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도마 - 아프리카에서 온 메신저
말리도마 파트리스 소메 지음, 박윤정 옮김 / 정신세계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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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잃어버린 문명

서구의 물질문명은 과거로부터 지속되어온 문명을 파괴시켜버린다. 이렇게 한 번 파괴된 문명은 다시 복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 가슴아픈 사실은 그 문명의 파괴가 물질문명과 보이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처음 시작될 때 인류로서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진 창조주의 메세지를 지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겉모습으로는 편리해지고 안락해지고 풍요로워져가는 세상이 내면으로는 다시 돌이키기위해서 많은 시행착오와 무수한 시련을 거쳐서 개척해야 할 황무지로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아메리카에 살았던 원주민 인디언의 역사도 그렇게 사라졌으며, 호주의 원주민도 아시아의 원주민의 역사도 그렇게 사라져갔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또 하나의 역사인 아프리카의 다가라 문명도 서구문명의 침투 속에 그 자취를 잃어갔던 우리들의 잃어버린 미래가 되었다.

말리도마, 두 세계의 소통

아프리카 다가라 족의 한 원주민인 말리도마의 이야기는 그가 할아버지의 환생이라는 사실과 그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의 길이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박케 할아버지 아래서 조상의 전통과 자신의 미래 삶의 메세지를 받으면서 자라다가 어느날 아침 갑자기 서양적인 삶으로 내던져진다. 거기서부터 15년동안 외부로부터 강요된 서구적 사고방식과 삶을 익히면서도 자신의 내면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한다. 15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그 곳을 탈출하게 될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족의 일원으로서 입문식을 거치면서 자신의 본래 모습과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그는 두 세계를 동시에 이해하고 자신의 안에서 두 세계가 소통되는 공간을 가지게 된다. 두 세계의 소통은 부족의 세계와 서양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내면적 진리의 세계와 인생이라는 꿈으로 드러난 현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두 세계의 소통은 체험되어져야 하는 마음을 직접 마음으로써 소통하는 세계와 그것을 드러난 글과 언어로서 소통하는 세계와의 소통이다. 사람의 마음이 글로써 모두 표현되고 드러난다는 서구문명의 발상에서 이젠 마음은 사라져버리고 표현하기 위한 포장인 글과 언어의 화려함과 치장만이 남은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문명 세계다. 그렇다고 글과 언어를 버릴 수도 없다. 세상의 변화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에서 드러나 인간의 몸을 받고 생겨난 이 세상과 세상이 나고 들어가는 그 세상과의 소통이 필요하듯 마음의 세계와 표현된 언어의 세계를 소통시키는 것이 현대의 과제다. 그 두 세계에 대한 소통이 그 스스로의 삶의 과제이자 부족의 과제로서 그에게 부여된 과제가 된다.

병든 기억

서구적인 삶은 물질적인 삶에 중심이 있는 삶이다. 외부적으로 마음을 투사시키는 세계이며 자신의 내부와는 단절된 세계이다. 세상 물질의 법칙과 그 지배에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세계의 너머를 보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바로 응시하는 데에 두려움과 공포를 갖는 세계다. 우리들 역시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고 그러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들은 몸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병든 기억들을 떨쳐내지 못한다. 외부로는 끊없는 욕망을 투사시키지만 안으로는 텅 비어 있는 유령들이다. 그 외부로 투사시키는 욕망은 또 욕망을 따르고 그 욕망은 또 더 깊은 욕망을 따르고.... 그렇게 꼬리를 물고 따라간 우리들은 자아라는 커다란 벽에 부딪힌다. 그 최초의 자아에 대한 인식은 또 그것을 고형화시키는 기억과 또 기억으로 인해 우리의 존재가 딱딱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억에 의해 파악된 세상을 이전과 같이 변함없이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도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의문을 버려라

때로는 그러한 진실을 직면하지 못하여 편하게 넘기는 방법이 의문이다. 나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문을 통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또 생각을 낳고 우리의 속은 더욱 복잡해진다. 어느 순간 우리들은 스스로 완전한 우주를 눈앞에 두고서도 문제투성이의 복잡한 우주를 창조해버리게 된다. 머리로서 진실을 알겠다는 욕심없이 주어진대로 가슴을 열고서 받아들이면 된다. 나에게서 그것은 어떤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함을 의미한다. 안다든지 모른다든지에 대한 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말리도마가 입문식을 통해서 겪었던 마법적이고도 환상적인 사실들이 바로 그의 마음이 빚어낸 형상들이 아닐까?

과거는 미래다

그는 결국 다시 서양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부족의 명령을 받는다. 두 세계에 대한 이해와 체험 속에서 그에게는 세상을 점점 물들여가는 서구 세계로 다시 나가서 부족민들의 삶과 정신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부족을 지키는 것이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닫는다. 물질적인 삶의 맹목적인 속도에 잃어버리게 된 과거의 정신적 유산은 물질문명의 폐해로 인해 인간이 다시 참된 삶의 의미를 묻게 될때 비로소 다시 되돌려야 할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힘들게 그리고 더디게 하나 하나 복원해내어야 하는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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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5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도적인 서구문물의 유입에 대해 아프리카인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낸다는 것이
현대 아프리카인들에게 숙제일 것입니다.

파란여우 2006-11-1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를 넘어 21세기 지구의 이야기군요.
경계를 구분짓는 건 서양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지요.
피자와 콜라와 컴퓨터를 외면하고 달팽이님과 제가 만날 수 있을까요?
모순의 소리 한 마디 더,
국악방송(라디오)를 즐겨 듣습니다. 오늘 거문고 소리를 듣는데 아, 미칠뻔했어요
전, 왜 이리 거문고라면 껌벅 죽어 넘어갈까요? 전생에 악사출신인게야...푸하하하
보내주신 책은 이불 속에 드러누워 한 장씩 읽습니다.
안녕, 달팽이님. 오늘 밤 별이 총총해요
그럼 나도 총총

달팽이 2006-11-15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nsa님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그들과 마음을 열고 소통하여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또한 그들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세기의 교훈으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것도 타자를 어떻게 우리가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 더욱 성숙함을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가라 문명이 잃어가는 그 영적인 것에 더욱 관심이 있군요.
여우님, 피자와 콜라와 컴퓨터를 외면하고서도 가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이 여우님이 올려다보는 그 하늘이라고 생각하지요.
밤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며 또한 그 별이 여우님의 올려다면서 마음의 총총함을 새기는 그 별이라 생각하지요.
은하수의 아스라히 빛나는 별 몇개 이불 속에 넣어서 주무시기를...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 - 5백년,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
이수광 지음 / 일송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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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다. 난세에는 명문도 나온다. 난세에 세상 민심을 대변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한다면 세상 민심의 가려운 마음을 긁어주는 글을 명문이라고 하지 않을까? 역사의 파란 속에서도 자신의 일신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부름에 나아갔던 많은 이들, 자신의 한 생명을 초개와도 같이 버림으로써 민족적 대의와 세계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많은 이들, 그들은 자신의 몸의 영욕과 부귀를 버렸지만 영혼의 안식과 성장을 꿈꾸었기에 세상의 마음을 얻었고, 후세의 가슴 속에 사라지지 않을 이름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피비린내나는 사화의 한가운데에서도 그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돌아올 것임을 알고서도 조정의 혁신과 왕을 향한 직언을 통해 사회를 바르게 세우고자 했던 사림들의 꼿꼿한 정신이 있었다. 기득권을 지키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부풀리려는 간신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주변 강대국들이 죄어오는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종묘사직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왕이 있었다. 왕조의 말기 피폐해진 서민의 살림과 관리들의 혹독한 횡포 아래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는 이유로 가혹한 학살로 내몰렸던 불운의 천주교도들의 삶도 있었다. 끝없는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도 가혹한 착취와 민권의 유린을 견뎌내면서도 외세에 흔들리는 국가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을 바꾸어보고자 그리고 새 세상, 인간평등과 자주독립의 꿈을 드높이 세웠던 동학농민군의 눈물이 있었다. 국권 상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약한 국력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힘없고 나약한 시대의 국민으로 태어나 비참하게 살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린 안타까움도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국모를 일본의 무사들에게 도륙당하는 것을 눈을 뜨고 보면서 조국의 주권을 빼앗기는 것을 울분과 한숨으로 지켜보아야만 하는 왕의 깊은 좌절과 고통도 있었다.

  2030년경에 한반도를 강타할 특급 태풍의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지구의 기상이변으로 해일과 특급태풍은 전례없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쓸어가는 그 태풍의 한가운데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하고도 쾌청한 하늘을 만들어내는 '태풍의 눈'이 있다고 한다. 역사의 파란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오직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자신을 바쳤던 이들의 마음 속에 바로 이러한 태풍의 눈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농민들의 인간다운 삶과 만인 평등의 세상과 남을 위해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해월 선생의 마음에서도, 거대한 구제도와 기득권의 횡포에 맞서 젊은 나이에 국가의 제도를 혁신하고 이상적인 유교사회의 꿈을 꾸었던 조광조와 많은 사림들의 마음에서도 나는 이를 본 듯 하였다.

  조선 후기 사대부 이응태의 부인 이씨의 <망부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신이 언제나 나에게 이르기를, 둘이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나와 어린 자식은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이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워 있을 때면 매양 당신이 나에게 이르기를,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 어찌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시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당신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어서 당신에게 가고 싶으니 나를 빨리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으니 슬픈 생각은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내 뱃속의 당신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고 해야 할까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생전에 펼치지 못하고 뜻을 접은 그들이 과연 후세에 무엇을 남겼을까? 하고 묻게 되자 나에게는 이씨 부인의 편지글에서 뜻밖의 답을 찾았다. "내 뱃속의 당신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 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고 해야 할까요?"가 바로 그 답이다. 그들의 마음이 후세에 그들의 글과 행적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격과 성품을 형성하여 오늘날의 현실에서 그 마음과 행동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의 정신적 아버지를 누구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과연 나의 정신적 아버지를 누구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격랑의 세월 속에 그 격랑의 시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내었던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마도 그 격랑의 시대와 세월이 고스란히 담기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그 격랑에 마음이 휩쓸리는 것으로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다하랴! 그들의 마음 속에 보다 넓은 세상과 우주를 품었다면 아마 그들의 행적과 삶이 조금은 가벼웠을런지도 모른다. 무섭고도 맹렬한 태풍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마음은 태풍의 눈에 머물고 있었던 삶의 스승들이 좀 더 아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 고로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는 말에 담긴 뜻이 더욱 나의 마음을 울리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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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들이 실제보다 '폄하'하는 조선조의 사상과 당시 인민들의 삶에
좀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망부가는 또 읽어보아도 애닯습니다..


달팽이 2006-11-20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조의 사상에는 좀 더 관심이 가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우선 퇴계 선생님과 율곡 선생님 남명 선생님과 조선후기의 연암과 그의 친구들까지....
망부가도 보고 싶군요..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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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기사를 읽던 중 중앙일보인가? 프레시안인가? 법정 스님이 FTA에 결사반대하며 일반인들에게 이 책을 필독서로 권한 것을 읽었던 적이 있다. 가트 체제하의 무역자유주의화의 흐름이 WTO체제의 성립으로 더욱 물리적인 힘을 얻어서 미국적 이익을 전세계적으로 관철시키려고 하는 가운데 칠레와의 협상과 더불어 미국과의 양자협상이 우리 사회의 도마 위에 오른 지도 이미 꽤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제조업과 공산품에 주로 부과되던 관세에 대한 이야기만을 주로 하던 각종 라운드와는 달리 FTA는 농업과 서비스업 지적 재산권 등 미국이 비교우위를 가지는 산업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미국의 이익에 맞서 우리는 FTA협상이 가지는 의미와 그 영향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가지지 못하였고 나아가 다른 유럽 국가들이나  일본 중국 등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이를 어떤 관점과 철학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준비하는지에 대해서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깜깜 무소식이다.

  그런 와중에서 KDI나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은 FTA 협상이 우리에게 불리한 점도 있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져 있는 기회의 공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80년대 밥솥시장을 일본에 개방하게 되면 우리 나라 밥솥공장은 망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더욱 좋은 밥맛을 가진 밥솥이 나와서 일본 제품들이 쫓겨 갔다는 사실과 세계 유통업계 1위 월마트가 결국 한국적 경영과 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출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FTA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비판적인 관점에 서 있는 농민과 재야 운동 단체나 민노당 계열은 FTA 협상으로 우리의 농촌은 초토화될 것이고 공기업이나 알짜 기업들은 모두 미국의 거대자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내적으로는 광범위한 중산층의 몰락과 더불어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FTA도 세계화와 자본자유화라고 하는 큰 물결 중의 하나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FTA에 대해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보를 가지기도 전에 우리들이 서있는 입장에서 또는 우리들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관점에서 아무런 검증없이 결론을 내리는 데 익숙해져 있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다. 한번쯤 FTA 현상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것이 사실이나 그 전에 어떤 판단을 요구받거나 이야기할 기회엔 어느 정도 부정적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GATT와 IBRD 체제와 미국의 세계 금융정책이 가진 본질적 성격을 나름대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르과이라운드와 동경라운드에서의 협상 내용과 자본의 자유화 그리고 다국적 기업의 세계적 활동의 흐름이 결국은 FTA라고 하는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냈고 그래서 그 현상도 기본적인 세계 경제의 흐름의 맥락에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보없이 선험적으로나 맹목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다. 우리 나라의 경제 성장에 대한 관점은 달리 내릴 수 있으나 그 경제 성장의 덕을 계급 계층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어느 정도는 보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 또한 경쟁 시장이 보다 값싸고 질이 개선된 상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우리들이 자랄 때의 삶의 모습만 뒤돌아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만이 좋은 삶이라는 생각은 아니다. 이러한 객관적(물론 이 말도 문제거리가 될 수 있다)인 정보의 필요성으로 우선 비판적인 관점에 서 있는 이 책을 인연이 되어 먼저 들게 되었다. 이후에 반대 관점의 책까지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있으므로 어쩌면 지금은 반쪽을 결론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FTA에 대한 비판은 우선 정부가 우리 나라 내부경제와 미국 경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없이 너무 성급하게 진행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농업은 대체로 우리 나라의 농업이 일부분만 남고 거의 파괴되는 것에 대해 대세라고 수용하는 분위기이고, 중소 기업과 공기업 그리고 심지어는 대기업마저도 미국의 주주자본에 의해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부는 정말 바보인 것이 아닌가? 다음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외교부가 그 어떤 정보에 대해서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상,하원 의회와 각 기업들이 모두 협상 내용을 검토하고 협상에 대응해서 대책을 수립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외교부를 제외하고 의회조차도 필요한 정보가 차단된 채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자국의 각 계급 계층과의 의사소통의 부재 속에 국민 전체의 운명을 담보하게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협상을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정부에 대한 극심한 불신은 이미 사회에서도 깊게 각 계급 계층 간의 갈등의 골을 만들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와 국가의 발전 방향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과 판단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떻든 경제규모만 부풀리면 만사해결이라는 식의 태도이다. 이런 철학의 빈곤은 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절벽을 향해 달리는지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는 트럭을 향해 돌진하는지) 그저 속도를 더욱 올리라고 하는 식의 정책운용일 따름이다. 이런 면에서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와 안전과 복지 위주의 평화주의 모델이라든지 스웨덴의 공장 중심의 사회적 합의모델을 통한 사회복지제도의 정착 또는 일본형처럼 고질적 중앙집권형 시스템의 폐해를 극복한 기술국가형이라든지 심지어는 나프타 체결 후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중산층의 몰락이라는 과정을 거친 멕시코의 교훈도 빠뜨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너무 철학도 없이 주변을 둘러봄도 없이 그저 속도만을 내고 있는 맹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둘러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연봉이 6000이 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조언대로 외국으로 이민을 가야 하는가?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버려둔채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외면하는 국가를 버리고 떠나가야 옳은 것인가? 그의 말대로라면 10-20%의 상류층만이 남아서 한국의 미래를 지켜봐야 하고 또 그 중의 양극화로 또 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한 국민은 이민을 가야 하고 그렇게 나중에는 국토마저도 미국에게 내어주어야 하나? 그가 내거는 마지막 대안은 조약체결을 다음 대선 이후로 미루어 정치적인 변화를 통해 협상의 내용에 변화를 주는 것이나 스위스의 경우처럼 국민투표를 통해 협상을 전면 변화시키는 안전장치를 두는 것이다. 지금처럼 입법, 사법, 행정의 3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행정부의 독주에 의해 유린될 때 국민들이 직접 국가의 중대사에 의견을 제시하고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적인 정착이 필요하다. 나아가 더욱 넓게는 국민 개개인의 욕망을 뿌리로 자라는 거대한 괴물인 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성과 그것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삶으로 나아가는 철학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더욱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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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1-0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생명산업의 기초인 농업의 몰락은 거대지질변동을 가져올 겁니다.
그 점 하나만 봐도 이번 협상은 바보짓이죠.
다 죽는건 아닐테지만 이번에도 그 해일의 공포는 역시나 민중에게 가해지겠지요
저는 미국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는 사실부터가 심란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새삼스럽지 않잖아요.
대통령이 한 말 중, 농민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면 될 것 아니냐는 말은
정책결정권자의 지도철학이 극명하게 나타난 예입니다.
무엇보다, 현실감각, 현장감각이 그에게 존재하는지 의문이구요.
기대했던(!!)대로 달팽이님의 FTA관점은 역시나 철학! 이군요^^

달팽이 2006-11-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것 벌써 내 바닥이 드러나버렸나요?
 
 전출처 : 니르바나 > [퍼온글] 작가 권정생, "교회나 절이 없다고 세상이 더 나빠질까"

한겨레 조연현 기자
» 〈강아지똥〉 〈몽실 언니〉작가 권정생 선생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69)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 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 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 명과
함께였다.

» ‘교회 종지기’의 나무 아래 예배 - 권 선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모자를 눌러쓴 채 얘기를 했다. 그와 수십 년 지기인 이 목사도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이렇게 말씀을 오랫동안 하는 것도 처음 본다”고 했다. 권 선생이 생전 처음 베푼 말잔치는 소리 소문 없이 온 산하를 물들여버리는 가을 기운 같은 축복이었다.

작가 권정생이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뜻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기도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여덟 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인간이 저지르고 하느님 뜻이라니… 천당 가는 것보다 따뜻한 삶이 중요

“할머니가 네 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 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한 권 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안동 /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 기자 cho@hani.co.kr

장애와 천대 보듬은 ‘몽실언니’처럼
자기를 녹여 꽃피운 ‘강아지똥’처럼

권정생의 문학과 삶 / 마을 뒤편 작은 개울가에
있는 권 선생의 오두막은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게 할 만큼 쓸쓸했다.
이끼로 덮인 바위를 지나 들어선 앞마당 잡풀
사이에 권 선생이 불을 때 밥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솥이 걸려 있었다.
오두막은 5평 남짓.(사진)
그러나 그도 평생 읽어온 책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사용하는 공간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는 0.3평이나 될까.

장애와 천대를 안은 채 살아온 가련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몽실 언니〉의 삶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 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서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 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밖에 안 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조연현 기자

'한겨레'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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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 옛이야기를 통해서 본 여성성의 재발견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는 이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과 기존의 지위에서의 이탈은 남성들에게는 이전에 여성이 부담했던 것을 더욱 많이 분담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주어진 일들을 나누어가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한 남성들에게는 이제 사회적 질시와 가족관계로부터의 이탈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물론 외부의 억압요소가 두려워서 서로를 배려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외부적으로 강요된 것이 아닌 스스로의 우러난 마음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누가 어떤 일을 나누어가지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못된다.

  가부장제와 함께 시작된 남성중심의 사회는 여성들에게나 남성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억압구조를 가졌다. 부족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만 하는 적자생존의 현실이 작용했음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인류는 외부적으로 주어진 강요를 스스로 내면화시키는 작업을 거쳐왔기에 그것이 우리의 마음으로 침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성들에게 가지는 의미와는 별도로 남성들의 내면속에서 억압당해서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던 남성 속의 여성성(아니마)을 생각하니 분명 여러 명의 상처입은 아이들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결국 남성성과 여성성은 하나의 뿌리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성(우주본성)을 말한다. 이 성이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분화되고 남여로 분리된다. 따라서 남성성의 부족한 점을 여성성이 메꾸어주는 면과 여성성의 부족한 면을 메꾸어주는 남성성의 면을 넘어선 곳에 그 자체로 완전하고 모자람이 없는 성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모든 분리의 문제는 해결된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분리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 속에 동시에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파악했다는 점과 그 여성성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영원성의 공간으로의 향수와 회귀본능을 그려내었다는 점이 이 책이 주는 메세지다. 그것이 옛 이야기 속에 어떻게 녹아들었으며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독창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땅(형이하학적인 세계)에서 허덕인다. 우리의 욕망과 감각에 의한 삶이 중심이 되는 이 곳에서는 여성과 남성 간의 문제도 욕망으로 드러나고 리바이어던과도 같은 끝없는 욕망의 괴물은 서로 간의 갈등을 키워가다가 어느 순간 상대방을 삼켜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땅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하늘(형이상학적인 세계)이라는 공간이 된다. 우리의 영혼이 저절로 꿈꾸는 그 곳에서는 이미 우리들을 스치고 간 선녀가 늘 있던 그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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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01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왔는데, 역시 좋은 리뷰를 만나게 되는군요. :) 아니마 아니무스를 생각하면 결국 인간은 둘이 만나 하나를 이루기보다 하나이면서도 둘인 완벽한 존재이길 바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어요. 아니, 하나인데 둘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바람을 접었다고 해야하나... -_-; 정리가 안되지만서도.. 으흣

제 안에 아니무스를 발견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그 모습까지도 수용하게 되길. 그리고 제 곁에 있는 사람의 아니마를 발견할 때도 자연스럽게 그 모습까지도 수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더 나이가 많이 많이 들면... 다시 한번 이런 바람을 떠올리겠죠.

달팽이 2006-11-01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사람이 만나기 이전 이미 각자가 스스로 완전한 존재임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 감사해요.

글샘 2006-11-0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녀는 금성에서 온 존재라고 하지요. 나무꾼은 화성 남자고.
그럼 화성 남자가 금성으로 찾아가든가 하는 수밖엔 없겠지요.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개인차는 남성과 여성 사이를 무한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는 것. 잘 읽고 갑니다.

달팽이 2006-11-0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성과 화성으로 갈라지기 전의 우주공간으로 들어가야 하겠군요.
우주의 블랙홀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