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사박물관 1 - 선사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1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지음 / 사계절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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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역사가 된다는 당연한 이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연속적인 세계관에서 보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하는 기준과 시기 자체가 무의미하다. 공간 개념과 더불어 시간 개념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가정하면 인류가 발생한 것은 12월 31일 해질 무렵 오후 다섯시쯤 된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은 해가 바뀌기 5분 전 쯤이다. 영겁의 시간 속에 한 인간이 인생을 고민하는 것은 무한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정말 낯간지러운 짓이다.

  시야를 좁혀 인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내 조상의 뿌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르치고 배워온 대부분의 역사는 왕조 중심이었으며 영웅 중심이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기록된 순간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후손들의 호기심과 의무였으며 기록되지 않은 민중들의 삶과 생활 모습을 유추하는 일은 관심밖의 일로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관심은 당연히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일상이 궁금하다. 영화 제목처럼 ‘생활의 발견’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역사에 관한 수많은 석학들의 견해와 사관에 대한 논의는 물론 중요하다.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과 역사에 대한 해석하는 입장은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판단부터 시작해서 천양지차의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 모든 사관도 중요하고 올바른 정리와 비판도 필요하다. 하지만 조금씩 더 관심이 가는 분야는 역사의 주변에 머물러 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필립 아리에스와 조르주 뒤비가 책임 편집한 <사생활의 역사>는 방대한 분량으로 유럽의 문화와 일반인들의 생활사를 정리하고 있다. 2002년에 새물결에서 번역 출간된 이 시리즈는 1권이 900페이지에 이른다. 읽지 않고 꽂혀 있는 몇 권 안되는 책 중의 하나다. 나의 게으름을 탓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생활사도 다각도로 조망을 받고 있지만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는 책은 없다고 본다. 미루고 미루다 이제 그 1권을 시작한다. 시간을 핑계삼아 비싼 책 값을 핑계삼아 미루어 온 것을 이제야 구입했다. 지난해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에 이어 역사에 대한 또다른 시각과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제1권 선사생활관은 처음부터 흥미 만점이다. 기원전 4000년전의 사냥 장면과 서기 2000년 서울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생활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석기의 종류와 쓰임새가 사진 자료와 더불어 꼼꼼하면서 쉽게 설명되어 있다. 수렵과 채집 농경와 장례 등 사실적인 그림과 내용들이 철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실감나고 흥미롭다. 특별 전시실과 가상 체험실을 통해 선사시대 인류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기획과 편집에 놀랄 수밖에 없다. 정교한 내용과 자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90페이지 밖에 안되는 분량속에 일목요연하고 재미있게 당시 인류의 생활을 중심으로 서술된 이 책은 성인들은 물론 청소년들에게도 흥미있는 역사 접근 방법의 교재로 활용될 만하다.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안목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책의 크기와 하드커버, 도판과 내용을 살펴보고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권 한 권 각 시대를 ‘생활사’를 중심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싶다. 반복되는 일상과 보잘것없는 생활들이 모여 문화를 이루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인간이 살아온 시간들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들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가히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진화하고 발달하고 있는 인류의 문명이 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성하게 된다.

  선사시대와 지금의 인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현생 인류와 지금의 인류는 뇌용량에 차이가 없다. 삶의 목적과 가치가 달랐겠지만 한 번 태어나고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들이 느꼈을 자연과 생존의 문제 그리고 행복과 고통의 과정들을 상상해 본다. 과연 지금 우리는 그 때보다 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대를 뛰어넘는 이 재밌는 여행을 천천히 오래오래 계속하고 싶다. 그러고 나면 지금 여기 나의 모습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이 조금은 어렴풋하게?痴?않을까하는 불가능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책과의 사귐이 지겹지 않도록, 쌓여가는 읽을 책의 목록만큼 살아갈 수 있도록 가장 작은 소망을 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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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닭 연구소 문학과지성 시인선 310
장경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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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다녀간
흔적이 있다

  그가 누굴까? 장경린의 <토종닭 연구소>의 1부 첫 번째 시다. 한동안 행간을 들여다본다. 나보다 먼저 다녀간 그를 생각해 본다. 무수한 존재의 시원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작업이 시인들의 창작 행위라면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무임승차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세상에 로그인하고 싶은 시인의 목소리는 유리벽처럼 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것 같은 현대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짧은 시행은 주관적이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것을 위험성이라 표현한 것은 그만큼 단순하고 즉흥적인 반응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경린의 시들은 대체로 일상에 발을 딛고 있다. 어느 시인의 시가 일상을 떠나 있을까마는 그의 시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가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비판과 풍자의 극을 달리지도 못하면서 유머스럽다. 독자를 포함한 타자의 대한 불만과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다. 다소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별 특징없는 한 권의 시집을 편안하게 읽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모두 심각하고 매순간 진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머가 미덕이 될 순 없지만 비틀고 장난하는 몸짓은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떤 형태의 목소리와 몸짓이든 시인 특유의 개성과 독특한 목소리만 낼 수 있다면 나름대로 분명한 색깔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장경린은 그런 면에서 미흡하지만 버리기는 아깝다.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자본의 물결에 휩쓸리고 내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거리에 버려진 날리는 비닐봉지 같다

  시인의 관심사는 ‘자본의 물결에 휩쓸리고 내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비극적 인식을 가볍게 말해 버린다. 버려진 비닐봉지는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날아다닌다. 저항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지 않고 흐름에 온몸을 내맡긴다. 때로 비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닥에 뒹굴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견뎌낸다. 그 모든 대상들이 시인의 관심사이다. 무엇하나 버릴 것 없는 세상이 아니라 아무것도 의미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오히려 비극적인 시선으로 느껴진다.

몽유도원도 21

먼 산
귀 기울이다
떨어지는
산수유
또 한 해
누군가
누가 오는가

  마지막 시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그는 나보다 먼저 다녀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가 누구이든 먼 산에 귀 기울여 기다리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다림이다. 이 도시의 삭막함을 견뎌내는 힘은 산수유 떨어지는 소리처럼 다가오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확신은 시인의 마지막 말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시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화합과 합일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의 ‘관계맺기’로 볼 수 있다.

시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벽을 넘나드는
일종의 ‘숨통 트기’가 아닐까
도시와 자연과 다르지 않듯이
과거와 미래가 다르지 않듯이
내가 당신과 다르지 않듯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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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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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마감했던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들과 철학자 중의 한 사람, 미셸 푸코를 기억한다. 그는 수많은 동료학자들에게, 그리고 문학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동료, 후배들의 찬사나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지식인들이 거들먹거리며 써먹는 논의의 화제거리가 우리들 현실과 미래를 짚어보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의 대표적 저작 중의 하나인 <감시와 처벌>은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제목은 항상 제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일반 명사나 추상 명사로 대표된다. 다소 흥미없는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일반인들 입장에서 ‘감시와 처벌’은 남의 일이며 더구나 ‘감옥의 역사’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만하지 않은가?

  안기부 도청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무렵 정형근 의원의 핸드폰 사용법이 한겨레에 소개된 적이 있다. 1달 이상 같은 번호를 사용하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개의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수시로 핸드폰을 바꿔가며 통화하고 자주 번호를 바꾼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안기부에서 악명을 떨쳤던 그의 행동이 CDMA 접속 분할 방식 핸드폰의 도청이 얼마나 쉽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아직 이 시대에 ‘big brother’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푸코의 경고는 단호하다. 일상 속에서는 우리는 대단히 무감각하다. 감출 것도 비밀도 없기 때문에 감시의 눈길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격리 수용되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은 당연히 감시와 처벌을 받아야 하며 그것이 감옥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히는 푸코의 주장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래를 예견한다.

  신체형과 처벌, 규율과 감옥 등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프랑스라는 한정된 역사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이고 있으나 봉건사회에서 민중들에 의해 시민혁명이 성공했고 또다시 복고 왕정이 등장하는 등 근대와 탈근대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고 험난한 역사를 걸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한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책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근대적 정신과 새로운 사법 권력과의 상관적인 역사를 밝히는 것이다. 처벌을 관장하는 권력이 근거를 두고 있고, 정당성과 법칙을 받아들이고, 영향을 넓혀가면서 그 엄청난 기현상을 은폐하고 있는, 과학적이고 사법적인 복합실체의 계보학이다. - P. 52 

  푸코의 이 말 한마디가 이 책의 의미를 밝히는 열쇠가 된다. ‘근대정신과 사법 권력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법은 누구를 위하여 복무하는가? 법은 과연 공평하고 평등하게 집행되는가? 이 질문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21세기의 현실에서 푸코의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아니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트에서부터 시작되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길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효과적인 권력의 통제 수단으로 비롯된 이 부자유스런 시선들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고 처벌을 위한 감옥에서 활용되는 수단이 아니어도 우리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팬옵티콘으로 대표되는 벤덤의 감옥의 구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규율의 제도는 인간행위를 관찰하는 현미경처럼 기능하는 통제장치를 확산시켰다. - P. 272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를 위해 복무하던 징벌은 대다수 범죄자에 대한 교정 기능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처벌을 위해 존재했던 징벌이 감옥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많은 논란과 혼란스런 과정을 겪었다. 범죄에 대한 형량을 시간의 개념으로 환산하고 신체적 구속을 통해 자유를 박탈하는 것으로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여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의 공개처형을 통해 보여줬던 야만의 시간들은 역사는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징벌의 목적과 효과 군중들에 대한 경고와 군주의 의도는 역사적 사실로 그칠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푸코의 논의를 한정시킬 수 ?문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이 짧은, 한정된 분량으로 다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일망 감시장치’는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 - P. 312

  한 사람의 감시자가 수많은 죄수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감옥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심리적 변화와 제도적 장치에 대한 공포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반성과 성찰들을 담고 있다. 그가 말하는 감시와 처벌은 단순히 감옥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고 아무도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의 삶을 대변하게 되었다.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 P. 420

  범죄의 원인과 처벌의 문제, 권력의 도구인 감옥의 문제를 심층적이고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단순한 사회적 문제제기가 아니라 논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의미의 크기를 헤아리기 어렵다. 다른 책들을 읽어나갈 때마다 마주쳤던 푸코를 만나 나눈 대화의 소중함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06010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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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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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진실과 내가 소설을 통해 찾으려는 인간적 진실은 다르다. 역사와 진실, 인간과 진실이 다른 것처럼. - ‘작가의 말’ 중에서

  역사에 기록된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설이라는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에서 굳이 실존 인물을 되살리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선택이겠으나 소설을 통해 독자가 나눌 대화의 단초는 이미 역사적 사실속에 내재해 있다. 영웅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선망과 외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채동구같은 인물의 삶이 훨씬 더 흥미롭다.

  이름 없는 역사속의 선비. 초야에 묻혀 일생을 보냈으나 자신의 굳은 신념을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존경 때문이다. 고령 지방의 ‘인간’ 채동구의 삶은 희극적이지도 비극적이도 않다. 작가의 외가, 먼 조상중 하나인 채동구의 고유제를 통해 그의 행적을 돌아보는 형식의 소설은 액자의 형식에 담아내고 있다. 현재와 과거의 진지한 대화가 역사의 소임이라고 믿는듯 한 작가의 태도는 객관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소설을 통해 찾으려는 인간적 진실은 역사적 진실과 분명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이므로. 400여 년 전, 병자호란(1636년)을 정점으로 네 번의 출도를 가출로 묘사한 작가의 시선부터 확인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가장 치욕스런 순간으로 기억하는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김상헌 같은 척화파가 명에 대한 의리와 국가에 대한 고매한 충절로 평가되고 최명길 같은 주화파가 욕먹을 짓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리와 국가의 안위를 담보로 자신들의 좁은 소견과 명분만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분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 당시에 태어나 받았던 교육과 세계관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고결하고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비판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미련스런 고집과 명에 대한 사대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채동구와 같은 인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머릴 내가 이고 내 뜻을 내가 지킨다.(吾守吾志 吾載吾頭)”는 묘비명은 채동구의 삶과 인간적 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것처럼 희극적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것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은 그 너머에 있을 것은 분명하다. 과연 소설속에서 인간적 진실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이지만 채동구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진실은 ‘인간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잘것없지만 한 인간의 삶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신념과 고집 속에 함유된 맑고 깨끗한 정신 말이다. 역사를 뒤바꿀만한 힘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인물들과 다른 평범한 양반의 대의명분 뒤에 숨어 꿈틀거리는 개인적 욕망과 가문의 영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작가는 수많은 기록과 후손들이 기록한 그의 행장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채동구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꿔지는데 그 상상력이 바로 성석제가 말하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적 진실의 핵심이다. 몇 줄로 기록된 한 인간의 행적들로 우리가 알수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진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가공의 인물이든 역사속의 실존인물이든 한 ‘인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보편성의 문제에 관심이 간다. 400여년 전의 인물 채동구를 통해 현대인의 숨은 욕망과 인간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산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라면 주어진 환경과 시간 속에서 자신이 가진 신념과 일관된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혹은 그 과정에서 겪게되는 인간으로서의 갈등과 이기적 욕망들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즐겁고도 고통스런 일이다.

  주인공 채동구와의 비판적 거리두기, 가독성 높은 문체와 해학은 작가 특유의 개성을 다시 한번 발휘한다. 장편으로는 처음 만나는 성석제의 <인간의 힘>은 커다란 문학적 성과와는 거리가 멀게 보이지만 소설의 영원한 주제가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데 동의한다면 작가가 안내하는대로 진지함을 벗어던지고 채동구를 바라보라. 그러면 네 번의 가출을 통해 인간 채동구가 ?변모해가는지 확인할 수 있고 그곳에 ‘인간의 힘’이 숨어 있다는 거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가출하고 싶어진다. 가출이 안된다면 외출이라도……


  가출은 인간에 의한, 인간만의,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따르는 의지의 표상이다. - 서. 전생


060106-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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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박물관 2 - 고조선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2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2권) 지음 / 사계절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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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대 이전,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본격적인 정착 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조상들이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000여 년 전 고조선이라 불리는 나라다. 그래서 단기(檀紀)는 2333년을 더해서 사용한다. 올해는 단기 4339년이다. 단군의 실존 여부를 와 고조선의 역사적 의미는 우리 민족의 국가의 기원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일이다. 평양의 위치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최근 북한 학계에서 단군의 묘를 발굴하고 실존 인물로 인정한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으나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로 여겨진다.

  씨족사회에서 부족간의 전쟁을 거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형성된 시기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동기 시대이후 ‘고인돌’의 무덤은 인류의 신산스런 역사를 암시한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생겨나고 원시 공동체 사회의 평등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다. 힘에 겨운 노동과 협동으로 거대한 무덤을 세운 사람들은 자발적 노력과 헌신이었을까? 죽음 이후까지 권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위정자들은 많게는 10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순장하기도 했다. 주거생활과 농경은 점차 고도로 발달했고 청동기는 농경을 위한 도구 사용을 넘어 전쟁과 살상을 위한 무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책의 의미가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재조명은 물론 일상적인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권력에 관한 이야기와 생성과정은 생략되어 있어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넘어선 힘에 대한, 권력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수천 년 간 지속되어온 전쟁과 국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요구와 민중들의 생존 때문이 아니다. 한나라에게 패망한 고조선은 이후 고구려와 고려로 그 국가의 명칭이 살아 숨쉬게 된다.

  여전히 민무늬 토기를 만들고 청동기와 석기가 공존했던 농경 중심의 문화가 이어지던 시대였던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국가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보호해주는 일차적인 목적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았다.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 삶의 터전이 짓밟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존재는 권력자를 위해 복무했던 폭력적인 제도가 아니었을까하는 공상을 해보기도 한다. 전쟁과 살육이 반복되는 가운데 국가의 흥망성쇠는 이어진다. 그렇다고 사람이 바뀌거나 생활의 형태가 국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이 속한 국가의 명칭만 바뀌어갈 뿐이다.

  직조 기술이 발달하기 베를 짜고 옷을 해 입기 시작했으며 장신구와 치장거리가 만들어지고 과학적인 이성의 혁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고인돌위에 새겨진 별자리는 기나긴 밤시간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의 신비와 별들의 아름다움을 느낀 결과물이 아닐까. 과학적 영농의 시작은 자연현상의 예측과 대처 방법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에 속한 부분에서 인간이라는 독립적 개체로서 본격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보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졌을까?

  어떤 면에서 인류는 끊임없는 진보보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올가미속에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천년 전보다 나아진 것은 물질과 생존의 문제 밖에 없을까? 지금도 물질문명의 혜택과 식량과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엄청난 수의 인류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많은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생활을 만들고 시대를 이끌며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의 오늘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는 것처럼.

  옷을 벗고 뛰어다니던 현생 인류가 이제는 농경과 정착 생활을 거쳐 국가를 형성했다. 다음은 고구려다. 국가와 시대를 뛰어넘는 끈끈한 생활의 역사 속으로 걸어간다.


06011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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