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꽃이 피는 건

죽어서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도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는 건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 꽃이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녕 그렇지 않다면

왜 꽃이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고

왜 사람들이 가끔 꽃에 물을 주는가

그러나 나는 평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왜 꽃처럼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마다

짐승이 한마리씩 들어앉아 있는지

왜 개 같은 짐승의 마음 속에도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이 들어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평생 불면의 밤을 보내는

한마리 짐승이다

 

                                  - 정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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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5-10-2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꽃같은 사람의 마음 속에도
세상 그 어느 짐승보다도 포악하고 잔인한 괴물이 있고
그 잔인한 괴물의 가슴에도
대지의 생명을 키우는 햇살 같은 사랑이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인간 존재의 의문을 가슴 깊이 품고
오늘 또 불면의 밤을 보낸다
나는 무엇일까?

이누아 2005-10-29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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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10-29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 같은 짐승의 마음 속에도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이 들어앉아 있는지
............오만한 인간의 마음이 들어앉은 것 같지 않나요?

달팽이 2005-10-30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어느부분은 동감입니다. 글샘님.
부처님은 만물에 불성이 내재한다 하였는데 그 불성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오만한 인간의 마음 속 한 점 불성이 있다면
그는 이미 부처인 존재인 것입니다.
다만 오만한 마음이 그 부처의 마음을 가리고 있을 뿐...
이누아님, 무슨 말인지요? 궁금해요..
 

병든 아들을 위하여

젊은 어머니가 부엌칼로

닭의 목을 힘껏 내리쳤습니다

낮달이 놀라 말없이 소리치고

꽃은 더욱 붉은데

모가지가 없는 닭이

온 마당을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저도 지금 그 닭처럼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여전히 햇살은 눈부시고

꽃은 붉은데

이제 곧 그 닭처럼

제풀에 꺾여 픽 쓰러지겠지요

멀리 떨어져나간 모가지를 향하여

길게 다리를 쭉 뻗은 채

 

                                     - 정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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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5-10-29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기형도, "가는 비 온다" 중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꽃이 있듯이, 꽃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저 닭도 무언가 되고 싶겠지요. 무언가 되어지겠지요.

달팽이 2005-10-29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같은 선혈을 흘리며
꽃같은 비를 맞으며
쿨럭거리는 목의 침을 삼켜가며
가야 하는 인생의 길...
 

떨어져 죽어야 사는 것이다

물보라를 이루며 산산조각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져 죽어야

사는 것이다

떨어져 죽어도 울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떨어져 죽어도 뒤돌아보지는

어머니를 부르지는

더더욱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저 푸른 소에 힘차게 뛰어내려 죽지 않으면

저 검푸른 용소에 휩싸여

한 천년 부대끼며 함께 살지 않으면

흐를 수 없는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 살 수 없는 것이다

산과 들을 버리고

밑바닥이 되어 멀리 흘러가지 않으면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새롭게

살 수 없는 것이다

 

                               - 정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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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 정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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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10-2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이 바닥인 날,
왜 사나 싶다가도, 그 다음 날 좀 나아지는 걸 보면,
고기압, 저기압이 상대적이듯,
바닥도 상대적인 모양입니다.

달팽이 2005-10-27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동감입니다..
절대적인 바닥을 찾기 전까진...있는지도...없는지도...
 

네가 날 버리고 간 그 자리에

풀이 무성히 돋아났다.

네가 날 버려둔 그 시간에

나는 묶여서 꼼짝하지 못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고

몇 번의 해가 바뀌었다.

네가 날 버리고 간 그 곳에

뿌리를 내린 나를 보았다.

밑둥부터 썩어가며 내리는 뿌리

슬픔과 절망만이 그 썩은 뿌리에

양분이 된다.

네가 나를 버린 그 과거의 시간 속에

나는 아직도 웅크리고 있다.

언젠가 돌아와 손을 내밀어 줄

너의 하얗고 작은 손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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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5-10-2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는 것들은 모두 옛것이지만 그것들은 기억 속에만 있어요. 그 시간에 묶여 숨도 쉬지 못하지만...이제 일어날래요. 걸어 볼래요. 때로 기억들은 잘못 맞춘 퍼즐 같은 데도 그것에 너무도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될 때가 있어요. 엉킨 기억들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 작은 손은 이제 작은 손이 아닐지도 모르는데...님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하는 혼잣말입니다. 시는요, 아파요...

달팽이 2005-10-27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 하얗고 작은 손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에요.
결코 현실에서는 끼워맞춰지지 않는 기억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놓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 아픔과 상처가 깊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건가봐요.
아파하지도 못했다면 슬퍼하지도 못했다면...
지금 난 더욱 그 자리에 묶여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얘깁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