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사진 한 장을 위해 목숨을 던진 기자 -로버트 카파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카파

1913~1954년, 41년의 생애를 산 남자.
어떤 위대한 역사가와 작가도 광포한 야만의 20세기를 이 남자처럼 사실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이 남자가 찍은 사진 한 장만큼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또 어떤 방대한 분량의 전쟁문학도 극한 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이 남자처럼 비극적으로 묘사하지는 못했다.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포토저널리즘의 신화(神話),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 보도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의 창립자…. 그 이름 앞에 붙는 형용어들이다. 그가 전 생애를 던져 찍은 사진 140점이 지난 3월 말부터 5월 26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다.

모든 사진기자의 우상이자 영웅이 된 남자, 그의 이름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다. 너무나 유명한 이름.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본명이 아니다.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먼(Endre Erno Friedmann)이 본명이다. 왜 그는 본명을 쓰지 못하고 영어 이름을 썼을까? 여기에 그의 생애를 규정짓는 운명적 역사성이 숨어 있다.

로 버트 카파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는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심부는 오스트리아 빈이었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그 주변부였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럽에 살면서도 비(非)유럽인으로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14년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가 한 살 때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프로이센(독일)과 한편이 되어 프랑스·러시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 그의 유년기 기억은 전쟁의 비참함과 굶주림으로 채워졌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생필품 부족은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경제난으로 인한 실업률 증가는 또다시 유럽 전역에 반(反)유대주의 기독교운동을 불러왔다. 반유대주의운동은 1930년대 들어 독일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 는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추방되어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베를린대학을 다니며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사진통신사 데포트(Dephot) 암실보조원으로 취직한다. 이것이 프리드먼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는 암실보조원으로 일하면서도 능력을 인정 받아 소소한 취재를 하게 된다.

1932년, 러시아의 레온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망명길에 오른다. 그 해 12월, 트로츠키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침 데포트 통신사에서는 트로츠키의 강연을 취재할 마땅한 사진기자가 없었다. 대신 취재를 나가게 된 프리드먼은 단 한 번의 기회에서 사진 특종을 건져 올렸고, 이로 인해 정식 사진기자로 채용된다.

1933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광풍(狂風)에 편승해 권력을 잡게 되자 유대인인 프리드먼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베를린을 떠난다. 프리드먼은 부다페스트를 거쳐 파리로 들어갔다. 파리는 반유대주의의 영향에서 비켜선 도시였다. 그는 파리에서 세 살 연상의 포르투갈 출신 사진작가 게르타 포호라일(Gerta Pohorylle)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1935년, 프리드먼은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가공의 미국인 사진작가 행세를 한다. 게르타는 프리드먼이 찍은 사진을 미국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것으로 꾸며 신문사에 비싸게 판매한다.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진작업을 하다 프리드먼은 로버트 카파로, 아내 게르타는 게르다 타로(Gerda Taro)로 아예 이름을 바꿔버린다.

로 버트 카파가 된 프리드먼을 세상에 알린 것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1936년 8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카파 부부는 인민전선 진영에 서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카파의 생애를 결정짓는 첫 종군취재였다. 당시 세계의 지성들은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우는 인민전선을 지지하면서 앞다투어 참전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파블로 피카소 등이 인민전선 편에 선 지식인이다.

1936년 9월, 카파는 인민전선 진영의 코르도바 전투를 취재한다. 인민전선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와 돌격하는 순간 머리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이 찰나의 장면이 카파의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진이 미국의 화보잡지 ‘라이프’에 실리면서 로버트 카파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로버트 카파는 전쟁 사진작가로 이름을 굳혔으며, 이 사진은 20세기의 전쟁기록 사진 중 가장 뛰어난 사진으로 평가 받게 된다.

1937 년 7월, 카파는 잠시 파리에 가 있었고 게르다는 혼자 전선에 남아 사진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르다가 후퇴하던 공화파의 탱크에 치어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듣고 카파는 보름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 카파 나이 스물넷. 한창 젊은 나이였지만 이후 카파는 평생 독신을 고집했다. 카파는 수차례의 스페인 내전 취재를 통해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알게 되고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게 된다.

1938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카파는 중국 대륙으로 발길을 돌린다. 카파는 6개월간 중국 대륙을 누비며 중일전쟁을 취재해 일본군의 만행과 잔학상을 세계에 알렸다.
1939 년 9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헝가리 국적을 갖고 있던 카파는 미국 입장에서 보면 적성국(敵性國) 시민이었다. 미국 당국에 의해 카메라를 압수당할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위기를 넘긴 카파는 1942년 미국 잡지 ‘콜리어스’와 계약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연합군에 종군하게 된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인… 1954년 베트남전서 지뢰 밟고 사망

카파는 1943년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탈환·시칠리아 탈환·나폴리 해방을 거쳐 이탈리
아 반도 전쟁을 취재한다. 2차 대전은 종군사진기자 카파의 명성을 또 한번 드날리게 했다.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 지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해안 상륙작전 취재였다. 연합군의 상륙작전 동행취재에 선발된 기자는 20명이었다. 이 중 사진기자는 네 명이었고, 로버트 카파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카파는 2차 대전 종군기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필맥)를 남겼다. 카파는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제1파 부대와 함께 상륙용 주정(舟艇)에서 뛰어내렸다. 카파는 총알이 쏟아지는 그 순간을 이 책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바닷물은 너무 차가웠고, 해안까지의 거리는 아직 100m 이상 남아 있었다. 내 주위로 총탄이 날아들어 물을 튀겼다. 나는 제일 가까운 철제 장애물을 향해 내달렸다. 병사 한 명도 나와 동시에 그 장애물 뒤로 뛰어들었다. 몇 분간 우리 둘은 장애물을 나눠 썼다. 그는 소총에서 방수포를 떼어내고는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해안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 그제야 안전하다고 생각한 나는 나처럼 장애물 뒤로 움츠리고 숨어 있는 다른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기 때문에 선명한 사진을 찍기에는 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의 정책참모들이 디자인한 초현실주의 작품 같은 장애물 뒤에 작게 움츠린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매우 효과적일 것 같았다.”

이때 카파가 찍은 사진은 모두 106장이었으나 ‘라이프’지 암실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쓸 수 없게 되고 10장만 살아 남았다.
카파는 1945년 초 또 한번 목숨 건 취재를 감행한다. 미군 제17 공수단 대원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독일로 침투한 것이다.
1945 년 6월, 카파는 파리에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나 2년간 연인으로 지낸다. 버그만은 딸을 둔 유부녀였으나 카파에 빠지고 만다. 종전 후인 1946년 카파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버그만의 권유로 잠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일에 관여하기도 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영화에서 손을 뗀다.

1947년 카파는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Magnum)을 설립했다. 1948~1950년 중동전쟁을 취재했고, 1950년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3년간 매그넘사 대표로 일했다. 1949년과 1951년에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때가 카파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중 ‘라이프’지로부터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카파의 친구들은 베트남행(行)을 만류했다. 이미 낙하산 침투 취재까지 한 경험이 있는 카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확률이 반반이라면 나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
카 파는 1954년 5월 24일 북베트남에서 프랑스전투 부대원을 따라 취재하던 중 타이빈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한다. 1차 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1913년에 태어나 종군기자로 다섯 전장에서 10년 이상 최전선을 지켰던 카파. 그의 마지막은 그의 생애만큼 영웅적이었다. 카파는 전쟁 혐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죽음으로 그 피날레를 장식했다.


/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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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퇴계 이황-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상)

한국 성리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큰 스승 이황의 관한 책을 이 기사와 함께 몇 가지 소개를 하려고 한다. 먼저 <퇴계 이황>(살림, 2007)은 ' 사단칠정론.성학십도.무진육조소'이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사단 칠정론과 성학십도는 어려워 그동안 전공자들 외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지만, 이번 이 책을 통해 좀더 퇴계 이황의 성리학 사상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퇴계 이황이 들려주는 경 이야기 - 초급, 중급, 고급>(자음과 모음, 2006)는 초, 중, 고등학생들 용으로 퇴황 이황의 성리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출판했다. <활인심방 - 퇴계선생의 마음으로 하는 몸공부>(예문서원, 2006)은 퇴계의 생애와 활심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책이다. <소설 퇴계 이황>(가람기획, 2005)은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 도서로서 뽑힐 만큼 내용을 검증받은 작품이다. 이 책의 특징은 퇴계 이황의 생애를 기본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읽기에는 무난 하리라 생각을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가장 널리 읽힌 서적을 세개만 더 꼽자면 <성학십도와 퇴계철학의 구조>(서울대학출판부, 2001), <퇴계선집>(현암사, 1982),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2003)이다. 특히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기대승과 이황이 주고 받은 편지로 이 글들은 아직도 주옥같은 문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어서 꼭 보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도서이다. 또한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 도서로 선정되어 있는 도서이다. 아울러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안에 퇴계선집이 들어있다. 읽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동아일보에서 난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2007. 4. 6. 경향신문) 퇴계 이황-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상)

퇴계 이황 당대에 세워진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의 산실이자 조선 성리학의 고향이다. 오른쪽 사진은 퇴계 선생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확대하여 동양의 정통학문으로 발전된 유학, 이름하여 수사학(洙泗學)이라 일컬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상과 학설이 첨가되며 발전도 했으나 때로는 침체에 빠지기도 했다. 마침내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와 끝내는 성리학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자리잡았다. 고려 말엽에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의 학문적 업적이 더해지면서 조선왕조로 승계되었다.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 성리학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정치와 학문의 기조로 여기면서 통치원리로 정착시켰다.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세워 공자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유학을 강(講)하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세워 선비들을 양성해냈다. 그야말로 유교천국의 나라가 세워진 셈이다.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경상도 예안의 온계리에서 태어나고, 중종 31년인 1536년에 강원 강릉의 북평촌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양대 산맥을 줄기로 하여 참으로 혁혁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른바 영남학파는 퇴계를 존숭하는 학파로, 기호학파는 율곡의 학통을 이으면서 조선 성리학의 두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퇴계는 태어난 다음 해인 6월에 부친을 잃었으니 돌도 지나지 않아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부인에게서 가정교육을, 숙부 송재 이우(李●)공으로부터 글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는 모두 닦을 수 있었다. 12세에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면 10세 전후에 벌써 학문이 크게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 20세에 ‘주역’에 몰두하여 밥 먹고 잠자는 일까지 잊을 정도였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아도, 약관에 학문이 익었음을 알게 해준다. 28세에 진사가 되고 32세에야 어머니와 형의 강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다. 34세에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급제 직후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편찮으신 어머니를 뵈려고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왔으니 37세에 끝내 어머니가 타계하고 말았다. 39세에는 옥당벼슬에 오르니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받았다.

학자로서 벼슬살이도 살았던 퇴계는 자신이 해야 할 본령이 학문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벼슬에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은 쉽게 여겼다는 뜻이다. 마음이 항상 학문연구와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선비로서 벼슬을 철저히 단념할 수가 없어 임금의 부름에 마지못해 응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퇴계는 43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에 오르는데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오면서부터 이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46세 때에 장인상을 당해 하향한 뒤 관직에서 해임되고는 고향에 은거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6세 이후부터는 벼슬을 받아도 나가는 경우보다는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50세부터 오늘의 도산서원 터에 하나씩 집을 지으면서 은거생활의 기반을 마련했으니 최초에 지은 집이 퇴계라는 개울의 서쪽에 있는 ‘한서암(寒棲菴)’이었다. 그 무렵 좌윤(左尹)벼슬에 있던 형인 이해(李瀣)가 억울하게 유배가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벼슬할 생각은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

▲1558년 율곡과의 만남

나아가기를 그렇게 싫어했건만 조정에서 벼슬은 계속 내려졌다. 53세에는 대사성, 54세에는 형조참의, 56세에는 홍문관 부제학, 58세에는 공조참판, 66세에는 공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해서 내리기도 하였다. 69세에도 의정부 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사직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대략의 벼슬살이 경력이다. 퇴계 연보를 보면, 50세의 2월에 처음으로 퇴계의 서쪽에 집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은거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의 선배인 농암 이현보를 찾아가 시를 짓고 함께 즐기던 생활의 기록이 있고, 이 무렵에 지은 시 한편은 바로 그 무렵 자신의 심경을 제대로 읊고 있다. 제목이 ‘퇴계(退溪)’라는 시다.

몸이 물러나오니 내 마음이야 편안하나                  身退安愚分
학문이 후퇴될까 늘그막이 걱정일세                      學退憂暮境       
시내 위에 처음으로 살 곳을 정하고보니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가에서 날마다 반성할 일이로세               臨流日有省


50세의 노숙한 학자 퇴계의 심경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벼슬에서 물러나 경치 좋은 시냇가에 살 곳을 정해놓으니 몸이야 무척 편안하지만, 행여 학문연구에 등한할까 걱정이 많음을 토로하고 있다. 공자가 개울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가는 것이 저것들과 같구나”라고 탄식했다는 ‘논어’의 글귀가 있다. 당한 그 순간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경계의 뜻이어서, 퇴계도 흐르는 물가에 이르고 보니 허송세월해서는 안된다는 반성의 마음이 앞선다는 생각을 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인 51세에 계상서당(溪上書堂)에 생활하면서 그 무렵 학자들이 글을 물으려고 찾아오는 수효가 늘어나자 도산서당을 영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던 어느날 조선의 천재로 조야에 이름을 날리던 젊은 학자 율곡 이이가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는다. 퇴계와 율곡의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다. ‘퇴계집’에는 기록이 없으나 ‘율곡집’에는 그들의 만남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율곡의 연보 23세 조항에 나와 있다. ‘봄에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뵙다’라는 대목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해는 율곡의 나이 23세이고 퇴계는 58세의 노숙한 당대의 대학자였다. 1558년의 봄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흠모하며 뵙고 싶던 퇴계,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도산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뵙다’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벼슬에서 물러나 제제다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계상서당에 은거하던 퇴계. 근엄한 노학자를 뵙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율곡은 우선 시 한수를 올려 바친다.

시내는 공자 마을 시내에서 갈려나왔고                      溪分洙泗派
산봉우리는 주자 살던 무이산처럼 솟았네                   峯秀武夷山
생활하는 살림이야 경서가 천권인데                           活計經千卷
살림집이야 초옥 몇 칸이로다                                     行藏屋數間
품은 마음이야 구름 갠 달처럼 열렸고                         襟懷開霽月
점잖은 말씀과 웃음 미친 물결도 그치게 하네              談笑止狂瀾  
어린 제자는 도를 묻고 구하려 함이지                         小子求聞道
반나절인들 허비하려고 찾아옴 아니올씨다                 非偸半日閒


퇴계라는 시내는 그 근원이 공자가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을 했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흘러나왔고, 산은 주자학이 완성된 무이산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면, 공자의 학문과 주자의 성리학이 모아진 곳이 바로 퇴계선생이 살고 있는 퇴계라는 시냇가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퇴계선생의 그런 높고 큰 학문을 듣고 배우려고 찾아왔지 그냥 시간을 보내며 놀다가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퇴계의 높은 학덕과 율곡의 구도정신이 함께 표현되었다고 보인다. 학문이 깊고 시를 잘하던 퇴계가 그냥 시를 받고만 말 것인가. 퇴계도 즉각 율곡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는다.

몸져 누워있어 문을 닫고 봄도 못 봤더니
그대 오시니 가슴 열려 정신이 깨는구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 알겠으니
지난 세월에 몸 경건하게 하지 못함 부끄럽네
잘 자라는 곡식이야 잡초 잘 자람 허락하지 않으며
노니는 티끌은 잘 닦아진 거울 그냥 안두네
지나친 표현의 싯귀야 모름지기 깎아내고
노력하고 공부하며 절로 친하게 지내세

평생 공경스럽고 겸허하게 살았던 노학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다. 기묘명현이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외손자로 신사임당의 아들이던 율곡은 세상에서 천재로 소문이 파다하던 젊은이였기에 퇴계도 이미 그의 이름을 기억했나 보다. 그래서 율곡의 수작을 들어보고 올린 시를 읽어보자,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알겠네”라며 율곡의 재주를 칭찬해주고, 곧바로 23세의 젊은 천재에게 어른으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학(正學)의 공부에 열심히 노력하여 학문이 제대로 익으면, 마치 잘 자라는 곡식에서 피가 자라지 못하듯이 잡된 학문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하여 한때 불교공부에 몰두했던 율곡에게 넌지시 정학에 분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흘러다니는 티끌이 있다면 아무리 거울을 닦고 갈아도 맑게 남아있지 않는 것이니 잡된 생각을 버려야만 맑은 마음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와 주자에 비긴 과장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겸손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대단한 학자들의 대화였다.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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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해제

(2005. 6. 18. 동아일보 -  책읽는 대한민국) 퇴계선집(퇴계문선) - 이황
 
유교 전도사로 자처하는 하버드대의 두웨이밍(杜維明) 교수는 항상 한국 지폐를 지니고 다닌다. 1000원권과 5000원권에 있는 퇴계와 율곡의 초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유학자가 화폐에 등장하는 예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하면서 조선이야말로 유학의 이념을 구현한 유일한 나라이며 그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은 유교가 아직 살아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라고 치켜세운다. 이러한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지극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가 퇴계와 퇴계사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퇴계가 한국 성리학의 주춧돌을 놓은 훌륭한 유학자이고 중국의 성리학자보다 더욱 정밀하게 주자를 연구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흔히 퇴계사상의 핵심은 이기론(理氣論)보다 도덕적 마음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데 있다고 한다. 퇴계는 욕망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순수한 영혼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덕적 직관이 가능하며, 성인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일반적인 마음은 기의 드러남이지만 도덕적 정신은 원리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이라는 독창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주장에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소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라는 조선시대 최대의 성리학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퇴계는 자신의 학설을 약간 수정하여 ‘행위를 유발하는 일반적인 감성은 기의 드러남이나 양심의 규제를 받고, 도덕적 감성은 이가 드러난 것인데 기에 의해 현실화된다(七情氣發而理乘之 四端理發而氣隨之)’고 한다. 아마도 퇴계는 도덕을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퇴계는 도덕적 감성을 일반적인 감성과 분리하고 이를 기에서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고 지적인 훈련보다는 감성적 수양(敬)을 중시하게 된다고 한다.

거칠지만 쉽게 요약한다고 해 보았는데 현대의 한국인이 이해하기는 역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퇴계선생문집’을 단지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적어도 한국의 지성인이라면, 그리고 참된 선비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학문적 고집은 있지만 제자뻘인 후배와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이고, 고고한 선비이면서 매화가 피었다고 술에 취할 수 있는 인간 퇴계는 그의 글을 읽어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퇴계 선생의 글을 직접 접할 필요가 있다.  ‘퇴계선생문집’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다 읽기 힘들다. 퇴계의 성리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학문적 태도를 아울러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고봉과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퇴계의 사상을 두루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퇴계문집’(민족문화추진회)을 권하고 싶다. (허남진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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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바이올린
진창현 지음, 이정환 옮김 / 에이지21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표지에 바이올린 사진이 하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창현 님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바이올린 선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바이올린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운명과도 같은 바이올린과의 만남. 하지만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기엔 이미 늦어버린 때의 슬픔을 뒤로 하고 그는 제대로 된 바이올린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다. 전쟁 후의 극심했던 고통과 배고픔을 뒤로 하고 더욱 캄캄한 앞길을 걸어가기 위해 대한해협을 건너던 소년의 가슴 속엔 바이올린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물질적인 배고픔은 참을 수 있지만 꿈과 희망의 배고픔은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도 "당신은 영혼의 배고픔에 굶주리고 있지는 않는가? 꿈의 배고픔에 굶주리고 있지는 않는가?"하고 물어온다.

  바이올린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긴다. 나무를 고르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한 나무를 발견하고서도 그것을 그저 버려진 통나무로 만드는 것은 영혼의 집중을 깨뜨리는 한 순간에 저질러지기도 한다. 바이올린을 아는 것은 나무의 나이테를 따라 나무의 숨결을 섬세하게 느껴야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바이올린 현을 받치는 받침대의 재질은 물론이거니와 위치와 높이 그리고 바이올린의 표면을 칠하는 니스의 종류와 색깔에 따라 천차만별의 음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는 온 우주를 한바퀴 돌아야만 했다. 삶의 어떠한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배워야만 한다. 바이올린 하나를 마스터하기 위해 그가 쏟은 열정과 노력들,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외면 속에서도 홀로 꿋꿋하게 헤쳐나가야 하는 적막한 현실, 아무리 절망스러운 현실 속을 뚫고 지나가면서도 그는 바이올린에 대한 꿈 하나로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된다. 바이올린의 그의 삶의 목표이자 삶 그 자체이다.

  그의 삶 속에서 이정표처럼 주어진 바이올린과의 만남의 순간은 그의 삶을 송두리채 바꾸어버렸다. 과연 그런 삶이 그의 가슴에서 어떤 일을 일으켰던 것일까? 약장수 아저씨의 악기를 따라서 그리고 아이카와 선생의 바이올린과의 만남과 스트라디바리우스와의 떨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의 주어진 내면의 길을 밝혀주었다. 그 영혼의 깊은 떨림이 그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삶의 의미였던 어머니를 떠날 수 있었고, 바다를 홀홀단신으로 아무런 보장처도 없이 건넜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홀로의 꿈을 꾸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바이올린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찼을 때 그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꿈으로 보기도 했고 깊은 고민의 한가운데 갑자기 펑 뚫린 듯이 빈 마음 한가운데로부터 해답을 실마리가 풀려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 상에 입상하게 되는 순간의 이야기들은 정말 감동적이다. 그의 인생의 한 획을 그으며 이젠 마에스트로로서의 삶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 자신의 바이올린 제작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간다. 어느 날 바이올린이 자신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 그 날부터 시작된 바이올린 제작자로서의 삶이 그의 마음을 채워버렸고 그 스스로 전개된 여정의 끝에 와버린 여기서 문득 정신이 들자 주위에서 들리는 박수소리에 정신이 어리둥절해진다. 6개 부문 중의 5개 부문을 그가 차지해버린 것이다. 조국 한국이 그를 낳은 땅이면 일본은 바이올린 제작자인 그를 기른 땅이고 그의 험난하고 어려운 순간마다 도움을 준 미국과 그가 바이올린에 담으려는 선율의 이야기 속에는 아프리카와 유럽과 태평양과 푸른 하늘과 땅과 흙과 푸른 나뭇잎과 빨갛게 노을 든 단풍과 대지와 들판 위로 떠다니는 구름과 바람....그 모든 우주가 필요했다.

  자신의 인생을 한 곳에 담아내는 사람은 우주도 그 속에 담아낼 수 있음을 진창현 님의 삶을 통해 우리는 다시 배운다. 무르익어가는 봄날의 비탈길에서 우주를 흔든 바이올린의 삶 속에 깃든 그의 삶을 배워본다. 다시 책의 표지를 본다. 그의 모습이 바이올린을 닮았다. 없는 바이올린이 어디서 생긴지 모르게 그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다. 그의 바이올린은 이제 해협만 건너지 않는다. 바다도 은하수도 건너 온 우주에 그의 선율이 울릴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바이올린 아닌가? 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이 있다면 그 선율이 이 우주에 가득히 울리고 있을 것이다. 그 선율이 빛나게 울리고 있다는 증거는 우리들의 가슴이 이렇게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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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0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 만에 달팽이님의 리뷰를 모두 봅니다. 매일 느끼는 것이지만 너무 잘쓰십니다.
또 한명의 글의 스승으로 모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빌려옵니다. 월요일 이번 시작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한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달팽이 2007-04-10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이십니다.
늘 저는 지인들의 글을 보며 저에겐 표현력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뭐 딱히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지만...
하지만 마음만은 그대들과 나눌 수 있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김선우 지음 / 미루나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책 제목과 표지를 보고 나는 젊은 날의 잃어버렸던 사랑의 열정을 떠올렸던가? 얼굴만 봐도 싱그러웠고 그림자만 봐도 가슴이 뛰었던 그녀를 생각했던가?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가오던 그녀에게 바람 한 줄기가 만들어놓은 머릿결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지. 모든 경물이 흑백처럼 빛을 잃어버렸을 때 오로지 천연의 빛으로 밝은 햇살로 내 눈에 들어온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 책의 첫 느낌이 그랬다면 첫 장부터 그 강렬함은 더욱 거세어질지나 그 방향은 불현듯 뒤바뀌어 있다.

  파블로 네루다의 '젊음'에 보이는 입에 들어온 설탕같은 키스들...빗속에서 뒤집어 엎은 램프처럼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 때...아! 그 때...마냥 하루 하루가 즐겁고 새로웠던 날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이런 열정의 화려한 원색으로만 채워져있지는 않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녀의 사랑은 변해간다. "봄날은 간다" 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니? 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당연히 변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도 사랑의 빛깔도 변한다. 사랑이라는 욕망구조의 본래모습을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그 에너지는 변하지 않을런지 몰라도 그것이 입는 옷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그녀는 니체에게로 그리고 장자에게로 먼저 달려갔던 것일까? 극한 절망을 늪을 지나서 사랑의 절망마저도 수용하게 되는 도의 경지로 먼저 닿고 싶었던 것일까?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그녀가 장자의 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모르지만 그녀는 재빨리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삶의 한가운데는 바로 사랑의 자리이다 라고 말한다. 그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와 생명적 존재 모든 것에 대한 아가페의 사이 어느 지점엔가 놓인 것은 분명하리라. 김소월의 초혼 처럼 처절하고 깊은 사랑과 디킨슨의 삶 이전과 삶 이후의 본래적 에너지에 대한 회귀적 욕망을 거쳐서 그녀는 계속 여정을 이어간다. 만해처럼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의 빛에 물드는가 하면 릴케처럼 예이츠처럼 낭만적이고 봄같은 사랑의 햇살 속에 알몸으로 드러눕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새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인생의 지혜에 묻은 사랑의 흔적을 찾아 신비주의로 들어서기도 한다. 루미를 만난 그녀는 이제 사랑의 대상이 곳곳에 현존하고 그것을 통해 신의 현전을 알아차리게 된다.

  삶의 한쪽 끝에는 어떤 사랑의 고통과 상처도 보듬어낼 수 있는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불교적인 사랑과 종교적 사랑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녀의 다른 한쪽의 이상에선 체게바라의 삶처럼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적인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더욱 성숙해진 마음의 자리에서 다시 꽃으로 피어난 사랑의 미세하고도 깊은 감정들을 그대로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사랑의 기쁨,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적 접촉과 그 어머니의 품음에 대한 안도감과 보호본능에서 느끼는 편안함, 세상의 모든 이념과 신념을 넘어서 오로지 진실하고도 진정성이 담긴 대상과의 사랑에 올인하는 태도...

  김종삼의 목포항에서 보이는 그녀의 사랑은 "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바라는 사랑이다. 사랑이 남기는 그 배면의 슬픔과 아픔이 생기고 사라지는 자리에 대한 깊은 응시를 통해서 바라본 사랑의 본체가 다시 그녀를 세상의 드러난 사랑으로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쏟아내는 감성적이고 육감적인 시어들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으며 그리 음란하지만은 않다. 이미 40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젊은 방황이 헛되지 않았고 그 치열한 방황이 지금의 꽃물든 가을의 단풍같으면서도 활짝 그 생명의 씨앗을 틔워내는 봄의 생명력도 전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진실 앞에서 인생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의 진정성 앞에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내 입 속에 들어온 설탕같은 키스들이 더욱 달콤해지고

봄 날같이 지나가버린 내 사랑에 무너지듯 가슴 아파도

더욱 쓸쓸해져만 가는 나의 사랑의 뒷모습도 말없이 아름다워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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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살아있는 자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짱꿀라 2007-04-0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의 말씀도 기억해 둘 아주 훌륭한 말입니다. 달팽이님 서평 잘 읽고 갑니다.
김선우 작가의 작품속에 글자들이 생생이 움직이는 것 같은 그럼 감동을 받고 갑니다.

달팽이 2007-04-05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사랑은 우리의 본래모습이자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님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불현듯 느껴지는 것은 왠일일까요?
산타님/ 앞으로 김선우라는 또 하나의 기억해 둘만한 한국시인을 만났습니다.

2007-04-05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4-0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기꺼이 보내드리고 싶어요.
주소를 이곳에 남겨주시면 고맙겠군요.
선생님의 이미지가 불현듯 지나간 이유가 있었군요..ㅎㅎ

2007-04-05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어여쁜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잘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고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들 어여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 김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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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4-0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동갑내기인 시인 김선우.
이 시 하나만 봐도 그녀가 참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연 2007-04-0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시군요...^^ 담아갈께요~

짱꿀라 2007-04-05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을 탄 시인 것 같습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아름다운 문장에 도치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네요. 오랫만에 들어와 글 남기고 갑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달팽이 2007-04-05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멋진 시입니다. 그리고 멋진 봄날입니다.
산타님/그대만이 주어진 목적이 아니라 가는 과정 하나 하나 그대임을 말해주는 시..
입니다. 그 삶의 어떤 상처에도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