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으로 얻는 깨달음 - 달라이 라마 명상록
텐진 갸초 지음, 지창영 옮김 / 가림출판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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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의 4일간의 대화로 엮어진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내와 관용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명상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말을 할 때 우리는 분노하기도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분노와 미움의 이유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내와 관용이란 무엇인가? 이미 온전한 이 우주에 내가 스스로 업을 짓지 않기 위함이다. 이러한 인내와 관용만이 이 지구에서 우리 인류에게 닥쳐온 위기를 해결하고 우리 인생이 가진 의미를 온전히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인내와 관용의 부족이 가져온 수많은 업들, 현상적으로는 세계의 전쟁과 살륙, 마음으로는 3독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마음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와 관용은 타인의 고통과 번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 그리고 자비의 마음으로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일수도 있으며, 현상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사건 사물들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의 수행을 이야기할 때 이 두 가지의 방법이 모두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통에 빠진 중생들의 삶을 연민하고 그 고통에 대한 자비심을 기르는 것은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보리심과 자비심을 위해 인내와 관용의 마음을 마음에서 키워내는 것은 중생의 행과 업이 사실은 그들 자체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는 깨달음을 아는 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상의 실재를 이해하고 공을 깨닫게 되는 것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깨달음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삶은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것이 된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다름이 없다라는 말도 이것과 상통되는 것이 아닐까? 인내와 관용 그리고 실재에 대한 깨달음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이 마음이란 무엇일까?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나의 오감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도 무감각하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그 마음을 놓치지 않는 것... 바로 명상으로 얻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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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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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까지의 과학은 전체는 부분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했으며 따라서 우주를 이루는 가장 작은 알갱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끊임없는 탐구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는 부분들의 합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네트워크, 즉 부분들간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염색체 수는 46개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네트워크를 이룬다면 인류역사와 더불어 존재한 모든 수백 수천억의 인간들이 하나 하나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일 정도의 많은 경우의 수와 그 수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많은 특성들이 나타난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네트워크이다.

사실 네트워크하면 컴퓨터의 가상공간에서부터 시작되어 사회 조직의 운영원리와 기업조직의 원리 등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정작 네트워크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해명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한 과정에서 씌여진 결과물이며 그것은 네트워크와 링크를 설명하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네트워크의 구조적 특성으로 드러난 몇가지 사실들은 우리 사회와 사회구조 경제구조 정치구조 및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을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유용한 도구가 되고 있다. 노드와 그것을 연결시키는 링크의 개념은 사회현상의 많은 것들을 설명해준다. 많은 링크를 가지는 허브의 존재는 기업이 소비자들을 구매로 이끌기 위해 치중해야 하는 방법에 대해 보여주고 있으며, 80:20 법칙을 통해 기업조직의 거대화와 빈부의 격차문제가 네트워크의 발전방향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생기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허브의 존재야말로 사회적 자원과 다른 노드들로 연결되는 링크의 횟수를 최소한만 사용하고도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경제적 효율성의 개념을 충족시켜준다. '6단계의 분리'역시 네트워크의 발전과 더불어 좁아지는 세상에 대해 우리들에게 노드라는 자아보다 링크라고 하는 상호작용에 대해 시사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네트워크가 가진 철학적인 의미와 그것이 인간의 존재와 삶에 주는 메세지가 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부분은 없다. 단지 과학적 연구방법에 따라 네트워크가 드러내는 여러가지 특성들과 그것이 우리 사회와 세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만일 네트워크의 여러 가지 특성들과 지금의 세계화 경제와 기업의 거대화 빈부의 격차문제...허브와의 링크계수가 작은 사람들에게로의 권력과 부와 명예가 집중되는 현상들도 자연스레 정당화되는 것인가?

과연 이 네트워크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네트워크도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영적인 세계의 네트워크에도 이런 특성들이 적용되는가? 아직까지 많은 물음들이 베일에 가리워진채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21세기에 네트워크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 세상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창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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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이정우 지음 / 산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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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놀랍다. 그리고 대학교수직의 제의를 거절하고 제도권에서 할 수 없는 담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철학아카데미를 개원해서 그가 펼치는 활동은 우리 사회에 참된 지식이 나아가야 할 바를 시사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이미 지구는 전 세계적 자본주의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본주의는 이미 초기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탄력적으로 흡수하여 더욱 공고한 체제를 바탕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 물질적 성장에 대비되어 정신적이고 진정한 삶의 행복에 대한 우리들의 만족도는 형편없다. 따라서 이제 이러한 맹목적 성장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자의 물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다.

과학에 기반하는 진리의 사회에서 철학과 사유에 기반하는 진실의 사회에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이라는 공간조차 자본과 기술 미디어의 3가지 세력에 의해 점령당한지 오래고 대학교수는 대학기업의 사원에 불과하다는 신랄한 비판은 단순한 독설적인 의미를 넘어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기능이 변질되고 타락되어가는 것에 대해 새롭게 그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사회에서 기술과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지고 인문이 차지하는 영역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기술과 과학이 자본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중요하게 그 의미를 점하는 부분은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이공계기피현상을 포함한 현상을 볼 때 그의 평가가 균형잡힌 것이라고 보기에 힘든 점도 없지 않다. 과학과 기술도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역할과 중요성이 있으니까..하지만 인간이 길러야 할 전체를 보는 안목을 무시하고 한 부분의 전문가나 기술자만 되면 된다는 식의 교육제도와 사회구조에는 명백한 문제점이 있다.

분명 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합이 아니다. 부분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데에는 네트워크가 작용한다. 인간의 유전자수가 23쌍의 염색체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 23쌍의 염색체의 기능이 밝혀진다고 해서 염색체의 비밀이 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를 가진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현실을 푸는 문제에도 이런 사실은 적용될 것이다. 한 부분 부분의 문제점이 각각의 대안을 가진다고 해서 그 대안들을 적용하여 각 부분이 풀리면 전체가 풀리는 식의 구조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체로서 작동하며 그 연관관계의 네트워크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동서양의 오랜 고전들을 망라하여 그 지혜들이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하여 융합하는 가운데 새로운 현실을 담아내는 새로운 이론과 담론, 철학의 탄생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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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 비법대사전
정청암.이성천 지음 / 문원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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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짓는 것은 운명을 만들어가는 작은 첫 출발이다. 그러므로 그 아이의 운명을 짓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중요하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아이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보아서는 안되지만 아이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 책은 음양오행과 주역에 대한 어려운 책들이 작명에 대한 어려움의 선입견이라는 벽을 어느 정도 허물어준다. 누구나가 쉽게 이해하고 작명할 수 있도록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고 도표나 기하학도 될 수 있는대로 쉽게 만들어놓았다.

따라서 음양오행이나 주역에 대한 깊이있는 설명보다는 일반인이 쉽게 책으로 작명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많은 이름의 사례들을 통해서 직접 짓지 않고도 지어진 좋은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좋다. 하지만 음양오행이나 주역에 대한 좀 더 매끄럽고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만세보에 대해서는 최근 몇년간의 자료를 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최소한 당해년도만이라도 말이다. 어차피 작명을 할 때는 생년월일시에 의한 사주도 풀이해보아야 하니까 말이다.

몇 가지의 아쉬운 점은 어느 책이나 남게 마련이다. 부족한 부분을 다른 책으로 메꾸어가면서 드디어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아이의 작은 운명을 부모의 마음으로 짓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 욕심이 안들어가게 되도록이면 너무 좋게 짓는다는 생각없이 그저 무난하게 짓는다는 생각으로 지어야지 하면서도 않좋다거나 해롭다는 말들에는 신경이 쓰이니 말이다.

아이의 이름을 지으면서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더불어 부모가 되는 자리에 한걸음 성큼 다가선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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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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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삶의 양식이 서구의 물질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그것을 단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과거의 발자취라고만 할 것인가? 그렇다면 경제도 정치도 군사도 더욱이 앞으로는 문화도 세계화되는 이 시점에서 한국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의 미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가진 인생의 멋과 정신적 풍류를 이해함을 아니 깨달음을 의미한다. 저자의 한국미에 관한 이 책은 주로 서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서화는 특히 우리 옛 문인들의 멋과 풍류가 한껏 베어나고 단순한 기교를 넘어 정신과 혼이 담긴 그야말로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세로쓰기가 사라져버린 우리들의 대중매체와 일상생활은 우리 조상들의 시, 서, 화를 접하는 기본적인 형식마저 와해해버렸다. 하지만 그 형식을 알고 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옛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작품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작품을 만든 이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세 번째의 원칙은 천천히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삶의 속도와 경쟁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들이 작품을 대할 때에도 그 고질적인 습관이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 작품을 천천히 음미한다는 것은 우선 패스트푸드화된 삶의 양식에 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이 ‘천천히’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한데 그것은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정신세계인 작품들을 제대로 즐기고 음미하지 못한다면 그것의 가치를 온전히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즐길 준비가 되었는가? 그것을 즐긴다는 것은 옛 사람들의 정신적 경지를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경험해보아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위대한 유산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위대하게 알아보고 즐길 줄 아는 우리들의 정신적 성숙정도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단원의 주상관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아일체가 뭔지 알아야 하고 송하맹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 이면에 담겨있는 정신적 세계를 엿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탈취당하는 아픔을 겪어 왔다. 하지만 더 큰 아픔은 그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있다 해도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지킬 줄 모르는 우리 국민의 정신적 미성숙에 있지 않은가? 심안이 없다면 천금의 가치를 지닌 문화재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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