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 원리 - 역사 원동력에 관한 과학적 분석
하워드 블룸 지음, 이무연 옮김 / 파스칼북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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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는 왜 대량학살이 없으면 안되는가? 왜 현대의 세계에도 그러한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왜 서로 다르다는 구실을 찾아서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하고 때로는 인종청소까지 서슴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야만성에 대한 물음에 답을 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은 세상에 나왔다.

이제까지의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소산의 결과라는 논리를 180도 뒤집은 이 책은 그 근거에 대하여 유전학적 성질에서부터 자연계의 여러 가지 법칙들을 가져와서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록 저자의 논리에 끼워맞추기 위한 논리적 치우침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사회적 지배논리를 뒤집어보면서 이렇게 논리적이고 명쾌한 설명을 엄청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야만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적 산물이나 문화적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그것은 애초에 인간의 유전적 정보에 의해 아로새겨진 생물학적 본성이고 자연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성질이라는 것이다.

침팬지 사회에서 자연스레 서열이 생기고 우두머리가 아랫바닥에 존재하는 침팬지를 학대하는 것에서, 개미부족이 다른 개미 부족과 부딪혀서 대량학살을 수반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서, 사자가 평원에서 자신과 새끼의 생존을 위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행위에서도 우리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을 발견한다.

다만 인간사회에서 그것과 다른 차이점은 인간사회의 발전으로 인한 조직의 확대와 그 과정에서 밈(관념의 자기복제단위)이 생겨나고 그 밈의 네트워크가 인간역사를 결정짓는 주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게 다인가? 이런 약육강식의 자연현상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사회에 일어난 대량학살과 인종청소에 대해 아무런 가치판단도 내리지 못한다. 따라서 미국사회의 독주에 의한 세계평화의 논리도 합리화되어버리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균형상태에 의한 불합리가 혼란상태가 가져올 대량학살과 생명파괴의 해악보다는 낫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에....

분명 루시퍼의 원리만으로 부족하다. 그것이 인간사회의 흐름을 결정짓는 원동력이자 에너지라면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킨다면 역시 인류사회를 선한 세상으로 바꾸어내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선도 악도 없는 그 에너지가 본래에 존재하는 것이니 그것이 가진 모순적 속성을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다면 그 에너지의 긍정적 사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루시퍼의 원리를 넘어서는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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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헤아리며 카르페디엠 34
로이스 로리 지음, 서남희 옮김 / 양철북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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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자르는 것은 가위의 양날이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무릇 이 양면의 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전쟁하면 그 고통과 학살 인간성 파괴 등의 아픈 상흔이 우선 떠오른다. 하지만 그 아픈 상처 뒤로 평시에는 찾기 힘든 삶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존엄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교훈이 잠재되어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아름다움과 사랑함에 관한 이야기로써 가위의 또 다른 아랫날이다.

사건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과 현상을 들여다보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짓는다. 참혹한 전쟁의 상황에서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저자가 그려낸 덴마크 사람들처럼 자신의 이웃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 중요한 사건전개의 핵심이 되는 일들이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만들어짐으로써 작가가 그려내려고 한 전쟁속에서 인간이 놓치지 않는 아름다움과 사랑함이 단지 지어낸 이야기를 넘어 우리 현실의 삶에서 전쟁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 가능한 일임을 이야기한다.

이 전쟁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인간의 존엄이 유린되버린 뒤에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래서 평시에 그것을 지켜가려고 하는 개인의 작은 노력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끔 한다. 그리고 이 전쟁은 사람들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안네마리가 전쟁을 겪지 않았다면 단지 평범한 아이로 성숙했을 테지만 그녀는 전쟁으로 자신이 알아야 할 일과 알 필요없는 일들을 구분하게 되었고,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데 자신의 희생과 용기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이 그런 현실을 수용하고 그것이 주는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였던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한 인간의 존엄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떤 현실(그것이 전쟁이건 자연적 재앙이건....)속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과 그런 현실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과 고양을 발견해내는 지혜로움은 우리를 신에게 향해 난 길 위로 인도한다.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신을 찾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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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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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년이 넘게 다정한 이웃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비극도 만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름을 수용하며 인정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받아들이며 조화롭게 살아왔다. 통혼이 이루어졌으며 이젠 서로 친족관계로도 발전해온 그 평화로운 사회에 지옥에서의 악몽이 시작된 것은 자신의 정권에 대한 야욕을 품은 한 인물에 의해서였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그는 자신의 정권 야욕을 위해 민족갈등을 이용했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민족갈등이라고 하는 500여년이 넘게 아무런 문제없이 보였던 그 미끈한 바닥아래에 보이지 않는 틈이 갈라지고 깊어지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했다.

저자는 밀로셰비치가 아니었다면 20만명의 대량살상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보는 가정을 하기에 앞서 과연 역사에서 한 개인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관심이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그런 야수성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저자의 말처럼 그 근본원인은 민족주의도 국가도 이념도 자본도 아닌 인간본성에 잠재된 악의 근성 즉 '야수성'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다만 불을 당긴 계기가 단지 민족이라고 하는 20세기 인간학살의 많은 도구로 사용된 그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타부족이나 공통체에 대한 전쟁과 대량학살은 인간 사회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왔고, 그것은 인간이 가진 마음 속의 잔인함과 야수성을 바탕으로 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회체제 속에 편입될 때는 사회제도나 구조 자체가 그런 야수성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보스니아 내전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발현된 그 야수성이 국가와 민족체계 속에서 드러난 사회적 야수성과 만나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것은 학식도 도덕도 어떤 가치관도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하고 본성 그 자체에 의해 작동되는 메커니즘을 가진다. 낮에는 타인의 아이와 여자를 학살하고 잔인하게 살인하면서 동시에 저녁에 자신의 집에서는 다정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이율배반적인 삶도 가능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현상은 사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조그만 일에도 그것이 자신의 자아를 해치려할 때 우리 속에서 불길같이 솟아오르는 적개심과 화는 바로 우리의 평화로운 마음을 순식간에 악마의 것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야수성 역시 이와 같지 않겠는가? 지배되지 못한 마음은 우리의 내면에도 사회에도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야수성은 아직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그 약한 틈을 가르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솟구쳐 오를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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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삶 그르니에 선집 4
장 그르니에 지음, 김용기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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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아침이면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는 사실을 우리들의 관성에 젖은 퀭한 눈은 알지 못한다. 오늘 나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땅속에서 자라나야 했던 채소 하나하나의 우여곡절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일상적인 삶은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 너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 굴러가고 있는 무수히 많은 톱니들이 제각각 맞추어져 거대한 하나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일상은 그저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르니에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영원성의 세계로 향하는 비밀의 문을 몇 가지의 소재를 통해서 그만의 섬세한 감각으로 찾아낸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부딪히는 수면과 독서, 정오, 자정, 여행, 산책 등의 개념 속을 치밀하게 파고 들어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틈을 찾아내고 그 틈을 통해 성과 속의 세상을 구분해내고 성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다. 그리고 일상적인 사건 속에 내재한 절대적인 세상과 상대적인 세상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실재하는 세상이 어느 것인지에 대해서도 우린 여전히 알지못한다.

수면에서 깨어날 때 우린 단지 꿈속에서 체험한 생생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깨어난 후의 이 세상의 코드와 다르다는 이유로해서 쉽게 부정해버린다. 하지만 꿈을 꾸며 도대체 나란 존재가 나의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가? 잠은 우리들 자신들의 근원으로의 회귀를 가장 확실하게 말해준다. 문제는 그 의식을 자신이 놓치지 않고 있는가이다.

고독과 침묵도 그러하며 우리 일상을 이루는 모든 언어적 상징들도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언어적 상징의 틈 어딘가에서 저 너머의 세계로 가는 비밀의 문을 찾아내야 한다. 빛은 이동하다가 막힌 벽에 다다르면 더이상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그만 아주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다면 그 빛의 파동은 회절현상으로 틈을 매개로 서로 다른 두 세상의 경계를 통과하여 건너 세상에 또 다른 빛의 파동을 만들어낸다. 우리 일상의 삶 속에 아마 그런 피안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회절현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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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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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의 잔인함과 고통스러움에 치를 떨것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행복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의아해할 것이다. 혹시 그 사람이 죄수감독인이라면 모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수감자중에서도 그런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작가는 바로 그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자유로움을 느끼고 행복함을 느낀 특이한 사람이다. 그럼 과연 그가 느낀 행복은 무엇일까?

그가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다시 돌아온 마을에서 부딪힌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신들에게 닥쳐온 비극에 대해 모두가 상처받고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얼룩진 전쟁의 상흔은 단지 잊어버리고 극복해야만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열다섯살 소년은 자신에게 닥친 운명 속에서 자유로움을 찾을 수 있었기에 닥쳐온 비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비극도 아니었고 무기력함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으로서는 잊어버리고 극복될 수 없는 되어서도 안되는 자신의 현재모습으로 이어지는 끊을 수 없는 정체성의 끈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사건과 일들에 대해 어떠한 고정관념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진 선악이나 호오의 감정없이, 편견없이 그 일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편견없는 맞이함은 우리가 편견으로 인해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의미들을 알게 해준다. 인간 삶의 극한 조건 속에서도 그것을 아무런 편견없이 대하게 되면 일상이 되고 그 속에서 느끼는 자유와 행복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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