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 (책 + 독송용 포켓 금강경) - 읽고 싶은 경전 시리즈 01, 개정판
정천구 지음 / 작가서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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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 독송의 바른 법을 아직 정착시키지 못한 나는 다시 백성욱 선생님에게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선생님 아래서 공부한 방법으로 평생 금강경 독송을 해오신 정교수님의 금강경 해설은 말 그대로 도인이신 백성욱 선생님의 금강경 공부법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잘 정리해놓으셔서 이 책을 통해 금강경 독송의 가이드로 삼기에 좋다. 마음이 열린 분들의 글은 그 깊이를 체험하기까지 오래오래 스스로의 마음으로 묵혀야만 비로소 그 뜻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기 마련이다.

 

  백성욱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탐심은 끊을 것이 아니라 깨쳐야 하며 진심은 참을 것이 아니라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치심은 자기 자신이 잘 알 수 없으므로 평소에 자꾸 닦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이란 곧 제 잘난 마음이며, 탐심과 진심은 그래도 스스로 느끼고 닦아나갈 수 있지만 제 잘난 마음은 스스로 깨닫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발원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이시다. "제도하시는 용화교주 미륵존여래불 시봉 잘 하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각각 무시겁으로 지은 업보 업장을 해탈 탈겁하여 모든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해서 부처님 시봉 밝은 날과 같이 복 많이 짓기 발원"하고 원을 세우셨다. "제도하시는 용화교주 미륵존여래불 시봉 잘 하겠습니다. 이 물건 주는 사람, 받는 사람들이 모두 각각 무시겁 업보 업장을 해탈 탈겁하여 모든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해서 부처님 잘 모시기 발원"하고 축원하시기도 하였다.

 

  금강경은 3000년 전에 영산회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1250인의 제자들을 앞에 놓고 수보리 존자와 대화하신 것을 적어 놓은 것이니 그것을 읽을 때에는 자기 자신이 영산법회에 그들 1250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읽으면 된다고 하셨다. 뜻을 애써 알려고 하지 말고 꾸준히 읽으면 그 뜻을 자연히 터득하게 된다는 말씀도 하셨다. 또 금강경을 잘 읽고 싶으면 "모든 중생들이 금강경 잘 읽어서 부처님 잘 모시길 발원" 또는 "모든 중생들이 신심 발심해서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짓기 발원"하면 손쉽게 읽을 수가 있다고 하셨다.

 

  아침 처녁으로 금강경을 읽고 평상시에는 부딪치는 사물, 떠오르는 모든 생각에다 대고 '미륵존여래불'하라, 이 두 가지 공부가 결국 바치는 공부에 귀착되는 것이다. 바치는 공부는 마음 속에 넣어두었던 모든 것을 꺼내어 부처님께 드리는 것이니 불공으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매화 가지 위에 달이 걸렸는데 매화를 보고 나니 달은 이미 간 곳 없네.." 현재심을 이렇게 표현하시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백성욱 선생님께서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아오신 말씀을 올린다.

이 세상을 대할 적에 보수 없는 일을 연습하라

제 마음 가운데 미안을 머물러 두지 말라

이 세상을 모두 성인으로 보아야 한다

부지런히 실행할수록 몸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어 슬기가 생기니 이것이 곧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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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시민 불복종 세계를 뒤흔든 선언 3
앤드류 커크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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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의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진행되었다. 헌법을 무시하고 사익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국가운영의 기본정신과 국민주권을 무시한 죄로 박근혜는 민간인으로 돌아갔고 죄인이 되었다. 그 사건을 이루어냈던 수많았던 '촛불의 밤'은 150여년 전 미국의 월든 호수에서 시민불복종과 자연적인 삶을 주장하던 한 선각자의 씨앗으로 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불복종이란 말을 생각해보면 국가기관의 횡포에 시민이 스스로 나서서 문제해결을 하려고 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특히나 국가기관이 헌법에 보장된 그리고 천부적인 권리에 대한 탄압과 인간성과 생명성을 말살하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것에 반대하고 투쟁하여 정의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소로우의 삶은 역사상 많은 곳에서 회자되어왔다. 먼저 유럽에서 그리고 그 씨앗은 간디라는 사상가를 통해서 전해졌으며 그 뒤를 이은 마르틴 루터 킹 목사와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씨앗으로 심어졌다. 소로우의 의지 또한 랄프 왈도 에머슨의 정신적 영향을 받았으며 어느 시점부터는 갈라져서 사회초월적인 성격을 갖고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에머슨과 달리 국가기관의 잘못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행동했던 소로우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적이라 불리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면의 정신과 삶은 씨앗처럼 어떤 인연을 만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는 우리 모두는 하나의 뿌리와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간디의 사상은 소로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간디가 인정하듯이 소로우의 삶을 책으로 펴낸 헨리 쏠트라는 사람과의 만남으로 시대를 건넌 만남이 이루어졌고 간디의 평등사상과 대영제국에 대항한 비폭력저항과 독립운동, 나아가 인권운동까지 소로우의 씨앗은 이어져 있다. 하지만 소로우는 적극적이고 때로는 무장투쟁까지 불사하며 불복종운동을 진행하는 것을 옹호하였지만 자이나교의 종교적 심성과 어우러진 간디는 그것을 비폭력운동으로 승화시켜 더욱 강한 의지로 상대방을 강한 도덕적 부끄러움 속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세상의 씨앗으로 뿌려졌다.

 

  반전과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했던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목사인 마르틴 루터 깅 목사에게도 그 씨앗은 꽃으로 피었다. 보다 성숙하고 발달된 정신의 드러난 모습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심어져 결국엔 그 꽃을 피울 인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1968년의 전세계적 평화운동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져내려온 것이다.

 

  소로우의 삶은 국가라는 것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참다운 의미의 영웅, 애국자, 순교자, 개혁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들의 양심을 가지고 국가에 이바지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필연적으로 국가에 저항하게 되고 따라서 보통 국가로부터 적으로 취급받는다. " 즉 국가는 항상 지배하려 하고 다스리려 하고 또한 그것은 무엇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본다.

 

  그러나 굳이 홉스의 저작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이 국가라는 것의 상징성은 우리들의 삶 속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열린 마음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면 그 부당한 횡포와 부당한 지배가 우리들에게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소로우의 말처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에 대해 적극적이고 변절없이 저항할 수 있다고 했고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이정표나 나침반처럼 전해오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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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 다락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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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였을까? 앵무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실 이 책의 이야기에서 앵무새라는 말은 단 한 번 나온다. 핀치 에티커스 변호사의 딸이자 이 책의 주인공인 스카웃의 마지막 말 중 하나다. "그건 앵무새를 쏘아 죽이는 것, 그런 종류였지요? 그렇지요??"라는 말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거짓을 참지 못하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 항의하고 약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 나아가 적극적 자비로까지 나아가는 개념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아주 오래 전에 읽다가 일간지에 소개된 책을 보고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은 한 소녀의 관점에서 엄마를 어릴 때 잃고 변호사 아버지와 흑인 가정부와 세 살 위의 오빠와 함께 유년시절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미국의 근대화로 오는 시기의 미국의 흑백차별문제, 그리고 메이컴 지역에서의 특수성(이웰가족과 백인과 흑인들의 문화가 어우러진...)속에서 아이들이 홀로된 아버지 밑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며 선한 양심에 눈을 뜨면서 성장해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포레스트 카토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처럼 아이들이 감정과 분노와 연민과 화 등의 다양한 감정의 굴곡을 겪으면서 성장해가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 이겨내는 과정'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우선 핀치 에티커스라고 하는 변호사 아버지가 성숙하고 건전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양육과정에 얼마나 섬세한 마음을 쓰면서 보살피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결핍은 더욱 책임감을 더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모습을 보면 한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가정부 흑인 칼퍼니아 아줌마도 흑인으로서는 글을 읽고 쓰면서 깨인 의식을 갖고 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아이들의 양육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이러한 따뜻하고 열린 보살핌 속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젬과 스카웃은 엄마의 부재로 인한 트라우마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며 밝게 생활한다.

 

  이 지역의 신비스러운 부 래들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뭔가 비현실적이면서 사회의 갈등과 차별로부터 문을 닫아버린 듯한 폐쇄적이고 밀폐된 이 집의 아들 아서가 이 아이들의 성장을 오랫동안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는 사실과 자신을 숨기고 아이들과 교류하고 그의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점과 마지막으로 이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면서 세상 속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아서는 이 이야기의 끝은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회적 불의 속에 '선한 감정과 선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깨인 의식을 갖추는 것도 그 하나일 수 있지만 나는 보다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당연하게 그런 판단과 연민이 일어나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와 어울리고 배려하고 자라면서 얻은 사랑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인생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사회가 가지게 되는 일종의 '앵무새'가 아닌가 생각된다. 앵무새는 인간의 말을 흉내내고 그 인간의 말은 바른 마음을 담아낼 때 비로소 '양심과 선함'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앵무새를 죽이는 사회야말로 차별과 편견을 재생산해내며 그 부정의와 불합리 속에 권력과 명예를 쫓으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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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해탈의 서
파드마삼바바 지음, 칼 구스타프 융 해설, 유기천 옮김 / 정신세계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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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벳 불교의 고승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분 중 합 분이 파드마삼바바이다. 티벳 사자의 서를 직접 저술하여 티베트 동굴에 감추고 몇 세기가 지난 후 제자들과 그 자신의 화신으로서 그 책을 발굴하여 서양사회에 사후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정신적 쇼크를 가져온 책이다. 그 외에도 다수의 저서를 낸 그의 삶에 대해 추측처럼 전해오는 일화들을 들은 적이 있으나 이 책을 통해 그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파드마삼바바에 대한 붓다의 예언이 전해진다. "세상은 덧없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나도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울지 말아라. 내가 죽고 12년 뒤 우겐국 북서쪽 변경에 있는 다나코샤 호수의 연꽃에서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강한 존재가 태어날 것이다. 그는 파드마삼바바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며, 비밀의 교리를 확립할 것이다."

 

  이 출생에 대한 붓다의 예언의 출처나 그 배경지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모든 경전이 가진 신뢰성을 생각할 때 이 또한 그와 같이 존중받아야 하리라. 이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원본에 대한 해설본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마음에 쉽게 읽히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리라는 생각으로 다 읽고 이야기편으로 들어갔다.

 

  파드마삼바바의 전기 이야기는 연화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이 가진 일반적인 인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그래서 지혜의 눈이 열린 자라면 이 부분들을 어떤 상징과 의미로 읽어낼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쉽게 몸을 선택하여 다시 태어난다든지 푸줏간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육체를 먹는다든지 자궁 속에서 아이를 데리고나와 성장하도록 기른다든지....어쩌면 너무 문학적 상상력으로 가득하여 신뢰가 감소하는 측면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아직 둘째권의 자기해방이라 부르는 마음 알기와 실재 보기의 요가 편이 더욱 마음에 들어왔다. 아직 내 마음의 성숙이 없어서 이 내용을 수용할 준비가 안 된 것이리라 생각하고 다음에 또 들 수 있는 기회를 살피면서 마음의 본성에 대한 글들을 반복하여 읽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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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연애시를 읽다 - 3천 년의 연애학,『시경詩經』의 비밀을 파헤치다
류둥잉 지음, 안소현 옮김 / 에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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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경을 다시 읽는다. 시경을 다시 읽으니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우선은 기원전 3000여년전에서부터 2500여년전까지 존재했던 시를 공자님이 가려뽑은 305편의 시가 시경이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점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의 보편적 교훈이 되는 글. 공자님의 말대로 '낙이불음, 애이불상'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는 단순히 사랑의 열정에 불타오르다 재만 남고 모두 홀랑 태워버리는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즐겁지만 음란하지 아니하고 슬프지만 몸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풀이처럼 사랑의 순수성이 있어 오늘날의 사랑이라는 말과 어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사랑의 감정을 바라보는 공자님의 깨친 마음의 경계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공자님 생전의 시들을 가려뽑았으니 그 시경에 담긴 평범한 청춘남녀의 감정을 순수하게 그대로 옮겼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유학의 기초는 수신에 있다. 그 수신은 몸마음 모두를 수양하는 것에 있다. 우선 한 인격체 안의 몸마음 수양이 된 후에라야 비로소 제가할 수 있고 능히 제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치국할 수 있고 나아가 평천하할 수 있다 한다. 그러하니 수신은 자신의 순수한 감정과 맑은 마음이 드러나 순수하고 맑은 사랑의 감정으로 표현되고 그것이 나아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랑하게 되고 가정을 이루니 그 첫 출발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비로소 나는 시경 300여편 중에 사랑을 읊은 시가 90여편으로 절대적으로 그 비중이 큰 이유를 다시 짐작하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능히 제가 할 수 있는 자는 이미 수신이 된 자이므로 치국 평천하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하니 나에게서 펼처져 상대방에게 가는 것은 절대적 숫자 1이 2로 나아가는 질적인 변화인 것이다. 그 다음 3이나 4나 그 밖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이미 1과 2의 의미가 다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편 이 시경의 사랑의 시편들이 지금에서야 다시 읽히는 이유는 바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든지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사랑'의 감정인 데에 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려고 했다. 살아있음의 가장 깊은 의미인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시경의 시편을 읽어보면 저절로 가슴 속에 어떤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감정을 매만질 수 있다. "구욱 구욱 물수리소리 모래톱은 다정스럽고 아름다운 요조숙녀는 군자의 배필이라네"라는 시편이나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이여,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그림움이로다"라는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이 메마른 중년의 가슴에서도 설레임이 솟구쳐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삶은 늘 첫사랑의 설레임같은 것일 수 있을 때 깨이고 열린 마음으로 순간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다음 시경의 문장들에 나타난 사랑의 언어들을 보면 그 시대의 남녀 사랑이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들이 자유롭게 연애하고 또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녀들이 감정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또 간절하고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시편들이 많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박하지 않고 그 욕망이 거칠지 않다. 그것은 그녀들이 표현하는 사랑에는 무거움과 절제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자유연애를 권장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할지라도 한 번 선택한 배필에 대해 인생의 끝까지 함께하려는 의지가 또한 거침없는 욕망의 한 편에서 보이지 않게 그 감정을 절제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교와 유학이 지향하는 사랑 이후의 가정의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여 끝내 사회질서와 가정의 구조를 정절로서 지켜내려고 하는 유교정신으로 이어졌을 터이다. 그러니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잡는 것처럼 위태로운 욕망의 말고삐를 절제와 균형으로 잘 돌려서 나의 수신과 가정의 안정과 나아가 치국과 평천하의 반석을 쌓아갔던 것이 아닐까?

 

  요즈음의 사랑의 치정으로 인한 범죄들의 기사를 볼 때면 우리들의 삶이 물질적으로는 달라졌다 하여도 정신적으로는 시경의 감정을 넘어서지 못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추구하였던 정신적 세계가 무언가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진다. 그것이 시경을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에서도 뭇사람들이 읽어야 하고 또 뭇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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