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색깔 공기
김동건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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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으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온전히 그 죽어가는 과정을 겪어내며 그 속에 존재하는 영적인 교훈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점에서 이 두 책은 특별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모리 교수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자신의 죽음을 뭔가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자신의 죽음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한다면 김치영 목사는 자신의 일생에 걸친 삶과 신앙을 죽음에 직면하여 마지막으로 검증받고 신앙의 힘을 통해 자신의 병을 극복해가며 빛 속으로 당당히 걸어들어갔다는 점에서 다른 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죽음을 통해서 비추어본 삶의 의미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가치를 다시 물어온다. 과연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 무한한 우주에서 한 인간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의미는 뭘까? 죽음 앞에서서 김치영 목사가 자신이 그토록 아껴 온 책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삶 속에서 우리에게 중요하고 가치있던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죽음 앞에서 진실로 가치로운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참된 가치는 아닐런지....

    죽음앞에서 참된 가치를 삶 속에서 찾아내고 구현하는 데에는 특별한 눈이 있어야 한다. 터너의 그림에서 보여지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공기를 특별하게 보는 눈,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내재한 빛을 보는 눈이야말로 삶을 후회없이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교수와 같이 선한 삶을 살면서 그 선업으로 삶의 마지막 교훈인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영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문제가 된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진실로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않는 한, 죽음 앞에서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되리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죽음의 과정에서 우선 뛰어넘어야 하는 자신의 죽음의 수용의 문제와, 죽음의 과정에서 갖게되는 온갖 고통을 바라보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서 그 고통을 극복해가는 문제, 남겨져 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고 자신의 삶을 정리해나갈 것인가의 문제, 남겨져 있는 자신의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얻어야 하는 영적 성장의 문제들이 삶 속에서 아무것도 준비되어지지 못할 때 과연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미함 속에서 그런 힘든 과제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죽음은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의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한 공부가 시작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육체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마음공부가 되지 않은 이가 육체를 벗을 시간을 어찌 오롯한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겠는가?  자 이제 죽음의 순간 빛 속으로 걸어간 김치영 목사님이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우리 마음 속에서 찾아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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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무심
경허큰스님 지음 / 고요아침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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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를 들어서며 왼편에 위치한 범종 앞에 놓인 약수를 한껏 들이키고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구내서점이 보였다. 그 구내서점에서 책을 보던 중 손에 잡힌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한국 근대 선지식의 선구자인 경허스님의 법어이야기이다.

사원을 거닐면서 연신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손등으로 쓸어내며 내가 다다른 곳은 팔만대장경판 앞이었다. 부처님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주축이 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이 거대한 작업 앞에서 옛 사람들의 이마를 적셨던 땀과 고단했던 허리를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 속에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그리움없이 과연 이 일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해인사의 지붕들과 산사의 풍경은 고요하고 적막하였다. 주차장으로 옮기던 걸음을 다시 돌려 금강사에 들렸다. 오후의 뜨거운 햇살에 산사는 고요한데 물흐르는 소리만이 적막을 깬다. 물한모금 입에 물고 목으로 올라오는 타는 갈증을 다스리고 고개 들어 선원을 보니 빽빽하게 들어선 승려들이 벽을 향해 삼매경에 빠져 있다. 인적이 끊어진 산사에 온갖 세상의 소리 끊어진 산사에 그 적막을 깨고 들어선 우리의 걸음이 한 갓 번뇌이련가?

여러 생각 올라오고 사라지는 그 자리,

번뇌와 망상이 멈추어버린 그 자리를 향한 끝없는 시선 속에 생사의 구별 사라진 영원한 빛을 본다.

순간 내 마음도 생각을 쉰다.

그 마음에 대한 그리움으로 경허스님의 책을 든다.  내 마음을 찾는 것, 항상 내 마음을 지켜보는 것, 항상 부처님과 함께 잠들고 깨는 것,

달리는 말과 같이 지나가는 인생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부질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는 있지 않는지.....

오늘 또 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듣는다. 그 죽음이 바로 나의 일임을 나는 왜 모르는가? 어두운 이의 마음 속엔 늘 마음을 궁구함이 없이 세상일에 휩쓸리고 마니....나는 과연 이 정도의 그릇밖엔 될 수 없는가?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진리를 향한 그 깊은 열정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눈이 없으니 볼 수 없구나...아,,,,아... 또 이렇게 속절없이 하루가 가는구나... 얼마나 많은 생을 기다려 또 사람의 몸을 받아 진리의 길을 가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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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앉으나 서나 항상 따라다니고

말할 때나 잠잠할 때나 함께한다

가는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음이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하네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느냐

다만 이 말소리로다

 

                                                        - 경허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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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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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당신은 제 3세계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우와 노동현실을 보면서 때로는 우월감을 느낀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 안에서 오리엔탈리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멋지게 지은 서양식 집과 좋은 차 , 늘씬한 서구형 미인을 부러워 한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서구 중심주의적인 옥시덴탈리즘을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들의 삶만을 중심으로 보고 나머지를 주변부로만 파악하는 태도, 자신의 삶을 문명으로 파악하고 나머지를 야만으로 파악해서 그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편견,  우리를 위해서는 타인의 삶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배타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씻어낼 수 없는 피로 물들였습니다. 나아가 인류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살지 못하고 타인에게 종속되거나 배제되는 비극의 역사를 낳았습니다.

    그럼 이런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과 같은 우리 사회를 보는 일그러진 시각들은 어떻게 생기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민족과 국가라고 하는 허상을 우리들 개인 각 각의 내면에 심어놓는 방법에 의해서 생기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박노자씨는 집단과 전체주의에 의해 희생되었고 배제되었던 개인적 가치의 복원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이나 가해자건 피해자건 그 국가나 중심부나 주변부를 해체해보면 전체에 의해  많은 기층 민중과 시민과 개인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한 개인은 그 수레바퀴를 되돌리기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수레바퀴에 묻어가는 미약한 존재로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방향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예측한다는 것도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20세기에 인류의 대량학살의 역사와 인간 존재의 극한적 무의미함을 겪으며 적어도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광기로 치닫는 집단적 무의식과 집단광기를 극복해가는 개인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주의적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우선은 인류의 대량학살은 반드시 민족이나, 국가라는 환상을 통해 국민들을 집단 무의식의 상태로 몰아 인류최악의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그런 외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허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과 나아가 전체주의적 환상과 집단광기는 반드시 개개인의 내면을 오염시키고 쇠뇌시키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우리들 내면의 깨달음이 이러한 비극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쓰고 있는 중심부를 향한 끝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하얀 가면,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자기비하와 타문화에 대한 사대주의적 시각을 말합니다. 그 가면을 벗어내는 일은 단순히 우리의 몸치장을 바꾸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어내고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보는 바르고 넓은 눈이 필요하며 여기에 그런 눈 하나가 박노자씨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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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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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들이 편안하게 읽어내기 쉽지 않은 역사책이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편지형식의 글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스스로가 '개인주의적 진보'와 '건강한 보수'라 얘기하는 그들을 통해 진보와 보수가 열린 대화와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읽다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흐릿하게 되고 누가 누구의 글인지 헷갈리게 되어버린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우리가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우익과 좌익의 구분으로는 설명되지 못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에서 외면적인 행위만을 놓고 보면 우리는 누가 보수이고 누가 진보인지 구별을 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근대화의 역사는 민족과 국가, 집단과 전체라는 것을 위해 개인적인 가치가 희생된 역사였다. 이에 두 교수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전체주의적 횡포에 의해 죽어버린 진정한 주체와 개인을 다시 살려내는 것을 그들의 임무로 삼았다.

  그것은 다시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학자들에 의해 교과서화된 정설만의 해석을 거부하고 역사를 보는 개개인에 의한 개인적 가치와 해석을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나타났으며, 이 책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개항기를 통해 본 한국사회는 봉건제 타파라고 하는 과제와 근대화의 추진에 의한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외세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만 가고, 주변의 조선지배의욕을 막아내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내부적으로 갖추어지지 못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전체주의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적 가치를 복원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당당하게 우리를 세우는 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민한다. 

   전체 역사의 흐름에서 과연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그 전체주의적 횡포에 맞서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답없는 질문을 던져보고 가장 합리적인 모색을 해보고자 하며 물론 그것은 오늘날에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는게 두 교수의 생각이다.

   한국 근대사에 대한 박노자 교수의 객관적이고도 외부적(?)이며 대담한 비판에 최소한의 민족적인 자존심을 나름대로의 근거로서 지켜내고자 한 허동현 교수의 반론이 묶여 한국사회가 안고 나가야 할 과제들에 대해 대중들의 개인주의적 가치의 부활과 개인의 자유롭고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현실의 한국의 선택을 지혜롭게 하고자 한다.

   두 교수의 진지하고도 깊은 우정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은 우리 사회의 앞날에 대한 또 다른 희망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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