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거미의 사랑 창비시선 259
강은교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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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셋이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 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르르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가 되었다.

  오랜만에 나온 강은교의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의 서시다. 하나되는 사랑, 분개하던 나와 네가 만나 하나되는 아름다움이 이 시집의 전하는 메시지다.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정답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각자 주장하는, 혹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순간순간 느껴지던 그 아름다움은 나의 존재 방식이기 이전에 타인과의 관계맺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다.

  <허무집>과 <풀잎>, <빈자일기>로 이어지는 강은교의 시의 절정은 더 이상 예민한 촉수와 감각적이고 치열한 정신을 동반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혼란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했던 강은교의 시도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까. 시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언어에 대한 참신한 감각과 전통에 대한 관심은 편안하지만 즐겁지 않다. 특히, 3, 4부로 모아놓은 가야 소리집과 행사시들은 깊이있는 울림보다 전통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어울림 정도로 그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지는 않는다. 풀잎에서 보여주던 명징한 언어도 깊은 성찰도 희미해져 간다는 것은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희미해져가는 빈 자리를 채워가는 다른 방식이다.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는 물론 시인의 몫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어떤 변화인가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확인하고 관찰하는 것은 독자의 즐거움이다. 그 변화와 태도가 긍정인가 부정인가는 시인이 선택할 몫이고 독자가 평가할 몫이다. 다른 시인 일반에 적용되는 문제가 강은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은 ‘소리’이다. 귀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소음이다. 고요 속에 빛나지 못하는 침묵은 또 다른 소음이다. 시인은 ‘소음’과 ‘침묵’ 사이에 서성거린다. 귓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은 특정한 소리에 대한 호감과는 거리가 멀다. 소리가 없는, 침묵은 또 다른 소리이다.

목도리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며칠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지금 누구인가의 목을 한창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러했듯 영원한 사랑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관조적 자세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상황과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관성의 법칙과도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건조하게 내뱉는 시인의 목소리가 메마르다.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상실감보다 상상에 근거한 목도리의 행위가 주는 비애는 배신감이라기보다 연민에 가깝다.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비온 뒤에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진흙처럼 좀체 떨어져 나가지 않는 지긋지긋한 그리움과 지금, 이 순간에 가지고 있는 이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날은 가까운 미래이거나 과거의 어느 날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사랑에 공감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때 몰랐’던 것들을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미완성의 문장이 긴 여운보다 무미건조한 모래 바람을 일으킨다.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의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06031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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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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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단어 ‘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이다. 같은 강물을 사용하는 건너편 사람들을 이르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경과 목축을 하던 시대에 강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아군 아니면 적군이었다. 강을 두고 대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법칙을 받아 들이며 살았을 것이다.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쟁은 강의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찍이 고대 인류 문명은 모두 강에서 발원한다. 강을 차지한 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이 라이벌이라는 단어는 ‘경쟁관계’를 전제로 한다. 서로 긴장하며 발전하는 긍정적 측면과 오로지 승부에 집착하여 상대를 공격하거나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며 자멸하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전문학사에서 걸출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라이벌 관계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특히 비슷한, 혹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연속선상의 흐름에서 이해하는 방식보다 이렇게 스타카토로 끊어 읽는 방법은 단편적 사실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할 수 있어 흥미로운 시도로 보인다.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을 서로 견주어보는 일은 색다른 방법이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입체적인 방법으로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물의 생애와 사상이 투영된 비교문학적 관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삼국시대의 ‘세상과 불화한 두 천재의 갈림길’이라는 부제로 월명사와 최치원을 시작으로 ‘연행예술의 극점을 추구한 두 예술가’ 신재효와 안민영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씩 묶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부식과 일연, 이인로와 이규보를 비교하는 일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거나 ‘시대의 충돌과 균열’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낸 것은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특히 정도전과 권근의 비교가 극적이다.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선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은 흥미롭다. 서거정과 김시습을 비교하거나 김만중과 조성기를 비교하는 내용은 단편적인 내용의 서술과 일관된 관점이 없어 아쉽다. 그 중에서도 ‘유쾌한 노마디즘’으로 박지원을, ‘치열한 앙가주망’으로 정약용을 비교한 고미숙의 글은 가장 돋보인다. 두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학적 성향의 차이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비교함으로써 동 시대를 살았으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 안타깝게 만든다. 문장의 탄력과 일관된 설명 방식이 흡인력있게 전개된다.

  정출헌,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 공저로 되어 있으나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는 한 장씩만을 썼고 나머지 여섯 장은 정출헌의 글이다. 책으로 묶이고 보니 전체를 통괄하는 하나의 키워드나 주제가 없고 여러 사람의 공저이다 보니 문체와 문장이 고르지 못한 단점이 있다.

  하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고전문학을 이해하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평면적이고 객관적 사실들만 나열한 역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문학으로서의 역사속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우리 고전을 두루 섭렵한 사람이라면 글 읽는 재미가 배가 될 것이고,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고전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는 책이다.

  텍스트 상호성 측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두 작품을 묶어내거나 책 두 권을 묶어보는 일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자칫 단순한 분류 방법으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 유사한 속성을 묶어내는 지루한 방식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낯설게 묶거나 짐작할 수 없는 다른 방식의 비교 방법이 필요하다. 작품의 비교 뿐만 아니라 작가가 살아온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문학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작품에 투영되었는지 비교하고 분석하는 즐거움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0603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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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고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312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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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을 만큼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우울한 날이 있듯이 어떤 자세로든 이제 인생의 황혼녘을 준비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황혼으로 비유된 늙음의 시간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이 주장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거짓에도 불구하고 나이들어 죽어가는 모든 인간에게 느끼는 연민은 다를 수가 없다. 하얀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를 보고 느낀 욕정의 끄트머리. 그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정년을 마친 노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의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공명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다. 한발 더 다가갈수록 소리와 의미 사이의 긴장은 풀어지고 무화된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에 침묵보다 더 큰 소리로 내면의 풍경소리 울린다. 그 울림이 실어증의 원인이 되고 침묵의 극치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누구’가
의자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지고
오랜만에 만나 사람이
그 ‘누구’와 무척 가깝지 않았어요? 물을 때
느낌만 남는 자리.
목구멍에 잠시나마 머물게 할 무엇이 나타나지 않는....
나름대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공터만 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명이 불가능한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소리로 표현되지 않는 침묵으로 전달되는 소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시인의 몫이다. 황동규 시의 편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또 다른 시작인지. 외로움보다 즉물적인 ‘홀로움’을 내세운 이 작품이 그를 대변한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시인의 모습에서 나이를 읽어내기 보다 세상속에 풍경처럼 펼쳐진 사물들의 모습과 맑고 조용한 시선들이 만나는 명징한 소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꽃의 고요>는 비로소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디게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지독한 반어가 독자들을 화자와 동일시한다. 봄이 짧다는 진술을 이해하는 독자나 느껴본 적도 경험할 겨를도 없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짧은 생에 대한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슬프게 들린다. 그래서 ‘더딘 슬픔’이 무섭도록 빠른, 혹은 찰나와 같은 순간적인 슬픔으로 전달된다. 꽃이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꽃이 ‘고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슬프다. 침묵하는 꽃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현실이 너무 차가운지도 모른다.

더딘 슬픔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처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06032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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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당신?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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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은 그렇게 속삭이고는 그녀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어디선가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구두 뒤축이 닳을 거야. 그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에 섰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당신인가요?

  나는 소설의 경우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에는 편견이 숨어 있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편견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성과 여성의 소설은 작가를 몰라도 구별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그 형식과 내용이 달라서가 아니라 문체와 감성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여류 작가’라는 희소성이나 차별적 시선 혹은 한정된 영역의 특별한 대우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분명했다.

  80년대 이후 서영은, 최윤, 김채원, 은희경, 신경숙, 권지예, 김인숙, 전경린 등 문학적 성과면에서 ‘여류’라는 이름을 털어버린 것은 오래된 일이다. 다만 한계라고 명명하기엔 어색한 감이 있지만 특징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수많은 평론가와 문학 연구자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이제 그것을 벗어날 필요와 가능성을 가진 작가를 발견한 듯한 개인적 느낌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윤성희의 <거기, 당신?>은 성격이 분명하다. 소설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게다가 작가가 시도한(?) 문체와 스타일은 나를 사로잡았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내가 소설을 썼다면 이런 식의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소설의 인물을 살펴보자. 현실에 있을법한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기본적인 소설의 정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순 없지만 윤성희가 만들어낸 소설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인물로 볼 수는 없다. 이럴 경우 독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 나와 다른 상황과 감정과 생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없다. 둘째, 색다르고 특이한 경험으로 대리 경험의 극대화를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 화려하고 잘나가는 주인공이 아니므로 선망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현실 원칙을 벗어나 쾌락원칙에 충실한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현실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로 투영된 대상으로서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독자들은 불편해하거나 호기심으로 그칠 뿐 절대적인 공감과 깊은 감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단점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고 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상에서 중심에 서 있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를 넘어 치열하고 섬세함이 독자를 몰입하게 한다. 보물지도를 찾으러 떠나거나 어린시절 암산왕이었거나 간에 현실에서 그들은 지루하고 흑백영화처럼 특징없는, 오히려 비참하고 어려운 생활속에 함몰되어 있다. 탈출구도 비상구도 없어 보인다. 그들을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뭔가? 작가의 의도보다 독자의 반응은 어떠한가?

  다음은 윤성희 문장의 특징이다. 그것을 문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윤성희 소설의 특징이라고 크게 말할 수도 있다. 헤밍웨이의 문체가 대표적인 간결한 단문이다. 그녀의 소설이 그렇다. 비슷한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헤밍웨이를 떠올렸다. 일단 길이가 짧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담백해서 가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두 번 이상 반복되는 복문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고의 흐름과 맥락이 끊길 염려가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숨가쁘게 다음 문장의 주어에 매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독자는 바쁘다. 평소의 패턴대로 문장을 읽어나가려는 습관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설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문체에만 있지만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비약과 생략은 윤성희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읽힌다. 나에겐 그렇다. 생략된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와 접점은 물론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음 장면과 상황을 보여준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때때로 힘겹다.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작가가 원하는, 혹은 독자가 상상한 것을 전부 채우지 못한다.

  건조한 웃음과 아이러니가 결코 의도되거나 계획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감정과 비애가 철저하게 배제된 채 마른 모래 바람처럼 서걱이는 웃음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이 남는다. 의도된 냉소와 철저한 감정의 절제는 윤성희 소설의 핵이다. 독자의 입맛이 아니라 작가의 성향과 의도에 충실한 소설이라는 느낌이다. 그것이 거부감없이 흡입될 수 있는 것은 낯 상황과 인물 그리고 문장 사이를 흐르는 긴장감이다. 쉽게 그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긴장감이 유혹이라니?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가.

  다양한 소설 전달 방식은 전달 내용과 형식과는 또 다른 방식의 재미와 즐거움, 사유 방식을 통해 지적 유희를 가능케 한다. 소설의 스토리만 보는 독자는 없겠지만, 또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색다른 맛과 분위기를 찾는 미식가처럼 윤성희 소설을 더 읽어야겠다는 강한 이끌림이 <거기, 당신?>이 내게 준 느낌이다. 훌륭한 소설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겠지만 주관적, 개인적 취향에 꼭 맞는 소설이었다. 내용과 형식보다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모래바람이 먼저 불어오는 독특한 윤성희의 소설에 호감을 갖게 됐다. 대중성과 문학성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제쳐두고 일단 읽어보면 색다른 소설적 상상력과 만나게 된다.

  말을 아끼는 태도와 응축된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거기’에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06032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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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시선 258
이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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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와 시의 상관성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았다면, 등단 시기와 첫 시집의 의미를 고민해 보았다면 우리는 시집을 읽어 나가면서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고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시인들과 시들과 비교하면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 시에 대한 일종의 편견인지 모른다. 다만 새롭고 신선한, 혹은 낯설고 독특한 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시집을 펴낼 수 시인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한 권의 시집을 대할 때 절대적인 기준과 눈높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희의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는 시집은 첫 시집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완숙하고 노련하며 안전하다. 97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99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65년생 시인의 첫 시집으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인다. 시를 대하는 태도나 언어의 사용에 대해서 신인으로 볼 수 없고 나이와 연륜에서 묻어나는 사물에 대한 시선과 깊이가 다작과는 거리가 먼 시인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잔잔하게 응시하는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가 마음에 닿는다. 기약할 수 없는 두 번째 시집도 읽어보고 싶다.

돌멩이를 쥐고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 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던 것을, 무덤 같기만 하던 그 속에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은 시뻘건 불을 피워 올리고도 남을 분노라는 것을.
  둥근 것들은 다 그렇게 제 속으로만 날카로운 각을 세우나봅니다.


  이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1부에서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혹은 삶의 지난했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난과 유년 시절의 결핍이 주축을 이룬다. 누님을 기억하는 시편들에 나타난 그의 삶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쓸쓸하고 외로웠을 화자의 모습은 자연의 대상을 통해 투영된다. 그것은 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시집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인은 그 외로움 안에서 혼자 놀았고, 그것이 쓸쓸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오랜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멩이 연작들은 가슴 속에 아프게 닿는다. 둥근 돌 속에 내재한 ‘날카로운 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옴폭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거대는 달

  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는 시절에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시인의 문제는 실존적이다. 저녁을 굶은 화자의 이력서는 달에게 보내는 연서와는 무관하게 냉혹한 현실과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는 변하지 않는 증거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핍과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과 삶’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승희가 생각하는 사랑은,

사랑은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사랑은 무엇이다. 무엇이다에 해당하는 서술어는 각자 채울 일이다. 시인의 말보다 앞서 가지 않았다면 찬찬히 읽어보면 된다. 동의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면 그뿐이다. 개인적 경험에서 촉발된 언어의 생동감은 쉽게 내면화되지 못한다. 사람과 생에 대해 존재론적 결핍과 열정의 부재에 대해 허무한 시선을 던지는 시인은 이제 어떤 시를 쓰게 될 것인지. 세상에 대한, 혹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뚜렷한 성찰도 끝나지 않은 듯한 시인의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내가 바라보는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세상을 끌어가는 힘이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라고 동의할 수 없지만 모든 감정과 과정에 논리와 이성이 개입하거나 인과법칙에 따라 변해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어쩌면 ‘그냥’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모든 순간에 ‘그냥!’이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절규가 내 것일 수도 있다. 답답하고 불가해한 현실을 견뎌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냥 살아 보는 것이다. 삶에 이유를 달지 말라. 그냥 살아 보자.


그냥

  그냥
  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 그냥이 산다. 아니면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잠을 털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잠 속에서 생을 마쳐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냥 속에는 그냥이 산다는 말은 맞다. 그냥의 집은 참 쓸쓸하겠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처럼 그렇게.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깊은 산그림자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둔 강물 혹은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사귀 같은 것들이 다 그냥이다. 그래서 난 그냥이 좋다. 그냥 그것들이 좋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들의 물살이 가슴에 닿는 느낌이 좋다. 그냥 속에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는 일처럼.



06040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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