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 교과서 -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테마로 본 11개국의 역사교과서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타카시 엮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역사와 교과서가 만나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역사 자체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시대와 사관에 따른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도 사학계는 논쟁중이다. 물론 건전한 학문의 발전과 역사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진행 중일 것이다. 국정교과서 제도를 채택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이제 7차를 시행하고 있다.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통치이념을 주입하는 수단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해방이후 대한민국 교과서의 특징이다. 특히 윤리와 도덕, 국어와 역사는 더욱 교묘한 헤게모니의 장악 수단이 된다.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논란은 앞으로도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개별적 사건에 대한 원인과 배경을 이해하는 방식은 계층에 따라 혹은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국가 간의 전쟁에 대한 역사 서술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러한 현상들을 비교 분석하다보면 무엇인가 접점을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눈으로 바라보길래 같은 사건에 대해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이토록 상이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것이 후세에 대한 역사교육의 관점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이시와타 노부오와 고시다 다카시가 편저한 <세계의 역사교과서>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우선 주제가 선명하다. 세계사의 수많은 사례와 쟁점들을 점검하려는 무모한 계획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전쟁’과 ‘식민지지배’라는 두개의 주제만을 다룬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각국의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을 것이다. 1,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나라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방식은 일본과 관련된 국가들을 살펴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첩되는 나라들의 역사교과서를 분석하는 일은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11개국의 작은 소제목이 각 나라의 역사교과서를 특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민족주의사관에 의거한 역사 - 한국,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기술 - 중국, 1980년대 ‘교서 문제’가 불러일으킨 ‘변화’ - 싱가포르, 역사교육과 ‘과거의 기억’ - 베트남, 독립을 쟁취했다는 자부심 - 인도네시아, 역사를 현대의 문제로 생각한다 - 독일, 역사의식은 가정에서 형성된다 - 폴란드, 세계를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인식력을 기른다 - 영국이 그것이다.


  각 나라는 고유한 역사 발전과정을 가지면서 현재를 이루고 있다. 객관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태도로 역사를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겠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못하다. 선택적으로 자국의 피해사실에 대한 부분은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가해 사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아예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식민지 지배 사실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로를 세습시켜나가지만 베트남 민족에 대한 가해 사실은 기초적인 사실관계와 피해 사실조차 확인하고 있지 않다. 미국의 침략 전에 가세한 한국의 경우 베트남전에 대한 성격규정조차 모호하다. 그나마 7차 교육과정에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설정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역사교육이란 사실만을 가르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배우는 학생들의 마음속에 형성되는 역사인식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실의 학습과 역사인식을 동시에 시야에 넣고 실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교육입니다. - P. 42


  역사교육에 대한 논의가 각국의 교육당국과 국민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런 논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교육은 한 나라의 미래다. 특히 역사 교육은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나와 우리, 사회와 국가를 넘어 세계사의 흐름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다. 눈물 질질 짜는 애국주의에 호소하거나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서술에서 벗어나 전국역사교사모임 등에서 활발히 벌이고 있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관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획일적이고 공통된 관점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 국가와 민족에 복무하는 역사가 아닌 현재 우리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교과서를 읽어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또 달라야 정상이다. 서로 다른 해석을 두고 대화하는 장소가 교실인 것이다. 빵틀에 구워낸 듯 똑같은 생각을 하는 섬?한 공부기계들은 이제 그만 생산을 중단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교사는 전쟁에 대해서나 다른 일들에 대해서나 언제나 비폭력, 인권존중이라는 가치관을 가치관을 가지고 수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교육이 아닐까 합니다. - P. 291


  역사를 국가에서 분리하고, 보다 더 민중 쪽으로 이끌어 가는 역사가 교과서에 배어 나와야 할 것입니다. - P. 338


  역사교육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사의 역할이다. 위와 같은 관점이라면 교사와 역사교육의 위치가 그래도 적당하다고 합의할 수 있을까? 우리 현실에선 아직도 이념논쟁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소원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역사는 의미 없다. 차갑고 냉정한 논리만 남은 역사교육은 더 위험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는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있다. 각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 하면서도 반드시 점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그것을 반증한다. 어쨌든 이런 거시적인 프로젝트가 민간에 의해 주도되고 올바른 역사인식과 미래의 역사교육에 대한 거시적 담론을 이끌어 내는 작업들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그 의미와 성과 면에서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일본 내에서 벌어지는 ‘후소샤 교과서’ 파동에 대한 우려로 시작된 작업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나름의 의미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중일 공동 역사 교과서를 넘어서 앞으로의 논의와 진행과정이 주목된다.


060118-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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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0-3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은 기억이 납니다. 세계에 대한 역사를 정확하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매우 독창적이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sceptic 2006-10-30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님도 즐거운 독서 계속 되시길 바랍니다.
 
아나키스트 문학과지성 시인선 311
장석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멜랑콜리 맨의 현대적인 사랑법
나는 우울한 남자, 이성주의자를 몰아내고 싶은 남자
나는 우울한 남자이기 때문에 다섯 사람만 사귀고 싶어
우울한 남자라서 다섯 손가락 펴고 다섯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나는
우울하기 때문에 눈물에 젖어 저 너머에 세워질
이성주의자의 묘비명을 생각하고 있어

  - ‘내 마음의 아나키’ 중에서

  지루한 이성과 감성 놀이의 틈바구니에서 허구적 거리는 몸짓을 보여주는 시인이 장석원이다. 라고 한다면 시인은 화를 낼 것이다. 설익은 목소리와 탄탄하지 못한 내공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지만 첫 시집을 읽는 독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신선하다와 돈 아깝다 사이에서 방황해야 한다. 미래를 알 수 없고 현재가 전부가 아니지만 아직 멀었다.

  ‘아나키스트’는 체제와 조직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자유에 대한 사랑과 자아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열림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시집 <아나키스트>는 자아의 각성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초록은 깊으나 치명적이지 않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벌 받아 마땅하다
얼굴 앞의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는 자 벌 받아 마땅하다

  - ‘근원적 센티멘탈’ 중에서

  반복되는 ‘멜랑콜리’와 ‘센티멘탈’ 사이에는 어떤 간극도 없다. 선언적이고 감성적이지만 때때로 공감과 울림으로부터 멀어진다. 시가 여전히 유효한 장르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와 감흥 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넘어서는 자리에 홀로 눈물 흘려서는 안된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는 장르가 시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잠언적 경구를 떠나 조화된 한 편의 시를 만나고 싶은 것이 독자들의 소망이다. 예를 들어,

크레모아 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용기.
우리의 만남, 부자연스런 체위, 시와 혁명,
술과 사상, 노동자와 시인.
우리와 그들의 사랑은 소도미야.
소돔 성이 소도미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어.
사랑의 힘 때문이야. 서풍이 분다.

  -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 중에서

  차라리 통속적이고 서툴러 보이는 위의 시 같은 경우가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이라는 지나간 시절의 한 순간을 추억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정밀한 언어 예술로서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목숨을 건 나머지 소통의 측면에서 부족하다면 ‘대중예술’로서의 직무를 유기를 했다는 혐의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한 편, 한 편 음미할 수 있는 시집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도 모르지만 전체가 주는 울림 속에 개별적인 시편들이 드러내는 의미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주는 시집도 드물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시의 제목은 의미 심장하다. 독자와 시인,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새로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간결하고 짧은 詩行 속에서 수많은 곁가지를 뻗어내는 마지막 구절의 선언처럼.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우연하게도
『창작과 비평』 전질 외판원이었던 그는
지하철 공사 한창이던 네거리 건널목
지하의 발파음 중심을 기울게 하던 그곳에서
정확하게 16일 전 보광동 81번 종점 앞 포장마차 황금시대의 末路 시비 끝에 주먹다짐 파출소 연행 후 지루한 調書 하룻밤 새우잠
그리고 아침의 어색한 화해 끝에 헤어졌던 그 사내를
즉석 복권을 긁고 꽝을 확인한 후
재수 없다 없어 안 되는 놈은 다 안 된다
담배 필터 씹으며 전봇대에 기대 하늘 보다가 다시 만났다
이 도시에서 우연은 격렬한 사랑을 수반할 때가 있다


06011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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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 공감 - 사람, 관계, 세상에 관한 단상들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개별성 안에 보편성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정혜신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개별적 경험이 세상의 진리라고 굳게 믿는 행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과 사회 일반에 관한 이야기들은 결국 개별적 특성을 통한 일반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정혜신의 <삼색 공감>은 특별한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짤막한 단편들이 모여 있어 긴 호흡으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은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로 상쇄된다. 한겨레를 통해서 최근에 접한 칼럼도 포함되어 있지만 지나간 이야기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우선 ‘사람, 관계, 사회’라는 이 책의 편집이 제목이 되어 버렸다. 삼색은 분명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어주는 관계의 모습.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기 색깔과 관점을 가지고 뚜렷한 목소리를 내거나 일관된 흐름으로 그것을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신과 의사가 바라보는 세상은 좀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오히려 책을 읽는데 방해 요소가 된다. 직업과 학력, 출신과 성분은 상대를 이해하는 최소한의 배경지식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직업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다만 정혜신은 직업과 전공을 병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 일반들의 이해를 돕는데 사용하고 있어 부담스럽거나 주관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칼럼의 특성상 잘난 척하거나 전문가로서의 충고를 잊지 않으려는 시혜적 태도를 버리기 어려운데 비해 비교적 설득력 있고 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매 꼭지마다 일상에서 만나기 쉬운 일화나 비유를 사용해서 평이한 목소리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하고 싶은 말들을 군더더기 없이 적확하고 명료하게, 때로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에 공감하게 된다.

  짧은 글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데 모범이 될 만한 형식과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물론 지나치게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고 시사 문제와 직결된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으나 발표된 지면의 특성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주관을 배제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정혜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과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되어 있다. 그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냉정하고 차분하며 설득력 있다.

  나는 개인의 특별한 경험을 아주 쉽게 일반화해버리는 사람들이 미덥지 않다. - P. 77

  개인적 경험에 객관과 통찰이 더해지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진보는 ''경험적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의 ''밝은 눈''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믿는다. - P. 77

  본능은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본능이란 정교하고 미세한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존재 이유'' 그 자체에 의해 움직이는 힘이다. - P. 91

  자신의 경험들과 개인적 통찰력을 ‘경험적 문제의식’으로 바꿀 줄 아는 ‘밝은 눈’을 가진 정혜신도 본능처럼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 고민들이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측면까지도 담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활동가나 선동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기본임은 물론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목에 핏대 세우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폭넓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P. 101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 P. 102


  정신과 의사라는 ‘지적 권위’나 논리성의 메마름이 아닌 부드러운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정혜신에 대한 나의 판단이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러나 강약 조절보다 그 설득과 생각의 편린들을 전달하는 방식들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그녀를 만날 수 없다면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적 권위주의’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그의 글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06012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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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박물관 3 - 고구려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3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3권) 지음 / 사계절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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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다. 안으로 향하는 눈이 없어서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항상 남의 탓이다. 한 인간에 대한 관찰과 평가가 쉬운 한 마디로 대체되거나 편견과 선입견이 되어 버린 말들은 고정된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탓이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망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다. 그 끝없는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과연 시간만일까?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증오가 국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 전쟁이다. 물론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동물적 본능에 의한 투쟁이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후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워왔다. 항상 너를 탓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었고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기상을 지녔다는 고구려의 멸망도 전쟁에서 비롯된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국가의 존립마저 뒤흔들어버리는 갈등은 개인이든 국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성이 파괴되듯 국가는 멸망에 이른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는 특이한 두 신이 등장한다. 야철신과 제륜신이다. 야철신은 철과 도구를 담당하는 신으로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바퀴를 관장하는 제륜신은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당시 수레를 통한 운송 수단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수레는 단순히 많은 물건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삶의 터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목과 정착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가 문제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직경 1.5미터가 넘어 보이는 바퀴는 2천 여년 전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찬란한 발명이다.

  왕과 귀족이 사는 성안과 성밖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나고 세금 징수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해졌을까?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수단과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벽화에 그려진 왕과 귀족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항상 주변에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다. 능력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진전을 보인 고구려는 이제 본격적인 인간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난 측면도 있지만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난 부분들이 실용성을 배제한 채 본격 예술도 등장하기도 했다.

  고분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생각은 지금도 비슷하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많은 부장품과 고분 천장의 그림이 그것을 말해준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각각 방위를 담당하는 동물들의 역할은 사후 세계에 인간의 두려움과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달랐을까? 무덤에 그려진 별 그림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다만 명칭과 위치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별들을 묶어내고 관찰하는 방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 하늘로 간다고 믿은 것인지, 하늘로 가는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을 놓고 아직도 일본과 견해가 다르다. 많은 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답과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비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해석과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경험에 보지 못한 상황들과 감정들에 대해 더 크게 떠들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의 자부심과 영토에 대한 아쉬움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나라 고구려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미 이전에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떤 모습과 구체적인 형태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한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든 그렇지 않든.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온 시간과 쌓아온 세월에 대한 흔적들은 고스란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남겨진다. 객관성이라는 성격 자체가 역사에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방식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인이든 국가든 반복되고 있다. 정답이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들의 반복된 습관인 것을.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 자신을 알라’

0601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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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박물관 3 - 고구려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3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3권) 지음 / 사계절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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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다. 안으로 향하는 눈이 없어서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항상 남의 탓이다. 한 인간에 대한 관찰과 평가가 쉬운 한 마디로 대체되거나 편견과 선입견이 되어 버린 말들은 고정된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탓이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망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다. 그 끝없는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과연 시간만일까?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증오가 국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 전쟁이다. 물론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동물적 본능에 의한 투쟁이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후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워왔다. 항상 너를 탓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었고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기상을 지녔다는 고구려의 멸망도 전쟁에서 비롯된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국가의 존립마저 뒤흔들어버리는 갈등은 개인이든 국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성이 파괴되듯 국가는 멸망에 이른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는 특이한 두 신이 등장한다. 야철신과 제륜신이다. 야철신은 철과 도구를 담당하는 신으로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바퀴를 관장하는 제륜신은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당시 수레를 통한 운송 수단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수레는 단순히 많은 물건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삶의 터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목과 정착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가 문제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직경 1.5미터가 넘어 보이는 바퀴는 2천 여년 전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찬란한 발명이다.

  왕과 귀족이 사는 성안과 성밖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나고 세금 징수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해졌을까?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수단과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벽화에 그려진 왕과 귀족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항상 주변에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다. 능력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진전을 보인 고구려는 이제 본격적인 인간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난 측면도 있지만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난 부분들이 실용성을 배제한 채 본격 예술도 등장하기도 했다.

  고분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생각은 지금도 비슷하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많은 부장품과 고분 천장의 그림이 그것을 말해준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각각 방위를 담당하는 동물들의 역할은 사후 세계에 인간의 두려움과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달랐을까? 무덤에 그려진 별 그림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다만 명칭과 위치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별들을 묶어내고 관찰하는 방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 하늘로 간다고 믿은 것인지, 하늘로 가는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을 놓고 아직도 일본과 견해가 다르다. 많은 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답과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비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해석과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경험에 보지 못한 상황들과 감정들에 대해 더 크게 떠들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의 자부심과 영토에 대한 아쉬움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나라 고구려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미 이전에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떤 모습과 구체적인 형태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한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든 그렇지 않든.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온 시간과 쌓아온 세월에 대한 흔적들은 고스란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남겨진다. 객관성이라는 성격 자체가 역사에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방식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인이든 국가든 반복되고 있다. 정답이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들의 반복된 습관인 것을.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 자신을 알라’

0601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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