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누었던 우정의 추억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듯이

여기서도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 걷고 있다.

한밤중에 나를 잠에서 깨우고 새벽이 올 때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어 피로에 지친 나는

다시 잠들 희망을 버리곤 한다.

심지어 이곳 감옥까지 따라와 운동장을 맴도는 내게

혼잣말을 지껄이게 만든다.

끔찍했던 지난 날, 내가 겪었던 고통까지도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내 기억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고통과 절망을 위해 비워 두었던 머리 한 구석에서는

그 암울했던 시절의 모든 일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젖은 땅을 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는데 먹구름이 산에 걸려 있었다.

어허, 이것 오늘 소풍은 어찌 되려나

비만 오지 않으면 참 좋은 소풍될터인데...

하면서 산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산 너머 저곳에는 하늘이 뚫려 파아란 속살이 드러났다.

아, 오늘은 좋은 소풍 날

아이들을 데리고 산길을 걷다가 비가 두둑 떨어지기 시작하여

발길을 돌려 공원 벤치와 잔디에 풀어놓고

막걸리 집에서 파전 시키고 김밥 들고 저수지 위로 떨어지며 수없이 만들어내는 동심원을 본다.

참 좋은 날이다.

꽃물드는 나뭇잎과 눈 앞을 가로막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희미해지는 풍경.....

아이들을 보내고 또 다시 산을 넘어왔다.

능선을 타고 오르며 내다보는 저 산 위로 부산에서 오랫만에 보는 대형 무지개가 걸렸다.

선명하고도 부산 전체를 감싸는 커다란 무지개 능선을 보니 마음이 떨리었다.

떨리는 마음 간직한 채 집에 와서 샤워를 한 후

몇 가지의 일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동래 전철역으로 갔다.

티켓팅을 하고 칸막이를 넘어서는데 테러용 폭탄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되었다는 역내 방송이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분주히 움직였고,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냥 지하철을 탔다.

어찌 되었을까?

폭탄은....

부산을 드리운 무지개 빛깔에 녹아버린 것이 아닐까?

이 삶에 소풍온 날,

나는 또 하루의 끝을 향해 달린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5-10-2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천상병 시인하고 벗하시는 달팽이님
폭탄은....제가 처리했어요(방법은 비밀^^)
뻥이구요...하루의 끝에서 이불을 펴고 뻗으러 갑니다.
꿈 속의 소풍을 기대하며^^

달팽이 2005-10-2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꿈 속에서나 말해볼까요?
우선 꿈 속으로 내 의식을 선명한 상태로 옮겨놓아야 할 것인데...

어둔이 2005-10-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학산 억새밭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풀었다. 물론 아이들이 싸온 김밥이긴 하지만
술 한잔이 없는 아쉬움이었던 것일까
하늘에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말씀이 같이 내려왔다.
"빗물에 젖은 김밥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소풍에 대해 논하지 마라"
"......."


달팽이 2005-10-2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강쌤 그 소리 오늘 여러번 듣게 되는군요..
모 선생님은 젖은 정도가 아니라 빗물에 말아먹었다던데요..
 
칼의 노래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부터 제도교육으로 자라오면서 우리들이 학교에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때 우리는 박정희식의 군인미화에 의해 부풀어지고 왜곡된 이순신의 모습을 상상하였을 것이고 어린 시절의 나 또한 장난감 검을 차고 그런 이순신의 전기에 나오는 어린 시절의 칼싸움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세월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훈은 그러한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국가로부터 강요된 이순신의 이미지를 하나도 남김없이 걷어낸다. 그리고 새롭게 하나 하나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창조해낸다. 인간의 희노애락과 시대적 운명 속에서 흔들리고 절망하고 불안해하는 한 개인의 눈으로 바라본 이순신의 마음 역시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인간적인 이순신을 살려내었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이순신을 존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늘 당위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리인 역사는 현재적 필요와 사가의 눈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왕의 종묘 사직을 위한 이율배반적인 스스로의 모순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은 이순신에게서도 임금에 대한 충성과 일본의 소탕이라고 하는 사명과 백성들의 안위와 가족들에 대한 연민과 정, 조국의 장수로서 명나라와의 조정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처신해야 하는 입장 등 모든 것에서부터 그는 흔들렸고, 불안해 했고, 자신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안개 낀 내일을 씻어지지 않는 불안함으로 맞이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속에서의 운명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운명 속에서도 세상에 대한 열린 마음을 잃지 않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을 보고 그가 곰곰히 느꼈던 삶 그 자체에 대한 문제는 결코 히데요시의 삶의 의미와 자신의 삶의 의미가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베어지지 않는 적은 베어지지 않는 삶의 문제였으며, 죽음의 문제였던 것이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히데요시의 영화도 한편의 꿈이었다면 역사와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던 그래서 벗어날 수 없는 허무와 덧없음에 시달렸던 충무공의 삶도 역시나 꿈 속의 꿈은 아니었을까? 

  가을이 깊어가는 강의 표면은 고요하고 강물의 빛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해질무렵의 노을은 더욱 붉어져가고 나의 인생의 깊이도 더욱 깊어져 간다. 삶 속에서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나를 볼 수 없었던 젊은 날의 헛된 꿈과 사랑이 한 편의 파노라마로 내 가는 앞길을 따라 펼쳐진다. 너무나도 가벼웠던 젊음, 주체할 수 없이 덧없었던 인생,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던 사랑, 그 늪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어 한참을 누웠던 그 자리엔 이미 무성한 풀들이 자라나고 있을테고, 나는 또 단풍 물드는 가을의 끝을 향해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있다.

  오늘, 충무공이 끝없이 막막하게 펼쳐진 미동도 하지 않는 바다를 쳐다보던 그 눈빛으로 나는 안개 짙게 깔린 나의 미래의 바다를 촛점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줄기 바람 가지에 매달린 잎을 떨구는 때

내 청춘의 계절도 바람에 쓸려가는구나

머지않아 마지막 남은 잎이 떨어지는 때

내 추억의 잎새들도 남김없이 져버리고 말테니

혹한 추위만이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따뜻했던 기억들 모두 버리고 홀로 서서

그 매서운 북풍을 맞이하리라

한 치의 바람도 피해가지 않고서

내 가슴으로 모두 받아내리라

한 곳으로 모아진 내 마음이

바다로 흐르는 한줄기의 강물처럼 흐르리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엔리꼬 2005-10-2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그냥 아는 서재분이 올리시는 글에 모두 댓글 달고 싶네요.. 이 시를 읽으니 슬퍼지잖아요.. 흐흑.. 진짜 눈물날라 그래요.. 흐흑

파란여우 2005-10-2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처럼 파란 달이 바람을 내려다 보는 시월의 밤
낙엽이 떠나가는 길 위에서
한 사내가 울고 있다
가슴시린 인생의 어느 냉동창고에서 떨고 있는지
사내의 눈물에는 냉기가 흐른다
그를 이렇게 길 위에 서 있게 하는 자 누구던가
애처로워하지 마세
우리모두 열심히 한 세월 강물처럼 흐르다가
등푸른 고래가 전설의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게 될터이니
그 바다에 가면 더듬이가 느린 달팽이도 있을테고
밤 길 어두워 술 항아리 달 항아리 삼는 어둔이도 있을테고
홀로 들국화 핀 돌계단에서 졸고 있는 파란여우와
새우산이 필요하다고 투정대는 서림이까지
바다로 가는 강물이 퍼지는 이 동네에서
어울렁 저울렁 어깨동무나 해 보세

엔리꼬 2005-10-2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신추문예 당첨된 시조입니껴? 제 이름이 들어있어 작품에 빛을 더하네요.. 감사합니다.

달팽이 2005-10-25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서림님 오늘 또 발자국을 지워가며 들리는 분의 모습을 알게 되어서요...
어깨에 건 팔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으로도 이 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군요...여우님..

어둔이 2005-10-2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월이 어느 멋진 날에"라는 제목의 노래말입니다.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김동규님의 그 우아한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음악은 들려드리지 못하고 노랫말만드립니다. 달팽이님 시월에도 이렇게 멋진 날들이 있답니다. 깊은 물별에 눈이 부신 청춘의 뒤안길에서 파란여우의 기품과 어둔이의 넉넉함과 서림의 애절함과 달팽이의 고독한 걸음과.......그것들이 시월의 단풍을 이룹니다.

눈을 뜨기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걸

네가 있는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좋은 것은 없을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http://www.green.ac.kr/bbs/view.php?id=c_p_changsoo_samsori&no=49
위 사이트에서 노래들어보세요
 

베어지지 않는 것을 베어야 할 때

그대는 무슨 칼을 쓰겠는가?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베어내는

그 칼을 벼리자

날카롭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