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인간 - 전2권 세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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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는 이외수의 소설은 하나의 틀로 굳어진 듯 싶다. 그 틀은 1992년 <벽오금학도>이후 굳어졌다. 이후 출판된 1997년 <황금비늘 1, 2>, 2002년 <괴물 1, 2>에 근작 <장외인간 1, 2>에 이르기까지 큰 흐름에서 변화가 없다. 1978년 <꿈꾸는 식물>, 1980년 <겨울나기>, 1981년 <장소하늘소>, <들개>, 1982년 <칼>을 이외수의 전정기로 본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그의 소설은 <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5년 등단이후 30년간 많은 양의 책들을 쏟아내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아온 그의 글들은 이제 힘을 잃어가는 것인가.

  미스 강원과의 극적인 결혼, 지독한 가난 등 자신의 이야기를 감수성 짙은 문장으로 풀어낸 1985년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를 알게 된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다. 올림픽 열리는 해에만 머리를 감고,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글을 완성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등 그의 숱한 일화와 외모와 일상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화제에 올랐던 소설가 이외수는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정통 문학에서 비껴 서 있는듯 수많은 에세이와 우화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영혼의 세계를 주유하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창 밖에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는 문장에서 ‘추적추적’과 어떤 특정 시간과 계절이 ‘당도’해 있다는 표현을 여전히 즐겨 쓰는 작가 이외수는 근작 <장편소설>에서도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장들과 표현들 비현실적 결말로 주목을 끈다.

  닭갈비집 ‘금불알金佛揠’의 주인 이헌수는 시인이다. 동생 이찬수와 동생의 동거녀 제영이와 함께 춘천에서 닭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느날 달빛처럼 스며든 여인 소요를 만난다. 닭갈비집 종업원으로 카운터를 지키던 소요가 사라진 어느날 하늘의 달이 사라져 버린다. 세상사람들은 달을 모르고 헌수는 미칠 것 같다. 월(月)요일이 인(人)요일로 바뀌어 있고 달과 관련된 모든 노래와 풍속들이 사라진 현실을 헌수는 받아 들일 수가 없다. 달을 아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돈에 눈이 먼, 가슴이 메말라 가는 사람들 때문에 사라진 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결국 헌수는 정신병원 개방병동에 입원한다. 차차 두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이 온다. 병원에서 만난 한도사, 문보연, 오대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많은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환자처럼 보이는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정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프랙탈 예술을 하는 친구 김필도는 누드 모델을 구하려다 모델을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고 선배에게 그림을 팔려다가 자신의 여자와 바람난 선배를 폭행해서 감옥에 간다. 병원에서 퇴원한 헌수는 필도를 면회하고 닭갈비집을 정상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날 명품 중독증에 빠진 동생의 동거녀이자 자신의 후배인 제영이가 인체자연발화 현상으로 사망한다. 정신을 수습할 무렵 모월동(慕月洞)에서 찾아온 소년을 따라 가끔 헌수를 찾아오던 노인을 만나게 되고 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달이 뜬다. 소요의 정체는 달의 주변을 유유히 날고 있는 시조새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과 허무 맹랑해 보이는 이외수의 소설들은 매번 사람들의 가슴들 적셔줄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 무언가는 감성과 낭만이다. 사랑이 사라져버린 시대, 돈과 물질이 눈을 가리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 때문에 하늘에 달이 사라져 버렸다고 믿는다. 달은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외수가 외치는 목소리는 어쩌면 단순하다.

  가슴속에서 사라진 것들은 가슴 밖에서도 사라진다. 물질로서의 달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도 정서로서의 달은 가슴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로서의 달도 정서로서의 달도 망실해 버렸다.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고 가슴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장외인간 1, 163페이지

  누가 일부러 가슴에 물기를 걷어내고 스스로 타죽고 싶겠는가. 김영하의 소설에 나온 비과학적인 죽음. 사람의 신체가 스스로 발화하여 타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결국 무덤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극적 인식이 아니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본 사람들은 삶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다만 여전히 밀린 숙제처럼 남아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답이 없다. 당연하다. 거기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이외수도 다만 젖은 가슴으로 감성과 낭만을 잃지 말고 사랑이 가득한 ‘관계’를 꿈꾸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말더듬이의 겨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감성사전’등의 에세이와 시집 ‘풀꽃, 술잔, 나비’까지 거의 모든 책들을 읽어왔지만 이제 유년시절의 추억과 재미있는 문장만으로 장편 소설 2권의 분량을 채워나가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장면 장면 에세이와 재미있는 우화로 풀어낸다면 더 좋았을 것같은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띤다. 소설 본연(?)의 임무가 뭔지 잘 모르겠으나 이제 그만 소설을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한 영혼을 지키자고 감성과 낭만을 그리고 사랑을 지켜 나가자고 외치는 기인이다. 춘천에 가면 격외선당(格外仙堂)에 살고 있는 찾아보고 싶을 것이다. 가을답지 않게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점령하고 있다.


200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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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 - 사이가 멀어지지 않고 딸에게 좋은 아빠 되는 법
장경근. 정채기 지음 / 황금부엉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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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나서도 딸의 인생은 바뀐다. 90분만에 책장을 덮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분량이 적거나 내용이 부실하거나 참을 수 없을만큼 지루해져 다음 줄로 다음 장으로 자꾸 눈이 넘어가서 속도가 배가되고 되새김질 같은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책이면 가능하다. 200페이지 분량의 <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는 책에 대한 정보 없이 ‘리뷰 신청 도서’에 이름을 올린 탓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런 아버지는 없다. 비교급이 불가능한 것이 부모이며 관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무엇과 무엇을 비교한다는 것은 돈의 수치화 계량화 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떤 딸이냐에 따라서, 아니 어떤 자식이냐에 따라서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은 다르게 기억될 것이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고 살아간다.

  이 땅의 딸들은 분명 아들과 다른 모습으로 키워졌고 길들여져 왔으며 출발을 달리했고, 한정된 역할과 능력과 상관없이 규정되어왔던 과거를 지닌 채 현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딸과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문제다. sex라는 생물학적 성의 차이가 아니라 gender라고하는 사회문화적 성역할의 차이를 간과하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동양적 유교적, 아니 한국적 가부장적 문화가 빚어낸 왜곡된 차별부터 극복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여성부가 설치되고 양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전시대에 비해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도 중요하다. 특히 딸에게 더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아들과는 다를 것이다. 이성 부모의 역할모델에 따라 배우자의 선택에도 결정적 역할을 미칠 것이고 남성 전체에 대한 인식도 다르게 결정될 것이다. 기본적인 생각에 누가 동의하지 않겠는가.

  다만 무언가 읽을 거리의 형식을 취하게 되면 얘기가 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유형별로 항목별로 번호를 붙혀 ‘좋은 아버지 10계명’이나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법’을 실천하라고 마치 강령처럼 표지 뒤쪽에 조잡한 삽화를 곁들여 부록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실천 사례 중심의 감동을 선물하는 방법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넘쳐나는 방법론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인생을 성공하는 일곱가지 방법’, ‘생산적 책읽기 50가지 방법’, ‘논문 잘 쓰는 방법’에서부터 심지어 ‘합법적으로 세금을 안내는 110가지 방법’에 이르기까지 가히 방법의 천국 속을 헤매고 있다. 읽으면 정말 그렇게 되나 싶다. 나는 여전히 책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그 길은 연금술의 비법을 몇 줄의 항목화된 방법으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 스스로 깨우치고 찾아내야 하는 사색의 길과 방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 사례 중심의 감동을 전하거나 차라리 이론적 접근 방법을 제시해서 현실 생활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해보는 방식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의 내용이 부적절하거나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과 방법들과 가득하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당연한 이야기를 구체화 시킨 것일 뿐.

  모든 아버지는 시간이 없고 바쁘며 근엄해야 한다는 과거의 이미지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깨지고 있다. 주 5일제의 여파로 여유 시간은 넘쳐나고 가족은 삶의 목표이자 희망이며 그 관계는 세대를 뛰어넘어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단위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것이 지나쳐 가족 이기주의로 비쳐질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의 소유물은 아니다. 그 관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부모 스스로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이 책에서 여러번 묻고 있다. ‘자녀가 당신같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까?’, ‘자녀가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부모가 되도록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직업과 경제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이 달라져도 아이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순수한 본성이 변하는 것은 부모의 영향이며 사회의 가르침이다. 내 자녀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위한 고민도 아울러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나서 딸의 인생을 바꾸기 전에 딸의 인생이 어떠했으면 좋겠는가를 먼저 고민하는 일이 더 어렵고 소중할 것이다. 그것이 결정되면 좋은 관계, 행복한 방법들이 다양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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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몸들 창비시선 246
조정권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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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 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그막에 데리고 갈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10년 만에 <떠도는 몸들>이라는 시집으로 돌아온 조정권의 시는 여전히 세상 밖에 시선을 두고 있다.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언어의 구석구석을 갈고 다듬지만 시선은 언제나 세상 밖을 주유하고 있는 듯하다.

<산정묘지> 이후 오랜만에 그의 시를 대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시간은 머물러 있는 듯 내면세계의 관심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인 채 세월의 깊이만 더해 간다. 현실과 동떨어진 맑고 깨끗한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라고 한다면 조정권은 거리가 멀다. 차라리 인간의 내면을 보지 못해 장자의 눈을 빌어 일상사의 모습들을 무심하게 흘려 보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닿아 있지만 결국 존재론적 관점에서 ‘無’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라.

여행의 경험에서 비롯된 시들은 정갈하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시들은 슬프다. 생의 본질이 슬픔이라면 조정권은 우울한 정서와 비관적 분위기를 눈물나지 않게 깔아준다. 발에 밟히는, 피부에 묻어나는 비애는 습관처럼 무덤덤해질 수 있는지 반문하고 있는 것같다. 때때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우러르지 말고 발밑에 썩어가는 낙엽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낮은 시선이 필요하다. 조정권의 시는 그렇게 읽혔다.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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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써라 - 글쓰기.읽기.혁명
데릭 젠슨 지음, 김정훈 옮김 / 삼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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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심상사’에서 ‘청소년 문학 창작학교’ 캠프에 갔을 때 박동규 교수를 비롯한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고정관념을 버려라. 둘째 낯설게 바라보라. 물론 내가 나름대로 얻어낸 결론이지만 문학적 글쓰기의 기본 토대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낯설지 않은 작품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 후로 접하게 되는 시나 소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고 지금도 가끔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말들이다.

  4차 교육과정 시절이었다. 교과서는 ‘바이블’이었고 마르고 닳도록 암기하고 또 외우면 된다. 교과서 이외의 지문은 학력고사에 출제된 적도 출제될 필요도 없던 시절이었다. 신동엽의 <금강>을 밤새워 읽지 않는 대학생의 되지 말라는 고 3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대학보다 <금강>을 먼저 만났다. 인생이 도움이 될만한 국어 교육과 글쓰기 교육은 그 후로 단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우리 나라의 교육 과정상 정상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교 교육 과정상 ‘쓰기’의 심화 과목인 ‘작문’이라는 과목이 있지만 대개의 경우 고 3에 배치해서 언어 영역 문제집을 풀거나 ‘작문의 절차 5단계’의 지식 전달 교육으로 끝난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와 중학교 시절 의무적인 독후감 제출이 전부로 기억된다.

  열악한 글쓰기 교육이 현재도 다름없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체계적이거나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이 없거나 불가능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대입에 반영되는 ‘논술’ 시험은 국민 전체가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사기극이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가르칠 수 없거나 ‘작문’을 선택하지 않으면 배울 기회조차 없는 ‘논술’을 언제 누가 가르치고 배워야 하나? 글쓰기를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취지에 적극 동감한다. 하지만 현실적 대안과 방법론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모두가 고민하고 방법을 바꿔야 한다.

  데릭 젠슨의 <네 멋대로 써라>의 가제를 ‘어떡하면 안 가르칠까’였다는 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말이다. 글쓰기는 삶의 모습이어야 하며 사고 과정의 반영이어야 한다. 붕어빵틀처럼 동일한 방식의 주입식 교육을 받고 부모로부터 일찍부터 경제교육이라는 미명아래 자본주의 속성과 경쟁 원리를 몸에 익힌 학생들은 수입과 직결된 직업을 선망하며 때로는 어른보다 더 속물적 성향과 배타적 이기주의를 드러낸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일까? 그렇지 않다.

  데릭 젠슨은 높이 뛰기 선수로 활약했으며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가에서 살면서 산업화로 인한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선생이자 농부이며 양봉업자이기도 하다. 여러 대학과 교도소 등에서 글쓰기를 가르친 방법과 내용을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고 있다. 항목별로 설명하고 있지도 않으며 특별한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 글쓰기 원칙은 ‘읽는 사람을 지루하게 하지 마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무척 어려운 일이다. 글의 종류와 쓰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루하지 않은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은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루하지 않은 삶과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조금 더 깊이 고민하는 방법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과 실제 수업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글을 쓰고 다듬는 방법의 핵심 원리는 경험적, 실천적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자발적인 글쓰기가 선행되어야 하며 진심을 담아야 하고 온몸으로 글을 쓰되 자신만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줄쳐진 노트의 줄을 무시하고 대각선으로 길게 편지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파란색 볼펜으로 반듯한 사각형 노트나 편지지를 대하는 마음은 누구나 답답하다는 것이다. 일정한 형식과 동일한 방식의 글쓰기는 공장에서 구어낸 공산품처럼 재미없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삐딱하게 쓰려면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고개를 5°쯤 기울이고 다른 각도와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 글쓰기의 시작은 거기서 부터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은 욕망,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나만의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폭발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편이 낫겠다.

  일상적인 글쓰기는 우리의 생활이다.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하다 못해 문자를 보내고 친구에게 메모를 남기고 일기를 쓴다. 모두가 소중한 개인의 기록이며 의사 표현 행위이고 생각과 삶의 반영이다. 두려워하?말고 저자의 말대로 멋대로 써야 한다. 그렇게 할 것이다.


200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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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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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박근혜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싶다. 다소 과격한 표현인가? ‘유신 공주’ 박근혜의 정체성부터 묻고 싶어지는 발언들이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대중은 바보인가? 대한민국의 체제 수호와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파수꾼 박근혜는 어떻게 현실 정치의 중앙에서 행세하고 있는가. 부끄러운 우리의 정치 현실의 단면을 보고 있는듯 하다. 보수과 진보, 우익과 좌익을 논하기 이전에 창피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이념 공방을 보면 대한민국을 뜨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문명국가 한국은 아직도 야만의 정서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는 사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문명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용인된 사상의 자유가 없다. 한국의 정치적 군사적 특수성 때문이라는 위협은 이제 지나가던 개도 웃게 되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국가 보안법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헌법 19조, 20조에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명시하고 있지만 사상의 자유는 인정하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에 일부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헌법 37조 2항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 한하여 벌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어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언제쯤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반공 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914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 존 B. 베리(John Bagnell Bury, 1861-1927)의 <사상의 자유(A history of freedom of thought)>가 박홍규 교수에 의해 완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이 책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시대별로 사람의 생각을 가두고 억압했던 인류의 역사를 종교를 통한 사상 통제의 역사로 풀어내고 있다. 각 시대별로 사상의 자유를 위해 피흘렸던 선각자들의 이론과 저작을 통해 이성적 존재라고 믿었던 인간이 얼마나 긴 세월동안 야만의 시대를 겪어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중세를 암흑기라 했던 이유는 ‘교회의 영향력이 최고도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이성은 기독교가 쌓아올린 인간 정신의 감옥 안에 사슬로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는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와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종교의 배타성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이성을 억압해 왔으며 고통스런 역사속에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극복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이다.

  베리가 종교를 중심으로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 나는 거의 전적으로 종교에서의 사상의 자유만을 고찰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본문 190페이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종교가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리의 우려대로 인류의 ‘사상의 자유’는 이데올로기라는 직격탄을 맞는다.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반공을 국시로 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지독한 사상 탄압과 맞물려 언론의 자유까지 유린되었다. 종교의 근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으며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와 사상의 자유가 없는 지구상의 특별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분당에 800억짜리 교회가 지어지고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개신교 세계 50대 교회중 44개가 대한민국에 있으며, 세계 10대 교회 중 7개가 대한민국에 있다. 규모와 신도수로 특정 종교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한 특정 종교의 배타성이 인류 역사에서 초래했던 불행과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결합되어 자행되었던 지난날은 이대로 묻혀 가는 것인가?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 존 밀턴(John Milton), 본문 120페이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에도 이와 동일한 항의가 등장했다. “관용이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모조품이다. 그 둘 모두 독재이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를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여할 권리가 있다고 처한다.” - 본문 133페이지

  밀턴과 페인의 말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 혹은 관용과 불관용을 논하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베리는 100년전에 설파했고 대부분의 문명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끝나버린 논쟁들을 우리는 여전히 유효한 갈등 요소로 감싸고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난해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학교를 상대로 외롭게 싸웠던 일,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로 매년 1천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 지금 현재 동국대 강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논란 등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의지했던 권위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호두껍질처럼 단단하게 나를 깜싸고 있던 암흑의 세월들을 난 이제 믿지 않는다. 그 첫 단추는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채워진다. 지금 우리의 초등 교육은 어떠한가? 베리의 걱정은 아직도 유효한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는 말은 곧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에서 삶은 시작되고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촉발된다. 전도유망함의 제 1계명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 진정한 행복을 배울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여 사상의 자유가 인류 진보의 원칙이라는 점을 젊은이들에게 각인시켜야만 하는데, 그러나 걱정스럽게도 이 일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초등교육 방식이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 274페이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라는 말은 전도유망함의 제1계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들은 바를 권위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경우에 정당하고 어떤 경우에 정당하지 않은가를 아이들 - 이제 막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된 - 에게 설명해 주는 것은 반드시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본문 275페이지

 
200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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