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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나는 우유 배달부!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상상초월 동물생활백서
비투스 B. 드뢰셔 지음, 이영희 옮김 / 이마고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다윈의 진화론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존의 가치체계와 과학적 질서의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과학의 발전과 진보는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으로 한 계단씩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지식 체계와 세계관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줄곧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기본적으로 개체 차원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어왔다. 반론이나 다른 차원의 이론이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동물행동 연구가들의 지속적인 연구 결과 자연선택은 개체 차원이 아니라 ‘집단선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비투스 B 되뢰셔의 <하이에나는 우유 배달부>라는 우스꽝스런 제목의 책은 최근의 이론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고 있다.
솔로몬 왕이 끼고 있던 반지를 돌리면 동물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제목을 가져와 <솔로몬 왕의 반지König Salomons Ring>라는 원제가 삽화가 곁들여져 <하이에나는 우유배달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책 표지나 편집 의도는 친근하고 재미있는 과학 상식 백과의 분위기를 내고 있지만 어쩐지 가벼워 보인다.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조금 동떨어져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케팅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저자의 수고로움은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수십 년 간 온몸으로 쓴 흔적과 노력들이 곳곳에 땀방울로 맺혀있다. 동물행동을 연구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지루하고 긴 인내력의 싸움이며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대화이다. 끊임없는 관찰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면밀하게 분석하고 검토한 결과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고 원인과 결과를 이끌어 내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고개를 숙이는 과정이 연구 성과로 나타난다. 다른 과학 이론과 달리 동물행동 연구이론들은 그래서 모두 귀납적이며 가변적이다. 또 다른 행동을 보이는 개체가 나타날 수 있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 패턴을 완벽하게 관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실험실에서 발견한 어떤 결과보다도 긴 시간을 견디며 위험을 무릅쓴 과정들이 인상적이다.
동물들의 언어능력, 결혼제도, 암컷의 지위, 자녀 양육법, 유희 본능, 영장류들의 인간적인 모습, 죽음에 대한 의식, 생존 전략, 사막 생존법, 겨울나기, 폭력성, 균형 메커니즘, 비밀 병기를 거쳐 조화로운 삶의 기술로 책을 맺고 있다.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며 긴 여행을 다녀 온 것처럼 나른하고 피로한 느낌이었다. 마치 책으로 보는 ‘동물의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들을 다룰 수는 없지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이 자연 생태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들의 행동과 삶의 과정 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책은 마치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거대한 망원렌즈처럼 보인다. 지구 곳곳에 위치한 동물들의 세계는 잘 짜여진 교향곡처럼 완벽하고 조화롭게 연주되고 있다.
인간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면 동물들의 삶을 알아야겠다. 위험한 존재로서 자연을 파괴하며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에게 자연을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귀 기울여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에서부터 그들의 공동체 생활의 지혜를 살펴보는 일은 마치 인류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커다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인간은 얼마나 위대하며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극단적인 의심이 생기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수십 년 간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이 알지 못하는 동물의 세계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역할에 충실하다. 그 과정을 통해 얻어낸 값진 결과물이 이 책의 내용이지만 단순한 보고서의 형식을 넘어선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이 독자들의 몫이다. 그것은 바로 솔로몬 왕의 지혜이다. 그 지혜의 원천이 바로 동물들의 세계라는 말이다. 개체 중심의 자연 선택이 아니라 집단선택의 차원에서 접근해야하는 문제이다. 조화로운 삶을 이끌어내는 공동체적 삶의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동물들에게, 자연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놓여 있었다고 읽는다면 지나친 오독일까?
이 책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의미로 읽든 결국 그것도 독자의 몫이겠다. 흥미 있는 자연과학 서적임에 틀림없는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동물들의 행동이 보여주는 의미는 사회학적,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로 끊임없이 그 외연이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유통을 매고 배달에 나선 하이에나의 애교스런 표지보다 훨씬 진지하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인간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던 책이다.
070513-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