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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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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단어 ‘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이다. 같은 강물을 사용하는 건너편 사람들을 이르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경과 목축을 하던 시대에 강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아군 아니면 적군이었다. 강을 두고 대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법칙을 받아 들이며 살았을 것이다.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쟁은 강의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찍이 고대 인류 문명은 모두 강에서 발원한다. 강을 차지한 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이 라이벌이라는 단어는 ‘경쟁관계’를 전제로 한다. 서로 긴장하며 발전하는 긍정적 측면과 오로지 승부에 집착하여 상대를 공격하거나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며 자멸하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전문학사에서 걸출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라이벌 관계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특히 비슷한, 혹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연속선상의 흐름에서 이해하는 방식보다 이렇게 스타카토로 끊어 읽는 방법은 단편적 사실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할 수 있어 흥미로운 시도로 보인다.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을 서로 견주어보는 일은 색다른 방법이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입체적인 방법으로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물의 생애와 사상이 투영된 비교문학적 관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삼국시대의 ‘세상과 불화한 두 천재의 갈림길’이라는 부제로 월명사와 최치원을 시작으로 ‘연행예술의 극점을 추구한 두 예술가’ 신재효와 안민영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씩 묶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부식과 일연, 이인로와 이규보를 비교하는 일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거나 ‘시대의 충돌과 균열’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낸 것은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특히 정도전과 권근의 비교가 극적이다.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선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은 흥미롭다. 서거정과 김시습을 비교하거나 김만중과 조성기를 비교하는 내용은 단편적인 내용의 서술과 일관된 관점이 없어 아쉽다. 그 중에서도 ‘유쾌한 노마디즘’으로 박지원을, ‘치열한 앙가주망’으로 정약용을 비교한 고미숙의 글은 가장 돋보인다. 두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학적 성향의 차이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비교함으로써 동 시대를 살았으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 안타깝게 만든다. 문장의 탄력과 일관된 설명 방식이 흡인력있게 전개된다.

  정출헌,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 공저로 되어 있으나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는 한 장씩만을 썼고 나머지 여섯 장은 정출헌의 글이다. 책으로 묶이고 보니 전체를 통괄하는 하나의 키워드나 주제가 없고 여러 사람의 공저이다 보니 문체와 문장이 고르지 못한 단점이 있다.

  하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고전문학을 이해하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평면적이고 객관적 사실들만 나열한 역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문학으로서의 역사속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우리 고전을 두루 섭렵한 사람이라면 글 읽는 재미가 배가 될 것이고,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고전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는 책이다.

  텍스트 상호성 측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두 작품을 묶어내거나 책 두 권을 묶어보는 일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자칫 단순한 분류 방법으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 유사한 속성을 묶어내는 지루한 방식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낯설게 묶거나 짐작할 수 없는 다른 방식의 비교 방법이 필요하다. 작품의 비교 뿐만 아니라 작가가 살아온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문학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작품에 투영되었는지 비교하고 분석하는 즐거움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0603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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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열쇠 - 철학
박이문 지음 / 산처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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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사유 방식을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철학에 대한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렵고 딱딱한 그들만의 철학은 나에게 필요치 않다. 학문으로서 연구실에 박제된 철학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리적이고 복잡한 진술들은 읽는 사람에게 중압감 내지 지적 허영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면서도 사고의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철학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하다.

  철학자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하고 요긴한 책으로 볼 수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연구와 탐구에 전력을 다한 연륜과 깊이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하다. 적절한 언어의 선택과 개념에 대한 일관된 깊이는 현대인을 위한 철학 사전으로서 손색이 없다.

  우리 인간들 사유의 도구는 바로 언어이다. 언어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철학이다. 인식의 틀과 사유 방식은 철학의 밑바탕이면서 동시에 완성된 하나의 학문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겪으며 생각을 공유하고 그 생각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철학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의 기저에 철학이 존재한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쉽고 명료한 철학에 대한 어원 풀이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풀어나가야 할 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그 관계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일은 철학자의 몫이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확인하고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사유하는 도구를 제공하는 일은 철학의 몫이다. 앎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역할은 언어가 존재하므로 가능하다.

  언어와 사유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가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에 의해 서술된 이 책은 단순한 철학 용어 사전과 구별된다. 일목요연한 연속선상에서 우리는 인류의 사상과 인식 방법에 붙여진 이름들에 대해 명징한 언어를 통해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단순한 개념과 용어에 대한 지식들의 편린이 아니라 저자 박이문의 ‘주관’에 따라 해석되고 정리된 언어들과 만나게 된다. 득과 실을 판단하고 구별해서 취사선택하는 문제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나는 여기에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하나 하나의 개념들을 두 세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순서에 상관없이 찾아 읽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는 방식을 권한다. 본류에서 뻗어나간 지류들의 미묘한 관계들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 이후에 발간된 ‘과학’과 ‘종교’ 그리고 김성곤의 ‘문학’ 시리즈가 있지만 동일한 성과를 담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성곤 교수에 대한 믿음으로 ‘문학’편을 다음 목록에 올려 본다.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하는 ‘생명’의 계절에 삶에 대한 욕망과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인식보다 먼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실존의 문제는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존재는 감성적 비애를 자아낸다. 개인의 존재가 사회적 존재로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을 되짚어 본다.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길잡이’라는 부제가 붙은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인간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류의 지성사를 일별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방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열쇠 하나를 제공한다. 손에 잡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무엇을 보고 어디에 앉아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는 물론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06030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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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고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312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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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을 만큼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우울한 날이 있듯이 어떤 자세로든 이제 인생의 황혼녘을 준비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황혼으로 비유된 늙음의 시간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이 주장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거짓에도 불구하고 나이들어 죽어가는 모든 인간에게 느끼는 연민은 다를 수가 없다. 하얀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를 보고 느낀 욕정의 끄트머리. 그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정년을 마친 노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의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공명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다. 한발 더 다가갈수록 소리와 의미 사이의 긴장은 풀어지고 무화된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에 침묵보다 더 큰 소리로 내면의 풍경소리 울린다. 그 울림이 실어증의 원인이 되고 침묵의 극치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누구’가
의자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지고
오랜만에 만나 사람이
그 ‘누구’와 무척 가깝지 않았어요? 물을 때
느낌만 남는 자리.
목구멍에 잠시나마 머물게 할 무엇이 나타나지 않는....
나름대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공터만 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명이 불가능한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소리로 표현되지 않는 침묵으로 전달되는 소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시인의 몫이다. 황동규 시의 편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또 다른 시작인지. 외로움보다 즉물적인 ‘홀로움’을 내세운 이 작품이 그를 대변한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시인의 모습에서 나이를 읽어내기 보다 세상속에 풍경처럼 펼쳐진 사물들의 모습과 맑고 조용한 시선들이 만나는 명징한 소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꽃의 고요>는 비로소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디게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지독한 반어가 독자들을 화자와 동일시한다. 봄이 짧다는 진술을 이해하는 독자나 느껴본 적도 경험할 겨를도 없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짧은 생에 대한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슬프게 들린다. 그래서 ‘더딘 슬픔’이 무섭도록 빠른, 혹은 찰나와 같은 순간적인 슬픔으로 전달된다. 꽃이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꽃이 ‘고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슬프다. 침묵하는 꽃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현실이 너무 차가운지도 모른다.

더딘 슬픔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처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06032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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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당신?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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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은 그렇게 속삭이고는 그녀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어디선가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구두 뒤축이 닳을 거야. 그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에 섰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당신인가요?

  나는 소설의 경우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에는 편견이 숨어 있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편견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성과 여성의 소설은 작가를 몰라도 구별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그 형식과 내용이 달라서가 아니라 문체와 감성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여류 작가’라는 희소성이나 차별적 시선 혹은 한정된 영역의 특별한 대우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분명했다.

  80년대 이후 서영은, 최윤, 김채원, 은희경, 신경숙, 권지예, 김인숙, 전경린 등 문학적 성과면에서 ‘여류’라는 이름을 털어버린 것은 오래된 일이다. 다만 한계라고 명명하기엔 어색한 감이 있지만 특징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수많은 평론가와 문학 연구자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이제 그것을 벗어날 필요와 가능성을 가진 작가를 발견한 듯한 개인적 느낌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윤성희의 <거기, 당신?>은 성격이 분명하다. 소설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게다가 작가가 시도한(?) 문체와 스타일은 나를 사로잡았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내가 소설을 썼다면 이런 식의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소설의 인물을 살펴보자. 현실에 있을법한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기본적인 소설의 정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순 없지만 윤성희가 만들어낸 소설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인물로 볼 수는 없다. 이럴 경우 독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 나와 다른 상황과 감정과 생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없다. 둘째, 색다르고 특이한 경험으로 대리 경험의 극대화를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 화려하고 잘나가는 주인공이 아니므로 선망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현실 원칙을 벗어나 쾌락원칙에 충실한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현실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로 투영된 대상으로서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독자들은 불편해하거나 호기심으로 그칠 뿐 절대적인 공감과 깊은 감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단점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고 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상에서 중심에 서 있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를 넘어 치열하고 섬세함이 독자를 몰입하게 한다. 보물지도를 찾으러 떠나거나 어린시절 암산왕이었거나 간에 현실에서 그들은 지루하고 흑백영화처럼 특징없는, 오히려 비참하고 어려운 생활속에 함몰되어 있다. 탈출구도 비상구도 없어 보인다. 그들을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뭔가? 작가의 의도보다 독자의 반응은 어떠한가?

  다음은 윤성희 문장의 특징이다. 그것을 문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윤성희 소설의 특징이라고 크게 말할 수도 있다. 헤밍웨이의 문체가 대표적인 간결한 단문이다. 그녀의 소설이 그렇다. 비슷한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헤밍웨이를 떠올렸다. 일단 길이가 짧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담백해서 가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두 번 이상 반복되는 복문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고의 흐름과 맥락이 끊길 염려가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숨가쁘게 다음 문장의 주어에 매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독자는 바쁘다. 평소의 패턴대로 문장을 읽어나가려는 습관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설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문체에만 있지만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비약과 생략은 윤성희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읽힌다. 나에겐 그렇다. 생략된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와 접점은 물론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음 장면과 상황을 보여준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때때로 힘겹다.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작가가 원하는, 혹은 독자가 상상한 것을 전부 채우지 못한다.

  건조한 웃음과 아이러니가 결코 의도되거나 계획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감정과 비애가 철저하게 배제된 채 마른 모래 바람처럼 서걱이는 웃음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이 남는다. 의도된 냉소와 철저한 감정의 절제는 윤성희 소설의 핵이다. 독자의 입맛이 아니라 작가의 성향과 의도에 충실한 소설이라는 느낌이다. 그것이 거부감없이 흡입될 수 있는 것은 낯 상황과 인물 그리고 문장 사이를 흐르는 긴장감이다. 쉽게 그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긴장감이 유혹이라니?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가.

  다양한 소설 전달 방식은 전달 내용과 형식과는 또 다른 방식의 재미와 즐거움, 사유 방식을 통해 지적 유희를 가능케 한다. 소설의 스토리만 보는 독자는 없겠지만, 또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색다른 맛과 분위기를 찾는 미식가처럼 윤성희 소설을 더 읽어야겠다는 강한 이끌림이 <거기, 당신?>이 내게 준 느낌이다. 훌륭한 소설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겠지만 주관적, 개인적 취향에 꼭 맞는 소설이었다. 내용과 형식보다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모래바람이 먼저 불어오는 독특한 윤성희의 소설에 호감을 갖게 됐다. 대중성과 문학성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제쳐두고 일단 읽어보면 색다른 소설적 상상력과 만나게 된다.

  말을 아끼는 태도와 응축된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거기’에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06032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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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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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아니 자주 나는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문을 가져왔다. 물론 그것에 대한 답이 될만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스런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를테면 사회경제적 지위로 볼 때 당연히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띠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조선일보를 보면서 기사의 방향과 논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착각하는 비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오래된 숙제처럼 대중들의 비합리적 정치 성향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모순은 풀리지 않았다.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그 의문부호에 확신에 찬 답변을 던져준다. 1933년에 출판된 이 책이 많은 부분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히 사상의 정수를 선보인 것은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만하다. 단순하게 사회와 정치를 보는 거시적 안목에 대한 탁월함이나 뛰어난 통찰력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을 통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의 기원을 분석해내는 방법과 논리는 명쾌하다. 프로이트와 동시대 인물로 정신분석학 연구소에 일했을 만큼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한계를 느끼고 독특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라이히는 인간정신의 심리구조를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향을 극복하고 거시적 관점인 역사적, 사회적 인식의 틀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맑스다. 맑스의 노동과 사회학적 관점이 라이히 사상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라이히는 ‘성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이 이론의 정수가 바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고 볼 수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극에 달한 시점에서 쓰여진 이 책은 이후 3차례의 개정 증보판을 내게 된다. 그린비에서 이번에 번역된 책은 1942 8월에 쓴 라이히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붙어 있다. 라이히는 이후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며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소를 세워 연구활동을 하던 중 미국 정부에 의해 연구 성과가 파괴되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6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옥사한다.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 후 출판된 이 책은 그의 이론의 독특성과 정치적 성향 때문에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차피 정치는 개인의 성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당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시대를 반영한다. 파시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혔던 라이히가 대중심리의 비합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프로이트와의 인연으로 인간의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정치적으로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입장에서 대중들의 모순된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중심리를 이용하고 억압하며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당당히 현실 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라이히의 고민에 공감이 간다. 이런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를 자연스러운 성의 신비적 왜곡과 억압된 오르가즘에 대한 열망 그리고 가부장적으로 구조화된 사회경제적인 억압에서 찾고 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라이히는 노동자들을 계층별로 세분화하고 그들의 정치 성향을 비교함으로써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개인의 성적 억압과 가족내에서 구조화된 가부장적 억압구조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지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 라이히가 생존했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구조를 지닌 현대 사회는 그 특징을 쉽게 규정하기조차 힘들다. 인류는 이미 정보 사회로 접어들었드며 인터넷의 발달과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에 따라 삶의 형태와 의식 구조가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대중들의 정치적 성향과 변화 주기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중들의 심리를 일방적으로 통제하거나 묶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원인을 몇 가지로 분류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변하지 않는 대중들의 심리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불어 성적 억압구조나 가족 지상주의, 언론과 정보 사회의 극단적 포퓰리즘 등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회경제적 계급구조는 더욱 모호해져가고 있다. 아니 모호해져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라이히의 지적대로 물질적 상황과 이데올로기 성향 사이의 균열의 원인이 항상 소시민들이 위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논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현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 사회의 구조와 경제적 토대가 어떤 형태로 변화될 지 알 수 없으나 라이히의 주장은 상당부분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이 많다. 전공자가 아니라서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관점과 이론적 토대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생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원인을, 혹은 그 연결고리를 ‘가족’으로 보았던 라이히의 견해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상황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면 그 다양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의 몫이겠지만 현실 정치에 나타나는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정치 협잡꾼이 아니라 소시민계층이 뼈를 깎는 고통과 반성을 통해 바로 잡아야할 문제다. 이 책의 의미를 나는 여기에서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히의 말 한마디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인간 존재의 원천이다. 또한 이것들이 인간 존재를 지배해야 한다!" - P. 496

 

 

06040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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