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 우거진 저 풀들은

해마다 시들었다 다시 나니

들불도 다 태우지 못하고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나네.

아득한 향기 옛 길에 일렁이고

옛 성터엔 푸른 빛 감도는데

그대를 다시 또 보내고 나면

이별의 정만 풀처럼 무성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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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5-09-1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러져가는 햇살 비끼는 길가엔
코스모스 이리저리 몸흔드는데
떠나간 그대 생각 오락가락하니
곳곳에서 이는 바람 모두 그대 향기로다.

어둔이 2005-09-13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한담론에 보면

"그대와 하룻밤 지새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십 년동안 책을 읽은 것보다 낫네그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살면서 우리는 그런 그대를 꿈을 꿉니다.
만나고 싶어합니다.
9월의 투명한 햇살속에서 함께 웃고
길가의 꽃잎과 함께 흔들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대와
하룻밤 내내 별빛밑에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서로 알아 주는 친구 있어 먼곳을 마다않고
찾아주는 것 또한 인생의 즐거운 일이 아니든가!!!

우리 모두가 그대의 그대가 될 수 있을지.....
 

  진리는 지속적이지 않다.

찾아가서 경배할 장소도 없다.

진리는 오로지 순간마다 보일 수 있다.

진리는 항상 새롭다. 따라서 시간을 넘어선다.

어제 진리였던 것은 오늘 진리가 아니고 오늘 진리인 것은 내일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진리라고 부르는 경험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은 마음이다.

진리는 언제나 새롭다.

같은 미소를 보되 새롭게 보고, 같은 사람을 보되 새롭게 보고, 같은 나무의 흔들림을 보아도 새롭게 보는 것이다.

진리는 삶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진리는 책을 통해서도 헌신을 통해서도 자기 희생을 통해서도 절대로 획득될 수 없다.

진리를 알려면 마음이 고요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마음의 자유와 고요는 그 관계가 벌이는 사실이 이해되었을 때 찾아온다.

그 관계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무슨 일을 하든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그러나 마음이 그 모든 투사로부터 자유로우면 모든 문제가 그치는 정적 상태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때서야 시간을 떠난 영원한 것이 찾아온다.

진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되는 것도 아니고 반복되는 것도 아니며 인쇄되거나 전파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이름도 없으며 따라서 마음은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 크리슈나무르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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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생물 이야기 - 상상을 초월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이상한 생물 이야기
하야가와 이쿠오 지음, 데라니시 아키라 그림, 김동성 감수, 황혜숙 옮김 / 황금부엉이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는 참으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생명체들이 무수하다. 이 책은 68종의 희귀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말미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쯔치노코'라는 동물처럼 확실히 검증되지도 않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생명체가 있다. 아마 이 책은 우리들의 마음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상상속의 동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렇게 희귀한 동물들은 어떻게 생겨났고 또 왜 이런 모습으로 진화되어 갔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우리는 과학에게 모두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기껏해야 생명체를 해부하고 각 기관의 기능을 설명하고 제한된 부분에서의 환경에 따른 진화만을 설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가 마지막에 현실과 상상 사이에 종잇장의 틈새로써 경계를 오가는 쯔치노코를 결론을 대신하여 소개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육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야 희귀하고 찾기 힘들다고 해도 역시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고 과학적인 조사와 설명이 용이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다. 하지만 심해에 사는 생명체는 사람의 손길과 과학이라는 환경파괴의 손길을 덜 받아서인지 아니면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조건과 상황하에서 자신들만의 생존법을 터득했음인지 오랫동안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고, 천적의 위험으로부터도 덜 시달렸던 것이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흡혈박쥐와 문어의 모습을 합한 것이라든지 나뭇잎 해룡이라든지 망원경 물고기 등 우리들의 상상 속에서나 있음직한 생명체들의 모습을 직접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고 낯설기조차 했다.

  물론 이상하고 괴상스럽다는 것도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무섭게 생기고 선하게 생겼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러한 천차만별의 생명체들이 인간의 의식의 무수한 차원에서 또는 우주의식의 무한한 차원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육상에서야 인간이라는 존재로 인해 생명의 종의 다양성이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수중에서 그리고 심해에서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의 종의 다양성은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만큼의 신비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센치미터도 안되는 조그만 생명체를 보고 있으면 이들은 어떤 의미로 살아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나아가 어쩌면 우주공간에서의 모든 생명체의 정점에 선 존재, 인간! 과연 그의 사명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를 갖고 그들은 이 별에서 살다 가는가? 무수한 시간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인간이라는 종의 종말 뒤에 인간이 살다간 흔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기에 아직 분화되지도 않고 의식도 없는 미개한 수많은 생명체들의 끝도없는 삶과 죽음이 이 우주에서 가지는 의미는 뭘까? 걸음 아래 밟혀서 일단의 비명도 없이 사라지는 작은 생명체들의 삶의 비밀, 우주적 차원에서 본 인간의 운명도 역시 그 작은 벌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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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시대 - 우리는 정말 이건희를 알고 있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왜 이건희에 대해 우리는 알아야 하는가? 현재 한국은 삼성열풍에 휩싸여 있다. "삼성에게 좋은 것은 한국에게도 좋다." "삼성이 만들면 표준이 된다." "한국의 대외경쟁력보다는 삼성의 대외경쟁력이 더 강하다."라는 말들은 우리 사회에서 삼성의 위력을 실감하게 해주는 말들이다. 순이익 100억불로 소니와 GM 등 세계의 유수기업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삼성의 변화엔 이건희가 있었고 그의 특별하고도 독창적인 경영방식과 사내의 지배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삼성과 이건희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고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가 비판적인 평가를 압도하는 경제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의 존경하는 기업인 1위, 취직하고 싶은 회사 1위를 차지하는 삼성은 이미 한국 내의 가장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직장이 되었고, 그 엘리트들이 입사하고 나서부터는 철저한 교육을 통해 삼성맨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건희의 카리스마에 복종하게 되고 자신의 창의성은 말살하게 된다. 그가 한국의 1인당 GDP를 올림으로써 국가경제의 성장과 회복에 기여한 공은 노무현의 경제정책으로 이어져 노무현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고, 그의 지배력은 경제를 넘어 언론, 문화, 사회, 정치 전반에 걸쳐 제왕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강준만 교수는 이러한 삼성과 이건희에 대한 기존의 극단적이고 고정관념화된 평가를 최대한 탈피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건희의 성장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그 환경 속에서의 이건희의 성격의 형성과 이병철의 후계자로 선정되는 과정에서의 권력다툼과 음모들의 과정속에서 자신의 보호하려는 욕구와 그것의 시스템화는 이건희라고 하는 인물의 성장과정에서 가진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가 그를 어떤 성격으로 만들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삼성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가진 고용효과와 경제적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비록 그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단순히 자신의 치부와 권력욕만으로 삼성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경쟁이 치열한 국제 경제 환경 속에서 앞으로 10년 또는 20년을 내다보는 업계의 현실에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발전해가기 위해 그가 쏟는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왕적 카리스마가 한국사회에 끼친 악영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업의 재벌적 소유구조와 그것의 세습이 가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기업내 상명하복의 위계적 질서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부재는 이건희 후의 삼성의 앞날을 여러 가지 면에서 걱정하게 한다. 뿐만이 아니다. 기업의 영향력이 문화, 언론, 교육, 사회, 정치 전반에 확대될수록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 사회내의 불평등과 위화감 등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남게 된다.

  기업 내의 제왕적 카리스마와 사원들에 대한 창의력과 상상력의 요구라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는 삼성에게 있어서나 이건희에게 있어서나 해결되지 못한 이중적인 모순이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사회적 정의를 외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자신의 잇속을 다 챙기려고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삼성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이건희와 삼성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려고 하는 통로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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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9-1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오늘 받았어요.
앞의 몇 장을 읽고 있습니다.
나중에 님의 리뷰를 커닝할 생각입니다.^^

달팽이 2005-09-1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는 여우님의 마음을 커닝..
 
고요한 침묵속에서의 자유
크리슈나무르티 / 문조사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늘 끊이지 않는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한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면서 때로는 그 생각이 함박눈 내린 세상 산을 타고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불려져서 자신을 온통 에워싸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는 늘 끊이지 않는 생각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들이 인류를 위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의 고리를 끊어보지 않아서 생각이 끊긴 세상과 지금 세상과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고요한 침묵은 그러한 생각의 고리가 끊기는 것을 말한다. 단지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탈출하여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을 벗어나 영원한 곳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자아의 허울을 벗고 나의 의식이 온 우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생각을 헤아리는 것으로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그 진리는 바로 헤아리려고 하는 그 생각이 멈출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의 영적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일반인들을 위한 명상록에서 평화와 자유는 우리 삶에서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평화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고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평화와 자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사랑으로서 피어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누리며 사는 속세의 삶도, 그 욕구를 억제하면서 그 저항과 부정에 자신의 삶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피안의 삶도 모두 버리라고 충고한다. 따라서 마음에서 어떤 이상이나 깨달음에 대한 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나 인격을 절대화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거부한다. 그리고 어떤 인격자나 영적지도자 절대자에 대한 의존 또한 거부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의견은 "지도무난 유혐간택"의 증도가 사상과 어긋나지 않는다. 마음 속에서의 선과 악에 대한 어떤 기준을 버리게 되면 통연히 진리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절대적인 인격자나 신의 권위를 거부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하고 영적인 지도자로 따른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사회적으로야 자신이 절대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이 나름대로 있을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는 자신을 지도자의 권위로 무장하지 않았고, 그의 뜻을 따른 사람들의 마음의 문제일 뿐이지 않는가? 그들 또한 도매급으로 취급되어 그렇지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뜻을 취하지 드러난 형체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그의 글에서는 참된 진리를 향한 글을 일상생활의 잔잔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의 눈으로 읽어낸 세상에 대한 묘사가 자신의 말 뒤에 부연설명되어 있는데 가만히 읽어보다보면 그것이 깨달은 자의 마음으로 들여다본 세상이다. 자아가 사라진 자리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묘사는 나의 마음을 묘사에 머물게만 하지는 않았다. 그가 찾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명상록 부분은 조용한 아침에 자신을 고요한 침묵으로 이끌고자 할 때 한 편 한 편 곰곰히 글을 따라가면서 마음을 맞추기엔 안성맞춤이다. 출근시간이 이른 내가 강변로를 따라 학교를 오며 보는 풀, 버들, 갈대, 강, 산을 보면서 학교에 도착해서 창문을 열고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한결 차가워진 바람을 맞으며 읽기엔 참 좋은 구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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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9-0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 you know what time is? Not by the watch, not chronological time, but psychological time? It is the interval between idea and action. An idea is for self-protection obviously.

결국 시공이란 자아를 가두는 굴레라는 뜻이겠지요. 자아로부터의 자유는 시공의 초월이고 관념과 생각으로 부터의 해탈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모든 것 크리슈나무르티의 깨달음에서 빌어온 이야기입니다.

글샘 2005-09-0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 is the interval between idea and action.
그렇네요. 시간이 그 짧은 간격의 적분임을 깨닫게 되네요. 두 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