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차와 이혼하라 - 자동차 중독 문화에 대한 유쾌한 반란
케이티 앨버드 지음, 박웅희 옮김 / 돌베개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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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한 장면에 자신의 자동차와 '혼인신고'를 하려는 한 사람이 있다. 창구에서 관청직원은 자동차가 사람이 아니므로 불가하다고 하자, 그는 "왜, 안되죠? 나는 저 차를 사랑한단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1999년 한 테네시 사람이 실제로 자기 차와 결혼하려 한다. 혼인신고서에 적힌 무스탕의 신원은 출생지 디트로이트, 아버지는 헨리 포드, 혈액형은 10-W-40으로 되어 있다. 공무원들이 신청서 접수를 거부하자 그는 어떻게든 혼인신고를 하고야 말겠다고 맹세한다.

비록 우리가 차와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삶의 대부분과 집착의 대부분은 어쩌면 남자의 경우 자신의 아내와 가족보다는 차에 더 가 있는 것이 사실일런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내와 가족에게는 하루에 한 번도 제대로 마음을 나누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가 운행하면서 마음이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보편화된 자동차와 눈 먼 사랑을 하게 되었나?

이 자동차는 그 탄생과정부터가 다른 비자동차 운반수단을 배타적으로 몰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미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마차와 자전거, 시가전차, 철도를 정책적으로 몰아내고 자동차기업과 석유기업들의 탐욕을 드러내면서 교통수단의 다양성은 짓밟혀버리게 된다. 이제부터 철저하게 시작된 개인주의적이고도 패스트한 라이프 스타일은 우리 문명을 더욱 비인간적인 환경, 비자연적인 환경으로 이끌게 된다.

자동차와의 결혼생활이 달갑기는 커녕 괴롭고도 고통스러운 원인은 무엇인가? 2부에서는 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동차가 대기에 끼치는 해악과 기름유출과 환경오염, 빈부의 격차 문제 등 산적한 문제들이 많이 서술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운행하는 사람의 직접 비용보다 숨겨진 간접비용이 더욱 심각하다고 저자 캐이티 앨버드는 말한다. 정화되지 못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보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환경 침해와 그 비용일부의 세금화로 인한 보행자의 부담도 그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동차로 인해 도로에서 학살되는 사람과 생명의 숫자가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비극이라 불리우는 전쟁의 그것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동차는 인류의 편리한 삶의 도구라기보다는 학살도구일 뿐이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오면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 바로 이 자동차이다. 자동차문화는 이미 우리 생활 아주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부터도 출퇴근을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왕복 50Km 거리의 직장에 대중교통만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3번을 갈아타서 가야 하고, 그나마 대중교통이 그리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시간으로도 2시간 남짓을 사용해야 한다. 그 뿐인가? 우리나라의 대중교통은 승차자가 이용하기에 편하지 않다. 서서 가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난폭운전과 흔들리는 버스, 밀집한 승차인구 등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 생긴 자동차에 대한 반인류적이고 반생명적이고 반우주적인 학살도구에 대해 아무런 반성과 실천없이 살기에는 양심이 찔린다. 어떻게 하면 될까? 나는 심사숙고 후에 아주 부끄럽고 작은 대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우선 자동차와 간헐적 별거를 할 것,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적당한 거리라면 걸어서 이동할 것을 다짐해본다. 다음으로 먼 안목으로는 직장에서 걷기나 자전거를 활용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자동차 운전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 직장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바뀌어지는가? 그렇다고 집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동차에 대한 인식만은 늘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의식없이 차를 마구 모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나아가 차에 매여 정말 우리 삶에서 필요한 그 무엇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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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쟁기를 끌면서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이려 하면 가고 워워 하면 서면 된다

콩깍지 여물에 배가 부르면

큰 눈을 꿈벅이며 식식 새김질을 할 뿐이다

 

도살장 앞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두어 방울 눈물을 떨구기도 하지만 이내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한쪽은 식탁에 오르고

다른 쪽은 구두가 될 것을 그는 모른다

사나운 뿔은 아무렇게나 쓰레기 통에 버려질 것이다.

 

 

 

'과연 우리들의 뿔은 무엇인가? 아니 나의 뿔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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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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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캔버스가 있다. 화가는 그것에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려고 하고, 학자는 그 캔버스에 자신의 연구성과를 담으려 할 것이다. 종교인은 믿음을 담으려 할 것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의 대상을 그리려고 할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그 햐얀 캔버스에 담으려고 한다.

고흐는 참 불행한 삶을 살았다. 때문에 광기보다 더 깊은 고통을 늘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았다. 그 뿌리깊은 고통이 그의 그림에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그림은 늘 암연에 드리워진 깊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보여주곤 한다고 생각해왔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한 그가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정말 자신에게 맞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찾아낸 그림은 그가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바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평생동안 의식주의 생활을 동생 테오에게 의존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놓지 않았고, 그림을 통한 상품화와 세속적인 명성과 성공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었고,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그림이 더욱 성숙되고 영혼의 빛깔을 담아내게 되었다는 것은 물질주의와 속도와 경쟁의 삶을 살아가며 영혼을 내팽개치며 사는 우리들의 삶에 비수같은 교훈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림은 풍경과 인물을 사진처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영혼의 눈으로 담아낸 것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이다. 이러한 그의 그림에 대한 태도는 내가 그의 그림을 접할 때 생각하기에 앞서 그 그림 전체가 전달하는 느낌과 내 마음 속의 어떤 '떨림'을 찾게 만든다. 이것이 온갖 언어로 각색된 해석을 떠나 그의 그림에서 한 예술가인 고흐와 내가 직접 만나는 길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씨 뿌리는 사람', '별이 빛나는 밤', '수확하는 사람',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 이 그림들을 통해 한 예술가인 고흐와 직접 만나는 내면의 떨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으로 변변히 동생 테오에게 대접한번 못하고, 동생의 보살핌으로부터 한 번도 벗어니지 못하고 배고픔과 가난에 쪼들린 삶을 살아야만 했지만, 결코 그림에 대한 영혼을 놓치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영적 충만함을 간직했으며, 이것이 사후에라도 많은 사람들의 떨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흐에게도 그랬듯이 나에게도 하얀 캔버스가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이 하얀 여백을 과연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에게는 어떤 "떨림"있는 것으로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 떨림이 고흐에게도 그러했듯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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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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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허무함이 있다.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물질주의와 돈에 눈먼 세상에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을 채우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 참되고 진실한 가치는 없다라고 하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즉 세상엔 정말 인간적이고 진실한 가치는 없기 때문에 그저 내 욕망에 따르는 삶이 무난하지 않은가 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냉소가 그의 글 아래 깔려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글에서 허무를 본다.

하지만 이 삶의 허무를 용납하지 못하는 인물의 설정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때로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니까...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열정을 불어넣는다. 자신이 맺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런 의미부여가 없는 기능적인 삶, 냉소적인 삶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참기 힘든 일일테니까...

어쩌면 참된 삶이란 그가 그리고 있는 열정과 냉소라고 하는 양극단의 중간지점 어디엔가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열정이란 삶에 대한 과장된 의미부여일 뿐이고 냉소란 삶에 대한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생각이므로 사실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담기가 망설여진다. 어쩌면 그가 그린 극단의 두 삶의 방식에서 독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아보도록 하고자 한 게 아닐까

현실적 삶은 늘 허무하다. 내가 욕망하는 바는 늘 채워지지 않고 때로는 내가 나를 불사르고 사랑하고 싶은 이를 얻지 못하기도 하며, 진정으로 내 안에서 올라오는 영혼의 욕구를 버리고 외부세상이 강요하는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인생도 있다. 삶의 깊은 좌절과 고통속에서 삶에 대한 허무와 냉소의 꽃은 피어나고 그 허무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삶의 헛된 열정의 병에 걸려야만 한다.

삶은 아직 삶을 이해하지 못한 미숙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극단적인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삶의 많은 경험을 통해 삶에서는 결국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깊은 허무의 수렁에서 헤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의 성숙한 삶이란 그래서 양쪽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의 빠른 삶의 속도에 지친 영혼을 천천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지혜를 갖는 것이 정말 인생을 가치있게 그리고 의미있게 사는 길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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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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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하지만 그 도도하고 필연적일 것 같은 역사의 흐름은 사실 중요한 한 순간의 광기와 우연에 의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물론 이런 일은 개인사에서도 나타난다. 내 삶을 중요한 순간에 있어서 뜻하지도 않은 일들이나 인물의 출현으로 인해 나는 또 얼마나 새로운 인생을 지어가고 있는가?

광기와 우연은 필연적일 것 같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힘이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는 실상을 전체로서 보지 못하고 인간지각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말일 수도 있다. 원래 인간은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상의 광기와 우연을 받아들이기에는 존재의 가벼움이 너무 깊다.

하지만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 그 결정이 이루어지는 우연한 방식들은 이미 그 역사적 순간의 운명적 의미를 내포한다.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 역할을 우리의 깊은 자아는 알고서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이 아니라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내게끔 하는 신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워털루 전투에서 '그루쉬'가 보여준 행동도 단지 그가 가진 능력의 부족 탓이라기 보다는 그에게 주어진 운명적 순간을 위해 태어나고 자라왔을 것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마호메트에 의해 파괴되는 비잔틴 제국의 절박한 도움의 손길에 마치 운명이 장난이라도 하듯 모두가 외면하던 유럽국가들의 공명현상(비잔틴제국의 멸망에 자신들의 역할을 해내는 배우처럼...)도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역사를 바꾼 운명의 순간들은 그것이 어떤 광기와 우연에 의해 방향지워질지라도 그것이 또한 신의 계획에 의해 사전에 짜여진 운명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을 비우고 신이 자신을 통하여 무엇을 행하려고 하느가를 알아차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삶의 광기와 우연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역사에 있어서나 나에게 있어서나 나의 이기심과 탐욕이 비워진 자리에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우주적 균형의 작용에 나는 얼마나 열려져 있는가? 일상에서 그런 노력들이 없을 때, 나는 또 다른 광기와 우연에 의한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광기'와 '우연'은 단지 은유일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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