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하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철 옮김 / 범우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마음 속에 악령이 자리잡고 그 사람의 행동을 이끌고 있을 때 과연 몸만 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 악령이 지시하는 바대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아니면 그 행동과 자신의 의도를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마음뿐이지 않은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 역시 한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하기 위한 계획에서부터 그 이후의 내면적 심리의 변화과정에서 악령에 씌인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살해이유를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가난한 삶을 지켜보지 못하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데서 찾았고, 또 한편으로는 돈도 없어 대학생활을 중단한 자신이 지금 고리대금업으로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근근히 유지하는 사람들의 등을 쳐먹으며 사는 이같은 존재에 불과한 늙은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의 꿈을 위한 자금을 마련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으로 부모와 누이를 부양하고 자신의 보장된 앞날을 다져놓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으로서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하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대의를 위해 법을 무시할 줄 아는 비범한 인간이기를 원했고, 그 대표적인 모델로서 나폴레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보다 큰 대의를 위해서는 그 앞에 걸림돌로 놓여 있는 사소한 범법행위는 마음의 가책없이 저지를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허황된 대의라고 하는 것은 있었지만, 인간의 생명과 가치라고 하는 또 다른 것은 없었던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엔 늘 비참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민중들의 가슴아린 생활들이 그 무대가 되고 있다. 그 민중적인 삶을 사는 어머니와 누이의 오빠로서 자신의 노력에 따라 그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대학생인 그가 결국엔 민중의 따뜻한 가슴과 사랑에 의해 상류사회로 접어들고자 팔아버렸던 자신의 양심과 선량한 마음을 되찾게 된다.

매춘부인 소냐는 바로 가장 낮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그 곳에서 가장 선량하고도 아름답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서 사람을 감화시킬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살인을 한 후에도 대중들을 얕보며 대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진실함과 선한 마음 앞에서만큼은 많이 알고 있고, 보다 나은 위치에 있고, 보다 교양이 있으며, 보다 상류사회의 가능성이 높은 그가  한없이 초라하고 작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야말로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구제해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선한 마음에 굴복한 그는 결국엔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하고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아직 자신의 마음을 구원받지 못한 그는 감옥생활에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질시를 받게 되고,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으로 돌보아주는 그녀가 몇 일 동안 나타나지 않자 가슴졸이며 그녀를 걱정하기 시작하게 되고, 깊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악령을 떨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소냐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세상은 180도 바뀌게 된다.  그가 같이 생활하는 수감자들이 이젠 어제와 전혀 다른 사람들로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죄는 마음 속의 죄였고, 벌도 자신의 마음 속의 벌이었음을 그는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20세기의 인류사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타자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의 성숙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20세기 뿐만 아니라 서구문명의 발달과 동구사회의 근대화에서 드러난 민족과 국가간 갈등, 민족과 국가, 사회내의 갈등 인간과 인간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관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타자를 수용하는 성숙한 관점이 단지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절대적 명제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내면에서 보다 역사와 우주를 대하는 성숙한 관점에서 기인해야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날 간디를 다시 읽는 것은 우리 인류 역사에서 한번도 해결해보지 못한 평화와 공존의 위대한 실천을 위하여 20세기의 시대가 못다 이해한 간디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종교적인 중심을 늘 잃지 않았고, 그와 어긋나지 않게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삶을 살았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그에게 있어 어떤 순간의 결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비워낸 자리 그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진리의 소리를 내면에서부터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종교에 있어서의 신의 자리에 진리를 갖다놓음으로써 종교적 견해의 차이와 그로 인한 인류사의 비극을 극복하려고 했으며, 그 가장 진실한 진리의 힘으로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극단적인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양 종교 간의 폭력과 학살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에 바탕한 분할 정책에 반대하고, 진리와 그 진리를 향한 인간의 지향본성에 대한 신뢰로서 접근하였고, 이는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가의 문제를 떠나 마음이 지향하는 바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적인 국경 분할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현실 사회에서 내가 겪어야 할 정치적 사회적 결정에 있어서 다시 내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게 한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서 간디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국민회의 지도자들의 판단은 기나긴 인간정신의 발전과 영원한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온다. 그렇다면 간디가 지향하고자 했던 진리의 방향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 다만 인도 사회가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만 인도 사회와 우리 세계가 간디의 성숙한 영혼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자명하다면 그리고 인도를 거쳐갔던 일련의 사건들이 인도 사회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회적 업이라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간디 자신의 말대로 자신이 일생에 걸쳐 사티아 그라하 운동과 아힘사 운동을 펼치면서도 그것을 진정으로 실천해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던 것처럼......이런 경우 자신의 진리를 향한 열망과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적인 괴리로 인해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말이다.

흔히 간디를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문명 사회에서 종교적 열망을 정치적 결단으로 연결시켰던 인물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진정한 종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과연 간디의 정치적 결단과 행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내릴 수 있을까? 요게시 차다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충실하게 이 책의 서술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종교적 수행자가 아니라 학자였으므로 간디의 내면적인 변화의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하는데 한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진정한 간디의 삶과 행동에 대한 평가에 대해 가려운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내고 나름대로 객관적이고 체계있는 책의 서술은 간디의 생애를 한번 정리해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책이라는 데에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차와 이혼하라 - 자동차 중독 문화에 대한 유쾌한 반란
케이티 앨버드 지음, 박웅희 옮김 / 돌베개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만화의 한 장면에 자신의 자동차와 '혼인신고'를 하려는 한 사람이 있다. 창구에서 관청직원은 자동차가 사람이 아니므로 불가하다고 하자, 그는 "왜, 안되죠? 나는 저 차를 사랑한단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1999년 한 테네시 사람이 실제로 자기 차와 결혼하려 한다. 혼인신고서에 적힌 무스탕의 신원은 출생지 디트로이트, 아버지는 헨리 포드, 혈액형은 10-W-40으로 되어 있다. 공무원들이 신청서 접수를 거부하자 그는 어떻게든 혼인신고를 하고야 말겠다고 맹세한다.

비록 우리가 차와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삶의 대부분과 집착의 대부분은 어쩌면 남자의 경우 자신의 아내와 가족보다는 차에 더 가 있는 것이 사실일런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내와 가족에게는 하루에 한 번도 제대로 마음을 나누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가 운행하면서 마음이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보편화된 자동차와 눈 먼 사랑을 하게 되었나?

이 자동차는 그 탄생과정부터가 다른 비자동차 운반수단을 배타적으로 몰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미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마차와 자전거, 시가전차, 철도를 정책적으로 몰아내고 자동차기업과 석유기업들의 탐욕을 드러내면서 교통수단의 다양성은 짓밟혀버리게 된다. 이제부터 철저하게 시작된 개인주의적이고도 패스트한 라이프 스타일은 우리 문명을 더욱 비인간적인 환경, 비자연적인 환경으로 이끌게 된다.

자동차와의 결혼생활이 달갑기는 커녕 괴롭고도 고통스러운 원인은 무엇인가? 2부에서는 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동차가 대기에 끼치는 해악과 기름유출과 환경오염, 빈부의 격차 문제 등 산적한 문제들이 많이 서술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운행하는 사람의 직접 비용보다 숨겨진 간접비용이 더욱 심각하다고 저자 캐이티 앨버드는 말한다. 정화되지 못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보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환경 침해와 그 비용일부의 세금화로 인한 보행자의 부담도 그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동차로 인해 도로에서 학살되는 사람과 생명의 숫자가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비극이라 불리우는 전쟁의 그것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동차는 인류의 편리한 삶의 도구라기보다는 학살도구일 뿐이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오면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 바로 이 자동차이다. 자동차문화는 이미 우리 생활 아주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부터도 출퇴근을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왕복 50Km 거리의 직장에 대중교통만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3번을 갈아타서 가야 하고, 그나마 대중교통이 그리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시간으로도 2시간 남짓을 사용해야 한다. 그 뿐인가? 우리나라의 대중교통은 승차자가 이용하기에 편하지 않다. 서서 가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난폭운전과 흔들리는 버스, 밀집한 승차인구 등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 생긴 자동차에 대한 반인류적이고 반생명적이고 반우주적인 학살도구에 대해 아무런 반성과 실천없이 살기에는 양심이 찔린다. 어떻게 하면 될까? 나는 심사숙고 후에 아주 부끄럽고 작은 대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우선 자동차와 간헐적 별거를 할 것,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적당한 거리라면 걸어서 이동할 것을 다짐해본다. 다음으로 먼 안목으로는 직장에서 걷기나 자전거를 활용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자동차 운전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 직장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바뀌어지는가? 그렇다고 집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동차에 대한 인식만은 늘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의식없이 차를 마구 모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나아가 차에 매여 정말 우리 삶에서 필요한 그 무엇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하얀 캔버스가 있다. 화가는 그것에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려고 하고, 학자는 그 캔버스에 자신의 연구성과를 담으려 할 것이다. 종교인은 믿음을 담으려 할 것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의 대상을 그리려고 할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그 햐얀 캔버스에 담으려고 한다.

고흐는 참 불행한 삶을 살았다. 때문에 광기보다 더 깊은 고통을 늘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았다. 그 뿌리깊은 고통이 그의 그림에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그림은 늘 암연에 드리워진 깊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보여주곤 한다고 생각해왔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한 그가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정말 자신에게 맞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찾아낸 그림은 그가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바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평생동안 의식주의 생활을 동생 테오에게 의존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놓지 않았고, 그림을 통한 상품화와 세속적인 명성과 성공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었고,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그림이 더욱 성숙되고 영혼의 빛깔을 담아내게 되었다는 것은 물질주의와 속도와 경쟁의 삶을 살아가며 영혼을 내팽개치며 사는 우리들의 삶에 비수같은 교훈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림은 풍경과 인물을 사진처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영혼의 눈으로 담아낸 것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이다. 이러한 그의 그림에 대한 태도는 내가 그의 그림을 접할 때 생각하기에 앞서 그 그림 전체가 전달하는 느낌과 내 마음 속의 어떤 '떨림'을 찾게 만든다. 이것이 온갖 언어로 각색된 해석을 떠나 그의 그림에서 한 예술가인 고흐와 내가 직접 만나는 길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씨 뿌리는 사람', '별이 빛나는 밤', '수확하는 사람',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 이 그림들을 통해 한 예술가인 고흐와 직접 만나는 내면의 떨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으로 변변히 동생 테오에게 대접한번 못하고, 동생의 보살핌으로부터 한 번도 벗어니지 못하고 배고픔과 가난에 쪼들린 삶을 살아야만 했지만, 결코 그림에 대한 영혼을 놓치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영적 충만함을 간직했으며, 이것이 사후에라도 많은 사람들의 떨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흐에게도 그랬듯이 나에게도 하얀 캔버스가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이 하얀 여백을 과연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에게는 어떤 "떨림"있는 것으로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 떨림이 고흐에게도 그러했듯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의 소설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허무함이 있다.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물질주의와 돈에 눈먼 세상에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을 채우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 참되고 진실한 가치는 없다라고 하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즉 세상엔 정말 인간적이고 진실한 가치는 없기 때문에 그저 내 욕망에 따르는 삶이 무난하지 않은가 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냉소가 그의 글 아래 깔려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글에서 허무를 본다.

하지만 이 삶의 허무를 용납하지 못하는 인물의 설정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때로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니까...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열정을 불어넣는다. 자신이 맺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런 의미부여가 없는 기능적인 삶, 냉소적인 삶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참기 힘든 일일테니까...

어쩌면 참된 삶이란 그가 그리고 있는 열정과 냉소라고 하는 양극단의 중간지점 어디엔가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열정이란 삶에 대한 과장된 의미부여일 뿐이고 냉소란 삶에 대한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생각이므로 사실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담기가 망설여진다. 어쩌면 그가 그린 극단의 두 삶의 방식에서 독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아보도록 하고자 한 게 아닐까

현실적 삶은 늘 허무하다. 내가 욕망하는 바는 늘 채워지지 않고 때로는 내가 나를 불사르고 사랑하고 싶은 이를 얻지 못하기도 하며, 진정으로 내 안에서 올라오는 영혼의 욕구를 버리고 외부세상이 강요하는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인생도 있다. 삶의 깊은 좌절과 고통속에서 삶에 대한 허무와 냉소의 꽃은 피어나고 그 허무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삶의 헛된 열정의 병에 걸려야만 한다.

삶은 아직 삶을 이해하지 못한 미숙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극단적인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삶의 많은 경험을 통해 삶에서는 결국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깊은 허무의 수렁에서 헤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의 성숙한 삶이란 그래서 양쪽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의 빠른 삶의 속도에 지친 영혼을 천천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지혜를 갖는 것이 정말 인생을 가치있게 그리고 의미있게 사는 길일런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