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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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최저 점수의 기록을 갖고 있는 과목은 수학이 아니라 물리와 화학이다. 7차 교육과정으로 바뀌면서 인문계 학생들은 수능에서 과학 과목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지독하게 싫어했던 과학 과목들은 학문의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어 단어처럼 주기율표를 외워야한는 과목이외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화학과목과 각종 공식과 법칙만을 달달 외워 숫자를 대입하며 수학처럼 시험 문제를 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지구과학은 돌맹이 이름만 외웠고 생물은 외울게 더 많았다. 과학은 내게 악몽이었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 낳은 불행은 나 개인에게만 그친 것은 아닐 것이다.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과 겨울바다의 파도소리는 세상의 모든 인공적인 것들의 스승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규칙성들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온다.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천재로 평가되는 리처드 파인만은 1961년부터 63년까지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이 책을 남겨 전 세계 물리학도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같은 무식쟁이도 재밌게 읽었으니까. 어렵고 딱딱할수록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완벽한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원자, 기초 물리학, 물리학과 다른 과학과의 관계, 에너지의 보존, 중력, 양자적 행동 등 6강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우리가 늘상 접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물질에 대한 혹은 물리학이라 이름 붙혀진 학문에 대한 거부감을 깨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깨달음을 준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베스트 셀러다. 과학을 콘서트에 비유해서 케빈 베이컨의 게임, 머피의 법칙, 잭슨 폴록, 프랙탈 음악, 금융공학, 교통의 물리학, 소음의 심리학, 크리스마스 물리학 등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재미있고 편안하게 나를 인도했다. 그러니 콘서트가 끝나고 어떻게 힘찬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젊은 물리학자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실험실 안의 그래프와 숫자놀이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과학이란 마치 길 건너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 반대편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술 취한 사람과 흡사합니다. 가로등 아래에 빛이 있기 때문이죠.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미국의 깨어있는 지성 노암 촘스키의 말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 나는 가로등 바로 밑에 떨어진 열쇠에 관심이라도 가져볼 생각이다. 시험 점수의 노예로부터 벗어난 지금 그것이 왜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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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02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월 중순인가에 읽어던 책인데 무척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과학 어렵게 느껴졌던 관점을 바꾸어 준 책이었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sceptic 2006-11-0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고 재밌게 접근할수 있는 과학 책들이 더 필요합니다. 계속 관심갖고 읽어봐야죠...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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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실체(노드)들과 그 성질을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개별적 실체들은 상호 연결(링크) 되어 있고, 이 연결들은 다시 하나의 연쇄 구조(네트워크)를 이루어 자체적으로 진화해 가며, 개별 실체들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대략 60억의 인구가 존재한다. 즉 60억개의 노드들이 존재한다. 지구상의 누군가와 나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6단계만 거치면 된다. 그 단계는 고사하고 그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서 케빈 베이컨 게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내가 니콜 키드만이나 아프리카의 부시맨 추장을 알기 위해서는 6단계 정도만 거치면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믿기 어렵지만 그것은 여러가지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반지름 6,400km의 거대한 지구위에 사는 우리는 그렇게 좁은 세상(small world)에 살고 있다.

네트위크란 용어에 이제는 우리 모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다만 21세기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네트워크를 물리학자인 바라바시처럼 학문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현재나 미래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통찰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 책은 모두 열 다섯개의 링크로 구성되어 있다. 무작위의 세계, 여섯 단계의 분리, 좁은 세상, 허브와 커넥터, 80/20 법칙, 부익부 빈익빈, 아인슈타인의 유산, 아킬레스건, 바이러스와 유행, 인터넷의 등장, 웹의 분화 현상, 생명의 지도, 네트워크 경제, 거미 없는 거미줄. 흔히 알고 있거나 익숙하게 들어왔던 문제들을 구체적이고 명쾌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 바라바시의 지적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또 그것들 전부를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해석하고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미시적 관점의 갇힌 시야가 아니라 넓고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준다. 세상에 대한 밑그림의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세상은 넓고도 좁다. 그것은 주관적인 느낌이나 개인적인 활동영역에 따라 물론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점점 더 촘촘한 그물망처럼 우리를 조여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기여할 수만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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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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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충청도 시골 외가댁에 며칠씩 놀러가는 일이 큰 행사였다. 그저 평범한 시골이었지만 논과 밭이 있었고, 여름이면 물장난질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개울이 있었다. 뒷동산은 당연히 거기 있었다. 평범한 시골에서 큰 재미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도시의 아이들이 느끼기에 충분히 새롭고 신선한 환경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밤의 화장실이다. 집 뒤켠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언덕이랄것도 없지만 조금 낮은 지대로 내려가 있었던 화장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헛간 한쪽에 엉성한 나무조각을 막아 놓은 재래식 화장실의 냄새와 공포 분위기는 상상 이상이다. 혼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작은 볼일은 물론 마루의 요강을 이용했었다. 7, 80년대 시골 풍경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시골의 밤하늘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시골 마당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경외롭다. 쏟아질듯 반짝이는 그 별빛들은 15년쯤 후에 강원도 비무장지대 매복지에서 바라볼 때까지는 마지막이었으니까. 주변에 불빛이 없고 먼지가 없는 맑은 하늘은 별을 관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마루의 평상에 누워 했던 그때 생각들이다. 저 별빛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을까? 하늘밖에는 우주가 있다는데 우주의 끝은 있을까? 우주의 그 끝 밖에는 뭐가 있을까? 총명한 영재였다면 훌륭한 천체 물리학자가 되었겠지만 학교에서 암기식으로 주입되던 지구과학, 생물, 화학, 물리는 나를 완전히 환장하게 만들었었다.

아이들의, 아니 일반인들의 그런 사소한 호기심들을 재밌게(?) 풀어줄 수 있는 책이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과학에 문외한이라고 밝힌 저자는 지구의 역사 크기, 우주에 관한 이론들, 인류의 기원과 생명의 신비로 부터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모습에 대한 반성까지 아우르고 있다.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에 치중하기보다는 과학자들의 에피소드와 과학적 이론의 탄생과정과 정확성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주고 있다. 학교에서도 이런식으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고 풀어줄 수 있는 방식으로 과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랬다면 나도 과학을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라고 핑게를 대본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점으로도 표시될 수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겠지만 과학적 관점에서 현재 나의 모습을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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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명 이야기 - 반양장
황우석.최재천.김병종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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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나는 책의 절반만이 사람들에게 읽힌다고 한다. 나머지는 팔리지 않아 폐휴지가 되거나 버려지거나 재활용 될 것이다. 팔린 책의 절반만이 읽힌다고 한다. 사람들이 책을 사서 선물하고 책꽂이에 꽂아두고 도서관에 비치하지만 정작 읽히는 책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읽힌 책의 절반만이 이해된다고 한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억지로 읽는 학생들부터 의무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는 사람들까지 활자를 읽어내기 했지만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된 내용의 절반만이 내면화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내면화 된 내용의 절반만이 활용된다고 한다. 활용이란 말은 자신의 생활에 적용되거나 남에게 제대로 전달하거나 인생을 바꿀만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하는 등의 실천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산술적으로 제작된 책의 6% 내외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읽은 책의 12% 내외가 활용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선택해서 읽느냐의 문제는 이 비율을 높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만큼 독서는 쉽지 않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노력의 과정이라고 본다. 악서는 없고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봐도 될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론 개인의 성향이나 지적 성숙도 관심 분야에 따라 편중된 독서 형태를 보이기도 하고 잘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그래서 책의 선택은 더욱 중요하다.

  게다가 출판 상업주의를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쉽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이틀동안 내 시간을 뺏긴 책 <나의 생명 이야기>같은 책이다. 황우석, 최재천 두 사람의 글을 정리하고 김병종의 그림을 넣어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황우석, 최재천 글, 김병종 그림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이름난 두 과학자의 생명에 대한 나름의 견해와 철학이 담긴 책이라고 판단한 내가 잘못일까? 심하게 말하면 신변잡기적 성공기 수필이다. 세 사람 모두 53년 동기생이며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동료 교수들이다. 같은 주제로 뭐든 묶어 펴내면 책이 되는가 묻고 싶다.

  스스로 시골 촌놈으로 자처하는 황우석 교수의 소이야기와 눈물어린 성공담은 순수하고 우직한 학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들 마음의 고향인 농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또 게으르고 나태한 자세로 주변 환경을 탓하는 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듯하다. 최재천 교수는 동물행태학, 사회동물학자로 많은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가 많은 과학자다. 하지만 후반부에 담긴 그의 사회적 발언들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대안이 없는 자기 학문분야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예산과 정책의 뒷받침을 요구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대안이 없다. 떼써서 될 일인가? 또한 교육과 사회 현상에 대한 시각과 관점이 실망스럽다. 편향되어 있다는 것과 다르다. 다른 시각에서 자신의 주장을 올곧게 펼칠 수 있다면 동의하기 어려워도 이해할 수는 있겠다. 다름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김병종 교수의 좋은 그림들이 책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으나 부분과 전체의 조화에 실패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학의 대중화를 넘어 대중의 과학화에 찬성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지양(止揚)되어야 마땅하다. 개인적인 성향과 책이 지녀야 할 미덕에 대한 기대가 달라서일까?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책이었다. 표지 뒷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세 분의 좋은 뜻은 이해하겠으나 다시 책으로 만날 일은 없겠다. 요즘 들어 책을 살 때 출판사를 꼼꼼히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 한 나의 탓이기도 하다.

 

200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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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 다르지만 같은 길 1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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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몇 십년전에 일어난 야만적인 미국의 일상사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은 두 인물을 통해 과연 미국의 전통과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며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종과 종교, 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교묘한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는 이 시대는 과연 그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맬컴 X와 마틴 루터 킹의 삶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남부 중류층에서 태어나 박사 학위를 받고 흑인 교회 목사로 흑인 민권 운동에 투신한 마틴은 비폭력 통합 주의를 표방한다. 반면 빈민가의 상징으로 백인에게 강간당한 외조모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붉은 피부색을 지닌 맬컴은 철저한 폭력적 분리주의를 내세운다. 미국의 자유와 민주적 가치를 믿었던 마틴과 백인들의 차별에 폭력으로 저항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맬컴의 가치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틴의 통합주의적 입장과는 반대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흑인 대중”들의 관점에서 미국을 바라본 맬컴 엑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절대 다수를 위해서 악몽이라는 이미지에 호소하며 미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묘사했다. (본문 75페이지)

  같은 시기에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위해 민권 운동을 펼쳤으나 전혀 다른 방법과 이념을 가졌던 두 사람은 미국이라는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만을 위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백인 우월주의로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극복은 두 사람에게 운명처럼 다가왔고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바탕으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룬다. 단 한번 만났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틴의 ‘통합주의’ 철학의 핵심은 “사람들은 종종 서로 미워한다.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두려워한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잘 모른다.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다. 서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 72페이지)”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백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마틴은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에 비해 맬컴은 북부 빈민가 흑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남북전쟁 후 1870년, 링컨의 수정 헌법 15조에 의해 흑인에게 투표법이 주어졌으나 ‘짐 크로(Jim crow)’법에 의해 ‘분리는 하되 평등은 하다’는 흑인 분리(차별) 주의가 흑인의 90%가 살고 있던 남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정착된다. 20세기 초부터 벌어진 흑인 민권 운동은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법적 투쟁부터 시작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등으로 촉발된 실생활의 차별적 행위들에 대한 폭넓은 범위의 투쟁이었다. 두 사람은 이 시기의 미국의 참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마틴의 신학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흑인과 백인이 사랑 넘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했다면, 맬컴의 신학은 엄격한 정의와 단호한 처벌 그리고 신이 백인종 전체를 절멸시킬 것이며 그리하여 평화와 선의의 세상을 모든 백인 가운데에 세워주리라는 희망을 강조했다. (본문 266페이지)”

  일라이저 무하마드의 이슬람 종교에 의지해 대중앞에 나선 맬컴은 결국 그와의 결별 이후 마틴의 주장과 흑인들간의 통합과 연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 암살 당한다. 맬컴 암살 이후 마틴은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미국의 절대 가치로 믿었던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한 인류애의 가치에 회의를 갖는다. 미국은 “평화를 얘기하면서 전쟁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색인종과 여성, 어린이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하는 모습은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격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됐던 인종주의 정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 사회를 초토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388페이지)” 베트남전을 통해 마틴은 “베트남에서 적군 병사 한 명을 죽이는 데 50만 달러를 쓰면서 자국 내의 가난한 시민에게는 단돈 50달러만 쓰는 나라”를 인식하고 미국은 자신의 도덕적 모순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미국의 이러한 이율 배반적인 모습은 걸프전과 최근의 이라크 침공등을 통해 아직도 변하지 않는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교언영색하는 미국의 참모습이다.

  “어떤 입장에서 흑인 문제를 바라보든, 그러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죽음의 위협과 마주합니다. 이는 ‘비폭력적인’ 킹 박사나 소위 ‘폭력적인’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맬컴의 죽음 이후 비로소 마틴은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에서 급진적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맬컴이 꾼 악몽의 공포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본문 351페이지)

  이러한 마틴의 변화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맬컴과 마틴처럼 혁명적인 예언가들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개 그들이 끊임없이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그 힘에 의해 살해당한다. 맬컴 액스는 그가 사랑했고 자기혐오에서 해방시키고자 노력했던 흑인 집단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마틴 킹은 그가 사랑했고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백인 집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미국은 그때와 많이 다른가? 한반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되어버린 미국의 가치와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두 민권 운동가의 삶은 시대를 넘어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불평등한 가치를 극복하기 위한 거울이 될 수 있겠다. 늘 그러하듯이 이념이 아닌 순수한 동기와 가치에서 비롯된 헌신적 노력과 행동들이 작은 변화를 만들며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다는 믿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란다.



200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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