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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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톡한 소설을 만났다. 밀란 쿤데라 이후 몰입할만한 외국 작가를 만나지 못했다. 번역과 정서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휘와 문장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느낌들이 주는 문체가 내용과 어울려 전체로 다가와야 하지만 쉽지 않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일부러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부분의 외국 소설은 나에게 그렇게 읽힌다. 번역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은 그런대로 좋은 평가를 내릴만하다.

  우선 내용 자체가 주는 신선함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의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선언적 의미로 읽힌다. 주인공인 타슈의 입을 통해 문학에서 오용되거나 독자들이 읽어내고 싶어 하는 비유와 상징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냉소가 시원하다. 공간의 이동도 시간의 흐름도 이 소설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인터뷰를 통한 기자와 작가 사이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장편소설에서 신경써야할 다양한 인물이나 복잡한 갈등도 간접적인 복선과 암시도 다 필요 없다.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만 소설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기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타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 그의 전 생애를 밝혀낸다. 유년시절의 지독한 사랑과 추억 때문에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추악한 외모를 가진 늙인이의 진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기자가 밝혀내는 결국 늙은 대가의 숨겨진 삶이 아니라 진정한 ‘문학’ 속에 가려진 진실 찾기 게임이다. 문학적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현실과 문학의 모호한 경계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즐기는 듯한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는 자신의 문학론으로 읽힌다.

  소설은 결국 허위적 진실이다. 허구라는 말도, 진실이라는 말도 모두 맞거나 모두 틀린다. 말장난이 아니다. 소설은 양면성을 지닌 두 얼굴의 사나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비평가나 독자들의 상상력은 자유지만 해석은 위험하다. 현실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소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 것처럼 소설의 의미 자체를 탐색하는 듯한 이런 종류의 소설 또한 쉽지 않다.

  또 하나의 축은 ‘사랑’이다. 작가 타슈의 어린 시절 절대 사랑이었던 사촌 레오폴딘. 그 사랑은 완벽했다. 탸슈의 입장에서. 성장하기 이전, 그러니까 2차 성징이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로 가장 순수한 모습만을 사랑했고 추억하는 현실 속의 환상이다. 그런 환상을 현실에서 지켜내는 방법은 일탈 행위 뿐이다. 살인을 통해 영원한 기억 속에 묻어버린 타슈는 그 후 전 생애를 글쓰기 속에 묻혀 산다. 다소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남녀간의 진부한 사랑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랑 이전의 사랑을 확인한 후 작가가 보여줄 사랑 얘기가 궁금하다.

  인류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새로운 작가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내놓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나름의 진실은 각각의 목소리를 낸다. 훌륭하고 위대한 문학으로 남겨질 작품은 결국 보편성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대중성과는 다른 문제이다. 특별한 의미와 내용을 담고 색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한 발랄함이나 재치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기자와 타슈가 보여주는 대화의 특성은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이전의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타슈의 말들은 현란하고 자유롭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요설들은 작가의 언어에 대한 화려한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능력은 작가로서 가지는 첫 번째 장점이다. 촌철살인의 은유와 풍자, 비틀고 후려치는 어법을 통해 ‘문학’ 자체에 대한 작가의 방법론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미덕이다. 특이한 내용과 색다른 방식으로, 무엇보다도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주목할(?) 만한 제목으로 일단 독자들에게 주목받고 많은 소설들을 쏟아내고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 몇 편을 더 읽어봐야겠다. 그래야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의 일이겠다.

 


200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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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5
윤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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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첫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는 88년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에 그를 만났다. 물론 시로 그를 처음 만났다.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시인도 아니고 주목받는 작품을 쏟아낸 적도 없다. 그의 첫 시집 마지막 시다.

죽지 않기 위하여

춥다.
곱은 손을 비비며 아침을 맞는다
성에 낀 유리창에 손톱으로
‘나는 오늘 아침에도 숨을 쉰다’라고 쓴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죽지 않기 위하여
몇 번 부대끼며 거리로 나서면
한 번 더 우스워지는 꿈.
생각할 줄 안다는 가장 빛나는 선물로
우리는 이만큼 슬펐잖은가

삶의 이유를 죽음에서만 찾아야 하는
우리들의
마른하늘을 위하여
마른기침과 변신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나와 내일을 위하여
입김으로 곱은 손을 녹이며 쓴다
‘살아야지 살아야지’

  2005년 가을. 그의 유고 시집 <고향길>을 대하는 마음은 헛헛하다. 첫 시집의 마지막 구절이 아이러니 하게도 ‘살아야지 살아야지’였는데, 이제 그의 마지막 시집을 들고 있다. 가난한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살뜰하게 드러내고 도시의 척박함을 담아내던 시인은 꼭 반세기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몇 년전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나헌티는 책음감 있이 살라구 허시등만
- 이문구 슨상님께

비설거지할 참도 마다하고
곰새 내렸다, 히뜩
골안개만 피우고 사라지는
여우비
처럼, 황망하게 가셨네.
개갈 안 나는 세상이라구
비죽이 웃으시드니,
슨상님 혼자 손 털고 뒷짐 진대유?
세상은 여적 그 세상인디……

  ‘세상은 여적 그 세상인디’, 아직 할말이 많이 남았을텐데 윤중호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지금쯤 이문구 선생을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제 둘이서 손 털고 뒷짐 지고 이 세상을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산다는 것이 때로 저 하늘의 구름만큼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깊어 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푸른 하늘을 우러러 깊은 숨을 쉴 때 마다 맡아지는 공기의 냄새. 살아있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먼 훗날 내 삶의 자세를 되돌아보며 후회를 남기지는 말아야 할텐데 싶다. 윤중호 시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잠깐만요. 마지막 저
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
무덤 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

이. 제. 됐. 습. 니. 다.

- 미완유고시 ‘가을’

 

 

 

200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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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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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소적인 책읽기 스타일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모든 책에서 저자와 대화를 나누며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 대한 애증은 영원히 계속되겠지만 좋은 책에 대한 열망만큼은 쉽게 가시지도 않을 것같다. 그래서 더더욱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하드보일드 하드럭>으로 첨 만났다. 순전히 남미에 대한 관심 때문에 조금 다른 시각이나 특별한 애정으로 남미를 살펴 볼 수 있을까 싶어 그녀의 소설 <불륜과 남미>를 읽었다.

  책 뒤에 여행 일정표를 부록으로 실어 놓을만큼 그녀의 여행 경험이 철저하게 소설에 반영되어 있어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의 말에서 실제 여행 경험을 소설속에 녹여 낸 장면들도 발견된다. 여행하는 모든 인간들이 부럽다. 평생 세상을 떠돌며 책만 읽다 죽을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그래서 부럽다. 200여페이지의 짧은 분량속에 그림과 사진을 삽입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남미에 대한 여행 욕구만 잔뜩 부풀려 놓는다. 그래, 가고 싶다.

  이 여행 에피소드 단편들은 7편을 묶었다. ‘전화, 마지막 날, 조그만 어둠, 플라타너스, 하치 하니, 해시계, 창밖’이 그것이다. 물론 제목처럼 불륜에서 오는 열정과 고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해석은 꿈도 꾸지 마라.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처럼, 받아본 적도 없는 남미의 가을 햇살처럼 노근하게 온몸의 긴장을 풀어놓는 편안함과 여유가 오히려 독자를 긴장시킨다. 뭔가 있을 텐데 싶은 조바심도 생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허무하다.

  이국적인 풍물과 분위기 낯선 곳에서의 상상과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을까? 문체로 승부하기에도 내겐 너무 지루하게 느껴진다. 오감을 충족시키거나 이성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어정쩡한 책을 골라내는 힘은 언제 생기려나.

  회색빛 하늘 만큼 우울한 날이다.



우울

어떤 형태로든
우울하다.

- 시 : 서정윤



200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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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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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작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은 그의 명성을 확인해 줄만한 수작이다. 우선 구성 측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인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의 넘나듦이 이 틀을 깨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작가다. 그의 소설 속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소설속에 ‘신탁의 밤’이라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건과 내용의 주된 내용은 외화(外話)나 내화(內話)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인 외화와 소설인 내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3중구조의 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문체와 전달방식에서도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오랜 병을 앓고 퇴원한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와 함께 살고 있는 작가다. 브루클린의 한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제 푸른 노트를 구입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속에는 닉 보언이라는 작가와 아내 에바 보언 그리고 로사 라이트먼이라는 편집자와 ‘역사보존관리소’를 만든 에드 빅토리가 등장한다. 또 소설속에 등장하는 실비아 맥스웰이 쓴 ‘신탁의 밤’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정리하면 소설속의 소설속의 소설이 바로 ‘신탁의 밤’이다.

  어떤 소설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하는가? 없다. 이 소설도 그런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한 또다른 통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구성요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도 제각각이겠지만 정답은 없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필연과 우연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놓는다. 다소 복잡하고 작위적인 구성으로 느껴질 법도 하지만 공상 과학 소설이나 기시감을 들먹이는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지닌 불가해한 측면을 깊이있게 고민하고 있는 소설로 읽혔다.

  작가가 기울인 그만큼의 깊이와 구성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현실속의 존 트로즈라는 대가의 입을 통해 글은 현실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이 작가의 다른 목소리로 들린다. 말보다 더 미래에 대한 예언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 글이라는 얘기다. 시드가 쓴 푸른 노트 속의 이야기를 아내 그레이스가 꿈을 꾸고 소설 속 이야기와 현실이 점점 충첩되면서 시드는 결국 푸른 노트를 찢어버리지만 소설속의 소설 ‘신탁의 밤’의 얘기처럼 아내 그레이스와 존 트로즈의 관계에 대한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버린다. 소설의 말미에서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벌어졌던 각기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병치시킴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 한 편을 통해 하나의 주제나 도덕 교과서처럼 하나의 교훈을 제시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폴 오스터는 그저 흘러가는 혹은 살아지는 인생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다만 영원한 숙제인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 보인다. 미래는 예언될 수도 있으며 현실과 상상은 언제든 충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우연이 전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당연한 전언.

  순간 순간에 대한 상황 묘사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현실과 소설의 내용이 겹치거나 영향을 주는 장면들이 전혀 어색하거나 서툴지 않다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래서 읽을 만하다. 호흡이 짧고 간결하지 않다. 다소 길고 느린 문장으로 생각의 속도를 지루하게 끌고가는 면이 있으나 내용과 어울리고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특별히 새롭고 환상적인 소설이 없다면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소설도 괜찮았다.

  ‘신탁의 밤’은 사실 미리 예정된 운명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밤’에 대한 아이러니로 읽을 수도 있겠다. 어쩌겠는가 인간의 삶에 대한 한계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볼 밖에. 그것이 모순된 생의 부조리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200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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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입 창비시선 245
천양희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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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정시가 유효한 것은 머리로는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서정시는 건재할 것이다. 다만 감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시들만 피해갈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그런 시가 있기나 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시에서 절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어떤 형태로든, 우스꽝스럽게 혹은 어설픈 몸짓으로 많은 책으로 엮여왔는지 독자들은 알고 있다. 각설하고 올 봄에 나온 시집, 천양희의 <너무 많은 입>에서 몇 편이 내게로 왔다.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왜 ‘뒤편’인가? 그건 시인의 시선이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다가오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다. 동전의 앞뒤처럼 생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믿는다. 잘못된 믿음인가? 아니 그러면 그 뒷모습을 포착할 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바꿔본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거라는 진단이 떨어진다. 동의할 수 밖에. 시인은 또 말한다. 그 지겨운 희망에 대해.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을 놓아버리는 일은 여전히 금기된다. 그러면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형태의 희망이며 무엇을 희망하고 있으며 어떻게 희망하는가가 문제이다. 물론 그 실현방식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노선

형님은 자기 노선(路線)이 있소?
독립문 지나다 아우가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걸까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 텐데

아우는 자기 노선이 있나?
광화문 지나다 형이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형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요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너의 노선이 될 텐데

가다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이 우리의 노선이리

  ‘가다보면 길이’ 된다고? ‘그것이 희망’이라고?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노신의 말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사람 두사람 가다보면 길이 생긴다’는.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선구자들의 이야기고, 등떠밀려 그 길의 첫 번째 보행자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평범에 바쳐지는 ‘희망’은 없는가? 구체적인 ‘희망가’는 울려퍼지지 않는다. 당연한 일에 목숨걸지 말자. 시인은 신이 아니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생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올곧은 시선으로 ‘희망’과 ‘노선’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말이 때로는 위로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희망’은 ‘완창’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희망’에 대한 평가와 기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필요성은 인정하자. 인간과 사회로 확대된 ‘희망’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꿈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교감’에서 시작된다. 이 울림과 떨림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메마른 생을 산다. 겹침과 떨림을 느껴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욕망이 있기나 한 걸까?

교감

한 마음의 움직임과
한 마음을 움직이게 한
한 마음의 움직임이
겹쳐 떨린다
물결 위에 햇살이 겹쳐 떨리듯

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어딘가에서 본 듯한, 참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구절이 눈에 밟힌다. 내가 걷는 이 길이 가장 먼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 '뒷길' 중에서

 

200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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