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 시작시인선 49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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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 ‘환상통’중에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88년에 무크지로 시작한 고려원의 <현대시사상>은 계간지로 전환되어 96년 겨울호까지 간행되었다. ‘모더니즘과 마르크시즘’, ‘해체주의’로 시작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비평, 페미니즘, 전위시론, 저자의 죽음, 라깡, 푸코, 데리다, 아방가르드, 탈식민지 문화이론, 타자에 대한 논의까지 현대시에 관한 다양한 사상적 주제들을 담아 내던 계간지였다. 책 꽂이 한 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책들 속에 시인 김신용이 자리잡고 있다. ‘버려진 사람들’과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이 그것이다.

  김신용의 시의 주제는 고통이다. 시가 상실의 예술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고통스럽지 않은 시는 많지 않다. 그러나 김신용의 고통은 직접적인 통각에서 비롯된다. 가난과 삶의 모멸에서 비롯된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일용잡부의 삶을 이어오며 ‘시멘트 침대’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의 고통을 무엇 때문에 시로 담아냈던 것일까?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의 시들은 여전히 아프다. <환상통>에서 보여주는 시세계는 김신용의 시가 자기영역을 확보했다는 표지로 읽힌다. 늦은 나이에 등단의 형식을 거쳐 일용직 노동자 시인의 삶을 이어온 그의 시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간다. 현실에 대한 안주와 나타로 대변되는 관념의 유희, 그것을 넘어선 그의 시는 깊은 울림이 있다. 시인의 경험과 깊은 사유가 길어올린 우물물에 비유할 만하다. 깨끗하고 담백하다. 군더더기나 잡스러움이 없다. 관념의 언어로 자기 만족에 함몰되는 많은 시와 비교될 수 있다.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다듬는 내면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고 가난과 신산스런 삶이 그려주는 물결 무늬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지하도 구석에 구겨 박힌 몸뚱이 하나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오늘도 숲 속의 너와집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뿌린 만큼 거두는 흙 속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 꿈틀거림이, 낮게 자신을 성찰하는 자의 몸짓을 닮았다

- ‘시멘트 침대’중에서

  그들이 꿈꾸는 ‘숲 속의 너와집’은 김신용이 오래동안 꿈꾸었던 지상의 집 하나와 유사하다. 실존의 문제는 관념에 앞선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먹을것인가의 문제와 부딪히면 얘기는 달라진다. 여전히 배고픈 사람들과 생존 자체가 치열한 문제인 사람들은 인식의 틀이 다르다. 그 꿈틀거림조차 ‘자신을 성찰하는 자의 몸짓’으로 볼 수 있을까? 시인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반성의 질문으로는 아쉽다. 자연에서 인간을 들여다보는 눈은 대체로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비목어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성찰이 생내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진 비목어가 되어 가고 있다.

比目魚여,
눈이 하나 밖에 없어, 세상의 한쪽 밖에 보지 못한다는
눈이 하나 밖에 없어, 그대의 뒷면을 보지 못한다는

물고기여,

그 하나 밖에 없는 눈의, 또 다른 물고기를 만나
둘이 한 몸이 되었을 때, 세상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다는

비목어여.

- ‘비목어’ 중에서

  ‘세상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중의 우리는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서 비목어를 비웃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나부터. 내가 가진 시선과 관점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충고가 아니라 시인은 비목어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반쪽 비목어를 찾아서 온전한 눈을 갖고 싶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것이 사랑일까? 모두가 불행한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고통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지껄인다. 귀가 따갑다. 손톱밑에 박힌 가시가 전해주는 고통은 타인의 생명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불행은 항상 타인의 불행을 능가하는 법이다.

자신의 불행에 짓눌려, 타인의 불행에 눈길 돌릴 여유 하나 없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 ‘다시, 풀잎에 기댄다’ 중에서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시인의 바람일 뿐이다. 타인의 불행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나와 가족의 울타리를 넘지 않는다. 이기주의와 가족주의를 넘어설 수없는 세상이다. 시인의 말이 공허한가? 각자 거울을 들여다 볼 일이다. 답이 없고 대안이 없어 답답한게 아니라 수많은 상상의 여지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는 아름다운 감상주의를 넘어선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김신용의 시집<환상통>에 갈채를 보낸다.

가시 1

가시에 얼굴이 비쳐 보일 때가 있다

핏방울이 묻어날 듯 날카롭게 돋아 있는 가시가
거울처럼 얼굴을 비쳐 보여 줄 때가 있다

내가 가시가 되었을 때다
내가 가시가 되어 가시를 바라 볼 때이다

그때, 가시는 드므다 된다
가시가 된 내 얼굴을 맑게 떠올려 주는 물거울이 된다

가시가 가시를 겨누는 그 전율!

내가 또 하나의 敵意 앞에 섰을 때의 삶이
덫과 같은 맑은 물거울에 파동 치는 순간!


060127-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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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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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중간쯤에서 허리를 펴고 등 두드리는 시인이 함민복이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가난한 삶에 대한 물결들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 그의 시는 더 아름다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어법과 바닥까지 드러난 감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우울씨의 一日>을 들고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그의 모습이 그랬다. 영종도 바다가에서 아직도 혼자 살고 있는 함민복은 세상의 잣대로 가난하다.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시인을 직업으로 선택한 그의 삶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 것은 그가 세상에 던지는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그가 가진 부드러운 힘과 <말랑말랑한 힘> 때문이다.

  나를 위로하며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를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나를 위로하기 위해 꽃송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비에게 꽃이 필요한 것처럼 누구든 위로받을 대상은 존재한다. 사람마다 그것이 다르겠지만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주는 일을 잊고 살았다. 내 마음을 ‘마음아’라고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한 채 눈을 항상 밖을 향해 열려 있는 나에게 던지는 시인의 서시는 그래서 아프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끝을 알 수 없는 높이와 깊이가 유한한 생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지금 이 순간의 생을 확인하는 일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은 단순한 자연의 순리와 이치가 아니라 ‘꽃침’을 맞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부드러움에 찔려 환해지고 선해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봄 꽃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그러나 봄이 와도 쉽게 꽃침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침도 아니고 누구나 맞고 싶어하지도 않겠지만. 꽃침대신 흔들리지 않게 닻을 내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 닻의 힘은 ‘상처의 힘’이 되고 ‘상처의 사랑’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 작은 마을마다 집집마다 숨겨놓은 사람들에게 닻은 때때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큰 바다가 몰려올 때 사람들은 닻을 찾는 대신 정신을 놓아버린다. 그것이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침착한 이성의 닻을 찾기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닻은 닻일 뿐이다.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줄 수 있겠지만 ‘상처’를 치유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저 작은 집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에 대한 미련과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걸 ‘그리움’이라 부른다.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그리움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는다


06020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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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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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과 집착을 구별하지 못하고 질투와 배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복수와 사랑을 혼돈하는 영혼이 존재한다. 알콜 중독자와 스토커의 공통점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모든 책임과 이유를 타인과 세계에 돌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에게 잘못을 따질 수가 있느냐는 문제다. 과거와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사랑’에 관한 스토리. 그 스토리의 변형은 무수히 많다. 알콜 중독자이며 천재 의사인 친구는 그 친구 때문에 자기 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의 능력과 한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식상한 스토리와 지루한 전개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물론 내용과 형식을 꼼꼼이 뜯어 먹으며 갓 구운 식빵처럼 방금 나온 소설을 대하는 일은 나른한 행복에 속한다. 이제 한 세대를 마감하는 이상 문학상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불손하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이 보류된다. 대부분의 독자는 연초에 나오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1년간 한국문단의 소설에 대한 점검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내 손으로 산 책이 18권, 눈에 띠는 대로 주어다 꽂아 놓은 것이 3권이니 습관내지 중독처럼 매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을 사 읽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매년 뛰어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소설가 한 명 씩을 쏟아(?)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심사위원도 바뀌어 가고, 기수상작가 우수작이나 특별상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독자들의 시선은 이 한 권에 책에 보내는 기대와 믿음이 크다. 그러니 매년 즐거움과 실망이 교차한다. 문단 권력의 의한 나눠먹기 수상에 대한 의혹은 단순한 문학권력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이인화의 수상으로 촉발되었던 시비와 문제제기는 조용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소설가들의 이력과 면면들, 수상선정 이유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감동없이 진부하다. 여기서 진부하다는 것은 스토리다. 정제된 문체와 다듬어진 문장들, 탄탄한 구성과 주제를 이끌어내는 솜씨는 갈채를 보낼만하다. 그러나 내게 전해진 그녀의 소설은 신선하지도 않았으며 섬세한 감각의 날을 세우고 있지도 못하다. 완벽한 천재에 가까운 인간에 대한 열등감은 주인공의 욕망으로 대체된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곧 자신의 거울 역할을 한다. 가 본적 없는 북유럽의 환한 밤과 뭉크의 그림은 인물의 심리를 그려내고 삶의 진정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짜 절규’는 없다. 다만 뭉크의 절규가 떠난 자리에 오롯한 슬픔으로 남은 빈 자리에 액자가 걸렸던 자국만이 선명할 뿐이다. 무엇을 말하든, 방법만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면 여전히 소설은 그 마음의 물결만 남는다. 천재의사의 치기에 가까운 몸부림은 개연성이 없다. 한 인간이 타자에 대해 품게 되는 욕망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심리를 드러내는 것도 작위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동일시 된 감정과 오히려 엉성해져버린 필연성이 작가의 의도라면 할 말은 없다.

  대상 수상작으로 심사위원들의 결선 투표를 벌였다는 전경린의 <야상록>에 한 표를 더해주고 싶다. 문예지에서 읽었던 김영하의 <아이스크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밖에 김경욱과 구광본의 소설은 신선함을, 함정임의 ‘자두’는 지루함을, 윤성희의 ‘무릎’은 주목을 끈다. 소설적 성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균등 배열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타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이렇게 또 1년이 지나갔다.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생이 아깝지 않다면 내년을 기다리면 그뿐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였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스스로 욕망하지 않고, 타인을 욕망한다고. 또한 모든 욕망은 타인의 시선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말했다.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나는 충만할 수 있다고. - 채호석, 작품론 - ''환의 절규''중에서

  채호석의 작품론 서두 부분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여기서 ‘타인’은 ‘타인들’로 복수의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타인’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욕망’에 관한한 가장 잔인한 거울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다. 거울을 보라. 그리고 내 욕망을 확인하라. 그것이 ‘타인의 욕망’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욕망’인가.

  환한 밤을 여러 번 나누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뭉크의 절규가 한 작품이 아니?수없이 여러 개의 ‘절규’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순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수많은 ‘절규’들을 떠올리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동그란 눈과 입, 귀를 틀어막은 손보다 배경으로 꿈틀대?그 암울함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뭉크의 첫 ‘절규’를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억했다. 좋아하는 그림이 아니라 각인된 그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라의 죽음’을 보여 느꼈던 그 선명한 피의 냄새는 오히려 순수해 보였다. 언어예술의 정점에서 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력과 감성을 극대화시킨다. 보다 좋은 풍부하고 다양한 소설들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아낌없는 갈채를 보낼 수 있는 작품을 기대하다가 써보겠다고 덤비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060206-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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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열쇠 - 문학,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길잡이
김성곤 지음 / 산처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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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진부한 물음에 대한 답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그 어려움에 관해서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문학의 성격과 본질은 인간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인간의 삶은 계속되었으며, 문학적 글쓰기도 계속되었다. 문학은 인간이고 삶인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형식과 내용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전시대에 대한 반발과 그 반발에 대한 대안으로 이어진 문예사조는 예술사의 흐름과 더불어 인류의 삶을 들여다보는 만화경과 같다. 그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치열한 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고민하고 인식하는 모습들이 곧 인류가 걸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산처럼에서 나온 <사유의 열쇠 - 문학>은 박이문의 ‘철학’편에 버금가는 구성과 내용을 담고 있다. 영문학자의 눈으로 평생 문학을 연구한 연륜과 사유의 깊이가 행간에 묻어난다. 문학 용어 사전이 아니기 때문에 문예사조부터 최근의 현대 문학이론 용어까지 포괄하고 있어 문학사를 일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루하고 논쟁적인 역사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6부로 구성된 내용속에 최근의 현대 문학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각각의 개념과 용어에 대한 설명으로 찾아 읽어도 좋을 법한 문학사전이지만 처음부터 전체를 조망하며 읽어나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포스트 시대의 문예사조들과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새롭게 시도된 형태의 다양한 문학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은 한 권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이퍼텍스트에서 테크노 픽션, 크리티 픽션, 그래픽 소설 그리고 판타지 문학에 이르기까지 가장 최근의 등장한 문학 형태에 대한 소개는 정보 차원의 소개로 머무른 것이 아니라 문학이 나아갈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의 역할을 한다. 단순한 이론 설명을 위한 나열이 아니라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내적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피드백 과정을 거치도록 스스로를 독려하면서 읽어나간다면 책이 주는 내용 이상의 즐거움과 색다른 사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살아오면서 문학에 대해 단편적으로 축적된 지식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도 있고, 문학 전공자라면 소홀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울러 한 번 잘못 기억되거나 오해할 수 있었던 개념들에 대한 간단한 확인과 지식의 점검이 필요하기도 하다. 문학에 대한 이론과 지식, 개념과 용어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은 소설무용론과 같다.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과 삶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문학과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 인류의 삶을 돌아보라고 충고하는 듯 하다.

  책의 마지막 6부는 문학과 신화라는 부제를 달고 ‘신화의 현대적 해석’, ‘헤라클레스’, ‘아라비안 나이트’의 짤막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다. 다른 장르와의 관계와 겹침을 확인하고 중첩되는 용어와 개념들을 이야기하자면 한권으로 너무나 부족하다. 양념처럼 들어간 마지막 장은 사족처럼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소홀하게 다루어야 한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벗어나 있다. 모든 것을 다룰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면 기본에 충실하도록 다른 장르와 분야에 할애하거나 나머지 장들을 충실하게 보완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더불어 한가지 아쉬운 것은 여전히 서구 유럽과 미국 문학 중심의 문예이론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류와 비주류를 함께 언급하고 참고하고 문학작품의 경우 그 예가 될 수 있는 작품들이 다양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또한 우리 문학에 대한 언급과 관계에 대한 설명이 단 한줄도 없다는 것은 더 큰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작은 책 한 권에 욕심을 낼 수 없지만 문학사전이라는 출판 목적에 충실하도록 좀 더 세심한 배려와 내용 설정에 대한 고민도 병행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와 독특한 구성, 내용의 충실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잡다하고 방대한 이론 설명이나 난해한 개념을 더 어려운 용어로 설명하지 않은 점은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이다.

  이제, 직접 그 작품들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손도 대보지 못했던, 혹은 아련 기억속에 묻혀 있던 작가와 작품들을 언제든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보는 일은 물론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행복이다.


06032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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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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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애와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 P. 148

  마술이나 환상을 믿고 싶은 사람들은 현실을 향한 욕망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든, 욕망이라 부르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가능성과 개연성을 뒤로한 채 꿈을 꾸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그 욕망의 공통성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욕망을 넘어 생에 대한 열정이 되고 시간의 흐름을 더불어 한 개인의 속성이 된다. 현실에 대한 다양한 인식 방법과 욕망의 표출 방법은 감춤과 숨김으로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감춤과 드러냄의 누빔점에 소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버린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의 누런 표지를 가끔 물끄러미 바라본다. ‘책읽기’는 과연 행복한가.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글에서 김현은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이 대립하는 접점에 위치한 호기심의 자리에 놓인 소설은 여전히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형태의 관음증을 제공한다. 살아보지 않은 생에 대한 열망과 내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절망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즐기기도 하고 안도하며 현실속의 나와 끝임없이 차별화하거나 동일시한다. 감정이입은 시에 사용되는 표현기교이기도 하지만 문학을 ‘하는’행위의 기본적 속성이기도 하다.

  <마이너리그>이후 오랜만에 접하는 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스토리보다 서사구조가, 문체나 구성보다 짤막한 단상과 생에 대한 잠언적 경구가 돋보인다. 독자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인생을 통달한듯한 격언을 던져넣는 방식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문장 속에 어색하지 않게 툭툭 던져지는 말들이 예민한 감수성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단아함을 넘어 투명한 레이스로 장식한 화려함을 소설들에서 찾을 수 없는 단면을 보여준다. 제 색깔을 드러내는 과정인 작가의 목소리는 강경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다만 흡인력과 탄탄함이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진다. 소설 속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비밀과 거짓말>은 치정극도 아니고 멜러물도 아니다. 영준과 영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확인하는 생의 비루함이다. 그것을 뭐라 표현하든 ‘생’은 빛나지도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거나 더럽지도 않다. 그게 그저 사람의 생일 뿐이다.

그 애가 감추려는 데 진실이 있어요. 때로는 거짓말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구요. 거기 붙여놓은 비밀이라는 봉인을 떼지 마세요. - P. 162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질 때가 있다. 일말의 의심도 의혹도 없이 모든 사람이 믿어버리는 그 혹은 그녀의 말은 진실인가. 봉인을 떼지 말라는 소설 속 전언은 현실에 적용될 때 더더욱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미칠 것 같은 일에 분노하지 말라.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 거짓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사람들이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오래 음미하는 대신 밑줄을 그어보고 머리와 가슴을 지나 손끝에서 처리되는 감정이 되어 버렸다.

  죽음이 모든 진실을 밝혀주지도 묻어주지도 않는다. 생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스런 많은 사람들과 말과 글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소설보다 아름다운, 혹은 소설보다 강렬한 비밀과 거짓말이 숨어 있다. 퍼즐처럼 조각난 생의 비밀들 속에서 아직도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영준과 영우의 아버지 정욱에 대한 사실들은 이 소설이 전하는 진실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다. 소설 속의 영화로 제작되는 ‘비밀과 거짓말’이 전하는 진실은 숨은 그림처럼 모두의 가슴속에 숨어 있다. 주변을 돌아보라. 그리고 거울을 보라.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객관적 진실보다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그럴 만한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 283


06031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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