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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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과 집착을 구별하지 못하고 질투와 배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복수와 사랑을 혼돈하는 영혼이 존재한다. 알콜 중독자와 스토커의 공통점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모든 책임과 이유를 타인과 세계에 돌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에게 잘못을 따질 수가 있느냐는 문제다. 과거와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사랑’에 관한 스토리. 그 스토리의 변형은 무수히 많다. 알콜 중독자이며 천재 의사인 친구는 그 친구 때문에 자기 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의 능력과 한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식상한 스토리와 지루한 전개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물론 내용과 형식을 꼼꼼이 뜯어 먹으며 갓 구운 식빵처럼 방금 나온 소설을 대하는 일은 나른한 행복에 속한다. 이제 한 세대를 마감하는 이상 문학상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불손하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이 보류된다. 대부분의 독자는 연초에 나오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1년간 한국문단의 소설에 대한 점검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내 손으로 산 책이 18권, 눈에 띠는 대로 주어다 꽂아 놓은 것이 3권이니 습관내지 중독처럼 매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을 사 읽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매년 뛰어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소설가 한 명 씩을 쏟아(?)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심사위원도 바뀌어 가고, 기수상작가 우수작이나 특별상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독자들의 시선은 이 한 권에 책에 보내는 기대와 믿음이 크다. 그러니 매년 즐거움과 실망이 교차한다. 문단 권력의 의한 나눠먹기 수상에 대한 의혹은 단순한 문학권력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이인화의 수상으로 촉발되었던 시비와 문제제기는 조용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소설가들의 이력과 면면들, 수상선정 이유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감동없이 진부하다. 여기서 진부하다는 것은 스토리다. 정제된 문체와 다듬어진 문장들, 탄탄한 구성과 주제를 이끌어내는 솜씨는 갈채를 보낼만하다. 그러나 내게 전해진 그녀의 소설은 신선하지도 않았으며 섬세한 감각의 날을 세우고 있지도 못하다. 완벽한 천재에 가까운 인간에 대한 열등감은 주인공의 욕망으로 대체된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곧 자신의 거울 역할을 한다. 가 본적 없는 북유럽의 환한 밤과 뭉크의 그림은 인물의 심리를 그려내고 삶의 진정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짜 절규’는 없다. 다만 뭉크의 절규가 떠난 자리에 오롯한 슬픔으로 남은 빈 자리에 액자가 걸렸던 자국만이 선명할 뿐이다. 무엇을 말하든, 방법만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면 여전히 소설은 그 마음의 물결만 남는다. 천재의사의 치기에 가까운 몸부림은 개연성이 없다. 한 인간이 타자에 대해 품게 되는 욕망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심리를 드러내는 것도 작위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동일시 된 감정과 오히려 엉성해져버린 필연성이 작가의 의도라면 할 말은 없다.

  대상 수상작으로 심사위원들의 결선 투표를 벌였다는 전경린의 <야상록>에 한 표를 더해주고 싶다. 문예지에서 읽었던 김영하의 <아이스크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밖에 김경욱과 구광본의 소설은 신선함을, 함정임의 ‘자두’는 지루함을, 윤성희의 ‘무릎’은 주목을 끈다. 소설적 성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균등 배열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타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이렇게 또 1년이 지나갔다.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생이 아깝지 않다면 내년을 기다리면 그뿐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였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스스로 욕망하지 않고, 타인을 욕망한다고. 또한 모든 욕망은 타인의 시선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말했다.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나는 충만할 수 있다고. - 채호석, 작품론 - ''환의 절규''중에서

  채호석의 작품론 서두 부분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여기서 ‘타인’은 ‘타인들’로 복수의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타인’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욕망’에 관한한 가장 잔인한 거울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다. 거울을 보라. 그리고 내 욕망을 확인하라. 그것이 ‘타인의 욕망’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욕망’인가.

  환한 밤을 여러 번 나누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뭉크의 절규가 한 작품이 아니?수없이 여러 개의 ‘절규’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순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수많은 ‘절규’들을 떠올리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동그란 눈과 입, 귀를 틀어막은 손보다 배경으로 꿈틀대?그 암울함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뭉크의 첫 ‘절규’를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억했다. 좋아하는 그림이 아니라 각인된 그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라의 죽음’을 보여 느꼈던 그 선명한 피의 냄새는 오히려 순수해 보였다. 언어예술의 정점에서 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력과 감성을 극대화시킨다. 보다 좋은 풍부하고 다양한 소설들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아낌없는 갈채를 보낼 수 있는 작품을 기대하다가 써보겠다고 덤비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060206-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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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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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과 ‘당신들’은 나의 포함 여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금을 그어 놓은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당신들’이라는 말에는 소외된 ‘나’와 ‘우리들’이 존재한다.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말하는 방식인 ‘당신들’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 소설과 다른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냉정하고 분별있는 시선으로 대한민국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이거나 공정한 시선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도 지니고 있다. 귀화한 러시아인 박노자는 외국인은 아니지만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전통과 문화적 관점에서 혹은 유전적 관점에서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볼 수 없다. 내게는 그가 또 다른 유형의 주변인이자 경계인으로 비친다. 그래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소속된 집단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일정부분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할 때, 박노자의 견해에 대해 많은 오류와 문제점도 지적당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논의에 대해 기본적인 시각차를 인정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다소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2006년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에 대한 문제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우리의 모습을 조망해 보는 모습은 항상 필요하다. 쓴소리와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박노자가 우리 사회를 보는 관점은 긍정 속에 부정이다. 경제와 문화 측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주)대한민국은 이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2001년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반응은 다양했다. 5년 후 속편 격인 ‘당신들의 대한민국 02’가 나왔다. 참여정부가 들어섰고 박노자는 이제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을 떠났다고 해서 그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던 표현과 비판을 넘어서 때로는 과격하고 감정적인 발언도 불사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은 알면서 고쳐지지 않는 것들도 많다. 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늘 궁금하다. 그의 말과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영향 때문이 아니라 벽안의 귀화 한국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권위주의와 숭미주의, 박제가 된 학문의 자유와 합리화된 폭력들, 민족주의와 북한의 문제 그리고 보수를 넘어 진보를 주장하는 그의 이야기들은 미온적 ‘개혁’의 흉내가 아니라 근본적인 ‘혁명’을 꿈꾸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행간에 묻어 있는 그의 생각들은 ‘이상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모두가 꿈을 꾸면 이루어 낼 수 있는 대단히 현실적인 이상들이다. 실현 불가능한 미래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된 미래의 모습, 현실속의 가능태로 나타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간에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방향의 문제를 점검하는 데 일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겨레에 여전히 칼럼을 쓰며 변함없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는 그의 쓴소리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특정한 목적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목소리도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적당한 거리에서 비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이, 박노자의 눈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노동자, 농민이라는 대다수 대한민국 사람들의 모습과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소수의 모습까지 두루 점검하고 손길을 내밀어 더불어 함께 걸어가야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다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분열되고 이기적인 모습들, 우리 안에 내재된 또 다른 우리의 모습들을 점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차별과 폭력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위정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 대타협의 서구 유럽의 모델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벗어던져야 할 편견과 익숙해져버린 이기심이다. 쉬운 길을 걸어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욕하기는 쉬워도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길이 아니라고 우기지 말고 또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박노자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아니다. 대학 교수의 직함을 가진 어느새 우리 사회의 주류 資鍍퓸?버린 신분과 다르게 그는 영원히 비판적 시선으로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이야기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근본 체제가 되어 버린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내고 반성할 때 ‘당신들’이 아닌 ‘우리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큰 틀과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 더욱 어렵다. 갑론을박하는 현 정치권의 양극화 해소 방안은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미래는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들’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


050208-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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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모델이 미래를 결정한다 워튼스쿨 경제경영총서 1
제리 윈드 외 지음, 류동완 옮김 / 럭스미디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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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번역한 세 번째 책이다. 기억을 위해 몇 자 적어둔다.

작년 봄에 읽은 책이다. 번역한 초고의 비문과 맞춤법 등을 교정해 주면서 읽었던 책이라는 뜻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원고가 책이 되어 돌아왔다. 번역과 대학 강의를 하고 있는 동생에게 이제야 책을 건네받았다. 워튼스쿨 경제경영 총서 중 하나인 <멘탈 모델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책이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번역한 대한 객관적 평가는 불가능하다. 또 다른 도약을 위해 인내와 준비를 하고 있는 동생의 앞날에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길 바랄 뿐이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도 아니고 좋아하는 분야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라는 식의 책은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미래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는 실용서와도 조금 거리를 두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많은 문제와 좌절 상황들을 ‘멘탈 모델’들을 통해 교정하고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책이다. 물론 충분한 검토와 노력의 과정은 필수적인 요건이다. 하지만 단순히 무턱대로 열심히 노력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 방법과 시기가 있고 미래를 향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060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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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멘토에게 배운 것
스티븐 K. 스코트 지음, 류동완 옮김 / 더난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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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번역한 네 번째 책이다. 기억을 위해 몇 자 적어둔다.

‘멘토’는 보통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를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도 ‘멘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일 것이다.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멘토’는 오디에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한 10여 년 동안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맡아 친구이자 선생, 상담자로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물론 멘토는 꼭 곁에 있을 필요도 없고 사람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찾아낸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가장 훌륭할 수도 가장 멍청할 수도 있는 아이러니한 멘토가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의 CEO중 여덟 번째인 스티븐 스콧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고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든다. 인생은 그렇게 작은 출발선 상의 차이부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극적인 반전과 ‘돈오’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방법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회적인 성공과 경제적인 부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적다. 별로 부러운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060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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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Kafka Franz
박홍규 지음 / 미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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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
  - 카프카, 나의 카프카 12

 1

어둠이었습니다. 세상은
열리지 않는 門 이었습니다

어둠 한 조각 도려내어
한 줄기 길을 트려 하였습니다
눈빛만 벼렸습니다. 새파랗게

 2

거미줄 迷路
내 손바닥에 펼쳐져 있습니다

 3

눈이 아픕니다
죽도록 벼려온 어둠의 칼
나 이제 허덕이며
엎디어 받습니다

나 아직도
門 앞에 있습니다 무쇠門 앞에

  94년 여름 민음사에서 나온 독문학자 전영애 시집 <카프카, 나의 카프카>를 오랜만에 꺼내본다. 이 시집 이후 그녀가 계속 시를 쓰고 있는지 어떤지 난 알지 못한다. 박홍규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를 읽다가 거론된 그녀의 이름 때문이다. 이 시집을 산 이유는 오로지, 제목 때문이었다. 그녀가 카프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망은 ‘글쓰기’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을 뿐이었다. 카프카를 전공했고 프라하에 다녀온 그녀의 이야기는 오로지 ‘카프카’를 위해 바쳐져 있다. 얄팍하고 빛바랜 그녀의 시집은 오래된 카프카에 대한 기억의 조각을 꺼내게 했다.

  카프카 전집 발간사에 소개된대로 카프카는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박홍규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간 전영애와 같은 독문학자들과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분석되어진, 혹은 규정되어진 카프카를 재해석하기 위해 이 평전을 썼다. 저자의 초점은 분명해 보인다. ‘권력과의 투쟁’이 그것이다. 가깝게는 가부장적 권위에서부터 멀게는 국가 권력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찾아내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법을 전공한, 글쓰기를 병행하는 박홍규 교수가 카프카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과 개인적 애정은 각별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어쨌든 ‘평전’이라는 형식은 객관화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면 또 다른 시각에서 카프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는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생을 마감했고 모든 원고를 태워달라고 부탁한 친구 브로트에 의해 빛을 본 작품들도 많다. 1937년과 1957년 두 차례나 그의 평전을 썼던 친구에 의해 말해지는 카프카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카프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과 그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 입장이든 사회주의적 시각이든 심리학적 분석이든 간에 카프카는 20세기에 가장 주목받은 텍스트가 되었다. 체코인으로 태어나 프라하에서 거의 전 생애를 마감한 그의 생은 같은 유태인이면서 20세기의 천재로 추앙받는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 마르크스와 더불어 플러스 알파가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엔 공감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모든 평전이 그러하겠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평전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카프카의 생을 음미해보고 작품을 이해하며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읽을 필요가 없다.

  더구나 카프카의 작품을 분석하기 위한 평론가의 평전은 표현론적 관점에서 작품과 그의 생애를 직접 연결시켜 분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박홍규는 순수한(?) 카프카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쉽고 단순하게 카프카를 표현한다. ‘나의 친구’라는 표현이 그렇다. ‘불안과 고독’이나 ‘소외와 부조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을 관찰하고 모든 권력에 대한 거부의 몸짓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어내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부분들도 많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전공을 위한 것도 평론이나 작품 분석을 위한 것도 아닌 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책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전방위적 독서와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박홍규의 ‘카프카’ 이야기는 결코 가볍고 만만하지 않다.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카프카와 그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있게 그리고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 소상하게 밝혀 적고 있다. 카프카의 생애와 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지적이다. 특히,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용하면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가정환경과 가족관계는 그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사랑했던 은 여인들과 41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는 고스란히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작품 세계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다만 개별적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당연히 저자는 카프카에 대한 진한 애정과 깊이 있는 관련 문헌들에 대한 꼼꼼한 분석으로 카프카를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미 열 다섯 살의 카프카는 엄청난 독서가이고 격렬한 토론가이며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위험한 사상으로 여겨진 사회주의자였다. - P. 189

  저자가 카프카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는 문장이다. 카프카에 대한 평가는 그 개별적인 의미를 넘어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의 난해하고 어려운 해설과 감상의 길잡이 때문에 오히려 어렵고 딱딱한, 이해하기 힘든 작가로 여겨지는 카프카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의 일기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전하는 다음 구절은 ‘문학’과 ‘독서’에 대한 주먹질로 이 평전을 통해 오래 기억될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사의 문제라기 보다도 민중의 문제다”(1911년 12월 25일 일기) - P.271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들의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바겐바하, <카프카>, 51-52쪽 재인용) - P. 274


06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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