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무위당 장일순을 기리는 생명의 이야기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 녹색평론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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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비가 조금 내리던 날 아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이 찌푸둥해서 산행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그 며칠 전에 보면서 언제 금정산 산행 한번 가자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남문으로 올라가서 동문을 거쳐 북문으로 걸으면서 산아래에서 강한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안개들이 우리의 온몸을 스쳐갔다. 범어사에 들러서 경내를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간단히 막걸리와 파전을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무위당 선생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서둘러 술잔을 비웠고 서점으로 갔다.

  친구에게 '노자이야기'라는 책을 선물하면서 이 책을 함께 샀다. 장일순 선생님의 책인줄 알았으면 이미 사야했을테지만 이 책은 선생님의 육성보다는 사후 10년을 기리는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묶여있는 것이어서 주저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뜻과 정신이 씨앗이 되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가 궁금했고, 무엇보다 장일순 선생님의 책을 본 것도 벌써 두 해가 다되어가서 다시 그 분의 책을 들고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을 대할 때 현실의 사람이든 역사적인 인물이든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나 업적이 무엇이었나를 보게 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정신은 무엇에 바탕했고 그가 가졌던 사상이나 삶의 기준이 무엇이었나에 더욱 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 선생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활동과 지위를 가지지 않으셨지만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관통해서 하나로 소통하는 깨달음에 뜻을 두셨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회적 운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향잡으시고 인도하셨다.

  신협, 생협운동과 한살림운동이 선생님에게서 비롯되었고, 독재시대의 반독재투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천하셨다. 그리고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동학사상을 재조명했던 점들은 사회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뜻은 깊은 진리를 향한 길을 걷는 것에 있었지 자신의 명예나 학문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에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지학순 주교님이나 리영희 선생님. 김지하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 이철수 씨, 이반 씨 등의 여러 사람들에게 그 사상과 철학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으리라.

  선생님의 삶을 기리는 모임이 결성이 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살았던 외형의 흔적을 쫓는 것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소박하게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을 되살려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선생님이 살면서 도달하려했던 마음의 중지가 아닐까? 위무위라는 도덕경의 말처럼 하는일 없으면서 안하는일 없게 사는 것을 추구하셨던 분, 스스로 일속자라 하여 자신을 겸손하게 하면서도 그 작은 것 속에 온 우주를 담아내었던 삶, 그리하여 삶의 깊은 지혜 속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소요유의 자세가 난을 그리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논리적으로만 치밀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단순하면서도 보다 넓게 삶을 포용하는 자세와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 나는 늘 부끄러움을 느낀다. 옛 성현들의 글이 항상 자신을 제대로 보고 내면적 성찰을 통해 성장하라는 격언을 선생님에게서 산 증인으로 배우게 된다. 선생님의 씨앗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피어날지 궁금해진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원래 대량화되다보면 그 깊은 뜻이 희석화되기 쉬운 법이다. 선생님과 인연되는 사람들이 소수일지라도 그 뜻을 최대한 살려내면서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몇 몇의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더욱 좋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표연란을 책을 넘겨가면서 마지막으로 들여다본다. 난의 기품이 서려있으면서도 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있다. 그 바람 속에서 난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난의 기운이 강하면 바람을 살릴 수 없고, 바람이 세면 난의 기운이 살지 못한다. 이 둘을 묘하게도 살려낸 선생님의 표연란에서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그의 삶과 정신을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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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2-0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노자이야기란 책, 읽고 싶어지네요..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엄두를 못냈었는데.그리고 님의 정신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리뷰였습니다.

달팽이 2006-02-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도덕경의 5천여자의 한자를 따라 써가면서 노자의 마음을 느껴보기를 바라며, 무위당 선생님은 노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꼭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파란여우 2006-02-05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색평론사에서 발간하는 종류들의 책을 편애하는 버릇이 많아요 저는.
장일순 선생하면 이론과 실천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그분이 맡으셨던 한살림이 떠오릅니다.
아까운 분은 왜 서둘러 가시는 것인지...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분입니다.

달팽이 2006-02-05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감히 그분의 정신을 닮고 싶습니다.

2006-02-05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2-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다음부턴 실수하지 않을게요..
좁쌀 한알,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노자이야기, 그리고 이 책이 아마 무위당선생님과 직접 관련있는 출판된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6-02-06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2-0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충고로 아무래도 국어 맞춤법 책도 좀 읽어야겠군요...
사소하지만은 않은 중요한 일이기도 하겠지요?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 우리 문화 바로 찾기 1
조용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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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둘째 아이의 출산일이 가까워온다. 천천히 아이의 작명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는 좀 더 성명학에 대한 기술뿐만 아니라 사주명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문서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지난번 서점에서 '조용헌의 사찰이야기'란 책을 보다가 이 사람이 동양학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눈여겨보았고 인터넷 검색 중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주명리학 하면 의례히 길거리에서 점보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당사주 네가지에서 오행을 추출하여 거기에 맞춰서 이름을 짓고 운명도 가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그렇게 작명하고 점보는 사람들도 불과 몇 달 공부해서 막 점보거나 이름짓는 사람부터 일생을 주역과 사주명리에 걸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아가서 자신의 영달을 위한 사주풀이나 예언보다는 타인을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면서 자신을 비워낼 때 비로소 참된 역학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흔히 잡스러운 학문이며 일반인이 좀 꺼려하는 부분이기도 한 동양학은 경희대와 원광대에서 한의대가 생김으로써 제도권으로 편입된 부분과 최창조 교수의 풍수지리로 인정을 받은 분야와 아직은 미신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사주명리, 굿, 점 등의 많은 영역이 남아있다. 그동안의 급격한 산업화와 서구화의 물결로 이젠 그 전통의 맥마저도 끊어지고 있는 실정에서 우리 문화의 하나로서 사주명리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벗어버리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5000년이 넘게 이어온 인류의 지혜와 예지가 담겨 있는 동양학의 하나로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수용과 창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작명서도 그러했지만 음양오행이나 주역책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번에 시윤이 이름을 지을 때에도 천체에 대한 난해한 그림에서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으며 서너번 반복해서 읽어내려갔지만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전체속에 부분이 있고 부분 속에 전체가 있다는 격언처럼 천, 지, 인이 모두 어떤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주명리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역과 음양오행, 사주명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이해 속에서 보다 거시적인 시각과 미시적인 시각을 골고루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일반인이 알기 쉽게 쓰여져있으면서도 강호동양학의 역사와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틈틈이 설명하고 있고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서 한국적인 동양학의 체계를 수립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나같이 관심은 좀 있으나 어떤 방법으로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고전에 해당하는 책들과 그 책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준다. 인터넷 검색으로 몇몇 책들을 찾았으나 절판된 것이 많았고 하지만 구할 수 있는 책도 없지는 않았다.

  둘째 아이의 작명을 계기로 다시 들게 된 역학에 대한 공부가 조금은 더 깊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저자를 만나게 되어서 예전에는 몰라서 이책 저책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구입했던 것이 이젠 공부할 방향이 좀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분야에서든 대가들끼리는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역학의 대가들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그 마음을 비워서 진리가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했다는 점에서 구도자와 같은 길을 걸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속인인 나는 이 분야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술을 익힌다는 생각보다 구도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것이 또한 보잘것없는 재주로 남들을 현혹하지 않는 길임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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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25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윤이라는 첫째아이 이름도 참 좋네요.
건강한 출산과 함께 멋진 이름 짓는 것도 성공하시길!^^
(이 책 저도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답니다.)

달팽이 2006-01-25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방학때 집에서 간간히 볼 수 있는 영화추천도 감사하구요..

비로그인 2006-01-29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 겨울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직접 이름을 작명하신다니 대단하시네요.막상 직접 이름을 짓는 것이 생각보다 참 어려운 일일 것 같네요.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사주와 미래와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니..성공하시길 바랄게요^^

달팽이 2006-01-30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 없는 저로서는 잘짓는다는 마음없이 그저 좋은 마음써서 짓는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자식의 이름을 좋게 지어 자식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아뭏튼 감사합니다.
 
논어의 논리 - 철학적 재구성
박이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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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가 가진 아시아사회에서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를 제대로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일반인으로서 논어가 가진 유교적인 영향을 국가와 사회, 문화와 관습을 통해 느끼고 영향받으면서도 그 논어에 내재한 혁명적이고 개혁적인 논리는 대체로 왜곡되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논리를 대변해주는 것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지금껏 쏟아지고 있는 많은 논어에 관한 책이 주로 논어의 내용에 대한 주석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박이문 교수는 논어를 새롭게 읽는 방법의 한 가지를 제시해준다. 논어에 내재한 논리를 중심으로 논어의 내용을 다시 이합집산시킨다. 논어가 가진 중요성을 우리 사회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논어의 정작 중요한 텍스트가 가진 논리의 이면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온 것이 사실이다. 우선 나부터도 도덕경에 먼저 마음이 끌렸으며, 도덕경이 청명한 하늘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논어는 진흙투성이의 땅위로 내려온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어를 현실사회를 해석하고 변화와 개혁을 위한 의미로서 새롭게 읽어내려는 노력들이 최근 들어 이루어지고 있고 이 책 또한 그러한 일련의 노력들 가운데 하나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서양적 가치와 대비되는 동양적 가치의 정신적 문화유산의 한가운데 오랫동안 서 있었던 논어는 삶의 진리가 우리가 감각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하는 서양의 경험주의와도 다르고 합리적 추론을 통하여 이성으로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합리주의와도 다르다. 서양적 가치가 합리적 이성과 과학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동양적 가치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으로 느끼는 것의 부정확함과 현실파악의 결여성에 주목한다. 나아가 참된 진리는 격물하는데서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내면의 수양을 통한 치지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동양적 견해는 인간과 사회역시 자연의 산물로 자연의 일부이므로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여 일체의 사회와 속세로부터 벗어나 도와 덕으로 귀의해야 한다고 생각한 노장사상과 하늘의 본성으로부터 나온 인과 예를 중심으로 사회에 나아가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삶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하며 그 진리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맹사상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묵가와 법가 그리고 불교사상이 있었지만 말이다.

  논어는 그 중에서도 탈현실주의적이고 탈사회주의적인 노장사상에 대비되어 참된 진리를 향한 배움의 길을 현실에서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나아가 배움의 추구를 통한 현실개혁에 그 완성이 있다는 점에서 관념적인 것에 치우쳤다고 비판받는 노장사상을 보다 현실로 끌어들여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삶속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인간 사회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그 의식의 산물인 문화가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깍고 산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현실적인 삶에서 우리는 보다 논어에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마음을 항상 도와 하늘의 본성과 그에 따른 인에 두고 그 인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인 예로서 수신했던 논어가 나의 삶에 주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공자에게 있어 군자불기였지만 또한 기이기도 했던 것은 인을 근본마음으로 지녀야했지만 예로써 실현해야 했던 문제와 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몸과 마음이 하나의 일체화된 삶으로서의 논어를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삶이 추구하던 바였으며, 종심소욕불유구라고 했던 그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사상을 펴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려했고, 자꾸만 좌절했던 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에 삿됨과 고집이 없이 인과 예에 닿으려했던 공자의 마음은 "조문도 석사가의"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참된 삶의 진리를 위해 내 현실적인 삶을 던져버리지 못한 나의 경우처럼, 공자의 사상은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서 수신하고 배우고 나아가 삶의 본성에 닿고 깨닫는 길을 가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다. 우리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양을 해나갔던 이가 얼마나 무수했을 것이며 또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마음의 바탕을 찾았던 이는 또 얼마나 무수했을 것인가?

  노장사상의 깊이로 단순히 논어를 비판하기보다 그 사상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지고서 참된 삶을 찾고자하는 이의 오랜 교과서적인 역할을 해왔던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우리는 논어의 첫페이지를 들추어야 할 것이다. 그 마음 속에는 노장이니 공맹이니 법가니 묵가니 하는 구별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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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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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본성은 어떠한가? 20세기의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는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선과 악의 역사적인 경험을 공유하였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본성의 여러 가지 측면에 대한 연구들이 많은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인류역사를 설명해주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에 대한 10가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실험들이 가지는 의미와 사회적 영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은 과연 행동의 조작에 의해 밀가루 반죽처럼 어떠한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는 존재인가? 평범하면서도 정상적으로 보여지는 인간도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서 희대의 살인자로도 무서운 인종차별주의자로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신체기관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면 인간의 성격과 능력도 신체기관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약품과 수술로서 유전자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각각의 대담했던 실험들은 많은 찬사와 비난을 받아왔다. 생명을 실험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윤리성 문제로부터 그런 실험의 성과로 말미암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으며, 잘못된 정신의학이나 심리치료의 폐해로부터 해방되었던 장점들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은 그 통계적 결과가 절대적인 수치로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애초의 무수한 가능성들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건화된 행동의 훈련으로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주어진 상황과 권위에 대해서도 거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런 실험 그 자체가 피실험자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인생의 경험으로 그 사람의 가능성과 선택에 따라 똑같은 실험이 서로 다른 피실험자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이러한 심리실험들은 인간이 가진 다양하고도 폭넓은 인간가능성에 대한 현실적인 증명에 다름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어느 한쪽의 조작만으로 인간 존재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갖는 한계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인간 행동의 조작 또는 신체 기관의 절제 또는 약물변화로써만 인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이고 행동적인 문제들을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로 모두 환원시켜 해결하려는 것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은 왜 그렇게도 사회적으로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던 실험을 하였던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의 학문적인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더욱 황폐해졌고, 우울했으며, 삶의 깊은 슬픔 속에서 지내야만 했던 것인가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이 종교적인 추구에 있어서는 깨달음과 성인으로의 길로 나있었다고 한다면 심리학적이고 정신의학적인 길들은 더욱 많은 좌절과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낳았다는 사실이 대비되었다. 그것은 실험자의 마음가짐과 그의 인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이 책에서는 채워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의 렌즈로서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좋은 배움이 되었다. 나아가 인간의 행동과 심리 뇌기관의 이해가 인간존재와 그 행동과 심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조언을 주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쉽지 않은 심리학 정신의학 용어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으면서도 본질적인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담아내었던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더불어 우리말로 잘 옮겨준 역자에게도 그 칭찬의 일부를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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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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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열하일기인가?

열하라는 공간은 18세기 후반 몽고와 티벳, 아라비아 등의 다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여기서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어느 한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 유목적인 삶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현재 우리 세상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근대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던한 사회로의 이행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의식은 아직 근대나 전근대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의 흐름과 의식의 불일치 속에서 더욱 많은 마찰음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하일기는 바로 200여년 전의 연암 선생의 열하기행문을 통해서 열하라는 공간이 주는 다문화적이고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라는 측면과 그런 열하일기를 쓴 연암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현실과 의식의 불일치를 극복해보려고 하는 시대적 코드로써 읽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우선 연암의 문체가 정조때의 '문체반정'이라고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원조가 된다. 그의 문체는 시대의 무거움을 벗어난 역설과 재치, 해학과 웃음의 생생한 필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체 형식만 보아서는 그의 정신을 얻을 수 없다. 그의 문체 이면에는 그의 문장에 대한 생각을 또한 읽어내어야 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가끔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가운데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영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초정집서]

  따라서 옛글과 오늘의 글을 같게하는 것은 형식에 또는 문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법도에 맞아야 하며 이는 옛 글쓴이의 마음과 정신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 사람의 마음을 잃은 채 문장의 형식만 흉내낸다면 그것은 이미 법도를 잃은 것이 될 것이요. 옛 사람의 마음을 잃지 못하고 행동거지만 따라한다면 그것은 앵무새의 흉내에 다름아닌 것이다.

  열하일기는 text의 미완성이란 점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결여로써가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넘어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은 열하일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완결된 구조로서 우리들에게 강요되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의 창조과정을 따라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부러운 점이 있었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우정이다. 벗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벗은 나를 알아주는 지기요 또한 인생이라는 배움의 장을 함께하며 질책해주고 위로해주고 때로는 경쟁자로서 때로는 스승으로서 때로는 삶의 동반자로서 우리들의 배움을 완성해가는데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러한 벗에 대한 인류사의 명문장으로 나는 이덕무의 글을 빼놓을 수 없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간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선귤당농소]

  아, 이덕무의 이 글을 읽고도 마음으로 애타게 그리는 지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정말 아직 친구를 잘못 사귄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말없는 말을 교환하며 배움의 길에 있어 서로에게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붓이 되기도 하고 종이가 되기도 하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인생길은 그리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연암선생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박제가가 연암선생과의 첫만남의 인연을 쓴 [백탑청연집서]를 보면 나이를 넘어서도 벗이 될 수 있는 만남에 대해 청연과도 같은 인연임을 말한다.

  "지난 무자, 기축년 어름 내 나이 18,9세 나던 때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에다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바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나이를 넘어서 벗을 만나고 그 귀한 벗을 대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다. 그의 집을 찾아간 날에 몸소 밥을 차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밥상을 정성스레  차려 준 밥을 가슴찡하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날 나는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벗의 우정을 먹은 것이다. 연암 선생의 벗을 대하는 마음에는 나이의 많고적음을 떠나 벗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또 그 대접을 받고 그 사람됨을 알아보는 박제가 선생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논객들의 만남다웠구나.

  열하일기에서 문장의 빼어남으로 야출고북구기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흠뻑 앗아버린 문장은 바로 [일야구도하기]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 문장은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

  대학의 '격물치지'를 떠올리게 한다. 외부의 현상들이 감각으로 인식되는 생각들을 물리친 다음에야 비로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각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더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휘둘리어 공연히 제걸음에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온갖 감각과 생각을 차단한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가 아닌가? 그 자리엔 강물소리가 들릴리가 없다. 마치 있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자유자재한 자리가 될 것이다.

  연암 선생의 매력은 단지 문장력에 있지를 않다. 혼란하고 무거웠던 시대를 해학과 웃음으로 가볍게 뛰어넘은 그의 삶 속에는 이렇듯 삶을 바라보는 깊은 지혜가 있었다. 오늘날의 시대, 감각과 온갖 사상과 생각의 난무로 너무나도 복잡해져 삶의 정체성을 찾기 힘든 시대에 열하일기는 단지 그런 삶의 회피로서의 웃음과 역설이 아니라 삶의 깊은 관조와 진리를 향한 구도자로서의 방향제시로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나는 이렇게 열하일기를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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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58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