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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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일 당신이 끊없이 펼쳐진 태평양의 한가운데에서 조그마한 구명보트에 아무런 무기나 도구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야생호랑이와 단 둘이서 태평양을 벗어나야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여기 16세인 파텔이라고 불리우는 한 인도 소년은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캐나다로의 이민을 결정하면서 온가족이 화물선을 타고 가던 중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배는 좌초하였다. 가족 모두를 잃은 슬픔을 느끼지도 못하는 급박한 상황속에 던져진 그는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마리와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벵골호랑이가 탄 구명보트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 소년에게는 그 막막하고 넓게 펼쳐진 태평양은 그저 외부의 세상일뿐 그가 생활하는 공간은 조그만 구명보트위가 되고 그곳에서 그는 서로 죽고 죽이는 먹이사슬에 놓여진 불쌍한 초식동물일 뿐이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이고 그 하이에나를 호랑이가 죽인 후에는 결국 파이와 리처드파크라는 호랑이만이 태평양의 망망대해에서 작은 점과도 같은 보트 위에 서있는 두 존재가 된다.

호랑이에 대한 인식을 한시라도 놓칠 수 없었던 한 소년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과 삶에 대한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데에는 이 상황에 소년을 던졌던 신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의 생명을 언제라도 위협할 수 있는 호랑이가 사실은 소년이 그 기나긴 시간동안 부모와 가진 모든 것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막막한 바다위에서 밀려드는 어둠과 바닷속의 상어의 공격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탱시키게 해준 생명의 열쇠였던 것이다.

일본 해양부의 직원이 일본 선박 침춤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조사하려고 왔을 때 소년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려는 대로죠. 안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확실히 그러하다. 소년이 만일 그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특별한 방식, 즉 현재의 상황에 대한 모든 이유를 신의 의지로 돌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해내지 못하였다면 아마 이 이야기는 작가가 만들어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서 나온 이야기처럼 이 이야기는 결국 당신을 신으로 인도할 것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이해할 수 가 있다.

화물선에 오르기 전에 소년이 가졌던 기독교와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다원주의적 종교관은 결국 그가 어떤 형식이나 교리를 떠나 자신의 생활속에서 참된 신앙을 찾으려는 노력이었으며, 그러한 노력이 극한적인 삶의 조건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그렇게 이해되고 수용된 상황은 단지 그가 헤쳐나가야 하는 모험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이제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그러한 극한적인 삶의 조건에 처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통해 삶의 의미와 희망을 가지고 그 역경을 헤쳐나갈 것인가? 어쩌면 태평양 망망대해위에 놓여진 추진기관없는 구명보트에 호랑이와 함께 한 227일의 삶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이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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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문진희 옮김 / 한문화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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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깨달음은 주관적이다. 호킨스 박사의 이 책은 특정한 종교적 형식을 떠나서 삶과 인간존재의 깨달음에 관한 영적인 책이다. 모든 인간사회의 종교가 가진 공통적인 메세지와 그 메세지가 가진 의식의 레벨에 대해 객관적인 수치로서 드러내었다. 이 책은 그의 전작인 '의식혁명'의 후속편이자 영성에 보다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보다 상세하게 깨달음의 구조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영성은 이 책에서 그가 강조하는 개념이다. 종교는 그 형식적 도그마로 인해 역사상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왔다. 그 선구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높은 의식레벨은 그것을 해석하는 후대사람들의 이기심과 에고에 의해 해석됨으로써 역사의 길목위에 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렸다.

그뿐이 아니다. 경전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왜곡은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써 그들의 일생에 걸친 노력을 헛되이 만들기도 했다.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지표와 나침반을 갖지 못함으로 해서 갖게 된 수많은 오류들과 거짓된 스승이나 구루들을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허비해야 했던 시간들을 그 생에서는 보상받지 못하였다.

만일 이 책에서 드러난 의식지수가 정확하지는 않다하더라도 그런 잘못된 길을 스스로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검정표의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이 책이 가진 가치는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표현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는 깨달음의 영역을 수치로서 나타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하더라도 이렇게 정확하고 막힘없이 수치화하는 것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깨달음에 대한 잘못되고 오도된 길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칭찬받아야 할것이다.

인류의 전망에 대해서도 이 책이 주는 메세지는 희망적이다. 200을 넘어선 인류의 역사는 앞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향해 달려갈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삶은 보다 영적으로 성숙해질 것이다. 지수가 더욱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영적으로 긍정적인 감화를 더욱 많이 받을 것이고, 언젠가는 지구가 더욱 성숙한 별로서 거듭 태어나게 될 날 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특별한 개명천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지구에서 우리들의 의식이 한 차원 성숙된 세상이 아닐까?

나의 삶 속에서 나의 모든 행동과 마음과 사건들을 지켜보는 내면의 눈, 그 눈이 늘 우리들의 생명을 지켜나갈 것이고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배우고자 하는 것을 지켜보는 참 존재일 것이고 그것을 우리들이 문득 아는 날에 세상은 나에게서 다시 펼쳐지는 날이 올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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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1-1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 책의 첫 서평을 '모든 깨달음은 주관적이다'라는 말로 시작했을까? 주관적이란 말에 더욱 함축성을 준 건가? 아니면 <나의 눈>이란 책 제목에서 비롯한 것일까? 제목에서의 '나'는 그냥 'I'가 아니라 'The I'란 것을 안다면 깨달음의 주관성을 쉽게 단정할 수있는 것은 아닐텐데...주관성에 대한 다른 설명이 없어 서평의 첫 말에 대한 의문을 가집니다. ^^!!

달팽이 2005-01-1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딴 것은 아닙니다. 저자의 깨달음의 수준의 객관적 수치화에 대한 일종의 의문과 'The I' 관찰하는 주.객관 없는 그 마음을 내 안에서 온전히 찾고자 하는 마음이 그런 표현을 쓰게 한 듯합니다.
 
나이듦의 기쁨
애비게일 트래포드 지음, 오혜경 옮김 / 마고북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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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인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의식주생활의 개선으로 말미암아 평균연령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2004년 말에 통계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연령은 74세 여자는 80세로 이미 고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는 나이들어서 죽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퇴직하고나서부터 앞으로 20년이 넘게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노년생활에 대한 준비는 경제적인 준비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마저도 국가나 사회적 차원에서의 준비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능력에 따른 준비에 맡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노년기에 대한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니다. 퇴직 후 갑자기 갈 곳을 잃고, 자신의 설 곳을 잃어버리고 사회적 인간관계의 상실에서 오는 무력감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이미 범죄에 의한 타살의 수치를 넘어서고 있다. 이는 20세기 후반의 인류문명의 발달사에서 예전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노년의 시기를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미국사회는 역시 문화적으로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가고 있는 사회다. 퇴직 후에 벌어놓은 돈을 써가면서 어떻게 노년을 편안하게 보낼 것인가가 아니라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하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주어진 위치에서 더욱 많은 연봉과 지위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새로운 삶은 자신이 기존의 경쟁사회에서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갔던, 그래서 자신의 진정한 내면적 욕구를 무시하고 외부적 기준이나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단호하면서도 용기있는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보다 낮은 보수나 불안정한 파트타임의 조건, 또는 무보수의 봉사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진정한 내적 욕구로부터 출발한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사춘기와 비슷하다. 이 시기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기이다. 그 변화가 10대때는 신체적 변화로부터 시작하여 심리적인 불안감과 반항감이 싹터가는 시기라고 한다면 이 시기에는 그간의 모든 사회적 경험을 겪고 난 후 가지게 되는 지혜와 자신감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 있는 심리적인 변화가 그 특징이다.  이 시기는 자신의 가족관계나 사회적 관계의 상실에서 오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여유와 지혜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10대의 사춘기가 자신의 바로 코 앞의 인생밖에 볼 수 없었다고 한다면 제2의 사춘기는 자신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춘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우리나라의 실정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우리 나라는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처럼 100여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 동안 노령화사회로 천천히 이동하면서 노령화사회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국가와는 달리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급격히 노령화사회로 진입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준비라고는 경제적인 준비가 모두인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사회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성장이 빨랐듯이 노령화사회의 도래속도도 빨라서 노령화쇼크의 사회가 다가올런지도 모른다.

물론 노령화사회에 대한 준비는 사회적, 국가적으로 준비되어야 하는 부분이 중요함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인이 준비해야 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퇴직 후에도 4-50여년이 남겨진 나의 노년을 과연 어떤 의미있는 일들로 새롭게 채워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준비없이 우리의 노년은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은 노령화사회를 준비하는 contents가 form만큼이나 중요한 것임을 이야기해 준다.

바로 지금부터 우리의 노년을 준비해야 한다. 그럴 때 나이듦은 단지 우리가 기피하고 싶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보다 지혜롭고 의미있는 삶을 살게 해주는 희망의 언어가 되며 노년은 신체가 노화되고 죽어가는 과정뿐만이 아니라 새롭게 출발하고 시작하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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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1-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노년을 준비하는 것은 그 이전의 삶을 규정하는 많은 잣대 중의 큰 부분인 것 같습니다..리뷰 잘 읽었습니다^^

달팽이 2005-01-0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군요...아직은 멀리 있을 것 같은 우리들의 노년도 전체적인 삶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준비의 과정은 지금 우리 인생을 새롭게 돌아보게 해주는 것 같아요...
 
고요함의 지혜 -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마음의 힘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진우기 옮김 / 김영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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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저자 톨레가 경전과도 같은 책을 썼다. 이 책은 비록 짧은 양의 책이지만 그 에너지는 아주 강렬하다. 그 강렬한 에너지의 분출이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깊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이 작은 책의 내용 중에서도 단연 1장의 내용이 액기스다. 단 1장 3장 반의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미 당신의 마음은 고요함을 찾아 어느 오솔길을 걷고 있게 된다.

고요함은 생각과 감각을 벗어버린 경계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단계이다. 몸을 바탕으로 하는 모든 감각들이 사라지고 마지막 한 생각마저 사라질 때 우리는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고요함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지혜가 있다. 참된 사랑이 있다. 그 참된 지혜와 사랑이 바로 고요함 즉 순수의식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원제는 'Stillness speaks'이다. '고요함이 말하다' 이다. 최근 일어난 해일 참사를 접하게 되면 우리 사는 세상엔 고통과 비극에서 나는 소음이 너무 많다. 사건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우리들이 가진 호오의 생각과 더불어 이미 생로병사의 소음이 끊일날이 없다. 따라서 고요함이란 바로 이러한 자아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선현들과 지인들이 이야기하는 바가 바로 자기 초월이 아닌가? 자기 초월이야말로 진정한 고요함으로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자기 초월을 어떻게 이루어내는가? 이 책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물론 각 장마다 톨레는 친절하게 고요함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나, 깨달은 자가 보는 세상과 깨닫지 못한 자가 보는 세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참된 지혜인 고요함으로 들어가기 위한 순간적이고도 직접적인 방법말고 독자가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생활속의 방법들이 제시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일 수 있다.

고요함으로 들어가는 일은 개인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 길로 가기위한 가이드나 지도는 늘 우리의 영적 교사들로부터 제시되어 왔다. 하지만 방향만 제시되고 나머지는 모두가 독자들의 몫이 된다면 아직 지혜의 빛을 밝히지 못한 나같은 사람은 너무나도 많은 시행착오와 반복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신이 알게된 진리의 빛이 세상속으로 스며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정기간의 고요함의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출판된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손에 가까이 하며 스스로를 초월하여 우리 삶과 인생을 바라보게 하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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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1-0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자기초월을 이루어 내느냐? 'Stillness speaks'입니다. 욕망과 잡착의 자기를 움지이지 않고 욕망과 집착의 'Stillness'에서 욕망과 집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체의 움직임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요함이 우리들의 에고가 지닌 변화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고요함은 소리없음이지만 모든 소리와 함께 하고 움직임없음은 고정된 것이지만 모든 변화와 움직임과 함께 합니다. 초월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즉해서 바로 뛰어넘어야 합니다. 고요하게 하려는 노력은 개인적이지만 고요함은 이미 개인적인 상태에 머무러지 않습니다. 관음하면 곧바로 오온이 공인줄 압니다. 색즉시공입니다. 그 사이에 시간과 공간의 틈이 없습니다. 바치면 쉬어 고요하고 쉬면 밝아집니다. 밝아진 디라야 세상이 보입니다. 고요함이 말을 합니다. 공즉시색입니다. 한손뼉으로 내는 소리를 들을 수있습니까?

오아시스 2009-06-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돌아가는 방법이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떻게 해얄지 모르겠다는 분은,
생각을 안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게 좋습니다.
또, 자기 몸을 느끼는 연습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체험적으로 책에서 말한 것들이 느껴질 것입니다.

 
서장공부
대혜종고선사 지음 / 여시아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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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대혜서 또는 대혜서문이라고도 불리우는 책으로 대혜종고(1089-1163)스님이 문하의 거사와 유학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선의 요지를 설명한 것으로 62편의 편지 중 49편을 정리하고 해설한 것이다. 서장은 간화선의 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묵조선을 배격하고 다른 마음공부에 대한 배타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선의 공부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혜스님의 깨달음의 마음으로 잘 풀어내어 주고 있다.

우리가 흔히 화두를 든다고 할 때 그것은 화두로 알음알이를 하거나 화두의 의미를 깨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두를 들고서 그 화두 앞에서 온전히 깨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냄새맡고 먹고 행위하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체험해내는 데 있다. 그 마음 본바탕은 세상 만물에 드리워져서 나타나므로 세상 만물이 없을 때에는 그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명상하면서만 그것을 구하지 말고, 숨쉬며, 밥먹고, 잠자며,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춤추고 눈물흘리는 모든 행위에서 그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밖에서 구하면 아무것도 없다. 안에서 구하면, 즉 마음에서 구하면 백척의 간두위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곳에서 허공속으로 한 발 내딛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생각과 마음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깨달음으로서 생각과 마음이 저절로 끊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문득 알아내도록 해야 한다. 삶과 죽음이 여기에서 해결되며, 구속과 자유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으니, 이것이 일대사인연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책은 단순한 편지글이 아니다. 선에 대해 마음 본바탕을 알기 위해 그것을 직접 가르치는 선의 언어이다. 또한 서술의 방법면에서 선이 그 적합한 표현형식과 만나 내 마음의 본바탕을 향하게 한다. 내가 오늘날까지 공부하고 알아진 것들 뿐 아니라 무엇인지 모호했던 마음의 상태를 명쾌히 설명해주고 있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법으로도 늘 이어져있음을 스스로 알기까지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늘 법을 향하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그것이 마음의 눈뜸이요 안으로 향함이다. 이제 비로소 마음의 눈을 뜬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마음의 눈이란 펼쳐진 세상과 모아진 세상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눈이다. 그것은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책을 읽고 걷고 운전하며 산책을 하고 무엇을 하거나 마음을 담는 그릇으로 이어지는 코드에 접속되게 하는 것이다. 그 접속이 나를 허공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허공 속의 뼈를 알게 해줄것이다.

그래서 문득 알아지는 날 화두가 타파되고 내가 비로소 온전하고 자유로운 자가 될 것이다.

찾는자는 찾아진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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