 사랑
천양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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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보며 시집을 뒤적이며 살았던 때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김지하의 시들을 보며 가슴을 치며 분노하고 아파했던 때도 있었고, 홀로서기라는 시집을 펼쳐들고 내 개인의 감정속으로 도피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를 보며 열심히 살지 못하고 세태에 흘러가는 내 삶이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기억의 저편에서 아스라이 덮여 겨우 흔적만이 이리 가끔씩 의식속으로 삐져 나오곤 합니다. 정말로 시라는 것이 젊은 시절의 열정과 감상이 지나고 나면 이리 스러져 버리는 건지.... 사는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리고 지금의 삶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는 이유로 외면하던 그 숲이 시인의 눈을 통해, 시라는 것은 저멀리 이상이나 꿈을 먹고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과 인생, 그리고 그가 살던 사회상이 가득 담긴 현실적인 글이라는, 그리고 바쁜 우리 영혼에 안식과 쉼을 들려주는 언어라는 사실을 새로이 깨닫게 해주지는 않을지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책 중간에 '쌀로 지은 밥이 배고픔을 채워준다면, 시는 고픈 정신을 채워주는 정신의 밥이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물질이 풍부하여도 정신이 궁핍하면 그 사람은 결코 풍요롭게 살수 없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정신의 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놓치고 살았던 세계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시가 '척'하는 사람들의 겉멋이 아니라 실연속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방랑속에서도 세상을 구도자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절망과 죽음으로 나아가면서도 시와 삶을 찬양하던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라는 것, 그래서 저자가 거니는 숲숙의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만나다 보면 저자가 저런 말을 그리도 자신있게 독자들에게 쓸 수 있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시는 멋이 아니라 곧 삶이라는 사실을 저자의 글에 동화되어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된다면 너무한 과장일까요? 
 
 숲속의 주인공들은 눈에 익은 이들도 있지만 태반이 넘게 내가 알지도 못하던 이들입니다. 또 어떤 싯구는 알고 있거나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 글을 적은 이가 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던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이 숲속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내가 알았든지 알지 못했든지- 자신에게 할당된 삶을 어떤이는 절망속에서, 어떤이는 방랑속에서, 어떤이는 실연속에서, 어떤이는 나라 잃은 슬픔속에서, 또 어떤이는 사랑의 열병속에서, 또 어떤이는 냉대와 무관심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백지위에 적으며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적은 싯구속에서 우리 영혼의 고픈 정신이 채워지는 양식이 자라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이젠 시인이 인도해준 숲속에서 삶의 지혜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굳센 안목을 배우게 하는 숲속 주인공인 시인들의 언어를 곱씹어 보며 나도 새로운 주인공들을 찾아 숲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 연유인지, 먼지쌓인 채 수년을 책장 한구석에서 외면당하던 시인의 언어가 내 책장 가운데로 버젓이 나오고 싶다네요. 그 동안 잃고 살던 영혼의 양식을 새로이 찾고, 고픈 정신에 밥을 먹이고 싶다면 저자의 말처럼 그 숲으로 당당히 걸어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합니다.
 
 '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에머슨의 <무엇이 성공인가>중에서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우리 사랑이라 알 고 있는 모든 것 / 그것이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서 늙어진다네. 세월의 흐름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나 정열의 상실은 영혼의 주름살을 늘리고......'   - 울만의 <청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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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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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가 자신의 가족들의 일상사를 공개된 지면에 쓰고, 또 책으로까지 엮어 내는 이유와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먼저 갖습니다. 요즈음은 아이들 교육이 우리사회의 큰 관심사인 만큼, 아이를 어떻게 키웠다는 류의 서적들 -성공적인 육아와 교육이라고 인정받은 듯이 자랑스러워하는 내용을 담은- 이 한 가정의 일면을 들여다보는 도구가 되고 있는데, 분명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는 그런식의 글쓰기를 하지는 않겠고, 아마도 그런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 아니라 고역일 듯 합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작가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쓸수 있다는 의미는 정말 무엇일까요? 가족의 똑똑함, 높은 교육이나 명예 또는 성취, 분명 이런식의 세상적인 자랑거리는 아닐듯 합니다.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해 자신의 '가족의 평범함'이 그가  이 글을 쓴 이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족들의 일상이나 고민과 닮은 한 가족의 평범함, 특별하지 않기에 독자들이 읽었을 때 '어 이런 일은 우리 가족이야기네!'하고 동감을 일으킬 수 이야기들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생활 가운데 겪는 사소한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 미소지으며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저자의 믿음이 펜을 들게한 동기가 된 듯 합니다.

 까칠한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을듯한 까칠하다는 단어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저자의 가족. 이가족이 까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호기심을 먼저 갖게 됩니다. 가족이 까칠하다니..... 그럴때 까칠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가족의 아이들이 어떻게 까칠하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그런건 아닐거고 결국 부모가 먼저 까칠한 건 아닐까....

 유명한 작가이지만 자신의 책을 읽은 아들에게 '너무 서둘러 쓴것 같다'는 타박을 받는 쿨한 아버지 조반니노, 착하지만 조금은 감상적이고 현실감각이 없는 듯하기도 하고 이기적인 듯도 한 어머니 마르게리타, 여행에서도 가장 큰 관심은 만화책속에 있을 만큼 자신의 세계에 충실한 아들 알베르티노, 태어날 때 너무 약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무기로 사용하며 하고픈 말, 해야하는 말은 참지 못하는 소녀 파시오나리아. 이렇게 넷이서 이룬 가족이 생활하면서 만들어 내는 까칠하고 따스한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글들은 분명 우리와 많이 닮아 있지만 독특하게 튀는 면도 곳곳에 눈에 띕니다. 까칠하다고 표현된 그리고 결코 다른 가족들에게서 쉽게 발견되지 않을 이 까칠함의 근원이 무얼까하는 답을 찾기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읽기을 진행하지만 '정말 까칠한 아이에 까칠한 부모네' 하는 장면들만 내 눈앞에 펼져질 뿐, 까칠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이라고 할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가정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가족, 하지만 이 가족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유산에 대해서 먼저 달라고 조르기도하고, 아버지가 결국 약속을 지킨다며 딸과 함께 빈집의 벽에 낙서를 하고 도망가기도 합니다. 헌 자전거를 두대 팔고  그 중 한대를 바로 두배의 가격에 사고서도 흐뭇할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아이들의 '약간 퉁명스럽지만 정답다'는 부모 평가에 쩔쩔매다가 그래도 안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기도 합니다. 치졸레타라는 한가지 음식을 고집하다가 결국은 가족모두의 배신(?)으로 질릴때까지 그 음식을 혼자 먹어야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느끼는 까칠함이란 문자 그대로의 느낌보다는 우리가 우리아이들이 귀여워 머리카락을 볼에 문지를때 전해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소름돋는 까칠함이 아니라 엔돌핀이 솟구치게 하는 까칠함.....엉뚱함에 놀라움보다는 미소짓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 가족의 까칠함은 곧 나와 내 가족의 일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덮고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주인공들의 까칠함은 표지의 저자처럼 생김새로 인한 것도, 성격의 결함으로 인한 부족한 부분도 아니었습니다. 부모가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존중해주는 그런 노력으로 인해 숨겨진 아이들의 감정이 분출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부모로서의 자신들의 감정을 억제만 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서로 소통시킬 줄 아는 동심을 잃지 않은 어른들의 능력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그런 까칠함이 이 가족의 까칠함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호존중과 이해 그리고 사랑. 여기에 이르러서야 결국 까칠함도 가족이라는 따스하고 포근한 단어와 어울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 모든 가족, 가족의 독특함의 표현들이 가족이라는 말과 어울릴 수 있듯이, 이 가족의 까칠함도 결국 가족애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즐겁고도 까칠한 시간이었어요, 과레스키 아저씨.^^

 여러분도 이 즐거운 가족이야기를 까칠하게 한번 읽어 보세요.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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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박목월.박동규 지음 / 대산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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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모든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박목월. 우리 중 누구나, 그의 시를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청록파' 시인중의 하나라고 시험문제에 답을 몇번씩은 했을 우리시단의 거목이지요. 그리고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나그네>의 한구절쯤은 마음속에 담고 사는 사람도 여럿일게구요. 저자는 이런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떼어내서 그의 삶을 생각하더라도 또 하나의 우리 사회의 그리고 우리 문학계의 건강한 지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저자가 굳이 자신의 아버지 박목월과 자식으로서의 박동규를 핏줄의 연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끈속에서 되돌아보는 귀한 글을 우리에게 이리 선물하였습니다. 저자는 이 글이 아버지의 우산아래서 살았던 행복을 뼛속깊이 깨달은 이후로, 아버지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의 골짜기를 함께 살았던 길을 돌아보며 글을 남기고자 했던 소망의 소산물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글들을 통해 아버지 박목월이 남기고 간 삶에 대한 명징한 진실과 오늘을 보는 지혜와 미래를 바라보는 열린 시각을 자신의 가족들에게 알리고, 아버지 박목월이 살던 시대와 자신이 살던 시대라는 세월에 싸인 단층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삶과 자신을 위해 즐기는 삶으로 대별되는 삶에 대한 인식의 차이- 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간의 소통이 막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질적인 가족관의 문제를 짚어보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식 사랑과 부모를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부모사랑의 원형을 자신의 가정을 통해 밝히고 허물어진 가정이 회복되고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I. 아버지 박목월, 남편 박목월 그리고 삶에 가득 채워진 가장의 사랑

  책의 앞부분은 시인 박목월이 쓴 일기형식의 글과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그리고 5남1녀의 아버지로서 그의 삶의 기록입니다. 다양한 주제와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결국 내용의 중심은 그의 삶에 가득히 차고 넘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인 듯 합니다. 갑상선 질환으로 수술을 해야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한 사랑으로 시작되어서 자식들 각각에 대해서 이어지는 부정은 읽는이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되돌아봄과 함께 숙연함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한 속깊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가난하였으되 구차하지 않고 힘든 세월이었지만 나약해지지 않고 한 가정의 중심이 되어 삶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삶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아버지들의 애틋한 세월이 아버지로 살았던 시인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은은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말로만 글로만 시를 쓰지않고 그의 삶으로 시를 쓴, 그리고 그가 쓴 시의 구절처럼 진실과 지혜와 사랑으로 생을 살다간 한 가정의 가장을 보게 됩니다. 단지 시인으로서 그를 알고 있었던 것보다 그가 더 가까이 그리고 친근하게 내 곁에 서있고, 또한 존경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산 그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II. 아들 박동규, 가슴에 남겨진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삶속에 스며든 아버지에 대한 사랑

  뒤이어 이어지는 글속에서,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박목월은 온통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단어속에 파묻혀 있는 듯 합니다. 자신의 구두 뒷축이 낡았어도 아들에게 새 구두를 신기며 기뻐하고, 자신의 옷깃이 다 해어졌어도 자식에게 새 양복을 입히고 웃음지었던 아버지의 모습 말입니다. 서커스 구경을 하고 싶은 아들에게 돈을 줄게 없어 함께 서커스 천막이 보이는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몰래 들어가는 아이들과 개구멍을 보고는 아들을 밀어넣고 쇼가 끝날때 까지 기다려 주었던 아버지, 남의 자전거를 정말 타고 싶어서 몰래 탔다가 고장낸 자식을 보며 '얼마나 타고 싶었으면 그랬겠니?'라고 오히려 위로했던 아버지, 자식의 마음에 조그만 그늘이라도 만들지 않기 위해 세심히 애쓰셨던 아버지, 자신의 어머니로 인해 모처럼 간 해수욕장에서 빌려입은 수영복으로 폼을 잡고 자식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이놈아, 아버지는 너하고 함께 바닷가에서 저 멀리 수평선을 보고 앉아 있고 싶은적이 한두 번이었겠니?'하고 고백하며 자식과 함께 그런 곳에 함께 가지 못한 자신의 간난을 에둘러 표현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의 삶에 그대로 사랑으로, 삶에 대한 교훈과 지혜로 남겨진 듯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아들이 그 모든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아무 거리낌없이 애틋하게 적고 있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처음 책을 들며, 아버지 박목월이라는 이름이 너무 큰 나무이기이에 아들로서의 그의 삶에 그늘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의 삶속에 지워진 짐이 너무 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했던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에 절절이 얽혀있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감사 그리고 사랑을 읽으며 이내 크게 어긋난 내 시각을 반성합니다. 저자가 머릿말에서 했던, 이질적인 가족관의 문제로 인한 소통의 부재와 가족간의 어긋남에 대해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고 싶다는 포부가 괜한 이야기가 아님을 이내 알게 됩니다. 아버지로서의 박목월의 삶은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삶으로서도 충분히 자라고 성숙한 거목이었음을, 그리고 자식으로부터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고백받는 행복한 이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부모의 깊은 사랑과 자식의 존경어린 부모에 대한 사랑이 세대간의 벽이 생긴 우리 사회 많은 가정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들로서의 저자의 삶 또한 스스로 머무르지 않고 그의 아버지처럼 한없이 자라가는 소중한 삶의 고백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사회의 희망이고, 우리 이웃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이 책 하나가 내 삶에 들어옴으로 인해 내 삶의 샘에 스러져가던 물줄기가 다시 새힘을 얻고, 풍족해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와 자식 -나를 포함한- 그리고 가족들에게 소망과 감사와 사랑이 가득한 한해살이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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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위한 스테이크
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최경은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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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 이책의 원제목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자신의 일생가운데  하고 싶었던 가장 속깊고 진솔한 것들을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리 제목을 붙였을듯 합니다. 하지만 이건 책을 다 읽고 알게된 이야기이고, 처음에는 <개를 위한 스테이크>라는 조금 생소한 표현의 제목과 절판되었다가 다시 나온 거라는 책소개에 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짧은 지식에 저자가 과거에 노벨상 후보에 까지 올랐다는 건 몰랐구요.

 저자는 헝가리에서 태어나 2차대전의 혹독한 시련을 몸으로 겪은 유대인이지만, 그가 쓴 이 짧은 글 (책 표지에는 짧은 소설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들 속에서는 그런 그늘이나 고뇌의 그림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세상을 비틀고 풍자적으로 과장하고, 가식과 위선을 유머스럽게 드러내고 있는게 아마도 그런 고난을 몸과 마음으로 다 소화해내고 삶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눈이, 그리고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그에게는 생긴듯 합니다. 그래서 차갑고, 냉소적이고, 어두움보다는 따뜻하고, 온화하고, 밝게 삶을 긍정하는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배꼽잡고 한바탕 웃고 마는 수준미달인 독자의 모습도 내게 있습니다. 저자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 이상일텐데 하는 미안함과 함께 말입니다.

 자기집의 개를 핑계삼아 식당에서 남은 맛있는 스테이크를 집에 싸가서 먹기로 결심하지만, 결국은 신물이 나서 식당주인에게 개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한 주인공과 그 가족의 이야기인 <개를 위한 스테이크>를 읽노라면 인간 내면에 있는 가식과 위선, 그리고 그걸 위해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고 또한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변명할 수 있는 숨겨진 인간 능력(?)에 대한 저자의 매서운 관찰과 풍자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변기에 열쇠를 빠뜨리는 아이를 보고서 남 모르게 그걸 따라하며 쾌감을 느끼는 어른, 아이의 '지구가 정말 태양주위를 돌고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어른, 고무 젖꼭지로 집안을 들썩이며 어른들을 골탕먹이는 아이, 개처럼 짖으며 합법적으로 이웃을 괴롭히는 사람, 자신의 아이의 발표에는 환호하지만 다른 시간에는 시들해져서 시간이 빨리 가기를 재촉하는 어린이 학예회에 참석한 어른들, 버릇없는 개를 길들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개에게 길들여진 가족, 엉터리 포커게임으로 돈을 따고도 그것을 포커 게임의 매력이라고 우기는 남자, 안녕이라는 말을 가르치고자 하지만 결국 다른 말만 잔뜩 배운 앵무새와 가족 등 40여편의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저자의 눈길은 그 사건들을 때로는 과장하여 부풀리고, 때로는 비틀어서 우습게 만들지만, 곰곰히 돌아보면 그 이야기들과 내가 지금까지 묵묵히 살던 나의 일상과 닿아 있음을 느낍니다. 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식상하게 넘긴건데 저자는 거기에다 기발한 상상력을 가미하여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도 하고, 키득거리게도 하고, 때론 배꼽이 빠져라 웃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도 만듭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삶에 대한 따뜻한 눈길이 생사를 넘나들었던 저자의 삶의 생존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어깨에 짓눌린 일상이 저자의 눈길로 본다면 어찌 보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자는 나의 이런 일상을 어떻게 따뜻하게 그려줄까? 라는 꿈같은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의 삶에 대한 자세를 나름 그려보며, 나는 내 일상에 대해 너무 무심하고, 냉소적인 눈길로 바라보고만 산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곁들이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나의 평범한 일상들속에도 이리 흥미롭고 많은 내용과 의미와 웃음이 담길수 있음을 되돌아볼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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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음모 1
데이비드 리스 지음,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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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증권 투기, 1720년 영국 남해 회사 버블사건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증권사기와 살인의 소용돌이.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이나 우리 증권시장에서 나타났던 IT버블, 그런데 그런 사건이 실제로 영국에서는 1720년대에 처음으로 발생했나 봅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인 지식이 없어서 할 말이 많지 않지만, 한장의 종이조각이 그동안 유통되던 은화나 금화등의 실질가치를 지닌 화폐를 대신하기 시작하던 시대가 이 소설이 시작하는 시기인듯 합니다. 현재는 주식이니 채권이니, 어음이니 하는 것들이 일상화되고 당연시 되는 시대이지만, 당시와 같이 단지 어떤 약속을 표시한 것에 불과하던 종이조각에 씌여진 숫자가 실질가치를 지닌 화폐의 역사를 대신하기 시작하던 시대에는 새로운 경제적인 신천지가 열리는 환희와 충격이 교차하는 시기였을 듯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 그 시장을 선점하고자 하는 세력, 그리고 음흉한 세력의 음모를 저지하고 건전한 시장을 형성하고자 하던 사람들간의 갈등이 있었을 듯한데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 되는 듯 합니다.

 유대인이며, 유망한 증권매매업자인 아버지를 둔 주인공 벤자민 위버는 한 때 복서로서 이름을 날리던 사내였는데, 부상으로 복싱을 그만둔 후에는 런던 뒷골목을 누비며 돈있는 의뢰자들의 유쾌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어느날 윌리엄 벨포라는 인물이 찾아와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아버지 마이클 벨포와 우연히 마차에 치여 죽은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사이에 엄청난 음모에의한 타살의 의혹이 있다며 사건의뢰를 받게 되고, 아버지와 등지고 살던 위버는 자신의 숙부를 비롯한 여러사람과의 만남, 친구의 도움, 증권골목의 커피하우스와 변두리 카페, 가택 침입 통한 증거수집 등 시공간의 활동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사건의 실마리에 접근해 가는데...

 소설은 물고 물리는 인간관계의 속고 속임의 모습, 위선과 가식, 음모와 배신 등의 인간사의 많은 허물들을 들추고 폭로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움을 유발하지만, 끝까지 반전을 도모하며 한조각 종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금융업계의 사기와 살인, 음모와 폭력, 그리고 주식투기사건의 내막이 한꺼풀씩 벗겨지는 스릴감은 그 흥미 못지않는 긴장감과 재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행해지는 주식이나 채권을 통한 속임수와 부침이, 이러한 경제적인 기초가 시작되던 시절부터 존재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는 느낌입니다. 결국 인간사 모든것이 세월이 흘러도, 그리고 문명이 발전한다고 해도 비슷하게 반복되는 건가 봅니다. 그런의미에서는 이 소설이 당시보다 훨씬 종이의 음모(?)에 둘러싸인 우리에겐 현실적인 시각과 도움을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그렇다면 누가 음모의 주범일까요? 저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찾아보실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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