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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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씨는 사람들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는 존재지만 또한 그 사람의 내면과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런 존재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 세상에 대해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좀머씨 자신이 의도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좀머씨의 이러한 행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죽음과 인간성 상실이 가져다 준 것일까? 아니면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기계화, 비인간화, 수단화인가? 아니면 어떤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쥐스킨즈는 열어 두기 위해서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좀머씨의 내면묘사도 그의 가족의 자세한 상황설명도 하지 않는다. 단지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뭔가 아직 뚜렷하지 않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불투명하고 뿌옅게 묘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이 어린아이는 저자의 성장배경과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난 이 어린아이가 바로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또한 어린아이가 음악선생님의 집으로부터 쫓겨나 자살을 하고자 하는 그 현장에 좀머씨가 출현함으로써 마음을 진정시켜 삶을 이어갔고, 좀머씨의 최후의 장면을 우연히 이 아이가 지켜보는 운명을 공유함으로써 이미 이 둘 사이엔 공유점이 생기고 뭔가 그것이 확대되는 느낌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즉, 저자는 이 책에서 어린아이이기도 했고 좀머씨이기도 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좀머씨를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온갖 인터뷰도 거절하고 은둔해 온 자신의 삶과 모습을 담고자 했고, 그리고 좀머씨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동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자신도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저자의 다른 저서(향수, 비둘기, 깊이에의 강요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독특하면서도 뭔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의 매력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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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 재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안철흥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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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JFK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나라였던 미국 사회의 이성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런 미국의 패권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절망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때가 있었다. 이 책 역시 불량국가이자 광신도들이 주도했던 미국이라는 패권국가에 의해 유린된 무수한 인간의 존엄과 법과 정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헨리 키신저라는 한 추악한 인물을 통해 본 미국 내의 정권다툼과 그 정권욕에 얼룩진 미국 민주주의 허상과 대외 정책은 인간으로서는 아니 인간사회에서는 생겨서 안되는 여러 가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역사에 남겼다.

베트남, 캄보디아와 라오스, 인도네시아, 칠레, 동티모르,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유혈사태, 전쟁범죄, 실종, 강간, 테러 등의 온갖 죄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정권욕과 자신들의 명예욕과 부를 추구하고자 하는 미국 상층부의 몇 몇 광신도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흥분을 멎지 못하게 한다.

더욱 더 절망적이었던 사실은 닉슨과 키신저라는 이 광신도들이 이런 죄악을 저지를 때에 미국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약소국의 생명과 심지어 자신의 젊은이들의 생명이 꺼져 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들의 음모를 밀실공간에 그대로 유지시켜 줄 수가 있었단 말인가? 과연 미국 사회에 민주주의란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미국 사회의 이성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었다. 여기서 어쩌면 경제와 기술이 가장 앞서 가는 미국이란 국가에서 가장 형체도 없이 흩어져 버린 민주주의의 실체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각국에서의 무수한 희생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비로소 여러 가지 인권협정과 독재정권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원흉의 처리가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이 참담한 실정은 바로 미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의심하게 하며 미국 사회의 이성에 대해 또한 의심하게 한다.

따라서 미국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비판하여야 하며 그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하여야 하며 그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민주주의를 참되게 세워야만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엄숙히 놓여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

단추는 하나가 잘못 끼워지면 그 뒤는 아무리 잘 끼워도 잘못 끼워진 것이 된다. 잘못 끼워진 것을 깨달았을 때는 과감하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미국 사회에 필요한 미덕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것은 해방 후 일제의 잔재가 깨끗하게 정리되지 못한 우리 사회, 군부 독재의 단죄와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미덕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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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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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킨즈의 이 책은 너무나도 흥미롭다. 책이 얇은 편이라 호흡을 크게 한번 흐읍~ 하고 단번에 읽어 내려갔다. 조나단 노엘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영영 사라져버렸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군대에서 돌아오자 동생마저 어디론가 가버리고 혼자 남게 된다. 결혼해서 넉 달만에 아내는 누군가의 아이를 낳고 과일장수와 눈이 맞아 줄행랑쳐버리자 노엘은 인간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게 되고 그 상처를 낳게 한 세상에 대해서도 마음을 닫아 버린다.

그는 오로지 인간과 세상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안식처이자 확실한 휴식처를 찾게 되고 그것은 어느 파리의 건물 6층에 위치한 24번이라는 번호가 붙여진 조그만 방으로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방에서만큼은 그는 고통스럽고 역겨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그 방을 완전히 영원히 소유하고자 한다.

나이 오십이 다되도록 오로지 이것 하나만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며 그 꿈에 가까워지던 어느 날 그는 예기치 못한 하나의 침입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비둘기인 것이다. 이제까지 완전하다고 생각되었고 가장 편안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보호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이곳마저도 이 한 침입자에 의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노엘이라는 한 인간에게서 이젠 세상은 그 어느 곳도, 심지어 자신의 가장 아늑했던 이 공간마저도 자신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우선 이 곳으로부터 영원히 떠나는 것이며, 또한 세상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 즉 죽음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잡은 어느 여관의 작은 방에 대한 관이라는 비유와 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세상은 모두 종말을 고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도 그의 생의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일에 대한 기계적이고도 자동적인 대응 역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계적이고도 자동적인 그래서 최소한의 대응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그의 '익명성'은 노엘식 세상살이의 기본 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익명성'에 대한 자기정당화로써 피라미드적인 상징성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내용은 상당히 흥미로왔다.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로서 모른 사람과 세상에 대해 완전히 닫아버린 고립된 노엘의 존재는 어쩌면 아주 극단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기계화되고 자동화되고 획일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들이 가진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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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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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킨즈의 글은 내 머리 속에 하나의 화살이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큰 충격과 감동을 준다. 그것은 그만이 가진 뛰어난 독창성과 그 독창성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논리 정연한 뒷받침과 잘 구성된 짜임새때문일 것이다. 쥐스킨즈의 유일한 단편선 모음집인 이 책은 네 가지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깊이에의 강요'에서는 한 젊은 여자 예술가와 평론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평론가는 여자 예술가의 작품을 우수하게 평가하지만 깊이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여자 예술가는 그 깊이 때문에 고민하고 좌절하여 결국은 삶을 포기해버리게 된다. 그러자 평론가는 자신의 견해를 뒤집어 깊이있는 한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하게 된다. 스스로의 깊이에 대한 자각없이 평론의 칼에 의해 무참히 무너지는 한 재능있는 예술가의 죽음이 말할 수 없는 착잡함을 느끼게 한다.

'승부'에서는 체스의 고수와 한 신인 체스 선수와 대다수의 군중(대중)들로 구성원을 이루어 체스판이라는 게임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이 게임은 우리의 인생이고 각 각의 구성원들은 바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Pattern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이루어 놓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은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우리들의 삶이 바로 이 게임을 구경하는 군중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국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나고 도전자를 환호하던 군중들은 풀죽은 채 다시 가정으로 발길을 돌리는 장면은 마치 우리들의 자화상 같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향수'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향수'에서 향수로 세상을 지배하는 그르누이의 삶을 보여준 것 과 같이 여기서는 조개들에 의한 지구와 우주의 정복이라는 황당무계한 내용을 담아낸다. 하지만 그 독창적인 발상은 '향수'에서는 인간의 생존에 호흡이 필연적임에 의해 근거를 부여받듯이 대기의 순환과 물의 순환에 의한 생명체의 탄생과 그 뒤에 내재한 신의 유일한 논리에 의해 이 유언은 뭔가 허구를 벗어난 심각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고찰'에서는 문학적 건망증과 문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준다. 문학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 속에 문학의 본질과 그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며 진행되는 화법은 역시 새로운 발상이다.

이러한 독창성에 근거한 몇 가지의 테마들이 바로 우리의 삶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 그리고 우리 의식의 문제를 여러 개의 실로써 묶어 내어 깊은 성찰과 반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런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체는 아주 가볍다고 느껴지며, 단순한 문장으로도 많은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삶의 깊이에의 강요를 나는 쥐스킨즈에게서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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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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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읽은 후 두 번째로 읽게 된 이 작품은 김 영하라는 작가의 매력적임을 알게 해 주었다. 마라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그의 화두는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창작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살인과 죽음이라는 삶의 무거운 주제를 깊이 빨려들게 하는 흡입력있는 글로 다룸으로써 두 가지 모두를 시도하고 있다.

살인 안내자라는 화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은 단절과 압축의 미가 의미있게 되는 그런 사회이다. 어쩌면 그것은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성이 소외된 모습일 수도 있고. 권태롭고 흥미없는 몇 몇 사람들의 자기도피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전자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쨌든 이런 사회에서 삶을 권태롭게 여기고 삶의 보람도 없으며, 앞으로의 꿈이나 방향은 찾아 볼 수 없는 관성화된 일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몇 사람들의 이야기는 화자인 자살안내자의 인과관계의 사슬에 엮여 마치 다른 각 각의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이어지고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화두, 즉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죽음은 삶의 권태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K의 스피드, 유디트의 섹스, 미미의 퍼포먼스, 화자의 자살안내는 이러한 일상의 지루함과 무의미함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들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로도 일상의 권태로움이 극복될 수 없을 때 비로소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버리는 것은 꺼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조금은 가볍게 다룸으로써 우리에게 흥미와 더불어 죽음과 자살이라는 테마에 대해 좀 더 깊은 성찰을 하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사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아주 멀리 닿을 수 없을 것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우리는 늘 죽음을 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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