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선생님이 하루는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장인 최병하씨에게 물었다.

"거지가 뭔가?"

"거리에 깡통을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지요."

장일순이 선생님이 받았다.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제재소라는 깡통을 놓고 앉아 있는 거지라네. 거지는 행인이 있어 먹고 살고, 자네는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있어 먹고 사네. 서로 겉모양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최병하는 얼른 답을 못했다.

"거지에게는 행인이, 자네에게는 손님이, 고객이 하느님이라네. 그런줄 알고 손님을 하느님처럼 잘 모시라고. 누가 자네에게 밥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지 잘 보라고."

학교 선생님에게는 누가 하느님인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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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4-06-2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비밀은 마음의 비밀입니다. 하느님의 비밀도 마음의 비밀입니다. 그러하듯 인간세상은 결국 마음으로 묶이고 또 마음으로 해방됩니다. 누가 따로이 하느님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누가 하느님이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우상일 뿐입니다. 거지에게 행인이 하느님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우리에게 손님이나 고객이 하느님이 된다면 우리는 행인을 기다리게 되고 손님이나 고객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물론 장일순선생께서 하신 말씀은 만나는 모든 것 살아가는 모든 것 공경하란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공경하는 마음이 더 근원적인 일이 되겠지요. 공경은 마음의 일입니다. 마음으로 공경하여 만나고 만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 보면 그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백성욱선생님께서도 부처님으로 모시는 그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져 마음의 안밖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하느님하고 부처님하고 모시고 행인과 손님을 만날 때마다 바쳐야 하지요. 학교선생님에게 누가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하느님을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가르치는 그 사람이 하느님이 됩니다. 해월선생도 밥을 먹을 때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는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구원하시려고 우리 모두로 창조되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하느님..하느님.....삶에 붙여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공부입니다. 우리에게 먼길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더디가도 아니가지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달라이 라마 죽음을 이야기하다
달라이 라마 지음, 제프리 홉킨스 편저, 이종복 옮김 / 북로드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하다. 마치 나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며 내 삶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 되고 만다. 그런 마음 때문에 죽음은 더욱 우리가 준비하지 못하게 되고 직접 죽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부정하고 분노하고 회피하려고 하면서 그 죽음이 우리의 일생에 마지막으로 주는 교훈을 외면해버리게 되고 만다.

달라이 라마는 이 죽음에 대한 명상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그는 제 1대 판첸 라마의 시를 통해서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의 과정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죽음을 늘 일상에 두고 있으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된다. 선험적인 죽음의 순간에 직면하여 내가 살아왔던 삶의 의미 추구에 대해 스스로가 묻게 된다는 점이다. 죽음에 직면해서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가지려 해도 몸의 극한 조건 속에서 그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삶에서 우리가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다음으로 죽음을 잘 맞이하는 준비가 귀결되어야 하는 방향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씀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이타적인 마음을 내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쳐 그들 모두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몸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엔 죽음에 대한 준비는 삶에 대한 준비이다. 삶을 잘 마무리 한다는 것과 그 다음 생을 잘 찾아간다는 것은 이 생에서 내가 마음짓는 것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내 마음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면 죽음의 과정에서도 그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마음을 수행의 길 위에 올려 놓아야 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다. 홉킨즈 교수의 말대로 이 죽음에 대한 판첸라마의 시와 달라이 라마의 해설이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수행의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늘상 삶을 이어가기 위해 행하는 들숨과 날숨 속에 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교차시키며 죽음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는 철저히 홀로이다. 이 홀로를 우리는 삶에서도 경험해야 한다. 마음 속에서 오직 홀로 걸어가야 할 고독의 길을 우리는 바로 지금 걷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고독이며 행복한 고독이다.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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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포기하고, 종교 의식들이 효과가 없을 때,

친구들이 우리의 생명에 대한 희망을 버릴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쓸모가 없을 때,

라마의 가르침을 기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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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간의 만남
신경림.조오현 지음 / 아름다운인연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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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기에 한 스님과 한 시인의 만남이 있다.

스님은 절가에서 속세와 떨어져 마음을 닦고 있는 수행자이고,

시인은 그가 가진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그 읽어낸 세상을 마치 도자기를 빚어내듯...

언어를 이용하여 빚어낸다.

어찌보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그들을 이어주는 다리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 다리는 세속적인 삶과 정신적 삶 사이에 놓여진 간격을 이어주기도 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건널 수 없는 두 공간을 이어주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오현 스님과 신경림 시인은 닮은 점이 많다.

우선 1930년대에 태어나 식민지를 경험했고, 한국동란을 경험했으며,

성장과정에서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아마 그들의 불우한 성장기와 더불어 시대의 중요사건을 가로질러 사는 사람이 그러하듯이

민족사의 아픔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두 어깨 위에 지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둘째는 모두 시를 쓴다는 점이다.

그것도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시를 통해 삶의 깊은 의미와 참존재에 대한 의문과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수행자이고 한 사람은 시인이지만 그들의 드러난 겉모습 이면에 삶의 의미와 그 경계를 넘나들며 공유하는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만남은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은 만남이 된다.

그들의 삶의 여정에 베어 있는 영원에 대한 기억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속도의 삶에 내던져져서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나아가 그들의 만남은 내 몸속에서 자꾸만 꿈틀거리는, 그래서 자꾸만 나를 뒤흔드는 내면의 소리없는 울림에 귀기울이게 한다.

신기루와도 같은 환영의 인생길을 거쳐 내가 다다를 곳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에 젖어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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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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