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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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깊은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도달하는 통증. 무엇인가 쓰지 않고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는 사람들 - 天刑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시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에 충실한 사람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 역할에 즐거움을 느끼고 스스로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는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흔히들 한 편의 소설이 전하는 의미를 확대해석하거나 외면해 버린다. 물론 모든 책은 선택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순 없다. 하지만 잠시 일상을 벗어나거나 알지 못했던 시간과 역사에 대해 혹은 무심했던 진실들에 대해 고민하고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도 한다. 내겐 그것이 책이 주는 의미다. 역사의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나를 돌아보며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본다. 거창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결국 나는 왜 사는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늘 귀결되는 문제이므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들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행복을 느끼며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다들 거기서 거기라고 하기엔 사람들의 의식도 생활도 방법도 너무 다양하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나 21세기 초반에 걸친 삶을 마감하게 될 내 삶은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는 당연히 궁금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불과 백년 전.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탈근대의 역사 속에 주목받지 못한 미시사에 해당한다. 고종의 생각도 근심과 걱정도, 명성황후의 죽음도, 대원군이나 순종의 이야기도, 최후의 왕손이 일본에서 사망한 최근의 뉴스 보도도 사실 나에겐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다. 하지만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채무 노동자로 팔려간 1033명의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삶은 눈물겹게 읽힌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위정자도 아니고 오히려 그들에 의해 삶을 유린당한 민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제국의 군인, 농민과 도둑, 파계 신부와 박수무당, 보부상 등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서 소외된 이웃들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들은 더 가질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한 채 일포드 호에 오른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신산스런 삶을 뒤로 한 채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이 땅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유예된 4년간의 시간만큼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기대했던 평범했거나 그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읽는 사람은 더욱 가슴이 아려온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할만한 성질의 이민사와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 팔려간 조선인 1033명의 운명은 1905년 대한제국의 운명을 대변하는 시간의 비극성을 대표한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지구의 반대편 멕시코로의 공간적 이동은 강압에 의한 탈근대를 대표하는 시간적 이동을 상징한다. 반상제도와 남녀차별 등 봉건적 요소가 붕괴되는 과정이 일포드 호의 선실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에네켄 농장에 도착한 후 노동의 과정을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것을 이민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민족의 비극성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작가의 말대로 피로써 쓴 1차 자료가 없었다면 이런 종류의 소설은 시작부터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도 다 말해질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작가가 영원히 쓰고 싶은 소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몰두하고 열정을 다했던 소설답게 성공적이다.

  일종의 역사소설로 분류될 수 있으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나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를 보는 여러 가지 시각을 점검할 필요도 없이 작가의 시선은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감상에 치우치거나 그들의 삶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객관적 정황과 사실성을 토대로 소설의 구성은 탄탄하며 인물들이 지니는 특성은 여러 주인공들의 면면들이 전체 이민자와 상황 속에 잘 어루어진다.

  에네켄 농장의 4년을 넘어 멕시코의 혁명 전쟁, 과테말라의 게릴라 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한 권의 장편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작가의 역량과 힘을 실어 좀 더 길고 다양한 면들을 보여주는 역작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추적할 순 없지만 과테말라의 띠깔에서 ‘신대한’을 세우고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사실들은 단순한 역사적 가쉽을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와 감동을 전한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처럼 마리오와 김이정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소설이 될 만하다.

  멕시코 이민 백 년. 많은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변했지만 신산스런 우리 조상들의 삶을들여다보는 일이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나 지나온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퍼즐의 조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발 딛고 선 이 땅의 역사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힘겹기만 하다. 과거와 미래가 통어하는 순간들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 훗날 어느 순간 쓰여질 것이다. 그 때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래보다 과거의 어느 찰나를 짚어내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개인적 취향이다. 좀 더 괜찮은 김영하의 소설을 기대해 본다.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의 흐름속에 개인들의 삶을 녹여낸다면 먼지처럼 부유하는 티끌이 될 것이다. 그것들이 뭉쳐져 아름다운 눈송이가 되듯 역사는, 우리의 삶은 이름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믿는다.


200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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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닭 연구소 문학과지성 시인선 310
장경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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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다녀간
흔적이 있다

  그가 누굴까? 장경린의 <토종닭 연구소>의 1부 첫 번째 시다. 한동안 행간을 들여다본다. 나보다 먼저 다녀간 그를 생각해 본다. 무수한 존재의 시원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작업이 시인들의 창작 행위라면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무임승차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세상에 로그인하고 싶은 시인의 목소리는 유리벽처럼 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것 같은 현대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짧은 시행은 주관적이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것을 위험성이라 표현한 것은 그만큼 단순하고 즉흥적인 반응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경린의 시들은 대체로 일상에 발을 딛고 있다. 어느 시인의 시가 일상을 떠나 있을까마는 그의 시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가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비판과 풍자의 극을 달리지도 못하면서 유머스럽다. 독자를 포함한 타자의 대한 불만과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다. 다소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별 특징없는 한 권의 시집을 편안하게 읽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모두 심각하고 매순간 진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머가 미덕이 될 순 없지만 비틀고 장난하는 몸짓은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떤 형태의 목소리와 몸짓이든 시인 특유의 개성과 독특한 목소리만 낼 수 있다면 나름대로 분명한 색깔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장경린은 그런 면에서 미흡하지만 버리기는 아깝다.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자본의 물결에 휩쓸리고 내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거리에 버려진 날리는 비닐봉지 같다

  시인의 관심사는 ‘자본의 물결에 휩쓸리고 내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비극적 인식을 가볍게 말해 버린다. 버려진 비닐봉지는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날아다닌다. 저항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지 않고 흐름에 온몸을 내맡긴다. 때로 비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닥에 뒹굴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견뎌낸다. 그 모든 대상들이 시인의 관심사이다. 무엇하나 버릴 것 없는 세상이 아니라 아무것도 의미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오히려 비극적인 시선으로 느껴진다.

몽유도원도 21

먼 산
귀 기울이다
떨어지는
산수유
또 한 해
누군가
누가 오는가

  마지막 시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그는 나보다 먼저 다녀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가 누구이든 먼 산에 귀 기울여 기다리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다림이다. 이 도시의 삭막함을 견뎌내는 힘은 산수유 떨어지는 소리처럼 다가오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확신은 시인의 마지막 말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시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화합과 합일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의 ‘관계맺기’로 볼 수 있다.

시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벽을 넘나드는
일종의 ‘숨통 트기’가 아닐까
도시와 자연과 다르지 않듯이
과거와 미래가 다르지 않듯이
내가 당신과 다르지 않듯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듯이


06010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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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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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적 진실과 내가 소설을 통해 찾으려는 인간적 진실은 다르다. 역사와 진실, 인간과 진실이 다른 것처럼. - ‘작가의 말’ 중에서

  역사에 기록된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설이라는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에서 굳이 실존 인물을 되살리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선택이겠으나 소설을 통해 독자가 나눌 대화의 단초는 이미 역사적 사실속에 내재해 있다. 영웅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선망과 외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채동구같은 인물의 삶이 훨씬 더 흥미롭다.

  이름 없는 역사속의 선비. 초야에 묻혀 일생을 보냈으나 자신의 굳은 신념을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존경 때문이다. 고령 지방의 ‘인간’ 채동구의 삶은 희극적이지도 비극적이도 않다. 작가의 외가, 먼 조상중 하나인 채동구의 고유제를 통해 그의 행적을 돌아보는 형식의 소설은 액자의 형식에 담아내고 있다. 현재와 과거의 진지한 대화가 역사의 소임이라고 믿는듯 한 작가의 태도는 객관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소설을 통해 찾으려는 인간적 진실은 역사적 진실과 분명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이므로. 400여 년 전, 병자호란(1636년)을 정점으로 네 번의 출도를 가출로 묘사한 작가의 시선부터 확인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가장 치욕스런 순간으로 기억하는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김상헌 같은 척화파가 명에 대한 의리와 국가에 대한 고매한 충절로 평가되고 최명길 같은 주화파가 욕먹을 짓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리와 국가의 안위를 담보로 자신들의 좁은 소견과 명분만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분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 당시에 태어나 받았던 교육과 세계관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고결하고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비판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미련스런 고집과 명에 대한 사대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채동구와 같은 인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머릴 내가 이고 내 뜻을 내가 지킨다.(吾守吾志 吾載吾頭)”는 묘비명은 채동구의 삶과 인간적 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것처럼 희극적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것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은 그 너머에 있을 것은 분명하다. 과연 소설속에서 인간적 진실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이지만 채동구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진실은 ‘인간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잘것없지만 한 인간의 삶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신념과 고집 속에 함유된 맑고 깨끗한 정신 말이다. 역사를 뒤바꿀만한 힘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인물들과 다른 평범한 양반의 대의명분 뒤에 숨어 꿈틀거리는 개인적 욕망과 가문의 영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작가는 수많은 기록과 후손들이 기록한 그의 행장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채동구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꿔지는데 그 상상력이 바로 성석제가 말하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적 진실의 핵심이다. 몇 줄로 기록된 한 인간의 행적들로 우리가 알수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진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가공의 인물이든 역사속의 실존인물이든 한 ‘인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보편성의 문제에 관심이 간다. 400여년 전의 인물 채동구를 통해 현대인의 숨은 욕망과 인간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산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라면 주어진 환경과 시간 속에서 자신이 가진 신념과 일관된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혹은 그 과정에서 겪게되는 인간으로서의 갈등과 이기적 욕망들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즐겁고도 고통스런 일이다.

  주인공 채동구와의 비판적 거리두기, 가독성 높은 문체와 해학은 작가 특유의 개성을 다시 한번 발휘한다. 장편으로는 처음 만나는 성석제의 <인간의 힘>은 커다란 문학적 성과와는 거리가 멀게 보이지만 소설의 영원한 주제가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데 동의한다면 작가가 안내하는대로 진지함을 벗어던지고 채동구를 바라보라. 그러면 네 번의 가출을 통해 인간 채동구가 ?변모해가는지 확인할 수 있고 그곳에 ‘인간의 힘’이 숨어 있다는 거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가출하고 싶어진다. 가출이 안된다면 외출이라도……


  가출은 인간에 의한, 인간만의,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따르는 의지의 표상이다. - 서. 전생


060106-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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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온 편지 작가정신 소설향 23
장정일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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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선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내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 혹은 ‘하이퍼링크’ 방식으로 이름 붙여 놓은 방법이 있다. 책을 읽다가 꼭 보고 싶은 책이 눈에 띄거나 저자가 소개를 하면 그 책으로 갈아타는 방식이다. 영역과 장르를 넘나들며 읽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같은 분야에서 다양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주변에서 얻어지는 책에 대한 정보들이다. 한겨레 서평이나 추천 목록을 참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자보다 위험하다. 출판사의 뛰어난 마케팅 능력이나 주례비평의 낚시 바늘에 걸려들기 십상이고 특히 검증되지 않은 신간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장정일의 <중국에서 온 편지>는 첫 번째 방법으로 선택한 책이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에서 저자가 적극 추천했던 두 권 중의 하나다. 나머지 한 권도 읽고 있다. 탁선생이 추천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시선과 관점을 위해서다. 소설은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된다.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시점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고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3류 쓰레기 통속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의 서술자가 점순이였다면 사춘기 시골 소녀의 일기장이 되어버린다. 고정된 관점과 시선은 얼마나 위험한가.

  중국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진나라의 시조 진시황에게는 스무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 가장 출중하고 명석했던 큰 아들 부소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를 토대로 장정일은 다양한 문헌을 뒤적이며 역사의 ‘구멍’을 찾아냈다. 그 구멍은 호기심의 블랙홀처럼 모든 상상력과 추측을 빨아들이는 대신 어둠속에서 선명한 한 줄기 빛을 내뿜는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아있을 역사속의 인물을 되살려내는 전지전능하신 작가는 타당한 이유를 독자에게 설명해야 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분명히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부소이자 부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면이라고 선언하는 서술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따지거나 소설의 잣대를 거부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형식의 이야기든 아주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이 책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주 훌륭한 소설이다. 개연성 있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됐든 독자의 오감을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책을 뒤늦게나마 만나서 다행이다.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소가 아버지 진시황의 견제를 받아 만리장성까지의 먼 길을 떠나야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도 희미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소가 떠난 지명조차 밝혀놓지 않았으나 작가의 구라는 들어줄만 하다. 변방의 만리장성을 쌓아가며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천하통일의 일등 공신이었던 몽염에게 보내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눈이 멀어 몽염에게 도착한 부소는 극진한 치료와 대접을 받고 다시 시력을 회복하며 몽염과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몽염에게로 옮아갔다고 볼 수 있다.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부소는 아버지와 죽음을 통해 이세 황제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허망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제목처럼 편지의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끝없이 떠벌이는 형식은 단 한 번의 휴지기 없이 한 호흡으로 길게 하소연한다. 말없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아버지와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아들 부소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1인칭 서술자의 끊임없는 언변에 혀를 내두르도록 만들어버린 역사적 상황과 틈새에 있지 않다. 중요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이 소설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기본 토대라면 아버지와 비교를 통해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삶의 진정성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항변으로 들린다.

  진시황의 무덤에서 출토된 실물크기의 병마용들을 전시했던 코엑스 전시회에 다녀왔던 적이 있다. 그 엄청난 규모와 부장품에 놀란 것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한 인간의 욕망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절대 권력에 오른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이 역사를 이렇게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싶다. 부소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지만 이 책은 어쩌?아버지 진시황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토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역사적 인물을 살려내서 진시황에 대해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이 들었다.

  가정법이 통용되지 않는 역사를 뒤집어보는 일은 철지난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같을까? 우리의 관심은 확인되지 않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다. 기록된 역사의 구멍과 간극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상상력이 소설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자유롭게 지껄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만은 사실 아닌가?


06011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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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문학과지성 시인선 311
장석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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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맨의 현대적인 사랑법
나는 우울한 남자, 이성주의자를 몰아내고 싶은 남자
나는 우울한 남자이기 때문에 다섯 사람만 사귀고 싶어
우울한 남자라서 다섯 손가락 펴고 다섯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나는
우울하기 때문에 눈물에 젖어 저 너머에 세워질
이성주의자의 묘비명을 생각하고 있어

  - ‘내 마음의 아나키’ 중에서

  지루한 이성과 감성 놀이의 틈바구니에서 허구적 거리는 몸짓을 보여주는 시인이 장석원이다. 라고 한다면 시인은 화를 낼 것이다. 설익은 목소리와 탄탄하지 못한 내공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지만 첫 시집을 읽는 독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신선하다와 돈 아깝다 사이에서 방황해야 한다. 미래를 알 수 없고 현재가 전부가 아니지만 아직 멀었다.

  ‘아나키스트’는 체제와 조직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자유에 대한 사랑과 자아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열림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시집 <아나키스트>는 자아의 각성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초록은 깊으나 치명적이지 않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벌 받아 마땅하다
얼굴 앞의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는 자 벌 받아 마땅하다

  - ‘근원적 센티멘탈’ 중에서

  반복되는 ‘멜랑콜리’와 ‘센티멘탈’ 사이에는 어떤 간극도 없다. 선언적이고 감성적이지만 때때로 공감과 울림으로부터 멀어진다. 시가 여전히 유효한 장르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와 감흥 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넘어서는 자리에 홀로 눈물 흘려서는 안된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는 장르가 시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잠언적 경구를 떠나 조화된 한 편의 시를 만나고 싶은 것이 독자들의 소망이다. 예를 들어,

크레모아 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용기.
우리의 만남, 부자연스런 체위, 시와 혁명,
술과 사상, 노동자와 시인.
우리와 그들의 사랑은 소도미야.
소돔 성이 소도미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어.
사랑의 힘 때문이야. 서풍이 분다.

  -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 중에서

  차라리 통속적이고 서툴러 보이는 위의 시 같은 경우가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이라는 지나간 시절의 한 순간을 추억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정밀한 언어 예술로서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목숨을 건 나머지 소통의 측면에서 부족하다면 ‘대중예술’로서의 직무를 유기를 했다는 혐의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한 편, 한 편 음미할 수 있는 시집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도 모르지만 전체가 주는 울림 속에 개별적인 시편들이 드러내는 의미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주는 시집도 드물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시의 제목은 의미 심장하다. 독자와 시인,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새로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간결하고 짧은 詩行 속에서 수많은 곁가지를 뻗어내는 마지막 구절의 선언처럼.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우연하게도
『창작과 비평』 전질 외판원이었던 그는
지하철 공사 한창이던 네거리 건널목
지하의 발파음 중심을 기울게 하던 그곳에서
정확하게 16일 전 보광동 81번 종점 앞 포장마차 황금시대의 末路 시비 끝에 주먹다짐 파출소 연행 후 지루한 調書 하룻밤 새우잠
그리고 아침의 어색한 화해 끝에 헤어졌던 그 사내를
즉석 복권을 긁고 꽝을 확인한 후
재수 없다 없어 안 되는 놈은 다 안 된다
담배 필터 씹으며 전봇대에 기대 하늘 보다가 다시 만났다
이 도시에서 우연은 격렬한 사랑을 수반할 때가 있다


06011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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