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유용주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 일찍이 동양의 현인인 노자께서 상선약수(上善若水--가장 최상의 선은 물이다)’라는 말을 써가며 부드러운 물의 힘을 극찬했던 이래...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라는 진술은 너무나 흔하고 지극히 당연한 레토릭이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이 시는 이제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굳이 마음이 아니어도 머리로는 당연하다고 여기고 또 옳다고 끄덕이는 그 부드러움의 가치에 대해 시멘트라는 아주 이질적인 소재를 끌어와 새롭고 신선하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먼저 시멘트라는 제목을 읽고 난 후,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라는 1행을 읽어 보십시오. 무척 당황스럽지 않으셔요? 그건 저나 여러분의 생각이 시멘트하면 떠오르는 어떤 단단한 벽돌같은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평소에 머릿속에 박혀 있던 시멘트가 주는 굳고 단단함의 이미지와 부드러운 것이라는 진술이 우선 충돌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2행에서 그 상반되고 충돌했던 이미지의 당황스러움은 조금씩 풀립니다.

  ‘가루라는 말... ~ 화자는 지금 시멘트 포대에 담겨있는 시멘트 가루를 보고 있는 것이군요. 부서질 대로 부서져서 부드러운 가루로 존재하는 그 시멘트의 현상태.

  화자는 그 시멘트 가루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 본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묘한 아픔과 반성을 그 안에 담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자 혹은 시인 자신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지요. ‘과연 나는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 본 적이 있을까?’

 

  주변에 건물을 짓는 공사장이 있다면 한 번쯤 머물러...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지그시 살펴보십시오. 시멘트 포대가 열리고, 쏟아져 내리는 회색의 가루들... 그 부드럽고 철저하게 부서진 가루들이 부드러운 물과 만나 섞이는 모습을... 부서진 가루와 부드러운 물이 만나 점점 뭉치고 뭉쳐지는 시멘트의 모습을... 그 시멘트가 바르고 발라져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건물의 모습을...

 

  놀랍지 않습니까?

  부서지고 부서져 더 이상 부서질 수 없는, 그런 뼈아프게 부드러운 가루가 되어 본 사람만이 진정 강해질 수 있다고 이 시는 일갈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 앞에서 문학이 어쩌고... 사는 일이 어쩌고...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고 연대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힘주어 말하곤 했던 제 자신에 대해서...

 

  과연 나는 부서질 대로 부서져 본 적이 진정 있었나?

  진정 나는 그 고통의 부서짐과 자기 단련의 과정을 거쳐 단 한 번이라도 단단해진 적이 있었나?

 

  이 때의 솔직하고 가장 적절한 답변은 오직

  ‘부끄럽다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너무나 아픈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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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김재석

 

   

사람의 눈에

나무가

땅에 뿌리박은 사람으로 보일 때

 

나무의 눈에

사람이

걸어다니는 나무로 보일 때

 

 

 

---오늘도 어김없이 저 중동의 가자지구에서는 피의 냄새가 자욱히 깔린 포성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념이든 종교든 돈냄새나는 자본이든... 이유가 어찌됐든 간에 광기의 폭력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전쟁과 학살은 이 세계에서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자부하는 인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한껏 스스로를 자부하는 인간,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건 그런 뛰어난 인간들이 지금껏 서로가 서로를 죽여왔으며, 자연스럽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마저 목 조르고 파괴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쌓고 만들어 온 이 문명과 역사라는 빛나는 성채 속에는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결국 죽음과 죽임의 세월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죽임의 피해자 대다수는 어린이와 여자, 그리고 힘없는 자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폭력과 광기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였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이런 세계에, 과연 진정한 평화는 진정 다가올 수 있는 것일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땅에 뿌리내린 나무가 인간의 눈에 사람으로 보일 때 가능하다구요.

나무의 눈에 인간들이 걸어다니는 나무로 보일 때 가능하다구요.

 

  몇 일 전 동네 뒷산에 올랐을 때, 눈을 감은 채 나무를 껴안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던 한 여자아이를 보았습니다.

그저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이나 바라보는 저나 말없이 평화로웠습니다.

 

  오늘밤 가까운 산책길에 꼬옥

나무를 꼭 껴안아 보시기를 평화를 다해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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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인숙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  단 두 줄 짜리 이숙희 시인의 '기적'이란 시 기억하시나요? 

  오늘은 그 시보다 딱 한 줄 더 많은 시 한 편 소개합니다. 울적하거나 마음이 푹 가라앉을 때...  무뎌진 감각 때문에 왠지 무기력하고 기운 빠져 멍 때리고 있을 때...  읽으면 톡~하고 신선한 물방울이 입 안으로 부터 몸 전체로 퍼지는 듯한 청량감과 생동감을 주는 시들을 많이 쓰신 분이 바로 이 황인숙 시인인데요. 그녀의 그런 감각적이고 발랄한 상상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읽을 때마다 묘하게 재밌으면서 동시에 아픔을 주는 시가 바로 이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시에 뭐 어려운 게 있나요?

  오래 전에 '엘리 시겔'이라는 외국 시인은 'I'(나) 라는 제목의 시를 써놓고... 딱 한 행으로 묻습니다. 'Why?'.  이 한 행의 물음에는... 도대체 나란 존재는 '왜 태어났고', '왜 성장하고', '왜 밥을 먹고', '왜 누군가와 관계맺고, 사랑하고 있으며', '왜 아파하고 이별하며', '왜 죽어야' 하는가 등의 일체의 삶의 존재에 대한 모든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황인숙 시인의 이 시가 그 '엘리 시겔'이 던졌던 화두 같은 'Why?'에 대한 하나의 재치있으면서 절묘한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삶과 존재에 대한 의문(?)에서 모든 생은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사는 일이 그 지난함과 막막함과 안개같은 모호함을 2행의 말줄임표(……)가 말없이 말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곤, 뚝 새침을 떼듯이... 딱 단호한 표정으로... 화자이자 시인은 말합니다. 의문투성이의 삶이고 막막하고 지난한 삶이지만, 어쩌면 '사는 일'이란 '외상값' 아니겠냐고! 마침표를 탁 찍으면서...

 

  마지막 마침표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그 앞 세 음절의 단어와 함께~~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사실 '사는 일'이라는 게 무언가에게 누군가에게 조금씩 빚을 지며 사는 게 아닌가? 하고... 또한 '삶'이라는 건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에게 무언가에게 조금씩 진 그 빚을 조금씩 되갚고 갚는 과정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랑도 그렇지만... 시도 길이가 중요한 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짧아도 감동과 깊이가 있어야 좋은 사랑이고 좋은 시겠지요. 이 폭염의 무더운 계절에 두고 두고 오래 곱씹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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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이숙희

 

 

 

세상은 다시 봄

세상을 다시 봄

 

 

 

 

--- 아무리 춥고 시리고 아파도... 겨울은, 봄이라는 희망의 예감 때문에 견딜 수 있는 한 시절일 겁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다가오는 봄은 정녕 봄이었는지요? 그저 일없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한없이 웅크려 보낸 시간은 아니었던가요?

  언제나 시간의 흐름 따라 이 세상엔 다시 봄이 왔었고, 오고, 또 오겠지요. 그렇지만, 어김없이 오는 봄 앞에서 과연 세상을 다시 들여다 보는 그런 지혜의 순간을 나는 가져본 적이 있었나? 하고 뒤돌아 보면... 휴우~ 아프지만 없었네요, 없었습니다.

 

  쾅~ 문을 닫아 걸고 방문을 잠근 채 그저 유리창을 내다보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자에게 그저 봄은 그 흔한 봄일 뿐. 결코 다시 봄은 아니겠지요.

  얼어붙은 동토의 길을 걷고 걸으며 오래 앓고 아파한 사람, 그 아리고 쓰린 고통의 계절을 꽉 껴안고는 끝끝내 버티고 이겨낸 사람에게만 봄은 다시 봄이겠지요. 그 봄은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사랑의 눈을 주겠지요.

 

  이미 지나간 봄을 생각하며 음미해 보시라고... 오래 전 제 비망록에 적어 둔 시를 꺼내 읽어 보았습니다. 두고 두고 보고 또 되새김질해 온 시이건만 아직 저는 다시 봄을 맞은 적이 없습니다.

 

  다시 올 그 추운 겨울 지나

  당신은 꼭 그런 봄을 맞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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