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 사람들의 지혜
단정자춰 지음, 성진용 옮김 / 호미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자의 장주접몽에 보면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내가 나비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일생을 거치면서 20-30년의 세월을 잠으로 보낸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세월을 차지하는 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이 우리 인생에 주는 메세지가 있음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이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 한 권 있다. 중국어로 달라이라마라는 이름을 가진 단정자취 스님의 티베트 세계관에 의한 꿈의 이야기 속으로 이 책은 우리를 초대한다.

먼저 우리가 잠드는 과정은 죽음의 과정과 흡사하다 우리의 오감이 해체되고 이완되어가는 과정과 의식의 해체과정은 죽음의 순간에도 체험되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업에 의해 오염된 의식으로 말미암아 꿈에 들어가기 전 광명의 나타남을 알지 못한다. 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우리는 진정 우리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알 수 있다면 꿈도 인생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의 수행이 잘 되어 있다면 오감과 의식이 해체되고 난 다음 우리에게 남은 본래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래 존재를 모르고 인생의 미망 속에 허덕이게 된다면 중음의 바르도 속에서도 매한가지의 경험이 있을 따름이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우리 일생의 수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잠과 꿈을 또한 우리 마음 수행의 공간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꿈 속에서 이것이 꿈임을 알아내고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의 인생이 꿈임을 알아내고 나의 진정한 본모습을 찾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꿈은 상징과 은유로서 우리 삶에 중요한 메세지를 전달하기도 한다.나도 인생에 있어 뭔가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명징한 꿈을 몇차례 꾸었다. 그리고 그 꿈들은 논리와 언어를 떠나 신기하게도 나에게 주는 교훈과 메세지를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달하였다. 문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방식을 내가 과연 그 무엇으로 그것을 아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그것을 아는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매일 밤 죽음의 과정을 거치며 다음날 아침 탄생의 과정을 거치는 중음의 어디엔가에 있을 나의 본래의 모습을 마음 속 흔들리지 않는 곳에 두고 또 다른 생(하루)을 맞이하는 가운데 나의 생명의 빛이 더욱 밝아지기를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
레프 톨스토이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인생의 각 단계에서 우리는 늘 행복함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중요한 지표가 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톨스토이의 조금 색다른 이 소설은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며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색다른 이유는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에서 늘상 다루고 있던 종교적인 삶을 떠나서 그리고 사회적 차별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떠나서도 아주 사소하면서도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 부부가 이루어가는 삶의 행복을 그야말로 우리 삶의 행복의 전형으로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관습이 매일 우리의 삶을 고정된 형상으로 석화시켜가고, 우리의 정신은 자유로움을 상실하여 아무런 열정도 없는 평탄한 삶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마 결혼생활이 중반기로 접어드는 세상의 모든 부부들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일 것이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이런 문제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르게이 미하일리치의 아내가 된 마샤는 이런 일상적 삶의 관성에서 의식의 화석화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새로운 삶의 활력소로서 사교무대를 찾게 되는 과정과 그 사교무대에서의 화려한 생활속에서 일시적 삶의 기쁨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시작은 끝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그녀는 쇠퇴하는 자신의 사교계에서의 위치와 그로 인한 삶의 또 다른 화석화에서 다시 가정을 찾게 되고 이미 가족에서 예전에 있었던 삶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결혼 초기 생활의 행복했던 시절들로 돌리고 싶으나 이미 그럴 수는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허무해한다.

그녀가 결혼 전 포크로브스코의 옛집에서 보내며 세르게이랑 나누는 후반부의 대화 속에서 그녀는 삶의 진실된 행복은 삶의 단계 각 각에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해내어야 하는 보물과도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당신은 잎새와 풀이 비에 젖는 것을 보고 그것들이 부러웠지. 당신 자신이 풀이 되고, 잎새가 되고, 비가 되었으면 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야. 아름답고 발랄하고 행복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삶의 각 단계에서 변화해가는 모습을 수용하고 그 곳에서 변화된 사랑과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세르게이의 말은 삶의 관성에 타락한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결혼한 지 일년이 다되어가는 나의 결혼생활에서도 사랑의 자리는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 서로에게 남겨져 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랑은 모두 씻겨져가고 없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텅 비어있을 것 같은 그 자리엔 여전히 변화된, 가슴앓이하고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열정은 없어도 내 삶을 지탱해가는 평화로움과 행복함이, 사랑이 모습을 달리하며 웅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 앞에서 울다
제럴드 L. 싯처 지음, 이현우 옮김 / 좋은씨앗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하고 단란한 한 가정에 별안간 닥친 사고는 그 가정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린다.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 구성원의 정체성과 자아마저 상실시킨다. 이러한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왜? 나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당혹스러워 한다. 급격하게 변해버린 그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앞에서 충격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때로는 그 상실이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황폐하게 하여 남은 생애를 무의미하게 보내게 하거나 남은 자의 삶을 단축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예고없는 불확실한 사고는 누구에게나 닥쳐온다. 다만, 인생의 길에서 일찍 만나느냐 늦게 만나느냐의 문제이고 급격히 죽음으로 치닫는가 아니면 천천히 다가가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은 자신의 일부를 파괴시킨다.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그 관계 자체를 파괴시킴으로써 자아를 파괴시킨다. 하지만 파괴 속에는 창조가 도사리고 있다. 파괴의 상실감에 아무런 것도 보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볼 수 없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인생의 길에 느닷없이 닥친 사고와 불행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이후의 삶에 의미부여하는 가치를 달리할 수 있다.

싯처는 상대편 운전자의 잘못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 세 명을 동시에 잃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을 존재하게 했던 정신적 관계망들을 완전히 해체시킨 이 사건은 그와 남은 자녀들의 삶을 불행속으로 던져 넣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상실감 속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고 삶의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 사고는 그로 하여금 점차 남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그의 모습을 기대했고 또한 파괴된 관계망을 대체할 새로운 관계망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과 믿음이란 이름으로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그 상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의 영혼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것은 그 사고를 일으켜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상대편 운전자를 용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그리고 자신의 이어지는 삶에 도움과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어 갔다. 비록 죽은 자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하고 갔지만 살아 남은 자들에겐 아직 남은 삶에 대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자녀들의 삶, 그리고 자신의 남은 삶은 그 처참하고도 수용하기 힘든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렇게 수용은 용서로 용서는 사랑으로 그 사랑은 저자의 영혼을 성장의 길로 돌아서게 하고 비로소 그는 자기 삶이 가진 전체적인 시각을 갖고 생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왜 나는 아닌가? 하는 물음 속에 나도 언젠가 맞아야 할, 아니 오늘일지도 모를 그 사고와 상실감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비체험을 하게 하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과연 나는 그런 상황에서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발휘해낼 수 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저자의 별세 소식을 일간지를 통해 알게 된 후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나서야 이 책이 손에 잡혔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주말을 이용해 찾은 순천의 선암사에서 나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속에서 그 흔적을 간직한 모습을 선연하게 볼 수 있었더랬고, 문득 관촌수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글은 시대의 질곡과 역사적 아픔을 자신의 성장과정을 통해 사실적이고도 고백적으로 쓰여졌다. 이 글이 나의 감성속을 깊에 파고든 것은 잘 정제되고 세련된 맛이 없이 투박하고 흙투성이의 글이지만 왠지 어릴적 세차게 비오는 날 밤에 아랫목에 손을 찔러 넣고 텔레비전을 보던 어릴적 기억을 되살려 놓기 때문이다.

물론 할아버지의 삶과 생각들이 한국의 양반사회의 고리타분한 모습과 비실용적이고도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가 그리던 것은 단지 그런 보수적이고 낡은 옛 양반사회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신분의 벽을 허물고 정을 느꼈던 옹점이와 대복이의 만남이 그러했고, 단 한 번 뿐이었지만 충격적인 표현을 써가며 되살렸던 아버지의 탈선도 아마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인간적인 면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사회가 각박해질대로 각박해진 지금...그가 떠난 뒷 자리에 그의 글이 주는 따스함의 여운이 이토록 오래 남아있는 까닭은 그의 글 속에 베어 있는, 아니 그의 삶 속에 자리했던 오래된 날들에 대한 인간적인 기억 때문은 아니었는지 싶다. 자신의 오래된 개인사의 여백 속에 위치한 삶의 아름다움과 그 생명성이 전근대적인 자연적인 삶과 그 속에서의 인간미에 대한 아련해지는 그리움으로 드러난 것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계시록 - 신과 나눈 이야기
닐 도날드 월쉬 지음, 윤원섭 옮김 / 반디미디어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인류는 지금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인 면에서의 매우 위협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아직 인류는 이러한 문제를 적절하게 다룰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대안과 실천적 지침을 만들어내고 조직화된 힘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역사는 항상 그런 노력들이 가진 한계점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닐 도날드 윌시는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적인 영적인 의식의 성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국사회에서 본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은 이런 시각의 필요성을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는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영적인 믿음과 세계관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신은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자유의지'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자유의지를 영적인 성장을 위한 신과의 교류에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신의 메시지라고 인간이 생각하는 바를 형식화, 교조화시켜 인간사회를 파괴하고 타락시키는 굴레로 만들어버렸다. 우리의 근본적인 오류는 신과 삶에 대한 다섯 가지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가 설정한 이러한 형식은 현실세계를 설명해주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물질세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은 본질적으로 물질세계를 창조하는 인간의 믿음과 세계관에 대한 오류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류가 창조해왔던 여러 가지 종교가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서 출발한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차이를 근거로 차별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현상을 낳는 기본적인 원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마음의 씨앗이다.

이러한 오류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방법은 개개인이 모든 인류의 조직화된 종교의 오류없이 직접적으로 현현하는 신의 모습을 삶 속에서 체득하고 신의 메시지를 증험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과 마음의 본성이 무엇인가의 차이로부터 차별짓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신의 메시지를 우리 개개인이 현재 직접 교류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면 조직화된 종교가 가진 해악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되면 우리가 가진 문제점은 눈이 녹아내리듯 스스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우리 몸이 가진 업의 한계로 말미암아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을 쉽게 알지 못한다. 만일 그것이 용이하다면 인류가 가진 오류도 애초부터 없었을테니 말이다.

따라서 우회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인간세상에서 인간을 파멸로 이끌 이러한 오류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마음,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마음, 이것이 정의이다라고 집착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절대원칙으로서의 도덕성이 필요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선악의 구분짓는 마음없이 다만 작동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늘 새로운 계시에 대해 열려 있는 마음, 그렇다고 우리가 가진 과거를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진보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확장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여백을 살려두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우리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행동이 우리들의 믿음과 세계관으로부터 정당한 것이듯 그들의 행동도 그들이 가진 믿음과 세계관에서는 진실로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는 인정과 그 믿음에 대한 열린 대화와 토론의 시스템과 네트워크를 형성해가는 것이 새로운 세기에 우리들의 지구공동체를 위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 시스템 속에서는 우리 영혼과 마음의 본성이 저절로 드러날테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