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일 없이 방학을 맞이하는 마음이 한편으로는 일상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해방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런 계획도 없어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종업식 날 의례히 간단한 여행으로 방학의 설계를 좀 더 낯설고 신비로운 곳에서 느긋한 시간의 흐름을 만끽하면서 세워보는 것이 좋은데 어쩌다가 이번 방학에는 그냥 이렇게 닥치고 말았다.

물론 아직 방학을 맞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월요일 우리는 방학을 맞기 위해 떠난다.

애초엔 강원도 쪽으로 갈려고 했으나 일정과 시간상 좀더 수월하면서도 주변풍광을 잘 음미할 수 있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지리산...

작년 여름방학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바로 눈앞의 풍경이 그 빗속으로 사라져버린 날,

나의 마음도 일순간 그 빗속으로 사라져버리고 텅빈 하늘같은 마음이 되어버린 적이 있었다.

지리산 백무동 계곡에 여장을 풀고 어둠이 깔릴 무렵 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술을 마시다 온세상을 가득 메워버린 불어난 물소리는 얼마나 우령찼던가?

그 소리 하도 천지를 흔들어 온갖 시름들 일시에 산산이 흩어져내리고 마시는 술은 어찌도 취하지 않는지..

그날 그 집 술을 다 바닥내고도 어둠 속에 한참을 기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리산 계곡 흐르는 물에 탁족하고 담가둔 술을 꺼내 술잔을 물위에 띄워 너 한잔 나 한잔 주고 받으며 늘어진 시간속에 한참을 하릴없이 보내는 맛을 어찌 일설로 다하랴...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시간에서 벗어나 따스한 햇살이 산을 넘어가는 소리나 계곡물이 정처없이 흘러서 지나가는 시간속으로 들어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속세를 던져버린 선비가 되고 선방의 스님이 되고 신선이 된다.

처음부터 맺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인간의 몸받아 속세에서 맺으면서 산 생활은 또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도리인 것처럼....

이렇게 한 학기의 맺음과 꼬임을 풀어야만 새로운 방학생활이 또 나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가덕도의 까마귀 목을 길게 늘이고 우짖던 모습이 기억난다.

기막힌 매운탕으로 점심을 거나하게 먹고 소주 한 잔 걸치며 흐느적 평상에 누워버린 얼굴위로 파도가 들썩이는 소리 아름다운 선율로 나를 감동시킬 때....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보는 풍경도...내가 듣는 소리도....내가 쉬는 숨결도 모두 들썩이는 파도소리에 묻혀버리고

또 다시 그 파도소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다.

반드시 한 번은 돌아야만 하는 세상....

그 비밀을 간직하지 않고 세상은 늘 시달려야만 하는 고통의 세계일뿐...

오늘도 나는 우아한 우주를 꿈꾼다...

사랑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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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산, 가덕도....
신선같은 여름방학 후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우터골 신선이라 우기는 파란여우-

달팽이 2005-07-1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베란다 하수구에서
음식물 쓰레기 통 씻다가
하수구멍에서 올라오는
파릇한 싹 하나 발견했네
너 어쩌자구 이 곳에 왔니?


문득 생각납니다.
참 특별하게 사는 파란 여우님도
바람타고 베란다 창가에 들어와
하수구에 뿌리내린 쬐그만 싹도
특별한 삶이라고 생각되네요..

- 나도 빠를만큼 빠르다고 우기는 달팽이 -

어둔이 2005-07-1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명은 존재와 존재의 빈틈에서 자라난다
그러면 생명이 자라나 또 다른 존재가 되고 그 존재에 빈틈이 생긴다
그렇게 존재가 나눠지고 생명이 이어진다
있을 것 같지도 않는 틈에서 발견한 파릇한 싹 하나
그 하나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왔고 그러다 가면 어디로 가는가

바다의 파도 처럼 철썩이는 것인가
아니면 강물처럼 유장히 흘러가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바람처럼 인연의 모습에 머물지 않고 변화하는 것인가

방하착하고 나니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정말 모르겠다!!!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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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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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7-1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성복은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라고
사랑일 것이라고
사랑이었다고 믿는
사랑이라는 말에
사랑처럼 생각되어버린
그런 사랑을 모른다
그는 사랑을 짖어대고 있다
나처럼 그냥 사랑을 나불되고 있다
 

저 부유하는 무허가의 땅

공중을 출렁이는 마음의 눈들

웃음 주고받긴 켜켜이 쌓인 먼지

구름

먹구름

먹장구름

운명적 사랑으로

비를 만들고 싶다

눈을 낳고 싶다

 

- 이찬, '발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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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7-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그리 오래 담고 있지 않고서 어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가슴에 그리 가득 담아내지 않고서야 어찌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으랴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 황동규,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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