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일기 - 잠든 나를 깨우는 100일간의 마음 공부
김홍근 지음 / 교양인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협심증에 당뇨가 있는 아버지가 감기를 앓은 것은 2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냥 감기려니 생각하고 집안 식구들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급기야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계시게 되었고, 식구들은 병원에 모시고 가려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다 낫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도무지 나아질 기세가 보이지 않자 다시 종용했으나, 고집은 그대로였다. 급기야 사흘째가 되어 자신도 이것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대학병원으로 바로 가셨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폐의 한 쪽은 완전히 하얗게 찍혔고, 다른 한 쪽도 드문 드문 보이는 흰 점들이 상태가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다가 협심증에 당뇨수치도 높아서 의사의 말로는 당분간이 위독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온몸이 흔들릴 정도의 기침에다가 손과 얼굴을 비롯한 온몸 근육이 심하게 떨리고 첫날을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의 마음까지 공포 속에 갇히게 만들었던 합병증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죽음'이라는 말을 가까이 던져 놓았다.

  우선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가 큰 문제였다. 어머니가 봐주시던 아이를 이리 저리 맡길 곳을 찾아 헤매이어야 했다. 그래도 장인 장모님이 가까운 곳에 있어 다행히 아이들 문제도 당분간 쉽게 해결이 되었다. 아이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녀석들까지 신경쓸 겨를이 우리에게 없었다.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가장 앞에서 우리들의 벽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간에 공부게을리했던 것이 많은 후회가 되었다. 정작 가까운 이의 죽음이 와서야 정신이 든다면 늦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죽음이 오기까지는 열심히 닦을 일이다.

  그런 중에 이 책이 잡혀졌다. 당장 사람이 위태로운데 무슨 책인가 하겠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의지처를 찾는데에는 마음을 잡아주는 책이 필요하다. 나보다 나이가 열네 살이나 많은 저자도 이렇듯 열심히 공부하며 사는데 젊은 나는 게으름을 있는 대로 피우며 사는 생활이 반성되었다. 좋은 스승의 지도를 통해 하루 하루 수행하며 적은 100일의 참선일기는 때로는 밝아지는 마음의 눈을 떠가는 즐거움과 보람을 알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짧은 깨우침의 순간을 버리지 못하여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경험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언제나 온누리에 가득한데 '자아'라고 하는 것이 그 앞을 막고서서 우리들의 참된 진리의 인식을 방해한다. '배고플 때 배고픈 것을 아는 자'라는 현웅 스님의 말씀도 우리가 에고의 작용을 하기 전에 배고픈 줄 알고 숨쉬는 줄 알고 보고 느끼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생각하는 그 자체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시선을 돌리면서도 어떤 생각을 하면서도 이 생각과 시선과 읽는 행위가 인지되는 그 무엇에 마음을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아직은 자아라는 너무나도 큰 벽이 나의 앞에 드리워져 있음을 알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글을 이해하려고만 하면 책장은 잘 넘어간다. 하지만 한 단어 한 단어 그 말의 뜻이 떨어지는 곳을 마음으로 짚어가다보면 막히는 곳 투성이다. 한 장도 그냥 넘기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의문을 들고 또 다음 장으로 넘어가서 또 의문을 보태고 이런 식으로 책을 넘기다 보니 의문에 의문을 보태어져서 또 한편으로는 희석화되어 버린 의문의 찌꺼기들만이 남아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위험한 고비를 넘긴 아버지는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과 생활과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남은 생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번 계기를 통해 아버지와 마음이 맞지 않았던 내가 아버지를 연민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번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가 인생의 끝에 서서 삶의 진실을 끝내 마주하지 못하고서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더욱 많이 공부하고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우리가 움켜쥐려고 하는 삶이란 사실 너무 연약한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그만 조건만 변해도 우리들의 삶은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영원한 것인양 잡고 움켜쥐고 욕심을 부린다. 밖으로 주어진 억만금의 보물이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마음 속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이번 기회가 다시 나에게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발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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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10-0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의 죽음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건강하게 사시다가 고요하고 편안하게 가셨으면 하는 것이 매일 아침 108배에서 빠뜨리지 않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번 일을 계기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_()_

달팽이 2006-10-02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혜덕화님..
둥글고 둥근 마음 나누는 한가위 되길 바랍니다.

비자림 2006-10-0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좋은 일이 있으셨군요. 고비는 넘기셨다고 하셨지만 많이 걱정되네요.
님, 힘 내시길! 아버님 손 많이 잡아 드리시길!

이누아 2006-10-0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 관세음보살 _()_

파란여우 2006-10-0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란게 내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지요.
그럼에도 결국엔 마음을 다잡아 먹는 일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고통이 중심을 잃지 않는 나침반이 될 수 있기를 멀리서 철없는 누나 기원합니다.

달팽이 2006-10-0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그렇게 하지요..고맙습니다.
이누아님, _()_
여우님, 마음만 다 잡아 먹으면 달리 할 일이 없겠지요..
공부해야겠습니다. 고마워요.
 

  시간은 지속이다.

존재하는 것은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시간은 나를 삼키는 호랑이지만, 내가 곧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소진시키는 불이지만, 내가 곧 불이다.

세상은 불행히도 리얼하고, 나는 불행히도 보르헤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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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10-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많은 상처를 잊게 해 주는 바람이지만, 내가 곧 바람이다.

보르헤스의 말에 한 번 궁시렁거려 보았습니다. 이 아침 철학적인 글 만나서 반갑네요. 저는 내일 비행기 탑니다. 그리운 얼굴들 보고 오면 더 마음이 여유있고 예뻐지겠지요? 달팽이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달팽이 2006-10-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그리운 이들을 찾아 떠나는 추석여행이 즐겁고 행복했으면 합니다.
그리운 이와 좋은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출처 : 니르바나 > 책사랑하기를 가신 님처럼 ...

독서광 故 정운영 `책갈피에 흘린 눈물`     -2006년 9월 27일 (수) 09:16   파이미디어



"추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셨다. 어림잡아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으로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고(故) 정운영 선생의 후배 윤소영(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가 고인을 추억하며 <프레시안>(2005. 9.25)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의 머리글이다.

지난 24일은 고인의 1주기였다. <한겨레>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온 그의 칼럼은 저널리즘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토해낸 글은 바로 `책에 서린 세상과 정신에 띄우는 연서`였다.

`책사랑`이 대단했던 그는 유학시절 부터 책을 모으기 시작해, 무려 2만1천여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1972년 벨기에 루뱅대학으로 유학, 그 후로 30여년간 한해 평균 잡아 6백여권을 읽었단 소리다.

올봄 유가족은 고인이 분신처럼 아끼던 책 1만6천여권을 모교인 서울대에 기증한 바 있다. 독어, 프랑스어 등 외서를 비롯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포함 유럽 경제학의 고전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운영 선생의 막역지우(莫逆之友)인 작가 조정래는 <한겨레>("종이책을 절실히 사랑한 마지막 사람이 아닐까 한다", 2006. 7.19)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4년 전쯤에 정형과 유럽여행 갔다 서점에 들렀는데 체 게바라 관련 책이 54종이 있었다. 아무리 관심이 있는 사람도 대여섯권 사고 말 텐데 정형은 신용카드로 54권 모두 샀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일시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정운영 선생의 책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인데, "만약 정형이 책을 사지 않았다면 집안 형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고, 더 오래살지 않았을까 한다"고 조정래는 말했다. 2만여권을 어림잡아 1만원씩 계산해도 2억원. 정운영 선생의 가족은 평생 전세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헛말이 아닌 듯싶다.

최근 선생의 1주기를 기념해 딸 정유신씨가 펴낸 고인의 마지막 칼럼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발문을 봐도 선생의 `책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는 귀인을 대하듯 책을 다루셨다. 읽던 자리에서 서표를 끼우지 않고 책장을 접는 일이 없었다. 무슨 책이 어느 책장 몇 번째 칸에 있는지 까지 기억할 만큼 한권 한권을 소중히 여기셨으니 책을 다른 용도로-이를테면 무언가의 받침(!)으로-사용하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책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칸칸이 달력 종이를 고이 접어 올려놓은 것을 보고 집에 온 제자들이 신기해했던 일도 있었다."

유고집은 곧 정운영 선생의 독서편력을 말해준다. <중앙일보>에 글을 쓰면서 내건 칼럼의 제목은 `정운영의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렇게 전해 들었다`는 뜻으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풀어내곤 했다.

선생은 2004년 칼럼을 쓰면서 최소한 두 번 이상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는 `10월의 크리스마스`(2004. 10.23)에서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샘터)을 읽고 눈시울이 붉어진 연유를 밝혔다.

그는 흔들리는 곳에선 책을 읽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조를 저버리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지하철에서 책을 펴들었다. 이날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여서 몸과 마음은 녹초가 된 상태. 그가 눈시울을 붉힌 대목은 이렇다.

`암 말기 환자인 젊은 엄마가 임종을 앞두고 아홉 살과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언제나 씩씩하고, 아빠가 새엄마를 모시고 오면 잘해드리라"고. 엄마를 묻고 온 날 형제는 아빠에게 "우리 항상 씩씩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새엄마를 데리고 오지 마세요"라고 편지를 쓴다.`

또 한번 정운영 선생을 울린 건 완연한 봄, 2004년 5월이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돈이 없어 꿈마저 작아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하 월세방에서 혼자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 주사를 찌르는 17세 당뇨병 소녀가 역시 중병으로 친정에 몸져누운 어머니를 향해 "엄마 아파서 미안해. 하지만 나를 왜 이렇게 외롭게 만들었어"하는 대목에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화끈했다..... 12세 우울증 소녀의 독백에도 마음이 스산했다. "부자가 아니라서 너무 싫어요. 공책도 아껴 써야 하고, 반찬도 김치하고 계란밖에 없어요."`(우리 모두 `도시락`을 풀자, 2004. 5.5)

칼럼에서 정운영 선생은 "생산력이 늘어났는데도 왜 부끄럽다는 생각은 점점 커지는가. 문제는 결국 소유의 많고 적음의 아니라 너와 나의 차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며 "이제 혼자 놓는 주사로 그을 외롭게 하지 말고, 김치 반찬에 퍼렇게 멍든 마음을 풀어주도록 하자. 그것은 성장이냐 분배냐 따위의 거창한 토론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시대 최고의 논객`이라 평가받는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남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진지로 불린 한신대 경상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이어 서울대 고려대 경기대에서 강의를 했다. 병석에서 구술로 완성한 마지막 칼럼 `영웅본색(2005. 9.8)`을 끝으로, 그는 보름 뒤 지병인 신부전증이 악화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혈연을 떠나 모든 인연을 얻는 삶, 작은 집을 버리고 세상의 집을 얻는 삶`(출가내인 이야기, 2004. 5.29)을 동경했고, `혁명시인` 김남주에게 빚진 마음(그가 남긴 칼과 피의 사랑, 2004. 7.10)이 있었던 고 정운영 선생. 역사적 사회주의가 실패할 즈음, 진보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세운 <이론>(1992)지 창간을 주도한 그는 평등주의에 가까운 학문(분배론)으로 학위를 받았다.

평생 가난한 지식인으로 살았지만 그의 왼쪽 심장은 언제나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뜨거웠다.

[북데일리 백민호 기자] mino100@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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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9-2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은 왼쪽에 있지만, 온 몸으로 골고루 피를 보내주어야 하지요.
위장도 왼쪽에서 죽도록 운동을 하고 pH 높은 위액을 내뿜는 중노동에 시달리지만,
간은 오른쪽에 치우쳐서 가만히 있으면서 온갖 영양분을 받아들입니다.
왼쪽으로 조금 치우쳤지만, 결국 온 몸에 골고루 산소와 영양분을 보내는 그분께 감사드릴 일이 아닐까 합니다.

달팽이 2006-09-2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지요..
온누리가..

비자림 2006-09-2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연해지네요. 얻어갈게요^^

달팽이 2006-09-2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연있는 사람이 보았으면 합니다.
고마움은 니르바나님께로 돌리죠.
 
세상 끝의 사랑
마이클 커닝햄 지음, 김승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196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 새로운 사랑과 가족의 형태를 그린 마이클 커닝햄의 작품이다. 사실 형태로만 본다면 새로운 가족에 대한 형성과 기존 가족 관계의 급격한 파괴와 변화는 지금의 트렌드이다. 40년 후의 미래사회의 모습이 그의 상상력속에서 되살아난 것일까? 그는 한 여자가 두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는 이상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삼각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관계이다. 육체적 관계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이 없어도 무방하다. 그저 세 사람은 각각이 서로에게 사랑과 연민을 품고 있고 그것은 아무런 꺼리낌이나 금기없이 서로간에 표현된다.

  커닝햄은 자신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동성애자이다. 동성남자와 한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그는 세상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자신의 삶의 형태가 비록 남과 모습만 다를 뿐,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가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보다 남자에게서 더욱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그는 이 소설 속에서 바비나 조나단을 통해서 자신의 성장과정과 내면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레이첼이 아기를 가졌다. 바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두고서 네 사람은 이상한 가족형태를 계속해나간다. 바비와 조나단은 식당을 운영하고 레이첼은 딸을 양육하면서 그들은 이상한 공존을 계속해나간다. 조나단은 레이첼의 딸을 마치 자신이 낳은 딸로서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가족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담아간다. 바비는 이런 관계를 수용하면서 아내와 딸의 공유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끝은 레이첼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자신이 심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두 남자에게 자신의 딸을 평생 짐처럼 지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과 딸이 그들의 곁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연극같이 이별의 장면을 준비한 그녀에게서 두 사람은 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비록 그녀가 지금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지라도 그녀의 딸 레베카만은 언제나 그 둘의 딸임을 잊지 않는다. 이 집과 그들의 유산이 모두 그녀에게 상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주제는 죽음이 된다. 인간관계의 영원하고도 되돌릴 수 없는 상실, 죽음 앞에서 그들은 남겨진 삶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단순하게도 모든 삶은 죽음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같이 삶을 꿈꾸었다는 사실과도 중첩된다. 위성같이 더 떨어지지도 않고 더 가까워지지도 않는 우리들이 살면서 맺는 가족관계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꿈꾸는 하나의 환상이다.

  새로운 가족을 꿈꾸는 것은 단지 인간의 욕망이 변용된 형태의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내겐.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서 떠나는 일련의 우주적 작용으로 주어진 새로운 만남과 관계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가족관계가 떨쳐버리지 못한 족쇠가 아니라 필연처럼 때로는 우연처럼 우주가 빚어낸 고맙고 감사해야 할 내 생의 과제이다.

주어진 가족 관계 그 자체에서 내 마음의 작용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하는 삶이 나에게 메세지를 준다.

너는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삶을 살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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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즐거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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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생 글쓰기에 이어 이 책도 손에 잡았다. 하지만 뭔가 더 마음을 끄는 글쓰기의 특별한 스킬같은 것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글쓰기가 늘 어렵지만 막상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놓으면 막 써내려가는 나의 글쓰기의 가벼움을 좀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때로는 날리는 듯한 글로써 일관성도 논리성도 결여된 빈약한 문장을 보면서 그래도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최소한의 사회과학적 글쓰기에 부끄러움이 적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책을 덮는 순간 바로 컴퓨터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 최소한 필기구로 하얀 종이에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간단한 전략적 사고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냥 자리에 앉은 나는 아무래도 시행착오를 더 거쳐야 하는 업을 가졌나보다. 글을 쓸 때 자신의 사고만으로 글을 이어갈 수 없는 글에는 반드시 책이나 자료, 또는 정보를 인용해야 한다. 그 인용할 자료를 어떻게 수집하여 고르고 정리하여 글의 어떤 부분에 인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끝나면 사실 글쓰기의 절반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은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과정과도 함께 한다.

  심리적 유혹이나 감정적 통제에 관한 오류도 흔히 범한다. 흑백논리에서 한 쪽에 몰입해야 한다는 유혹, 거대담론에 대한 결론의 유혹, 도식주의의 편리성이 주는 유혹과 과장, 몰입에서 오는 처리하기 힘든 감정 문제. 때로는 어느 한 쪽의 견해로 미끄러져버리는 나를 본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 50%의 결론이 정해져버린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거리두고 바라보기'가 필요하다.

  수사학과 국어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꼭 필요하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써 국어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거니와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담긴 원리와 의미에 대한 이해도 요구된다. 다석 선생님은 그 한글의 깊은 의미를 되살린 사람 중 하나다. 물론 한글학자 중에서도 그 의견이 분분한 것들도 많지만 이럴 경우에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바를 취하면 되겠지만 적어도 명백한 오기나 중요한 오류는 고쳐가며 쓰는 것이 필요하다. 짬짬이 우리말 바로 보고 쓰는 공부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시사 논쟁의 이해는 바로 내가 글쓰기에서 배워야 할 부분을 현실적으로 적용한 실전학습란이다. 고등교육을 받는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은 이런 글쓰기에 좀 더 훈련되어야 한다. 물론 실전 글쓰기에 앞서 실전 글읽기와 균형잡힌 인식이 필요하다. 양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이다. 논쟁적인 문제에 있어 상반되는 양자의 입장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이해하는 것과 그 논쟁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입장과 주장을 마음을 열어놓고 이해하는 것은 그 상충되는 의견의 합의를 이루어내는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담아내는 마음의 그릇을 넓혀야 비로소 전체적인 시각과 대안이 도출될 수 있다. 나를 넘어서 타인에게로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 나와 상반되는 타인에게도 그 마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열려야 한다. 비로소 나의 입장과 그의 입장이 나의 마음에서 서로 맞물리고 감아들어 내 입장만도 그의 입장만도 극단적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은 더 나아가 서로를 고려하면서도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놓치지 않게 되어야 한다. 사회와 세계의 흐름과 그것이 바른 방향인가에 대한 물음은 인간 사회와 지구 그리고 우주의 관계에서 되묻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비로소 그 속에서 나의 길이 보이게 되고 세상의 모든 갈등이 관계한 인드라망을 본 후에 내가 제시하는 결론과 대안은 아무런 사심없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너무 말도 안되는 결론인가? 그가 얘기하듯이 단순한 이념적 관점과 입장적 관점에서 벗어나 거리두기를 하면서 보다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관점과 사회적 구조와 흐름을 둘러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한 쪽으로 치우친 글쓰기가 되지 않고 상대방의 비판과 입장을 뻔히 알면서도 쓰는 글을 피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려면 결국 마음이 열리지 않고서야 어찌 말의 논리만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합의를 유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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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9-1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읽으시는군요.^^ 저는 글 쓰기를 좋아하지만 자주 안 쓰고 진지하게 안 임해서 그런지 아직까지 이런 종류의 책을 일부러 읽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이 세상에 여러 종류의 글이 있고,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추측하고 산답니다. 장르를 벗어나서 그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은 가장 많이 생각해 보았고 가장 잘 알고, 가장 말하고 싶은 분야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해요.


달팽이 2006-09-11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적으로 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다만 저의 글쓰기가 너무 엉망인 탓에 사람들이 읽기에 불편함이 많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아이들의 논쟁문에에 대한 수행평가를 지도하면서 그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더군요..

비자림 2006-09-1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쓰기가 엉망이라뇨? 당치 않으십니다. 근데 수행평가 지도상 책을 읽는다는 말씀에 감동이 이는군요. 좋은 선생님들이 많은 세상이에요.
저는 실업계에 있어 술러덩술러덩 넘어가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반성해야 하는데..^^ 되려 현실을 잊기 위해 장편소설들을 읽고 사는 시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