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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문답 -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홍대용 원저, 김영호.이숙경 지음 / 꿈이있는세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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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세기 조선의 임금은 영조와 정조였다. 왕조 중심의 역사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인물에 대해 살펴 볼 때도 임금부터 확인한다. 나만 그런가?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사건을 찾아내는 일보다 그러한 토대를 제공한 상황이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18세기 조선은 이앙법으로 토지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증가했으나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고, 중국을 통해 자연 과학적 지식이 조금씩 전파 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랑민이 발생했으며 상업 자본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자본과 권력이 결탁되고 신분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예송 논쟁 등 그야말로 쓸데없는 소모적 권련 다툼이 이어지고 정조의 탕평책이라고 하는 개혁은 정약용 일가 등 천주교도에 대한 비교적 관대한 태도로 이어지지만 오히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등 피바람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변화와 개혁의 시도는 그 어떤 혁명보다도 어려운 법이다.

담헌 홍대용은 이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1731년에 태어난 홍대용은 18세기 실학자로 기억된다. 이덕무나 유득공, 박제가처럼 서자 출신도 아니고 노론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가 보장된 그의 관심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노나라 공자의 유학이 주희의 성리학으로 굳어지면서 조선 사회는 철저하게 성리학적 이념이 통치의 근간이 된다. 이것은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념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 태도와 사상적 근간이 되어 올가미처럼 벗어나기 힘든 것으로 만든다. 성리학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는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진 자들과 권력층의 기득권 옹호를 위한 전가의 보도가 된다.

홍대용의 기본 사상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사상의 단면을 확인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의산문답醫山問答>이다. 음직으로 40세가 넘어 관직에 나갈 때까지 홍대용은 치열한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세상의 이치와 만물의 원리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보인 관심은 당연히 고정된 틀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의 모순이다.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고 대안을 제시한 해결사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혁명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만한 인물을 18세기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우리는 누리지 못한다. 동시대 인물인 박지원이 시대를 주유한 ‘유목민’으로 명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대를 온몸으로 거스른 실천적 지식인을 찾을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살펴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홍대용은 18세기 북학파 혹은 실학파의 대표 주자로 손색이 없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은 종교에서 이성으로의 변환이다.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기준과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어진다.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이해되지 않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두 세계의 합종연횡은 이후 끊임없는 논쟁과 연구가 지속되지만 그러한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18세기는 의미 있는 시대였다. 홍대용의 사상적 전환은 중국 방문에서 연유한다. 35세에 6개월간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은 자연과학에 더욱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갖는다. 그러한 사유의 증거가 바로 이 책 <의산문답>이다.

허자虛字와 실옹實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홍대용은 기존의 통념을 명쾌하게 박살낸다. 이미 이름에서 감지하듯이 ‘허자’는 지금까지 가졌던 그릇된 지식과 사물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실옹’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헛된 것들로 가득 찬 ‘허자’와 실재적인 것들로 무장한 ‘실옹’의 대화는 ‘허자’의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풍자된다. 우회적이고 애매한 태도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통렬한 방법으로 허자를 꾸짖는 실옹의 목소리는 바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대한 홍대용의 비판의 목소리로 들린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동양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책이 아니라 홍대용이 지니고 있는 사물에 대한 혹은 세계관 자체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과 ‘패더다임의 변환’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하는 책이다. 18세기에 이런 주장과 생각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당시의 현실과 그와 사상적 교류와 친분을 나눈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비교는 한층 더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북학파의 저작과 사상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겨우 250여 년 전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홍대용의 사상은 <의源??이라는 저작을 통해 그 단초를 제공한다.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와 그 이후 ‘탈근대’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그 변화의 조짐들을 읽어내는 일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짧은 내용에 중간 중간 해설을 덧붙이고 쉬운 말로 번역해 놓은 책이라서 원문과 멀어진 단점이 있고 해설 자체가 일반적이고 평범한 내용의 반복이라서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든다. 중간에 삽입된 해설 때문에 전체 내용의 흐름에 맥이 끊기기도 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획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좋은 기획과 출판 의도가 좀 더 완성도 높은 책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060509-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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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의 세계 살림지식총서 35
이윤성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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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일은 무의미하다.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간이 지녀야 하는 기본적 한계 상황인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싶은 것은 단순한 인간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죽음에 대해 제각기 다른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죽음이 원인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이 비록 죽은 자에게는 부질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일반적인 자연사의 경우 원인은 호기심 차원이거나 질병과 죽음의 관계에서 다루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고사일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가령 물에 빠져 죽었을 경우 자살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빠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단순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 내는 차원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밝혀내는 일이 ‘법의학’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감상적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상황과 원인의 복합적 결합이 이루어져야 정확한 죽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같다.

법의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법률의 시행과 적용에 관련된 의학적 또는 과학적 사항을 연구하고 이를 적용하거나 감정하는 의학의 한 분야’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권을 옹호하고 공중의 건강과 안전을 증진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의학’이다. 법의학의 궁극적 의미가 와 닿는다.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구현이 목적이 되는 법의학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특히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범인을 찾아내어 반드시 처벌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단순하게 과학적 수사기법과 결합된 의학의 역할이 아니라 인권 존중을 위한 중요한 학문 영역으로 자리잡아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반인의 경우 ‘법의학’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아야 가장 바람직하다. 행복하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꿈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많은 사고와 불행에 마주친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초래한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법의학은 범인을 찾기위한 법의학의 역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법의학은 범죄와 관련된 죽음과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사람이 자연스럽게 죽지 못한 이 불행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타살과 뺑소니의 경우 가장 심각하다. 용의자를 찾을 수 없을 때 단서를 제공하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죽음이 이야기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는 것이 법의학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흔적들이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법의학은 그 죽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부검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정적인 정서는 쉽게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법의학의 가장 기초 단계인 부검에 동의하지 않는 보호자들 때문에 많은 오해와 중요한 단서들을 놓칠 때가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명백한 증거와 원인이 있을 경우는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어떤 범죄 사건의 경우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수 있다. 특히 훼손된 시신의 경우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법의학의 영역이다.

단순하게 말해질 수 있는 죽음은 없다. 다만 그 수많은 죽음들 속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히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다. 법의학의 목적이 여기에 있겠지만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여의봉이 아니라 법의학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을 해본다. 과학 수사와 법의학이 발달해서 미제 사건이 없는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냉정한 현실 인식을 위해 보다 발달된 기술과 정확한 의학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어주는 법의학은 우리들 모두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미래 사회가 어떠하든 최소한의 법과 정의만이 적용될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해 보는 것은 나만의 낭만적 사회를 꿈꾸는 헛된 희망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060904-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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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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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패러다임 [paradigm]
[명사]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의 뜻이 궁금해서 책을 들었다.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개념의 원전을 찾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얼마간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의외로 감탄할만한 책을 만나기도 하지만 지루한 고역이 될 때도 있다. 간단한 백과사전식 설명으로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책을 통해 명확하게 전달될 때 느끼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다. 책읽는 재미와 즐거움은 다양한 형태로 나에게 전해진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긴 설명이 필요없는 현대적 의미의 고전이다. 침작하게 정신을 집중하고 읽을 만큼 어려운 내용의 책은 아니다. 다만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 책이라서 1969년에 ‘추가’한 부분의 내용 중 일부 해독불가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에세이’다. 그래서 일단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개론서를 대하는 태도를 갖출 필요는 없다. 과학과 철학의 만남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의 의미는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야 할 것 같다.

‘패러다임’의 개념은 그 자체로도 논쟁거리였지만, 이 책에게 쏟아진 숱한 찬사와 비판은 그만큼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초판이 1962년에 이후 과학사학자들이나 과학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이 책은 글자 그대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코페르니쿠스나 라브와지에를 비롯해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혁명 전사들의 이름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그들은 기존 과학의 연구방법과 태도, 이론들을 점진적으로 개선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전체 틀을 바꿔 놓았다. 저자는 기존의 과학 방법론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라 명명하고 이것이 점차 도전받고 오류를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폐기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과학의 혁명으로 보았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들이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용어를 통해 개념화되면서 뚜렷하게 설명되고 독자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패러다임의 명확한 범위와 한계가 보이질 않는다. 저자 스스로도 이것이 ‘패러다임’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간단한 이론처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과 철학이 만난 자리에는 사유의 연장만이 남는다. 명쾌한 결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과학’이라는 학문 분야에만 적용될 수 있는 특수한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쉽게 밝혀진다.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성찰로부터 비롯된 토마스 쿤의 사유는 결국 과학을 넘어선 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책이 출판된지 40여년이 흐른 지금은 오늘 아침 뉴스에서도 ‘패러다임’을 들먹이는 기자의 목소리를 들을만큼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의 부부과학자가 ‘면역체계 원리’를 규명했다고 한다. 이것은 과학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이라는 평가를 하는 기자의 말이 새삼스럽다.

문제는 이런 원리와 관점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유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학문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들여다 보는 것은 당연히 역사적인 통시적 관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지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새로운 용어를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 낸 것이 저자의 가장 큰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매몰된 근시안적인 시선으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폭넓은 시야와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야말로 저자와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전체 13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당연히 큰 반향을 불러왔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질서들 속에서 무언가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쿤이 과학혁명을 주도했다는 말이 아니라 거대 담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깊이와 넓이는 다양한 학문 영역에 대한 독서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좁은 시선을 1mm쯤 확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끊임없는 성찰과 모색만이 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긴 안목을 머리로가 아니라 발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지금 내 삶의 패러다임을 뒤흔들만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지?


0610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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