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골 외딴집 일곱 식구 이야기 - 2004년 우수환경도서
김용희 지음, 임종진 사진 / 샨티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농촌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삶의 자취는 인류역사의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 자연을 찾아 간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다름아닌 삶의 행복을 찾기위함이었다. 여기 그 삶의 행복을 찾아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강원도 두메산골로 자연적 삶을 찾아 자급자족적 삶을 영위한 한 식구의 이야기가 있다.

농촌으로 들어간 사람들 중의 일부는 이상적인 자신들의 생각이 현실적인 농촌생활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걸음을 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엔 무작정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이 자신의 삶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가지고서 그들은 Come back City했다.

이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에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다 쾌적한 삶의 환경을 바라고 들어간 자연에서 정말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단지 보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유기농 작물과 채소를 먹으면서 몸의 건강과 장수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행복인가? 사실 그런 이유라고 한다면 도시에서 돈을 많이 벌어 그런 환경을 갖추고 살아도 된다. 아니면 도시의 변두리지역에서 좋은 집을 짓고, 환경의 혜택과 도시의 문화적 환경을 동시에 누리며 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과연 우리는 왜 자연으로 돌아가는가? 그 내면적 욕구의 정도는 나의 현실적 삶들을 모두 버리고서라도 강한 욕구인가? 하는 물음들에 대해 깊은 고민을 통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럴때에라야 예측하지 못한 농촌과 자연생활의 불편함과 몸의 불편함(도시생활에 익숙해져버린 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생기는 불편함)을 극복할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선이골 일곱식구는 우선 그런 면에서는 잘 적응하고 있다. 그러면서 삶의 새로운 행복과 자연에서 느끼는 교훈을 누리며 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시간이 더욱 지나서 다섯 아이들고 그런 삶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까? 물론 그렇지 않다면 나가서 살겠지. 그리고 자신의 성장기를 남과는 색다른 경험으로 채워진 것에 대해 때로는 자부심도 느끼고 좋은 추억도 가지고 하겠지....아니면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사회화과정에 실망을 느끼고 부모님을 후회할 수도 있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자연으로의 회귀가 단지 몸을 건강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고 그렇기 위한 좋은 환경을 찾아간 것이라면 도시에서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문제는 내 마음이 과연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고 있고, 그래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냥 몸도 건강해지고 밝고, 행복하고 자연과 친화적인 삶만으로는 인생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비로소 내가 가진 모든 도시적 삶을 버리고 갈 만한 것이지 않을까? 내 사회적 지위와 내가 가진 부와 사회적 포부를 모두 버리고 간 곳이 단지 그런 욕망을 포기하고 내 몸과 가족간의 행복을 찾아 간 것이라면 냉정하게 말하면 하나의 욕망을 위해 다른 부차적인 것을 포기한 것일 뿐이다.

어떤 환경에 내가 놓여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 마음의 중심이 서야 비로소 삶의 문제에 직접 부딪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내면으로 눈을 돌리어 진정으로 우리가 이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갱 2006-01-2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면서 책들 리뷰를 보다보니 달팽이님 글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와 많이 겹치기도 했고, 올려 놓으신 글들을 보고 책을 구입하기도 했구요.

이 책을 쓰신 김용희씨가 얼마전에 돌아가셨더라구요.
책보고 나서 아는 분 통해 선이골에 가보기도 했는데요, 올망졸망하던 아이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싸했더랬습니다. 생각이 나서 적어봅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들 많이 발굴해내시기를..^^

달팽이 2006-01-2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고갱님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몇 번 댓글을 달아주셨죠...
저도 그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자연으로의 회귀적인 삶을 끝까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군요.
이제 다섯아이들을 아버지 혼자서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구요..

이렇게 글 남겨주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만남 이어갔으면 합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추사의 '세한도'를 한참 쳐다보면서 "우리 나라 선비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추운 겨울날 산속 깊은 곳에 눈은 내려 가지위에 가득히 쌓이고 쌓이는 데 그 곳에 세상의 추위를 견뎌내며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 그 속에 세상의 험난한 현실을 견디어내며 자신의 정신을 잃지 않았던 우리의 선비정신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였다.

다산 정약용도 어쩔 수 없는 선비였다. 이 편지글을 통해서 본 그는 나이 마흔이 된 그제야 비로소 유배를 통해 자신이 정말 걸어가야 할 인생의 오솔길을 찾았고, 그것은 학문의 길이었다.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두아들에게 보내는 교훈, 흑산도로 귀양살이갔던 형님 정약전에게 보내는 글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내는 글은 비록 대상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글공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 매진하고자 하는 자기 스스로의 당부의 말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하지만 그 글공부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과거를 위한 글공부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둘러보고 참된 진리의 자리에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세우고, 그 세운 마음과 정신에 의해 마음가짐과 행동을 하면서, 현묘한 지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학문은 우리들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학문이 제일등의 의리라고 하였으나 나는 이 말에 병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땅이 유일무이한 것이 의리라고 바로잡아야 한다. 대개 사물마다 법칙이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배움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수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신유사옥이라고 하는 사건이 그에게 준 18년간의 유배생활이 자신의 실학과 관련한 저서 500여권을 저술하게끔 하였고, 자신의 학문하는 삶을 살게 해주었고, 또한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인 사고가 글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그의 글이 가진 유교적이고 성리학적인 한계 또한 곳곳에서 엿볼 수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유배지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깊은 글공부가 좀 더 젊어서부터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학문에 대한 눈을 키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의 많은 저서나 뛰어난 능력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민중은 아니더라도 선비들의 삶에 있어서라도.....)하나의 대안을 보여주는 비전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더라면 말이다.  이것은 그가 아무리 글공부를 하여도 자신의 정신에서 떨쳐버리지 못한 유교와 성리학의 구습과 찌꺼기인지, 아니면 너무나 실사구시적인 학문으로 선회하여 보다 큰 방향을 잡지 못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옛 선비들은 학문의 깊음과 진정함이 한갓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여 진리의 길에 이르기 위한 격물의 방법에서 잘 드러났음을 알 수 있었다. 농사를 짓는 마음가짐도, 장사를 하는 마음가짐도, 그리고 세상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마음가짐에 깊은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경건함과 절제를 우리는 진실하게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비록 이르지 않은 나이에 배움과 지혜를 위한 책을 들고는 있지만 나 역시 책읽기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삶의 깊은 곳을 응시하도록 하는 그 '무엇'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지식만 쌓아서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수의 허기 - 동물로서의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르네 바르자벨 지음, 장석훈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F 소설가였던 그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작가적, 철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인간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거시적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한 원대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은 그의 말대로 자신이 쓴 이전의 모든 작품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자신과 애정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내놓은 작품이다. 야수로서의 인간 존재가 가진 허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이 질문을 통해 베일에 가려진 우주의 비밀로 나아간다. 그 배고픔의 궁극적 원인을 궁구해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봄을 심상히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첫 구절은 그가 가진 이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비함이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그리고 존재하는 우주에 대해 궁극적인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의 시선의 출발점은 인간이다. 그 인간이란 모든 생명체를 포함하여 그저 하나의 생식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외의 다른 기관들은 저마다의 역할을 갖고 생명을 유지시키고 생식기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보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란 중력의 법칙에 따라 흔들리는 진자처럼 생식의 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창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른 것은 로미오가 아니라 그의 남성 생식세포였다. 자신을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여성 생식세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사다리를 오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또한 자신의 몸의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한다. 어떤 병균이 자신의 몸을 파괴하고 있는 때라도 그는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버려 둘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란 존재는 생태계의 모든 동물을 지배하고 이젠 이 지구라는 별을 자신이 정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존재하는 병균에 대해서도 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정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이라는 힘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 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의 오감각을 기초로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 오감각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남이 없는 감각의 확장에 불과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 과학 또한 여러번 반복되는 현상에 대해 공통의 법칙을 만들어내어 이름만 부여한 것이지 존재의 신비는 여전히 건드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자연의 법칙에 존재하고 있는 '균형'의 법칙이 존재한다면(보박이라고 하는 설치류는 자신의 천적인 늑대가 지구상에서 사라짐으로써 수백만에 해당하는 집단이 스스로 몇 개월에 걸치는 여행을 통해 집단자살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인간 역시 그런 법칙에 의해 스스로를 정리하게 될 것이다. 전쟁이든, 환경이든.... 결국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전능한 존재는 없다고 주장하며 안하무인격으로 자연계를 파괴하는 인간 역시 별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는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나아가 이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비함을 품게 한다.

만일 과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은 종교와 화해하고 결합할 때 우리가 잃어버린 앎을 언젠가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제시하는 날조된 이야기와 모호한 신비주의를 깨뜨릴 경우에만 과학은 정말로 필요하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참된 진리에 이르기 위한 길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결코 봄을 심상히 자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우주의 창조자는 있을까? 만약 이 창조물을 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다면, 창조자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은 것이 된다. 창조는 인식되지 않는 한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식된다면 창조자는 그 창조물의 각 부분 부분에 존재하게 된다. 이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생명활동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역할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5-01-1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제 리뷰 안쓸래요....흑. 너무 잘 쓰시잖아요. 왜들 자꾸 저의 기를 죽이시는지요...

달팽이 2005-01-1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입니다. 저도 파란 여우님의 리뷰에 감동하는 독자인걸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지음 / 열림원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류시화 시인의 삶에 대한 동경에 공감한다.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결국 찾아낸 것은 그가 가진 내면 속의 또 다른 "나"였다. 우리는 세상을 보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찾아다니지만 결국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나"라는 사실을 그는 말해준다. 

빗줄기가 자꾸만 굵어져가는 어느 오후였다. 낙동강 하구변에 자리잡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며 내다보이는 강의 풍경은 하늘색과 물색이 어우러져 은은한 색조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 강의 표면에 닿는 순간 그것은 강물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서 강물과 하나가 되는 그 변화의 순간 내 마음 속에서도 그 풍경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행자의 서시에 보면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하는 표현에서 그는 시라는 여행을 통해 그가 다다라야 하는 곳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자기의 문을 통해 나가면 세상과 나는 하나가 되고 나는 그 영원의 나라에서 나와 너가 없는 경계에 다가서게 된다. 그 세계란 바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개울물로 강물로 바다물로 동화되는 나와 너의 경계가 없는 한 마음이 되는 세계가 아닐까?

;때로는 사랑이 그 하나되는 세계로 가기 위한 문이 되기도 한다.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의 사랑처럼 두 마리의 물고기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그런 사랑을 그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사랑, 그런 만남은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치는 사랑으로 역시 떨어지는 빗방울의 사랑과 같지 않은가?

하나된 그 세상에서도 빗방울 하나의 흔적은 남아 과거의 아픔과 눈물과 기쁨과 희망까지도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열림원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시인은 시인으로 태어난다고 했던가? 칼릴 지브란의 이 시를 접하면서 나는 "배가 오다"라는 시부터 내 가슴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신의 손길이 연주하는 현악기,  또는 신의 숨결이 내 안을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피리."라는 표현 앞에서 나의 숨결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다. 이 시는 아주 특별한 시임에 틀림없다.

그의 유년기는 불행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작시를 낭송하는 자리에서 "이런 정신나간 소리는 다시는 안들었으면 좋겠군!"이라고 말함으로써 어린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런데다가 세금징수원이던 아버지는 늘 술을 취하도록 마셔댔기 때문에 집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곳에서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레바논 베차리지역의 대자연이었다. 혼자있길 좋아했던 그는 삼나무 숲의 향기를 가득 담은 골짜기를 거닐며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한 원체험을 쌓아갔다.

그가 처음 재능을 보인 분야는 미술이었는데 그의 미술선생이었던 사진작가 홀랜드 데이는 그의 명상적이고 신비한 얼굴에 매료되어 자신의 사진모델로 쓰기 시작한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의 사진의 대부분은 그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브란을 키츠, 셀리, 블레이크, 에머슨, 휘트먼 등의 문학세계로 이끌었으며, 이는 지브란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키워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성공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쳤던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과 세 번에 걸친 사랑했던 여인들과의 이별로 인해 그가 더욱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는 더욱 종교적 명상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40의 나이에 이 위대한 작품 '예언자'를 완성했다. 서양에서도 동양의 위대한 종교시를 들때면 타고르의 '기탄잘리'와 이것을 들곤 한다.

예언자의 알무스타파가 말한 것처럼 "말을 한 것이 나였던가. 나 또한 듣는 자가 아니었던가?"라고 한데서 이 시는 그가 지브란이라고 불리는 세속적 자아를 비워낸 상태에서 자신의 근원 깊은 곳에서 울려나온 소리에 이끌려 적어나갔음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그 깊고 깊은 근원적 울림이 바로 이 시를 읽어가면서 내가 떨렸던 이유였을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예언은 "잠시 후면, 바람 위에서 한 순간만 휴식하면, 그러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이다. 그의 영혼이 아직 저 세상의 어디에서 바람을 맞으며 휴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여인의 아이로 다시 세상에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삶을 통해 성숙해야 할 영혼이 아직 이 지구라는 별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는 한 언제고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나 나나 같은 숙제를 가지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