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림을 만날 때 - 인생의 길목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명화 이야기
안경숙 지음 / 북웨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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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림을 만나면 그 그림이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삶이 그림을 좋아해서 찾아가면 그 그림이 친구의 얼굴로 우릴 맞아줄까?

그렇다.

마음이 그림을 품으면 그 그림은 내 마음에 들어와 말을 걸어준다.

인생을 지나면서 만나는 세상 속의 그림 한 점에 문득

시선이 매이게 되는 순간, 그림과 삶의 만남이 시작된다.

비록 그 화가에 대한 정보를 몰라도 그 그림이 어떤 사조에 속하는지 몰라도

그림만이 마음에 남기는 떨림과 느낌을 따라 그 그림과 만난다.

 

안경숙님은 아마추어로 그림을 좋아한다.

전문화가도 아니고 그림에 대한 평론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좋아해서 그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림을 쳐다보기도 하고 그림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기도 하고

그 그림과 관련한 자신의 추억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그림에는 이런 음악, 저런 그림에는 이런 차......

 

때로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은 멀리 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랴!

아마추어 애호가에게 있어서 무엇이 주저할까?

그림이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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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5-06-0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잘 지내시죠? ^^
유명세에 상관없이 그림이 확 마음에 들어올때가 있어요. 각자의 삶이 다르니 각자의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도 다를 것 같아요. 그래도 평생에 그렇게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 하나를 만날 수 있는 것도 행복이겠죠

달팽이 2015-06-08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입니다. 바람돌이님...잘 지냅니다.
그렇더군요. 그림 한 점 마음 속에 들어오면 ....
그 기쁨이 쏠쏠합니다. ^^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법정.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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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의 글을 즐겨 읽을 때가 있었다. '무소유', '봄여름가을겨울', '맑고 향기롭게', '버리고 떠나기' 등등... 제목에서 묻어나는 것처럼 아무런 수식과 장식없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마음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이름들에 생각들이 자연히 쉬었다. 책 속 내용은 소박하고 부드러우면서 자연스럽고 단촐한 일상의 산사 생활들이었지만 마음 속의 어떤 감성을 일깨우고 무엇보다 글을 이렇듯 가벼우면서도 전달하는 깊은 떨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느덧 그런 스님이 떠나고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최인호 작가도 떠났다. 두 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샘터에 글을 연재하면서부터이다. 주위 지인들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법정 스님을 통해 우리 사회에 '어린왕자'가 다시 읽히고 조명받게 되었으며 '월든 호수'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 사람을 통해야만 건너 갈 수 있는 작은 개천이든지 강이든지 그런 것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통하여 새로운 정신적 자양분을 얻게 되는 인연들이 있다. 법정 스님은 내게 편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상태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는 주옥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무소유'란 삶의 아이콘으로 우리 사회에서 큰 시선을 모았던 스님은 자신의 무소유적인 삶을 많이 방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승려로서의 삶을 살다가 가셨다. 효봉스님의 제자로서 속명'박재철'이란 이름을 쓰셨으며 상좌나 자신의 삶을 보조해주는 어떤 혹도 없이 홀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셨다. 그런 스님의 영향이 내게도 적지 않은 삶의 파장을 가져왔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몇 일만 홀로 방안에 있어도 그 외로움을 떨쳐내는 데에는 많은 마음의 내공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산 속에서의 수십년 간의 홀로된 삶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의 직접적인 맞닥뜨림 없이 어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인가? 비록 큰 스님으로서 큰 깨달음으로 속세의 인연들을 깊은 공부로 이끌지는 않았으나 수행자의 본분의 모습을 생각하기에는 법정 스님같은 삶도 참 의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의 대담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지혜와 교훈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 줄로 믿는다. 그러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법정스님이 말씀보다는 최인호 작가의 말이 많아지고 대화의 논점이 조금은 흐려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법정스님의 사진을 더 많이 실어서 주제와 상관없는 사진으로 주제를 흐리는 면이 적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족과 죽음과 외로움과 삶에 대한 가볍지 않은 명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있는 시간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그 사람을 통해 우주를 보게 하는 것이라는 마음의 상태,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의 말 속 그 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마음 속의 물음표 하나를 찍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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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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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는 10세기 전후까지의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문화적 꽃을 피운 시기이다. 그리고 가장 상업이 발달한 시기였으며 가장 개혁이 많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신진관료의 출현에 따른 개혁적이고 참신하고 능력있는 관리들이 합리적이고도 깊이있는 정책을 통해 송나라를 이끌었던 시기이고 황제는 그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인 인재등용책을 통해 그 지배를 공고히 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고 또 가장 학문적 사상적 기술적 상업적 발전과 번영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송나라의 번영의 원인을 우선은 문치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송태조는 자신의 개국을 도왔던 무인세력들에게 신뢰를 주면서 무장해제를 시킨 후 정신적이고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문인들을 등용했고 그들의 정신적 수준으로 송나라를 통치하게 되고 이는 불문율이 되어 후대의 황제들에게 되물림되는 문화적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황제이든 간에 당대의 가장 훌륭한 문인들을 등용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며 그것이 송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으로 안다.

 

  그 밖에도 송나라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달하여 상품화폐관계가 정착화되었다. 개봉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상업과 화폐제도는 송나라를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사는 곳이며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고 문화적 번성을 구가했던 사회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북방 민족들이 아무리 괴롭히고 지배하고 억압해도 송나라가 가진 우월적이고 매력적인 문화에서만은 동화되고 만 점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송나라는 북방의 민족에 대해 무력과 전쟁으로 상대하지 않고 비록 굴욕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참하리만큼 몸을 낮추어서 실리를 얻고 평화를 추구했다. 그들에게 조공으로 바치는 물량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송의 경제적 능력으로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되었다는 점과 문치주의에 근거한 성숙한 시대판단과 형세판단으로 더욱 오래 평화적으로 왕조가 존속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점은 역사에서도 많은 교훈을 남겨 준다.  그래서 송대에는 그 평화와 번영의 바탕 위에 시와 사, 문학과 예술이 꽃피는 시기가 되었다. 한유, 구양수, 소식, 육유, 정이 정호 형제 등의 사상가와 문학가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펼쳤는가 하면 왕안석, 주자 등의 개혁적이고도 학문적인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서 송대는 그 후 천년의 역사를 써내려갈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시기라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살다간 많은 사람들, 때로는 역사적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다운 평범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을 지도 모를 그 많은 지배와 전쟁의 역사 속에 세상의 중심으로서 가장 큰 나라였던 송나라의 평화롭고도 행복했던 한 시대의 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매력적인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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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제작팀 지음 / 해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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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이는 아프다. 아니, 이 시대의 젊은이는 아프다. 혼자서 점심을 먹고 시간을 쪼개어가며 즐겁지도 않은 공부를 하고 스펙쌓기를 하고 또 직업을 찾아 헤맨다. 초등학교때부터 공부 공부 하는 강요와 내 인생을 위해선 공부 밖에 없다는 암묵적 동의로 입시교육환경 속으로 빠져들면서부터 특목고 대학 취업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야 한다. 그 통로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또 그 길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서울대학에 오면 인생의 고민이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지방대학에서도 자기만 열심히 해서 실력을 갖추면 그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외국의 유명대학에 나오고 스펙을 많이 쌓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이런 저런 학벌과 스펙도 없는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다. 대학이 어느 때부터인가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행복하게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진로를 결정하고 직업을 선택하는 공간이 아니라 어찌됐든 좋은(??) 직업을 선택해서 잘먹고잘살아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학입시를 보며 달려온 학창시절 모두가 부정되면서 생기는 깊은 절망감을 극복하기가 너무 힘들다. 세상이 원한다고 해서 그 길을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제 그 세상이 외면한다. 그러니 인생이 위축되고 대학생활이 힘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일까?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무엇일까? 기업이라는 조직에 분명 비용보다 효율이 큰 사람이겠지. 그게 기업의 이윤논리이니 그 사람의 연봉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기업에 이득을 안겨다줄 사람일 것이다. 그 인재라는 것은 현 시대에 과연 무엇일까?

 

  최근에 오면서 기업에서도 창의성과 열정, 인성과 긍정성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덕목이란 것이 대부분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자아존중감과 긍정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런 덕목은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기준이 있을 때에 비로소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리들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한 번의 실패에 가로막혀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청춘들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긍정성과 희망과 실패로부터 배워서 더욱 나아가려고 하는 의지와 삶 전체에 대한 신뢰와 긍정이 바로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인성이라면 그것을 배우는 학교교육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멘토들을 통해서 다섯 대학생들이 자신감을 가져가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기질은 장점과 단점이 있다. 때로는 장점이 단점이고 단점이 장점이다. 어느 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기질과 자신으로부터 배우려는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재의 기준이 된다. 인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과 자신에 대한 신뢰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자가 결국은 세상의 기준으로도 인재가 된다.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 광고천재 이재석 등을 보라.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고도 절망하지 않고 그 실패에서 배워 더욱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시켰는지....우리들은 아니 우리 사회는 너무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실패의 미덕을 인정하지 않고 실패의 교훈을 되새기지 않아 그 실패 한 번에 쓰러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세상의 장애물을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거기에 기꺽이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는 긍정과 꿈의 희망으로 가져가는 것이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가 된다. 그럴려면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나아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의 배움과 가르침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과연 우리들의 배움터는 문제가 없는가? 우리 교육이 문제라면 그 대안적 교실을 또는 대안적 배움을 실현하는 모델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하면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교육법, 조벽 교수님의 교수법, 샌델 교수님의 교수법 등 틀에 박힌 수업을 탈피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교수님들의 수업을 소개하면서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더 나아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왜 대학에 가야 하는가? 의 물음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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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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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8년 18세의 소년이 독재정치를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고등학교 2, 3학년의 나이에 정치권력의 부당성과 정의를 고민했고 그 대안에 대해 글로 적어놓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33살의 나이로 전염병으로 세상을 버렸다. 하지만 그의 짧은 생은 그 누구보다도 더 위대했으며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세월호 사건, 사자방 국회청문회, 대한항공 땅콩 회귀 사건 등등 무수한 사건들이 우리들을 관통해 지나가지만 권력의 지배 속에 자발적 복종을 멈추고 자유를 누리려는 진정한 시민들은 소수다. 세상이 이러한 것은 이 세상에 우리들의 마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우리들의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들이 그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스스로의 자양분을 잃고 자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권력의 횡포 속에 우리 사회는 고통스러워 한다.

  그런데 개개인이 기존 권력에 맞서 싸우면 거대하고도 산같은 절대권력과 맞부딪치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권력의 횡포에 익숙해지고 또 적응하게 된다. 그러나 습관처럼 되물림되는 '자발적 복종'에서 벗어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

그는 1554년 보르도의회 고등재판관으로 근무했고 이 글을 포함해 29편의 시와 여러 글들을 친구인 몽테뉴에게 맡긴다. 몽테뉴는 그의 사후 대부분의 그의 글을 출판하였지만 당시의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서 이 책만은 출판하지 못했다. 당시의 왕정질서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1574년 세상의 빛을 보았고 프랑스 대혁명과 아나키즘 운동에 사상적 영향을 주게 된다.

  참 통렬한 통찰이다. '자발적 복종'

그렇지 아니한가? 이 사회의 주류 자본 문화며 정치권력이며 그 모든 종류의 권력은 자발적 복종에 기인한다. 우리들 마음 속에 그들에게 에너지를 제공해주지 않는 한 적어도 내 삶 속에서만은 그것이 더 이상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권력의 부당성을 말할 수 있게 되고 비판을 할 수 있게 되고 자본의 부정적인 면에 삶이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자발적 복종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된다. 참 쉽지 않은가?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계급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세습되고 습관화된 복종을 떨쳐버릴 자 누구인가? 돈으로부터 상품화폐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 누구이며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소신으로 행동하고 살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자신의 생활에서 매 순간 깨어 습관화된 시선을 탈피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며 그 의미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치열한 자기고민과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이 없이 어찌 철저하게 자신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절대권력의 가까운 시녀가 되어 사는 일이나 절대권력의 지배 하에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소시민적 삶이나 복종의 삶은 같은 것이지 않은가?

  진정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세상의 힘으로 불어오는 국가권력과 그 부정의에 맞서 자신의 삶을 온통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내가 자발적 복종의 영역 밖에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러하니 '자발적 복종'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흐르는 역사의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무겁지만 않을 수도 있다. 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 물질적인 삶보다 정신적인 삶을 중요시하고 상품화폐적 인간관계보다 정과 나눔의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자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조용히 실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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