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공부를 제대로 못해서 미혹함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꾸준하게 이어갈 것인지가 과제다.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좌선을 해보기도 하지만

꿈속으로도 스며들지 못하고 깨면 영 모르는 나이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문득 눈을 떴을 때

아! 내가 이렇게 어둡지만 눈을 떠서 마음을 찾으려는 마음이 고맙고

매일 또 공부하려고 하는 마음이 고맙고

또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 만물이 공부거리가 되니 고맙고

무엇보다 내가 미혹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주는 마음이 고맙다.

책을 보며 사는 미운 내게 한마디씩 말걸어주는 처가 고맙고

책읽는 것 방해하며 내 손을 끌어당기는 아들이 고맙다.

참 고마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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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2-2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누아 2006-02-2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얘기 들려줘서 고마워요.^^

달팽이 2006-02-2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마스테 _()_

파란여우 2006-02-2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달팽이 2006-02-2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님이 돌아오신건가요?
 

문을 닫고 방안에 하릴없이 앉았으니

한가하고 여유로워 마음마저 조용하다

간간히 까치가 날아가며 세상 소식 전하지만

옳고 그름의 일 쉬어두고 바닥에 눕는구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받고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책 한 권을 집어드네

읽다가 졸리우면 자고 깨면 다시 읽으니

진리의 뜻 마음에 품고 해지는 걸 맞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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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覺爲我 夢者是誰 以夢爲我 覺者是誰

以生爲我 死者是誰 以死爲我 生者是誰

覺不知夢 覺是夢之幻 夢不知覺 夢是覺之幻

生不知死 生是死之變 死不知生 死是生之變

夢覺互幻 死生相變 而求我於其間 未得眞實處

世無一人 疑到於此者 噫擧世方在夢裏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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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02-1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몽쇄언]을 읽고 계시군요. 서늘한 달빛 아래에서 월창거사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혹은 꿈도 아니고, 깨어있지도 않은 어떤 상태가 존재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요. 사랑하는 이야기를 함께 들으니 흐뭇합니다.

달팽이 2006-02-1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새벽 출근길에 밝은 달빛이 잔잔한 강물 위에 비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산위에 뜬 달이 진짜인지 물 위에 어린 달이 진짜인지 우리들은 알지 못합니다.
꿈을 꾸면서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나에게만 고유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제 꿈에 친구와 물을 뜨러 악어늪을 지나야 하는데 조심하라고 충고하지만 그 친구는 스스로 덤벙대다가 악어에 물렸습니다.
마치 내가 물린 것처럼 온몸이 아팠습니다.
물린 것은 친구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은 마치 생시와 다름이 없었지요..
깨어난 나는 온몸에 땀이 흥건히 젖어있음을 느꼈지요..
저마다 꿈꾸는 세상
저마다 사는 세상
모두가 한바탕 꿈인지도 모릅니다.
 

 

世人以覺爲常 以夢爲幻 夢者不覺之名 覺者不迷之稱

夢若是幻 在夢者可謂無常 覺若是常 出夢者乃可謂常

世所謂大丈夫者 果能知其何者是常 何者是無常乎

常者不變不幻 苟知身中有不變不幻之物 則可謂知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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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2-1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 상

이누아 2006-02-1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有一物於此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이뭣고?

저 글을 읽으니 이 물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달팽이 2006-02-1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가?

달팽이 2006-02-12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몽쇄언에 좋은 말 있어 한번 더 옮깁니다.

雲走天無動 舟行崖不移
本是無一物 何處起歡悲

 
한글세대가 본 논어 1
배병삼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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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학기 중에 들었다가 공야장편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제자에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글들에서 중단된 좌절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중이라 전편이라도 끝내리라라는 생각에 하루 한 편씩 한문을 중심으로 시작한 논어가 이제야 전편이 끝났다. 학이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인생의 단계를 담은 위정편과 공자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을 다룬 이인편이 아무래도 많이 기억에 남는다. 보수적인 유교공부의 대표격이 되어버린 논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공자의 사상이 시대를 앞질러가서 혁신적이고 계급타파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 많았다. 나아가 사회개혁을 주장하면서 은둔적인 노장사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도 마음의 중심을 수기하는데 두어서 늘 그것을 잃지 않고 사회에 나아갔다. 또한 마음의 중심을 인에 두고 벗어나려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가 자신의 인격을 잡아먹는 현실의 위정자들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논어 전체를 꿰뚫는 그의 정신은 호학에 있다. '호학' 얼마나 멋진 말인가? 어느 정도의 학위만 따면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격적 성장이 멈추는 것인데도 그것을 자랑삼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면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의 호학하는 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배움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벗을 삼아 속으로는 자신의 공부를 부추키고 밖으로는 배움을 교류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또 벗의 모습에서 자신을 비추어 면학하면 인생을 사는데 있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학이편의 첫구절의 내용이 논어 전체를 통과하는 정신이라고 보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배우고 이것을 몸에 익혀 자기 삶으로 만들어가니 이것이 기쁨이 아닌가?

배움을 함께하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것이 즐거움 아닌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니 이것이 군자 아닌가?

 

그것은 배움이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고 닦는데 있는 공부이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무관하게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이러한 배움은 막힘이 없어야 하겠는데...그것이 군자불기이다.

 

 君子不器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그 편협한 시각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가지겠지만, 사람이 사회에 나아가면 한 분야의 일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법, 나는 차라리 그 마음가짐을 드러난 세상에 두지 않고 수기하는 데 두었다라는 뜻으로 읽고 싶어진다. 마음 속의 진리와 그를 향한 배움에 뜻을 둔 호학인은 그릇 속에 제한된 편협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는 십오세에 지우학, 삼십에 이립, 사십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 칠십에 종심소욕 불유구라 했다. 

 

  從心所慾不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도 천성을 따르는 곱자 즉 구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했다. 그 곱자란 무엇일까? 논어공부를 한 후 그 곱자 하나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논어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러한 공부는 모든 공부와 모든 세상 살이를 하나로 꿰어내게 만들어주는 공부였을 것이다.

    吾道一以貫之

  논어를 읽으면서 나는 대학과 중용, 도덕경과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을 하나로 꿰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관지하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때로는 불교의 화두가 되기도 하고 배움의 화두가 되기도 하고 삶의 화두가 되는 그것을 위해서는 삶을 버려도 좋을 공부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삶을 꿰어낸 공부는 이제 더 이상 삶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는 삶을 살게 하지 않는다. 이제 삶은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되며 소요하는 것이 된다. '빈이락' '부이호례자'에서 빈이락은 가난해도 자신의 인품으로 남에게 부족한 것을 구해서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가난 그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다. 즉, 가난은 삶을 즐기는 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장자의 소요유와 경계를 같이한다.

 

朝聞道 夕死可矣

 

한 시대를 학문으로 배움으로 풍미하면서도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없음을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상하지 아니하고 배움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공자의 길, 조선 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수기하는 학문으로 삼아 따라갔던 그 길에는 이미 많은 발자국들이 나 있지만, 공자의 마음을 따라 바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얼마였을 것인가? 외부의 흔적을 찾으면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패인 길이지만 마음으로 들어가면 혼자만이 묵묵하게 걸어가야 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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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1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2-1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바뀌었는지...모르겠군요...
호학은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님과도 상관없는 말은 아닐터..
이현주님의 시집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호학은..ㅎㅎㅎ

이누아 2006-02-11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를 읽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두 구절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종심소욕불유구"고, 나머지 하나가 "불천노불이과"(不遷怒不二過)입니다. 누가 와서 묻지요. "선생 제자 중에 호학하는 자가 있습니까"하고. 공자께서 "안회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단명하였다네. 해서 지금은 내 제자 중에 호학하는 사람이 없네"라고 하시지요. 책을 안 보고 기억으로 적은 것이라 오류가 있나 모르겠습니다만 3천 명 제자 중에 호학하는 제자가 단 한 명이었다고 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천노, 불이과...

달팽이 2006-02-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를 옮기지 않고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노여움을 마음으로 녹여내는 인격과 품성이 필요하겠고,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기 위해선
한 번의 잘못에서 칼끝을 대하듯 내면으로 성찰하는 마음이 필요하겠지요..
님 덕분에 빠뜨릴 뻔 했던 좋은 말을 다시 떠올리는군요..
연암 선생님도...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으며, 만족한 줄 안다면 위태롭지 않다고 해서 불이과에 대한 교훈의 말의 남겼지요..

어둔이 2006-02-1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불기...'모름지기 삶의 주인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진리에 뜻을 두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을 따지지는 않는다.'라고 어둔이가 이 즈음 깨달은 의미입니다.

달팽이 2006-02-1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릴 것이 하나도 없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