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김재웅 / 형설출판사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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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 올라오는 수많은 생각들로 나의 일상은 혼란스럽다. 그 생각들 올라와서 순간순간 없어진다면 마음의 고통없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어떤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주만큼 커져서 나를 휘어잡기도 한다.

몸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탐, 진. 치가 참 많다. 그러고보면 내 육신이 탐, 진, 치로 뭉쳐진 업장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생각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없어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생각들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생각들도 있다. 순간 바치면 없어졌다가도 느닷없이 다시 올라오는 생각들...업들... 중간덩어리의 생각들은 바치고 또 바치면 사르르 녹아내린다. 미운 사람 얼굴들 떠오르면 바치고 또 바치고 그러면 당분간 사그라든다... 않좋았던 일들도 생각들도 바치고 바치면 또 없어진다.

하지만 몸을 바탕으로 하는 오욕들, 무엇보다 자아만큼 질기고 커다란 장벽도 없다. 가족관계,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생각들도 아직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벽이지만 이놈의 '나'라는 생각은 아직 내가 풀어내기란 막막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낙수가 바위를 쪼개기도 하듯.. 그렇게 순간순간 올라오는 생각들 바치는 방법이 있으니... 면면히 끊임없이 순간순간 깊은 마음 내어 바치는 것. 그러면서 내 마음 지향하는 바 놓치지 않는 것. 그러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 낼 날도 분명 있으리라. 그것이 다음 생, 아니 그 다음 생일지라도...

그런데 바치는 곳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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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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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덩이를 금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을 알고 있다면 아마 자신의 인생은 크게 변할 것이다. 그런 연금술이 있다면 누구나가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런 연금술이란 다름아닌 돈을 잘버는 직업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돈이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으로 되는 소비중심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가치에 맹목적인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코엘료가 말하는 연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그래서 마음을 고양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을 말한다.

그런 연금술은 우선 말과 글의 언어를 떠나 동물이 내는 언어를 알아야 하고 식물이 내는 언어도 알아야 하며 광물과 모든 생명체가 내는 언어를 알아야 한다. 즉 '만물의 언어'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아들어야 하고 그런 만물의 언어의 바닥에 존재하는 신의 언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온전히 현재에 사는 방법이다. 지금 이 순간 온 우주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온전히 귀기울이는 것. 지켜보는 것. 느끼는 것.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양치기였던 산티아고가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 속에는 이런 만물의 언어, 즉 신의 언어가 곳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운명적인 삶의 기로에 서있을때 항상 그를 주어진 운명대로 이끌게 해주기 위해 신이 남긴 표지가 존재했다. 과연 나의 삶도 그러했다고 본다. 내가 태어난 곳, 나를 낳고 기르신 부모님, 그 부모님을 낳고 기른 조부모님들과 나와 함께 유년시절의 고락을 함께 한 형제들과 동료들, 많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만난 아내와 지금의 내 마음의 여행에 함께 한 사람들 모두 일종의 지표였다. 진정한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한....

그 운명적 선택의 순간, 나를 끌어당기는 운명의 힘을 마주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마음 속에서 에고로 인한 온갖 부정적 감정들과 생각들을 걷어내어 주고 추위에 언 영혼을 따스로운 태양 아래서 녹여주어 긍정적 마음으로 바꾸어내는 영혼의 연금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의 언어를 현상하는 물질세계의 언어와 닿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만물의 정기를 알고 사는 것은 단순한 진리를 마음과 몸으로 행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고로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아는 것이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것임을 이해없이 생각없이 자연스레 가지는 마음이며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며 삶인 것이다.

인생여행을 통해 누구나가 자아의 진리를 찾아나간다. 다만 그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각자에게 고유한 길이다. 하지만 그 고유한 길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의 언어, 신의 지표를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사이에는 천국과 지옥의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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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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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위화의 이 소설을 접한 것은 '매혈기'라고 하는 색다른 제목이 주는 끌림이었다. 역시 넓고 넓은 중국 대륙은 우리가 가벼이 보아넘길 곳이 아니었다. 모처럼 눈물을 찍어가며 때로는 웃음소리를 크게 질러가며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 책을 단숨에 읽어내렸기 때문이다.

허삼관이라고 하는 주인공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는 딴 남자와 눈이 맞아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고 넷째 삼촌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 누에방직공장에서 일을 하다 우연히 피를 팔게 되고 그 피를 판 돈으로 그는 하옥란이라는 여자를 얻어 결혼을 하게 된다. 그가 다시 피를 팔게 된 것은 하소용의 아들로 의심되는 첫째 아들 일락이가 대장장이 아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게 되면서이다. 피는 그에게 있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서민이 시련을 극복해가는 마지막 수단이자 힘없고 돈없고 벼슬없는 아무 보잘 것 없이 사는 이가 가지는 마지막 자기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는 땀과 달리 자꾸만 팔게 되면 그 사람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되며 결국엔 한 인간의 존재기반을 허물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귀중한 피를 그는 결국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집안의 생계와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계속 팔아야만 하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이렇게도 기구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가 집을 나간 일락이에게 국수를 사주기 위해 업고가던 모습에서, 아내와 간통했던 하소용이를 살리기 위해 아들 일락이에게 사람먼저 살리자고 부탁하던 모습에서, 문화대혁명의 환란 속에서 세 아들 앞에서 아내의 부정은 자신의 부정과 같다고 하면서 옥란을 두둔하던 모습에서, 만성 간염으로 죽어가는 일락이를 구하기 위해 매혈여로를 거쳐 아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 가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동과 삶 그 자체에 대한 연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가진 것이 하나 없는 비참한 삶 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아넘기지 못하는 연민과 사랑이 바로 이 작품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그것을 너무 무겁고 어렵게만 읽히지 않도록 적절한 희극적 요소를 가미한 것은 어쩌면 실제로 우리 서민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의 굴레를 수용하며 극복해가는 삶의 지혜였을 것이며 그것을 이렇게도 날카롭고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위화의 작가적 위대함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삶을 살아오며 느끼는 삶 그 자체의 애환과 그로 인한 연민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내가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많은 사람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그들의 애절한 삶에서 내 마음도 슬퍼하며 한줄기 공감의 눈물을 뿌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모습은 달라도 상징이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똑같은 삶의 비극 속에 놓여진 인간 삶의 공통된 슬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매혈을 하며 사는 인생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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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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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이 개정되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간에 우리사회에 밀어닥친 정보화혁명과 기술발전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과거에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바꿔 버렸다. 그래서 저자의 대중문화 겉과 속 시리즈의 후속편이 나올 것을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의 대중문화의 흐름에 잠재되어 있는 기본적인 사상의 흐름을 읽어내고 대중매체와 신기술의 발달로 인한 사람들의 삶의 형태와 그 삶에 담긴 의미에 대해 일반인들이 쉽게 알 수 있게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중문화에 대한 철학적 사상을 담고 있는 제 1부에서 정보화사회에서의 우리 삶이 가진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차별과 계급을 이해하는 부르디외의 기발한 생각들과 우리들의 삶을 연극에 비유한 어빙 고프만에서 원천이나 실재없이 실재적인 것의 모형에 의해 만들어진 과잉현실이 우리 삶이라는 장 보들리야르를 거쳐 판옵티콘과 시놉티콘에서 정보사회에서의 감시와 역감시가 가지는 인간존재적 의미에 대해서 우리들의 생각을 깊이 가져다주게 한다. 마지막으로 정보와 지식을 둘러싼 소유권과 공유권 논쟁에 대한 스톨먼과 토발츠 게이츠의 생각들의 미묘한 차이와 복잡성 속에 우리 삶들 또한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비문화 속에 자리잡은 기업의 본질과 문화코드는 우리들의 소비사회와 그 속의 소비자로서 우리들에게 삶의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다. 날로 새로워지는 삶의 모습과 신개념(어플루엔자, 디드로효과, 보보스, 알파 소비자, 데이터 스모그 등)에 내재한 삶의 본질과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게 하고 인터넷과 휴대폰이 가진 대표적인 대중매체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삶 속에 무의식적으로 휘몰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반성하게 한다. 기업의 탐욕에 의한 인간 마음의 타락과 삶의 빠른 속도 속에 잊어버린 자신의 자아와 대량 정보 속에서의 혼돈과 직접적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그늘과 함께,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대중적 능동성과 금기와 사회적 굴레와 강압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 자신의 삶의 자유로운 선택과 자유의지라고 하는 빛도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명암이다.

따라서 급격하고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해가는 대중문화와 매체 속에 놓여진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책의 말미부분의 리처드 스턴의 자기 삶의 가장 큰 장애물을 묻는 말에 대한 답이 교훈적이다.

'그것은 내 안의 쓰레기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허영심, 자만심, 우월감, 비교의식 같은 말로 묘사되는 부분이다. 나는 그런 부분을 다스리려고 무척 고생했다. 나보다 천성이 좋은 동료나 친구가 짜증과 원한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그 점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내 안에 있는 긍정적 요소에 힘입어 그런 좋지 못한 감정을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그걸 이겨내는 요령을 터득했다.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현실적 삶의 많은 부분은 늘 변한다. 정보화사회에서도 새로운 정보의 탄생과 소멸의 주기는 더욱 빨라지고 매체와 문화적 코드도 열심히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덧 내 능력이 쇠퇴해진다고 느끼는 순간 낯선 곳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삶의 중요한 문제는 바깥의 외형적 모습을 쫓아가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것인지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자율 선택권에 있다. 외부의 주어진 삶의 모습과 속도에 휘둘리지 않는 삶,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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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 알츠하이머병이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솅크 지음, 이진수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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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화가의 대가 데 쿠닝이 뉴욕에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기의 기내영화를 보면서 말했다. '정말 형편없는 영화네. 여보, 그만 나갑시다.' 이 이야기는 농담이 아닌 실화다. 데 쿠닝은 알츠하이머 환자다. 뇌세포에 생기는 섬유농축제와 플라크가 원인이 되어 생기는 알츠하이머병은 이미 미국에서 큰 사회문제가 되었으며 앞으로 전세계로 확장될 전망이다.

이 병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른 치명적 병이 단기간인데 비해 20여년 또는 그 이상으로 장기간이다는 점이다. 둘째,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에서 500만명 정도의 환자에 전업으로 보호하는 사람이 500만명 정도이므로 환자가 증가할 시 미국의 사회경제구조의 기반이 허물어질 정도라는 것이다. 셋째, 공공의 안전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이다. 판단능력이 결여된 자에 의한 운전과 행동이 공공의 안전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회문제가 된 알츠하이머병이 결론적으로는 가족이나 공동체내에서 부담지워지고 해결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런 병이 생길까?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이런 병은 그리 흔치 않았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로 인한 수명연장으로 인해 육체가 노화되면서 이 병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 병의 증세는 독특하다. 점차 생각과 감정, 기억력, 인지력이 뇌세포의 파괴와 더불어 파괴되면서 사고력이 아이수준으로 되돌아가다가 탄생의 순간 아이의 무의 사고력으로 돌아갈 때 사망하게 된다는 점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사고력은 아이와 같아서 아이들과 잘 논다. 하지만 다른 점은 아이들이 점차 사고력을 완성해간다면 그들은 점점 퇴보해간다는 점이다.

이 병을 만일 내가 앓게 된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그리고 만일 내 부모나 가족 중 누군가가 걸려서 내가 보호자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여느 치명적인 죽음에 이르는 병을 대하는 태도와 같으며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이자 삶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 망각을 모르는 모스크바의 20대 신문기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지난 세월동안 자신이 겪어온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일을 잊지 못해 제반사건으로부터 그 사건의 의미와 교훈을 배울 수가 없다. 그래서 망각은 참된 삶의 조건이자 숨겨진 미덕이 되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인간의 삶을 또렷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렌즈다. 인간경험으로부터 노망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다 삶의 의미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창까지 없애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수많은 고통과 상실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인류정신의 위대하고 고결한 성숙도 역시 없었을 것이다. 영생의 삶이 주어진다면 그로부터 얻을 이익보다 실이 더욱 많을 것이며 더욱 큰 사회문제화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한계지워진 삶 그 자체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인간이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영생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는 인간의 강점이기도 한 것이다. 망각과 상실이 주는 운명적 교훈이 있는 것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내가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하나 둘씩 사라져버리고, 지각력과 사고력이 떨어지고 말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다면 나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때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본래 있었으며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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