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퍼온 글] 안데스 민속음악

 

 

20년간 안데스 민속음악을 연주해온 에콰도르 출신 그룹 뉴깐치냔(Nucanchinan)의 Album.
* 뉴깐치냔 (Nucanchinan)은 '우리들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
에콰도르 원주민들 언어인 께추아어입니다

 

Sisay - 나 같은건 없는건가요







SISAY는 남아메리카 잉카문명의 후손들로서 안데스의 음악과 문화를 소개하고자
세계적으로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그룹이다.
SISAY는 1984년 에콰도르에서 오타발로(Otavalo)의 젊은이들로 결성되었다.
북아메리카 및 유럽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한 후
1994년도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했으며,
한국과 싱가포르에서는 1998년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 외에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행사와 콘서트 등
여러 형태의 공연을 통해서 안데스 민속음악을 많이 알리고 있는 그룹이다.


'SISAY'라는 말은 에콰도르 인디오들의 언어인 케츄아어로
'Spiritual Blossom'(꽃이 피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Achakachi

 

Chulla Pargati

Alturas

Ecuador Inkas

Jatarishum Guambritos

 

잉카(Inca)문화의 중심지였던 안데스 산악지방에서는 원주민 음악(잉카족이나 아이마라족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가 서반아음악과 조화를 이루면서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혼합음악이 생겨나게 되었다.

초기에는 3음계(do, fa, la)가 사용되는 Quechua 음악의 특성이 주조를 이루었으나 식민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인디오적인 영향은 점점 줄어들고 유럽음악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7음계가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주요 악기로는 하프와 토착민의 피리인 께나(quena)와 갑옷쥐(armadillo)의 등껍질로 만든 차랑고(charango)라는 이름의 작은 기타 그리고 까하(caja)로 통하던 유럽식 베이스 드럼이 있으며, 카리브해의 섬나라들과는 달리 바이올린 계통의 현악기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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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코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물고기는 물을 모른다.' 물고기는 물 밖에 나와 봐야 물이 무엇인지 안다고 강준만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물고기는 물 속에 있을 때에도 물을 알 수 있다. 물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구분짓는 것은 주어진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물고기의 의식이요 마음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런 강준만 교수의 말의 뒤집기가 저자의 말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저자의 말을 달리 표현했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의 한국 사회의 분석과 한국인의 이해는 주로 사회과학적이고 주어진 사회환경을 이해하는 데 있었다. 또한 한국인의 의식의 해석은 주로 외국이론의 수입이거나 외국의 이론 틀을 갖다 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한국인이야말로 한국인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인맥을 맺고 있는 수백명의 사람들, 수천명의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한국 사회학자들의 한국인에 대한 설명은 주로 사회구조적인 설명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의식에 대한 설명도 자신의 입장에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다. 선거철이 되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지고 강해진다. 이러한 기존의 한국인의 이해에 대해 저자는 사회과학 이외의 심리학, 인류학, 인구학, 인문학의 성과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특성을 주어진 현실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바른 이해야말로 현재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국민들의 의식을 해명하게 해준다. 이런 듯 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보면 다시 바뀌어버린 국민들의 의식을 이해하게 해준다. 펼쳐진 환경과 외부적인 사회구조는 이러한 국민적 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 기여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의식은 다시 현실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코드로써 작용한다. 이제까지의 사회과학적 분석은 중간과정이 생략된 사회적 환경과 구조의 변화와 그 원인에 치중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빨리 빨리와 냄비 근성, 최고 최대 최초에 대한 집착, 정실주의와 가부장주의, 쏠림 현상, 지도자 추종주의, 단기적 극단과 장기적 중용이라고 하는 그의 코드들은 한국 사회 현상과 국민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아주 실증적이면서도 명쾌하다. "부분 속에는 전체가 존재하고 전체 속에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존재의 법칙이 유효한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하루 하루의 사건과 정보 속에는 한국인의 의식을 해명하는 코드가 존재한다. 뛰어난 학자는 그 전체와 부분이 현실에서 어떻게 연관되는 지를 보여주는 데 자신의 소임을 둔다. 그것이 성공하면 정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현실 이해의 코드가 되며 실패할 때에는 쓰레기더미처럼 쌓이는 종이조각일 뿐이다.

  한국인 코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쏠림현상과 지도자 추종주의는 급격한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되었고, 국민적 행사에 국민적 힘을 모아내는 구심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대중 추종 현상과 정치 주체 의식의 부재와 독재 정치의 초래를 낳기도 했다. 정을 바탕으로 한 가부장주의는 급격히 진행된 물질사회의 부족함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권위주의적 가족 형태와 사회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국 현실을 이해하는 코드는 '마음의 코드'다. 주어진 현상과 한국인의 특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도 마음의 문제이다. 냄비근성이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가는 것에 촛점이 있다면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되지만, 깊이를 추구하지 못하고 빨리 식어버려서 대충주의식으로 흘러간다면 사회적 정체를 초래한다. 한국인 코드의 이면인 마음에 타인을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마음이 동기가 된다면 그런 현실을 창조해갈 것이고, 내가 좀 잘 되야지 하는 마음과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현실은 이기심과 이기심이 충돌하여 빚어내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대고 묻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성찰하자. 우리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자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성찰"이다. 그 깊은 성찰로부터 펼쳐지는 세상이야말로 한국인을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펼쳐나가게 만들 것이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세계를 아름답게 담아내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한국인은 무엇인가? 나를 이해하고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코드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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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내가 왜 오지도 않을 그녀를 그곳에서 기다리게 되었는지....

학교 건물 옥상에 앉은 까마귀의 울음 소리가 너무 슬퍼보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흐린 잿빛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져내리는 눈발때문이었는지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운 하얀 종이위에 새겨진 글들을 차마 건네지 못하고

종이 위의 글들에 담긴 마음을 하나 둘씩 어둠 속으로 숨겨버려야 했던 날들

교정 앞에서 매일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 속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을 만들기 위해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들이

산너머로 번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변했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의 어색한 시간들에

나의 내면이 차분해지는 시간이 좋아지게 되었다.

그 날도 그랬다.

발목까지 눈에 잠기어 발의 감각이 점점 무디어져가고 있는데

잿빛 하늘에서 눈은 멈추지 않고 펑펑 쏟아져내리는데

오지도 않을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들이

어느새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으로 변해갔다.

왜 초조하지도 않았는지 슬프지도 않았는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이 우연히 새로운 눈을 뜨게 했을 때

내게선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시 봄이 와서야 비로소 나는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봄비가 내리면 늘 혼자서 바다를 찾곤 했다.

지금도 첫눈이 오면

그 때가 생각난다.

올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 것인가를 지켜본다는 것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

이미 와 버린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해지면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이유요

무심코 지나가는 내 머리위로 비둘기가 똥을 싸고 날아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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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필라의 아침
퍼디넌드 해롤드 / 일지사 / 1981년 9월
평점 :
절판


  붓다의 생애를 이렇게 시적인 표현으로 기록할 수 있다니...책 자체가 하나의 시같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생애가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이 가능하다니...분명 붓다는 시적인 삶을 산 성자였다. 또한 시적 비유가 주는 삶의 교훈만큼 진리에 근접할 수 있는 매체를 아직 보지 못했다. 저자나 역자나 자신의 마음을 이 책을 써내는데 모아서 오로지 작업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빛나고 텅 빈 무아의 작업에서 이 책은 탄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필라의 아침에 여명이 밝아오고 밝은 아침의 빛이 궁전의 뾰족한 첨탑 위에 비치면서 시작되어 온누리를 밝히는 햇살로 바뀌듯 진리의 햇살도 온 세상 온누리에 비친다.

  붓다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세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붓다의 탄생과 구도의 과정,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지혜를 사람들에게 전해 세상을 구원하는 과정,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기만하는 배신자들과 그들을 대하는 붓다의 넓은 마음, 그리고 다시 깨우침과 진리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이다. 마치 손을 뗄 수 없는 한 편의 영화처럼 책 속으로 푹 몰입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밤들이 책을 덮고 난 후에는 마치 한 편의 영화같다. 정말 꿈같다. 어젯밤 두 아들의 울음과 재촉 속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지치고 노곤했던 시간도 아침여명이 밝아오니 모두가 지나버린 한바탕 꿈일 뿐이다.

  모든 이야기의 비유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실적인 비유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내어야 되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보면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부처님의 생애보다도 더 정확한 부처님의 생애가 될 것이다. 삶은 늘 우리들에게 환영과 꿈처럼 나타났다 스러져간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이 우리들의 인생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진짜 현실이다. 따라서 비록 짧고 문학적인 형식을 띄었지만 이 책만큼 부처님의 생애를 잘 보여준 것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의 마지막 여행에서 만난 소지기 다니야와의 대화가 마음에 쏙 들어왔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보고 반해버린 말이었다.

다니야는 노래했다.

이 몸은 쇠젖을 짜고 있네.

식탁에는 맛있는 식사가 기다리네.

나는 강가에서 아내와 자식과 더불어 즐겁게 지내지.

우리 집은 지붕이 튼튼해.

기둥도 튼튼해.

아궁이에서는 따뜻한 불이 타고 있지.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소지기 다니야의 노래에 붓다는 또 다른 노래로 대답했다.

 

이름은 분노를 벗어 버렸네.

어리석음을 벗어 버렸네.

나는 강가에서 하룻밤을 지내지.

우리 집은 지붕도 없고 기둥도 없다.

욕망의 불은 모두 꺼져 있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붓다와 소지기는 계속 노래를 주고 받았다.

 

쇠파리는 가축들을 귀찮게 하지 않네.

소들은 푸른 풀밭에서 맛있게 풀을 뜯고 있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나는 튼튼한 뗏목을 짰다.

해탈을 구하기 위해 저어간다.

욕망의 세찬 물결을 건넌다.

마침내 해탈의 언덕에 닿는다.

더는 뗏목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이 몸의 아내는 착하고 순결하고 진실하다

나는 아내와 수십년을 살아왔다.

그녀는 친절하고 유쾌해서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이 마음은 자비롭고 진실하다.

나는 이 마음을 수십년간 닦아 왔다.

이 마음은 친절하고 행복해서 모든 이를 가르친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나는 노예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하다.

노예들에게 삵을 지급한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나는 노예가 아니다.

노예도 갖지 않는다.

이 마음이 나의 주인이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우리는 소가 있고 송아지도 있다.

소를 지키는 개도 있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내게는 소도 없고 송아지도 없다.

지키는 개도 없다.

그러니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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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04-2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야와의 대화는 숫타니파타에서 봤습니다. 저도 인상깊게 봤어요. 내리고 싶으면 내리려무나, 하늘의 비여! 하고 따라 말하고 싶었지요.

달팽이 2006-04-2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셨군요.
대화 후에 다니야가 붓다의 발치에 몸을 던졌던 이유이군요.
 
장욱진 이야기
최경한 외 / 김영사 / 1992년 1월
평점 :
절판


  선생님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인터넷에 올려진 서재지인의 페이퍼를 통해서였다.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서재마실을 하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앉은 그림이 좋아 유심히 쳐다보다가 퍼왔다. 아이들이 괴발괴발 그린 것 같은 그림이 단순하면서도 뭔가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마치 먼 곳에서 지나가는 바람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그렇게 담아두고도 그 후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우연히 최근에 또 서재지인이 올린 그림을 보다가 이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

  장욱진 선생님을 존경했던 사람들은 우선 선생님의 삶에 반해버렸다. 그림에 몰두해있을 때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작업에 열중해 있다가도 작업이 없는 공백기는 그야말로 술로만 살았던 특이한 이력이면에 그의 예술세계와 삶에 대한 자세가 사람들에게 많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자화상'을 쳐다보면 시원하면서도 곁을 쳐다보지 않게 쭉 뻗은 길... 그 속에서 단정한 양복을 입고 모자와 우산을 들고서 평온한 모습으로 걸어온 한 신사....노란 논길인가 밀밭길인가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풍요로우면서도 여유로운 그의 인생길을 쳐다보게 한다. 아마 선생님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나무 한 그루와 몇 점의 구름 그리고 새 네마리가 자유롭고 느긋하게 나는 모습...

  당신의 아내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부탁받은 지 10년이 훌쩍 넘어서는 어느 날에 화실로 들어가서 일주일동안을 식음과 수면을 전폐하고 그려낸 그림... 그리고 문을 열고 아내에게 그림을 던지면서 쓰러져서 석달동안 사경을 헤매이었던 이야기도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을 지켜봐야 그 사람됨과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돋보인 작품이다. 경봉스님과의 만남에서 '뭐 하는 사람인가?'하는 물음에 '까치를 잘 그립니다.'라고 하는 대답 속에 자신의 지위나 명예보다는 그림 그리는 자신을 말하는 모습에서 경봉스님도 사람됨을 알아보게 된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부분의 작가연보에는 백성욱 선생님과도 함께 어울리었던 시간들이 도인은 도인을 알아본다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단순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는 그림, 전혀 사실성과는 관계없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마음을 쫓아본다. 진묘묘의 그림을 한참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왠지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내의 자신에 대한 마음, 그것은 늘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보살의 마음이었을까? 뼈대만 남은 그의 그림은 자신의 삶처럼 일체의 군더더기를 생략하고 자신의 삶의 핵심을 위해서만 자신을 소모시켰던 그의 삶과 정신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는 도를 추구했던 것이다.  도의 그림을 담아내기 위한 일체의 형식의 생략과 치열한 구도의 삶이 그의 인생을 요약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삶의 모습이 어떠하건 그 삶을 모습 이면에 그가 추구했던 정신세계를 보는 것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만나는 길이 아닐까? 다시 청명해진 봄 하늘 위에 그의 그림 하나 하나를 그려보면서 나는 그가 그림을 통해 닿으려했던 잡히지 않는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잡을 수 없는 봄의 소리를 듣는다. 들을 수 없는 봄의 햇살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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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5-0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욱진 아내-진진묘
이 그림 아시죠?
단순의 극치입니다. 정갈함속에 꼿꼿한 단아함이 풍기는 아내의 그림이죠.
막걸리 값 대고, 화구값 대느라고 기름장사, 책장사 마다하지 않은 아내.
예술가로서의 장욱진은 좋아하지만
생활인으로서의(가장) 장욱진은 싫어합니다.^^

달팽이 2006-05-0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체의 군더더기를 생략한...
한 마음으로 만들어낸 작품인 것 같았죠...
뭐라할까?
선생님의 정신세계가 아주 단순하고도 형이상학적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우님이 언젠가 올리신 자화상이란 그림도
가진것이 양복 한 벌, 모자하나에 우산 하나이지만 그래도 넉넉하고 풍요로운 보리밭길을 그것도 시원하고도 곁가지없는 한 길을 따라가는 자신의 삶이 바로 마음 속에 가진 세계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2006-05-05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5-0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캭! 그렇군요..
왜, 진진묘를 진묘묘로 읽었을까?
근데 제가 마음으로 존경하는 분들은 어찌 그렇게
똑같이 세속의 삶으로서는 남편으로서 또는 아버지로서 꽝인지 모르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