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12

추운 겨울을 나고서도 바짝 말라붙은 낙엽으로 가지끝에 매달려 바람을 맞고 있는 느티나무 잎사귀를 본다.

이미 옆 가지에 새싹은 돋고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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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9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2-0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문득 이 풍경이 눈에 띄인 것은,
내 마음에도 그렇게 놓아버려야 할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둘러보게 됩니다.
그러니 참 많더군요...

프레이야 2007-02-0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12812 숫자가 뭘 의미하는 건지요? 궁금^^

달팽이 2007-02-1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산 날의 수입니다. 혜경님.
 
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어린 아기가 웅크리고 있다. 때로는 분노에 가득찬, 때로는 좌절감으로 녹아버린, 때로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보이지않을 만큼 작아져버린 아이 하나. 어쩌면 이 모든 심리적 약점을 모두 갖춘 아이가 아직 우리들 가슴 한 켠에서 울부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를 내팽개친 채 우리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고삐를 쥐지 못하고서 우주 천지를 다니며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가 지나온 곳마다 폐허다. 상처투성이이다. 그 아이는 부정적인 양분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이 괴물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우리들의 인간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열쇠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아이에 대해 바로 쳐다보기를 주저한다. 두려워한다. 아니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런 이유로 그 아이는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겨져 있다.

  김형경씨의 치유의 첫단계는 바로 이런 자신을 '직면하기'이다. 그동안 꺼려했던 사소한 일 하나가 마음에서 눈덩이처럼 부풀어 나의 우주를 오염시키는 경험을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다. 그러나 그 눈앞을 가득 메운 문제가 사실은 그것을 제대로 눈 앞에 가져와 다정하게 쳐다만 보아도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끼인 작은 티 하나가 세상을 왜곡되게 만들듯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직면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듯 자신도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쳤고 그 시작을 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미 '직면하기'가 되면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이고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해도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 헤르만 헤세의 말은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해준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일부인 그 어떤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사실 자기 알기가 바로 되면 나머지는 불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장을 제일 처음 썼을 것이다.

  가족관계, 성과 사랑, 관계 맺기는 사실 그 영역이 독자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사례를 중심으로 그렇게 구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유아기 때의 가족 내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억압기제와 뒤틀린 욕망구조와 관련된다고 한다.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펀지같이 세상을 흡수하고 형성할 때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부모의 마음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문제행동이 성인이 된 지금에 있어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문제행동의 원인을 유아기때 형성된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500여권이 넘는 많은 심리학 책들을 읽고 정리해내었고 그것을 사람들의 경험을 분석함으로써 많은 사례적인 검토를 거쳐서 이야기한다. 자신을 알고자했던 그 치열했던 노력이 자신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게 했고 그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진단에서 많은 공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위대한 정신을 드러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우리가 과거에 자아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자아를 초월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

  심리치료는 현대생활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디딤돌의 역할도 충분히 해내리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론을 갖다붙여서 현실을 설명하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체험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주는 힘이 된다. 타인의 설명은 비록 한 순간의 이해와 해결을 가져올런지는 몰라도 결국은 나의 문제를 타인의 설명을 빌어서 넘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단정을 감히 한다. 물론 그 타인의 말과 설명이 자신의 삶을 더욱 잘 이해시켜주고 자신 스스로를 바라보게 도움이 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설명으로서가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체험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문제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보아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학문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치료가 가진 한계는 두더지 뿅망치처럼 당장 올라온 두더지의 머리를 방망이로 두드림으로써 그 구멍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구멍에서 올라오는 두더지의 머리를 순간 순간 힘껏 두드려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작가의 책을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이라는 책부터 거의 다 보아왔다. 그의 삶과 공부가 나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고 생각할 단서를 제공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와 같은 자기보기를 제대로 해낸다면 성격과 인격의 안정성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는 있을 것이라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단지 문제행동을 교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한정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녀가 말하듯이 삶의 성숙을 향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심리학과 종교적 영역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 인식이야 작가의 능력에 한참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덮으며 작가가 열어두었던 심리학의 한계 영역에(경계가 가물가물한) 눈길이 더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고 우리는 마음이 만들어낸 경계인가? 나 속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나이자 너이고 우리다라고 말한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나와 우리의 경계가 없다. 그러면 문제는 바로 나 속에 갖추어져 있는 그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감'은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타인의 마음이다. 나 아닌 타인의 마음..그런데 원래부터 우리는 쭈욱 '공감'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말 공감 그 자체였다고... 하나의 공감 속에 이미 천의 만의 공감이 다 갖추어져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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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놀라운 책이다. 릴리 프랭크의 자서전적인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살때부터 아버지와 별거에 들어간 어머니와의 동거를 통해 성장한 그가 아무런 가족관계의 결핍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지극하면서도 애틋한 사랑때문었다. A를 투입하면 B를 꼭 산출하고야 마는 솔직하고 단순한 기계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감동과 눈물을 산출해낸다. 한번도 자식에게 힘들다는 소리도 못하고 자신을 위한 것에 한 치의 마음도 쓰지 않았던 어머니의 헌신적이고도 순교자적이기까지 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진다. 그런 어머니 아래서 자란 아이가 잘못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 중 마음에 찍었던 하나의 별이 바로 지구를 향해 돌진해서 폭파되는 확률보다도 적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이 시원하게 보인다. 그가 올려보는 도쿄타워 주위에 넓게 분포된 별들 사이로 어머니의 시선이 따뜻하게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왜 이 책이 감동적일까? 왜 첫 장을 넘긴 손이 책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내어야만 마음이 해소되듯한 급속한 블랙홀 속으로 독자들을 빨아들였던 것일까? 지독하게 어려워서 수시로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녀야 했던 유년시절에도, 서로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아보이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살지 못하고 떨어져 살면서 결손가정이라는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이 모든 약점을 없이보이게 만들었던 어머니의 말이 없으나 뜨거웠던 그 사랑이 이야기의  전 공간을 따스하게 덥혀주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객관적이고 감정을 배제한 묘사를 해내려고 노력하더라도 이미 그와 엄마 사이에 놓여진 끊을 수 없는 질기고도 튼튼한 하지만 헌신적이면서도 애틋한 사랑 속에 모든 것은 이미 빨려들어가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가까이서 우리 인생을 나누는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진정으로 한 걸음이라도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이 감동적인 두번째 이유는 이 책을 덮고 나서 나의 가족관계를 둘러보게 되기 때문이다. 좀 더 친절하고 배려있는 말을 나누지 못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좀 더 어머니의 마음에 가까이 가보려 노력하게 한다. 그 희생적인 삶만을 살아오면서도 한번도 자신의 것을 가지려 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욱 따듯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더욱 깊이 주위 사람을 배려하게 만드는 책이 바로 이 책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 앞에서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 자신을 잃어버린 마음에서는 상대방의 마음만이 투명하게 비치기 때문에 우리는 어머니라는 존재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기만 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진정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물질적인 것은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으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동거 생활의 공간이었던 도쿄에서의 삶. 어머니는 오로지 자식의 뒷바라지만으로 자신의 작은 몸 누일 곳 하나 장만하지 못하고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동경행을 선택한다. 자신의 마지막 삶을 가장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도쿄에서 나는 다시 일상의 무관심한 자식으로 돌아가버리고 짧았던 어머니의 행복은 잠시 그렇게 지나가고 되돌릴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비로소 나는 묻혀져 있던 어머니의 삶을 조금씩 보게 되고 그 이면에 숨겨졌던 어머니의 끝없는 희생과 사랑을 보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씩 알게 되는데 이젠 더 이상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없게 된다. 정말 살아생전에 고쳐하지 못할 일을 두고 나는 샘물처럼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을 위해 마음을 쓰는 어머니의 사랑 앞에 서러워진 나는 다시 울고 다시 울고....그러다 육체의 극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팔에서 주사를 뽑고는 '이제는 고만 죽고 싶다.'고 말하는 어머니 앞에서 나의 미어진 가슴은 내려 앉는다.

  어머니는 죽기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도쿄 타워에서 세상을 내려보았다고 했다. 그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프랭키는 어머니가 죽은 몇 년 후 도쿄타워에 오른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도쿄는 의외로 죽음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도시의 삶 사이로 곳곳에서 눈에 띄는 묘지와 주검들이 죽음 앞에서 삶을 쳐다보게 한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과 죽음은 빙글빙글 돈다. 삶은 삶대로 빙글빙글 돌고 죽음은 죽음대로 빙글빙글 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빙글빙글 돈다. 우리는 이미 우리 관계 속에 있는 행복의 파랑새를 외면하고서 밖으로 허황된 꿈을 쫓고 있는 어리석은 멍청이일런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메세지이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인연을 갖고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하나되고 공유하는 마음없이 우리가 어찌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삶의 진정한 행복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가 죽은 후 벚꽃이 피고 지고 다시 벚꽃이 피고 졌다. 수많은 봄의 기억 속으로 어머니의 죽음의 기억들도 희미해져간다. 하지만 어머니가 프랭크에게 남기고 간 그 사랑은 아직도 그의 가슴 속에 남아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맞는다. 꽃의 삶과 죽음 사이에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가지와 줄기가 있고 또 그것의 삶과 죽음을 경험하는 뿌리가 있다. 피어난 것은 피어난 대로 소중한 인연이고 지는 것은 지는 대로 소중한 인연임을 우리는 뿌리 속에서 느껴야 한다. 늘 밑에서 우리들을 받쳐주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그 영혼의 뿌리 속에 어머니가 영원히 살고 있다. 그 영원을 향한 동경의 이야기가 그의 남겨진 이야기이다.  

 

P.S :  처가 무척 좋아하는 오다기리 조에 의해 영화화된 작품이 4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이 작품을 영화가 어떻게 그려내었는지가 궁금하다. 아니 이 작품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졌으면 한다. 삶에 대한 깨달음이 존재한다면 바로 프랭키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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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09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기사를 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달팽이님 서평보니까 더욱 읽고 싶어집니다. 거의 일본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인데 요것은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달팽이 2007-02-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같은 역사학도의 관심을 끄는 이 책은 괜찮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제 서평이야 뭐 무턱대고 갈겨 쓴 것이라...
님의 안목이 있음입니다. ㅎㅎ

프레이야 2007-02-1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오다기리 조가 나올 예정인가 보죠? 그 영화 봐야겠네요^^
책만큼이나 감동을 제대로 그려내야할텐데요.
달팽이님의 리뷰가 가슴을 적십니다..

달팽이 2007-02-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좋아하는 혜경님.
보시고 페이퍼를 남겨주세요.
님의 영화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군요.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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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직업적인 화학자이다. 그의 글은 화려하고 기교적인 문체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의 진솔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밖으로 나오게 해서 종이 위에 쓰기만 하면 되었다."라고 그가 말했듯이 이미 삶의 강렬한 체험으로서 그에게 남겨져있던 과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깊었던 절망과 잔인함의 기억들이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글 위로 옮겨진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밥벌이의 지겨움으로써 쓰여진 글처럼 뇌에서 집어짜내듯 써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저 그 쏟아져나오는 이야기들을 병두껑을 열어서 내보내는 것만이 살아남은 그의 육체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제목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하는 그의 물음 속에서 나는 인간존재의 깊은 바탕에서 올라오는 희망의 메세지를 읽는다. 보통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잊을 수 없는 고통과 깊은 절망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타락을 그려낸다. 물론 이 책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극한 상황을 아주 담담히 그려낸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와서 자신의 몸의 경험을 관조하는 듯한 자세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무감각이 아니라 그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사람들이 밟아가는 마음의 타락에 저항하면서 휴머니즘을 지켜갔던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겪으며 내뱉었던 극한의 절망의 말들, 하지만 절망이지만은 않은 말들을 들어보자.

"오,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대등하게 바람과 맞설 수 있다면...영혼이 없는 텅빈 벌레로 사는 이 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

"오늘은 무지개 빛의 가벼운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변함없는 물웅덩이 위로 맑은 하늘이 비친다."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수용소는 뚜렷하고도 거대한 생물하적, 사회학적 실험실이다."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 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시도 쉴 수 없다. 모두 절망적일 정도로 잔인할 정도로 혼자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단 하나의 드넓은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고 험하고 가파르며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

  수용소는 특수하게 환경지워진 하나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또한 삶이 있고 삶의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지금 이 곳과도 같은 인생이 펼쳐진다. 육체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사는 엘리아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함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그 결함들 덕분에 살아간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권력을 향한 투쟁은 치열하고 그 수용소 내에서도 인간적인 따스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꼭 닫아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앞에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 게 아니라, 그의 손에 좌우되는 도구였던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운 의심이 든다." 우리 사는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의심을 하지 않고 또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삶이 일상화되어버린 곳. 외부의 고통이나 타인의 죽음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자기보호기제가 작동하는 그 곳에서는 "어느날 내일이라고 말하는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라는 모토가 삶이 되게 살아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감각해지는 마음의 타락이 보편적인 공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생존을 위한 보호막을 작동시키되 권력구조에 의해 마음마저 타락시키지는 않는다. 그곳에서도 삶의 의미를 묻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생존을 나눈다.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되고 수용소의 구조가 파괴되는 시간동안 그는 병든 자들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킨다. 공동의 생존을 위해 협동하고 공동노동하고 노인과 병자를 보살핀다.

  그가 말하듯 순전히 운으로 살아남아서 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 그의 아우슈비츠 경험은 그의 인생을 더욱 폭넓고 깊게 만들어주었다고 말한다. 물론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간직한 채 말이다. 나아가 그는 전체주의가 20세기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비극을 만든 데에는 유대인의 역사적 행위에서도 그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 눈여겨보인다. 자신이 역사적으로 탄압받았다는 이유로 전세계에 흩어져서도 자신들의 유대감을 지나치게 강화하고 타 민족들의 눈에 띄게 단결하여 선을 그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아마 이러한 극단적 시오니즘이 선량한 유대인마저도 배반한 또 다른 전체주의는 아니었을까?) 결국 전체주의는 '우리'와 '타인'의 구별에서 시작된다. 독일의 나찌가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로서 게르만족과 유대족의 구별을 지은 것처럼...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자신의 삶의 성숙으로 받아들인 그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태를 보고 눈을 감고 있지 않는다.

"우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가지, 즉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베긴에 반대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베긴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적인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완전한 고립의 상태 속으로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이스라엘 지도부의 실수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을 억눌러야 한다."

  그의 말대로 전체주의는 얼굴을 바꿔서 우리 사회의 곳곳에 그 모습을 숨기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와 타인의 구별을 조장하는 어떤 작은 선동조차도 그것의 얼굴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역사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그 전체주의의 흐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식없이 동조하게 되거나 침묵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전체주의의 반대입장에 선다는 선언적인 말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전체주의는 아주 교묘하고 세련되게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며 정치인의 모습으로 상류층의 모습으로 아니면 노동조합의 모습으로 심지어는 소외받는 자의 모습을 하고서 우리 앞에 나타날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나아가서 나의 마음 속에 불현듯 나와 타인을 구별짓고 우리와 그들을 나누어서 타인과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싹틀 때에 우리는 이놈의 전체주의가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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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07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읽으셨군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의 한계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하세요.

프레이야 2007-02-0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써 외면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으로 공범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됩니다. 그 시대 독일인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들을 읽고 섬칫 했습니다. 부록에...

파란여우 2007-02-07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씨의 단골 손님인 프리모 레비.
시를 쓰는 일 하나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걸어 나온 이 사람의 자살은
목구멍을 울컥 적십니다.
몸에 문신으로 새긴 수인번호 174517의 삶은 우리가 지닌 민족주의의 허상이 남긴
공동의 상처입니다. 상처에 더께가 앉아있다고 잊혀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우리의 전체주의를 지적하셨는데 배트남전에서 우리가 자행한 죄질을 아직 용서를 빌지 않고 있지요. 이주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개인의 전체주의 신념이 막강한 권력을 얻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다 봐서 알고 있으면서 오늘 날 반복하고 있는 인간. 스스로 인간임에 간혹 살갗이 부르르 떨려요.

달팽이 2007-02-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그러게요. 인간에게 실망하다가도 왠지모를 희망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니까요.
혜경님/동감입니다. 내가 그 속에 놓였을 때 과연 내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우님/시원하게 설명해주시네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민족주의. 그것도 전체주의의 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선량한 마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도 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꽃과 벌
청안 지음, 이민영 옮김 / 김영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청안 스님이 제목을 이렇게 정한 데에는 숭산 스님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담겨 있다. 꽃과 벌은 숭산스님이 고봉 선사와의 최후 선문답에서 즉여의 답을 내리자 고봉 선사가 네가 꽃이 되었는데 내가 춤추지 않겠는가!하고 덩실 춤을 춘 이야기를 말할 것이다. 그래서 꽃과 벌은 줄탁동시의 이야기이자 우주의 피어난 아름다운 인연의 이야기일 것이다. 청안 스님의 법문에는 숭산스님의 기운과 어투가 그대로 살아 있다. 숭산스님은 가신 것이 아니라 여러 제자들의 가슴에 그리고 여기에 그대로 남아계신다. 어리석은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제야 비로소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즈음에 이 책을 만난 것이 반갑다. 하루 공부의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하고 낮에는 그 공부의 이어짐이 있어야 공부의 진전이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다시 공부방법에 대한 귀중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장 불교 서적으로 달려 나가야겠다. 절방법론에 대한 책을 찾아보니 서재지인의 리뷰가 하나 올라 있다. 아침시간을 좀 더 일찍 일어나서 108배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과중 틈틈히 반야심경 정도의 경전 염불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 중생인 나로서는 사실 하루에도 몸으로 짓는 그리고 입으로 짓는 업들이 많다. 그것을 순간 순간 부처님께 바치거나 정화하지 않고서 공부가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백성욱 선생님 말대로 미륵존 여래불 하고 순간 순간 바치는 것이 공부가 된다. 하지만 공부가 정착되기까지는 이런 저런 방편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에 몸에 맞는 옷을 고르듯 맞추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몸이 출가를 해서 출가인의 생활을 따르자면 그대로 맞추어서 생활하면 되지만 일상인으로서 방향도 없이 공부하는 나로서는 이런 좌충우돌을 두려워할 필요도 주저할 필요도 없으리라.

  한 사람의 지혜로운 사람이 나오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드리우는 광채가 크다. 그 주변의 사람들이 생활을 지혜롭게 하고 또 지혜의 길을 찾아가게 된다. 아직 익지도 못하고 세상에 나아가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을 스님은 "장님이 장님을 이끌고 간다"라고 표현하였다. 눈이 밝아야 상대방의 업장을 바로 보고 깨뜨려 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스님이 책 내내 강조하신 이 말씀을 옮겨보도록 한다.

 "내일 죽으면 어떤 몸을 받을 것인가? 이것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질문 아닌가. 서둘러라, 서둘러.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구름은 천상까지 떠다닌다."

  한 사람의 깨달은 이가 나오면 그 사람의 할 일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의 입장이 된다고 했다. 그 깨달음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인지, 국가와 사회를 위할 것인지, 전 인류를 위하는 것인지, 나아가 온 우주와 생명의 세계가 될 것인지 결정 된다. 그렇다고 수행하는 사람이 자신만 보며 살 것은 없다. 성인들의 모습을 따라야 하니까. 바로 내 옆의 사람에게 옮겨가는 화가 나에게서 멈추도록 노력하고 바로 내 옆의 사람의 마음에 환한 밝음의 꽃 하나 피워내도록 그렇게 살면 되는 것 아닐까?

  꽃이 피어나면 벌이 모여든다. 한 사람의 깨달은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에게로 정신적인 양식을 찾아 사람들이 모여든다. 같은 이치다. 그리하여 또 깨달음은 촛불이 옮겨가듯 옮겨가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정신적양식으로 먹고 사는 세상, 우주가 바로 극락천지이며 우아한 우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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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0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달팽이님 평안하시지요.
달팽이님 글 보러 들렀습니다.


달팽이 2007-02-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한사님.
입춘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걸음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덕화 2007-02-0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안 스님 만나셨군요. 축하합니다.
책으로 만난 인연이라도, 육신의 만남 못지 않음을 많은 서재인들의 글을 통해 느낍니다. 생활 속에 수행이 자리 잡기를.....

짱꿀라 2007-02-06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깨달음은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나 봅니다. 늘 올바른 깨달음을 위해 삶 자체가 진실되어야 할 텐데 저는 그러지를 못하니...... 좋은 하루 되세요.

달팽이 2007-02-0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겐 이미 그 가능성도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산타님의 방대하고도 멋진 자료에 요즘 제가 사료의 호사를 누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