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

 

 

 

태양 아래 놓인 책상보다

달빛 스미는 바닥

그 그림자 위에 펼친 술상을 사랑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길을 가지 않고

길에 취하기 위해 바람부는 길을 걸었다

 

절망하기 위해 환멸하지도

환멸하기 위해 절망하지도 않았다

희망하기 위해 절망의 끝까지 

희망의 눈동자를 보기 위해 환멸의 심연까지 닿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누가 눈동자를 만질 수 있는가

 

만질 수 없으면 사랑을

믿지 못하는 세상

육체가 비애인 건 그 믿음에서 온 것

 

만질 수 있는

부드럽게 탐할 수 있는 몸보다

만질 수 없는 눈

안으로 뿌리내리는 슬픔을 사랑했다

 

함부로 영원에 대해 생각한 적 없다

쉽사리 영원히 라고 말해 본 적 없다

 

지금 여기 꽃이 핀다고

지금 여기 꽃이 진다고 말하리

피는 꽃에 기뻐요

지는 꽃에 아파요 라고 말하리

 

술잔의 수위를 넘는

눈물의 지도에 대해

금세 해는 지리라 라고 말하리

 

 

 

 

--- 나름 주(酒)를 모신다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주(主)를 모시러 교회에 다니던 순정한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옛일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저는 주신을 모시는 제 나름의 의식을 치르곤 합니다. 

  예전에는 시끌벅적한 바깥에서 시끌시끌한 사람들과 불콰하게 마시는 게 재미이기도 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혼자 제 집 서재에서 혹은 집 앞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조용히 음미하면서 마시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여러 사람들의 말과 말 사이에 둘러싸여 그 얘기와 분위기에 취해서 마시는 시간을 그리워해 보기도 하지만, 역시 주권(酒權)은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신에게 행사하는 게 가장 어울리고 합당하다는 생각을 해보는 요즘입니다. 

 

  가끔씩 비가 내리면 자연스럽게 '아! 술이 내리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내리는 술방울과 술소리 들으며 비에 취하는 밤의 그 기분을 과연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대낮의 태양처럼 빛나는 아폴론의 눈부신 이성이 어찌 이 그늘의 영역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슬프다고 술푸지는 마십시오. 너무나 자꾸 슬프다고 술푸면...

슬퍼서 술푸게 된 건지 술퍼서 슬프게 된 건지 그 경계마저 사라지고 마니까요~~!   뭐라구요?  그게 바로 진정한 디오니소스의 경지라구요?

 

  모두가 잠든 오늘 밤... 딱 참이슬 클래식 석 잔만 하고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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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하루에 십만 번

쉬지 않고 단 한 번 멈춤 없이

너를 향해 달려오는

그런 사랑을 아는가

 

서 있을 힘도 여기

아무도 없이 참혹히 외로워

다시 걸어볼 용기도 없을

 

그런 때

당신의 왼편 가슴에

오른 손을 포개어 보라

 

거기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한 사람 하나 있다

거기 두근두근

언제나 당신을 기다려온 사람 하나 있다

 

 

 

--- 사람의 심장은 하루에 평균 10만 번을 뛴다고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 사실을 우연히 알고 저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세상에나~~ 천 번 만 번도 아닌 십만 번이라니...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몸의 상반신 왼편에 매일 쉬지 않고 뛰는... 그토록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 있었다니요.

 

  먹고 쉬고 일하고 잠자는 그 모든 순간 순간에도 심장은 우리의 왼편 가슴 안에서 쉬지 않고 이토록 뜨겁게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장이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따스한 피가 돌 수 있었겠지요. 따스해진 손과 몸으로 우리는 누군가의 손과 몸을 다시 따스하게 안을 수 있었겠지요.

 

  어쩌면 우리가 꿈꾸고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들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너의 당신의 우리의 왼편 가슴 속에 언제나 나를 향해 너를 향해 우리를 향해 달려온 사랑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으니까요. 두근두근 뛰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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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모세혈관이 터질 것 같다

힘줄이 타닥타닥 타들어가고

거멓게 그을려진 얼굴을 꼿꼿이 들어

그대, 흐려지는 실루엣을 바라다봤다

명치를 타고 뿌리에서부터

촛농같은 슬픔이 수액처럼 치밀어 오르며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어둠처럼 조용히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성냥불처럼 옮겨 붙은 그대 체온이

잠자던 육체에 꿈의 불을 싸질러 버리는 순간부터

둥근 달걀처럼 나는

어둠을 감싸기 시작했다

파란 싹을 부화시키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육신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질 때마다

힘줄 한가닥이 끊어질 때마다 문 밖의 별들도

진물같은 눈물을 뿌렸고, 그대도 괴로웠을까

창문을 열고 그렁그렁 다가와서

차디찬 숨결을 불었다 시야를

무겁게 내리덮는 검은 안개야

나는 安樂死했다

 

 

 

---깊은 밤, 모두가 잠들어 버려 마치 나 혼자만 깨어있을 것만 같은 그런 시간에... 가게에서 사 온 둥근 초의 심지에 성냥으로 불을 켭니다. 그리고 책장 여기저기에 꽂혀 있는 시집을 들추어 읽곤 합니다. 차디찬 전원을 모두 꺼트린 채, 희미하지만 따스한... 둥근 촛불 아래에서 시를 읽는 일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고요와 슬픔을 내면에 불러일으킵니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둥글게 둥글게 피워낸 내 꿈과 사랑을 후~~ 하고 불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어쩌면 이 생의 길에서... 꿈도 사랑도 그렇게 예기치 않은 길목에서 꺼져버리는 촛불의 운명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러나, 그렇다고... 초가 스스로 제 내면에서 타오른 불을 끌 수는 없습니다.

 

  상처가 깊어질 걸 알면서도 우리는 이 생에서 꿈을 꿉니다.

  상처가 깊어질 걸 알면서도 우리는 이 생에서 사랑을 합니다.

 

  "깊어진 상처를 피하지 않고 그 상처마저 깊이 사랑하게 되면 

  상처는 없고 사랑만 남는다"는

  마더 데레사의 오래 전 말을 곱씹어 보는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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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는 말,

해 뜨는 장엄한 아침이 아닌

해 지는 쓸쓸한 저물 무렵의 말

높이 솟아 오르는 산이 아닌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강의 말

빛나는 햇살 받아 환해진 얼굴이 아닌

햇살 가린 그늘 속 얼굴없는 그림자의 말

빨간 루즈를 칠한 요염한 입술이 아닌

붉은 마음을 감추고 입 안에 갇힌 혀의 말

박수 받는 몇몇이 아닌

어딘가에서 박수치고 있는 여럿의 말

기쁨이 슬픔에게가 아닌

슬픔이 기쁨에게 건네는 말

웃음이 눈물을 잊었기에

눈물이 웃음에게 조용히 건네는 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앞서갈 때

누군가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말

장미꽃다발 들고 세레나데를 부르는 로미오가 아닌

꽃상여를 달고 슬피 우는 단테의 말

새벽 첫차의 시동 켜는 소리가 아닌

자정 무렵의 차고지

막차의 시동 끄는 소리의 말

잘난 사람들 잘난 세상의

그 요란하게 잘난 말들이 아닌

못난 놈들 못난 세상의

그 서글프게 못난 말들의 말

매끈하고 세련된 이마트 그런 대형마트가 아닌

투박하고 초라한 시장 그런

땀냄새와 악다구니 들끓는 재래시장의 말

시원하게 쭉 뻗은 고속도로가 아닌

산굽이 물굽이 다 돌고 도는

정선 아우라지길 그 곡선의 말

입으로 빠르게 고백하지 않고

마음으로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천천히 되뇌이는 말

가까이로 오는 이 아닌

먼 곳으로 떠나는 자들의 말

기쁨 속에 행복 속에

무심코 지나치는 말

서럽다는 말

아프다는 말

아프냐는 말

 

앞만 보며 길 가는 생의 여울목에서

발 아래 전혀 못 보고 건넌

그 뒤에 남아 온 몸으로

너를 받친 징검다리의 말

 

뒤도 안 보고 떠나는 사랑에게

뒤에 한참을 남아

안녕이라는 말로 오래도록 손 흔드는

사람의 말

 

오래 전

너는 떠났어도

단 한 번도 너를 떠난 적 없는

나의 말

내 안의 말

 

 

 

 

--- 저는 요즘... 해가 지는 저물 무렵 오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차를 잠시 세워 두곤 합니다. 빠르게 뛰던 심장박동 같은 차의 시동을 꺼뜨리고, 밖으로 나와 무섭도록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바라봅니다. 저 편 산 너머로 온 몸을 부스러뜨리며 저무는 해를 한참 바라보고 있곤 합니다. 그럴 때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에 보이지 않는 구멍을 내며 아리게 관통합니다. 

 

  그 구멍에서 슬픔이 주룩주룩 새어나올 것만 같아... 곧잘 담배를 입에 물곤 합니다. 꽉 깨문 입술에 담배 이 녀석의 신음소리가 배어들어 흠칫 놀라기도 합니다. 아~! 너도 나와 같은 생이구나! 너무도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왜? 라는 질문을 놓아버렸을 때... 나 역시 누군가의 입에서 이렇게 쪽쪽 빨려서 사라지고 마는 한 생인 것을~ 

 

  순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이 세상 그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파스칼이란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저는 바람에 흔들리는 존재를 읽어내는 그의 눈빛에 놀라긴 했었지만, 이 명언 보다는 다음의 말이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구멍이 있다."

 

  너무도 빠르게... 너무나 바삐...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어딘가로 가려 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한 번쯤 이 깊은 심연의 구멍의 실체를 보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앞장 서서 어딘가로 가려는 사람과 사물의 눈에는 절대 보일 수 없는 그 구멍 말입니다.

 

  저물 무렵... 그리고 어둠이 고요히 내려오는 그런 시간에 어쩌면 나, 너, 우리들은 가장 맑고 순정한 시간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백석의 그 처연하게 아름다운 시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요.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는 것들은 /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만들었으니 / 한없는 슬픔과 사랑 속에서 살게 만드신 것이었다"

 

  뒤에 남아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는 아마도

자신의 마음 속의 구멍을 아프게 들여다 보는 심안을 지닌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당신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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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지 않는 아이들을 기다린다

이 이른 아침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직선으로 달려가고 있고

시계는 둥근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문득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는

저 구석구석의 쓸쓸한 책상과

허공을 받친 채 견디고 있는 의자들을

바라보다

문득

너를 생각한다

아픔이거나 슬픔이거나

달뜬 희열이거나 가라앉는 우울이거나

집이었거나 부는 바람이거나

바람부는 길이었거나 길 위에서

별을 바라보는 집시였거나

그 무엇이었거나

너무도 흔하게 떠드는 사랑

그러니까 문득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不在를 쓸쓸하게 기다리는 건 아프다

서럽다 그러나

서럽다는 말은 어쩌면

네가 지금 여기 오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직 오지 않아

비어 있는 저 허공의 막막함을

너의 없음을

내 그리움이 내 기다림이

사랑이라 감히 부를

내 마음이 채워넣지 못할까 두려워서일지도

그러니까

문득

나는 네가 아프다

 

 

 

--- 너무도 이른 아침... 무거운 가방을 메고 제가 맡고 있는 반의 어린 벗들은 하나 둘 집에서 나와 이 교실로 터벅터벅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을 지으며 들어오지만, 매일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학습노동의 피곤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얼굴들. 순간 어떤 통증이 가슴 한 켠을 찌르르 찌르고 갔구요. 시계를 들여다 봅니다.

  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어린 벗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몇몇의 어린 벗들의 책상과 빈 의자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감고 길 위를 걷고 있을 그네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습니다.

  그러나 감은 눈으로 진정 보고 싶었던 건 결국 그리움의 무늬였습니다. 부재와 결핍은 늘 아리지만 그리움을 낳을 수 밖에요. 그리움이 번지면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구요.

 

  그리움과 그 그리움이 불러 일으키는 기다림의 자세는 결국 어떤 것일까를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너'의 부재와 결핍을... 그 구멍의 심연을 진정 채울 수 있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너'의 부재와 결핍은 '너'로 인해 메꿔지고 채워지는 걸까요?

과연 그건 가능한 일일까요? 설령 '너'의 실존이 '나'에게 다가오고 살을 맞댄다고 해서 그 부재와 결핍이 완벽히 채워질 수 있을까요?

 

  '너'가 오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기다림의 자세는 바로

'나'의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으로 지금 여기 '너'의 부재와 결핍을 끝없이 채워넣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람이 부네요. 바람을 온 몸 온 마음으로 맞으러 바깥으로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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