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날 버리고 간 그 자리에

풀이 무성히 돋아났다.

네가 날 버려둔 그 시간에

나는 묶여서 꼼짝하지 못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고

몇 번의 해가 바뀌었다.

네가 날 버리고 간 그 곳에

뿌리를 내린 나를 보았다.

밑둥부터 썩어가며 내리는 뿌리

슬픔과 절망만이 그 썩은 뿌리에

양분이 된다.

네가 나를 버린 그 과거의 시간 속에

나는 아직도 웅크리고 있다.

언젠가 돌아와 손을 내밀어 줄

너의 하얗고 작은 손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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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5-10-2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는 것들은 모두 옛것이지만 그것들은 기억 속에만 있어요. 그 시간에 묶여 숨도 쉬지 못하지만...이제 일어날래요. 걸어 볼래요. 때로 기억들은 잘못 맞춘 퍼즐 같은 데도 그것에 너무도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될 때가 있어요. 엉킨 기억들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 작은 손은 이제 작은 손이 아닐지도 모르는데...님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하는 혼잣말입니다. 시는요, 아파요...

달팽이 2005-10-27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 하얗고 작은 손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에요.
결코 현실에서는 끼워맞춰지지 않는 기억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놓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 아픔과 상처가 깊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건가봐요.
아파하지도 못했다면 슬퍼하지도 못했다면...
지금 난 더욱 그 자리에 묶여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얘깁니당..^^;
 

우리가 나누었던 우정의 추억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듯이

여기서도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 걷고 있다.

한밤중에 나를 잠에서 깨우고 새벽이 올 때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어 피로에 지친 나는

다시 잠들 희망을 버리곤 한다.

심지어 이곳 감옥까지 따라와 운동장을 맴도는 내게

혼잣말을 지껄이게 만든다.

끔찍했던 지난 날, 내가 겪었던 고통까지도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내 기억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고통과 절망을 위해 비워 두었던 머리 한 구석에서는

그 암울했던 시절의 모든 일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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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젖은 땅을 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는데 먹구름이 산에 걸려 있었다.

어허, 이것 오늘 소풍은 어찌 되려나

비만 오지 않으면 참 좋은 소풍될터인데...

하면서 산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산 너머 저곳에는 하늘이 뚫려 파아란 속살이 드러났다.

아, 오늘은 좋은 소풍 날

아이들을 데리고 산길을 걷다가 비가 두둑 떨어지기 시작하여

발길을 돌려 공원 벤치와 잔디에 풀어놓고

막걸리 집에서 파전 시키고 김밥 들고 저수지 위로 떨어지며 수없이 만들어내는 동심원을 본다.

참 좋은 날이다.

꽃물드는 나뭇잎과 눈 앞을 가로막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희미해지는 풍경.....

아이들을 보내고 또 다시 산을 넘어왔다.

능선을 타고 오르며 내다보는 저 산 위로 부산에서 오랫만에 보는 대형 무지개가 걸렸다.

선명하고도 부산 전체를 감싸는 커다란 무지개 능선을 보니 마음이 떨리었다.

떨리는 마음 간직한 채 집에 와서 샤워를 한 후

몇 가지의 일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동래 전철역으로 갔다.

티켓팅을 하고 칸막이를 넘어서는데 테러용 폭탄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되었다는 역내 방송이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분주히 움직였고,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냥 지하철을 탔다.

어찌 되었을까?

폭탄은....

부산을 드리운 무지개 빛깔에 녹아버린 것이 아닐까?

이 삶에 소풍온 날,

나는 또 하루의 끝을 향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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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0-2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천상병 시인하고 벗하시는 달팽이님
폭탄은....제가 처리했어요(방법은 비밀^^)
뻥이구요...하루의 끝에서 이불을 펴고 뻗으러 갑니다.
꿈 속의 소풍을 기대하며^^

달팽이 2005-10-2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꿈 속에서나 말해볼까요?
우선 꿈 속으로 내 의식을 선명한 상태로 옮겨놓아야 할 것인데...

어둔이 2005-10-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학산 억새밭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풀었다. 물론 아이들이 싸온 김밥이긴 하지만
술 한잔이 없는 아쉬움이었던 것일까
하늘에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말씀이 같이 내려왔다.
"빗물에 젖은 김밥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소풍에 대해 논하지 마라"
"......."


달팽이 2005-10-2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강쌤 그 소리 오늘 여러번 듣게 되는군요..
모 선생님은 젖은 정도가 아니라 빗물에 말아먹었다던데요..
 

한 줄기 바람 가지에 매달린 잎을 떨구는 때

내 청춘의 계절도 바람에 쓸려가는구나

머지않아 마지막 남은 잎이 떨어지는 때

내 추억의 잎새들도 남김없이 져버리고 말테니

혹한 추위만이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따뜻했던 기억들 모두 버리고 홀로 서서

그 매서운 북풍을 맞이하리라

한 치의 바람도 피해가지 않고서

내 가슴으로 모두 받아내리라

한 곳으로 모아진 내 마음이

바다로 흐르는 한줄기의 강물처럼 흐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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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꼬 2005-10-2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그냥 아는 서재분이 올리시는 글에 모두 댓글 달고 싶네요.. 이 시를 읽으니 슬퍼지잖아요.. 흐흑.. 진짜 눈물날라 그래요.. 흐흑

파란여우 2005-10-2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처럼 파란 달이 바람을 내려다 보는 시월의 밤
낙엽이 떠나가는 길 위에서
한 사내가 울고 있다
가슴시린 인생의 어느 냉동창고에서 떨고 있는지
사내의 눈물에는 냉기가 흐른다
그를 이렇게 길 위에 서 있게 하는 자 누구던가
애처로워하지 마세
우리모두 열심히 한 세월 강물처럼 흐르다가
등푸른 고래가 전설의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게 될터이니
그 바다에 가면 더듬이가 느린 달팽이도 있을테고
밤 길 어두워 술 항아리 달 항아리 삼는 어둔이도 있을테고
홀로 들국화 핀 돌계단에서 졸고 있는 파란여우와
새우산이 필요하다고 투정대는 서림이까지
바다로 가는 강물이 퍼지는 이 동네에서
어울렁 저울렁 어깨동무나 해 보세

엔리꼬 2005-10-2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신추문예 당첨된 시조입니껴? 제 이름이 들어있어 작품에 빛을 더하네요.. 감사합니다.

달팽이 2005-10-25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서림님 오늘 또 발자국을 지워가며 들리는 분의 모습을 알게 되어서요...
어깨에 건 팔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으로도 이 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군요...여우님..

어둔이 2005-10-2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월이 어느 멋진 날에"라는 제목의 노래말입니다.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김동규님의 그 우아한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음악은 들려드리지 못하고 노랫말만드립니다. 달팽이님 시월에도 이렇게 멋진 날들이 있답니다. 깊은 물별에 눈이 부신 청춘의 뒤안길에서 파란여우의 기품과 어둔이의 넉넉함과 서림의 애절함과 달팽이의 고독한 걸음과.......그것들이 시월의 단풍을 이룹니다.

눈을 뜨기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걸

네가 있는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좋은 것은 없을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http://www.green.ac.kr/bbs/view.php?id=c_p_changsoo_samsori&no=49
위 사이트에서 노래들어보세요
 

베어지지 않는 것을 베어야 할 때

그대는 무슨 칼을 쓰겠는가?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베어내는

그 칼을 벼리자

날카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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