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의 진실 - 해설편
마틴 룬 지음, 이주영 옮김 / 예문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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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의 진실에 대한 갈구가 강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현실의 허구속에 헤매게 된다. 예수의 참된 말씀과 그의 삶을 찾기 위한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상황과 예수를 해석하는 집단의 이해관계와 어긋난 신념체계로 인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 예수 사후 예수의 사상과 믿음을 따르고자 하는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지역적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개성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바울로에서부터 예수의 말씀과 말씀이면에 있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글의 문구 하나하나의 차이를 놓고 시비를 가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비를 가르는 데서 우선 여자들이 배제되고 또 다른 믿음들이 배제되었다. 우선 여성들의 배제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을 통해서만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의 탄생이 동정녀로부터 난 것이라는 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다윗왕의 후손으로 유대인 남성은 반드시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가지는 것이 보편적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막달리아를 예수의 아내가 아니고 창녀로 취급함으로써 예수의 결혼을 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부와 권력을 쥐고자 하는 음모는 신약성경을 만드는 데서도 예수의 진실된 말씀을 왜곡시켜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콘스탄 티누스 황제에 이르러서는 로마에 있어왔던 전통적인 태양숭배사상과 미트라교와 접합함으로써 또 다른 형식의 변화를 낳게 된다. (예수님이 말하는 하느님의 빛은 태양의 빛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설하였던 진실은 사라져버리고 인간 예수의 외형적 삶을 둘러싼 믿음의 차이를 이유로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사의 이면의 비밀을 간직해온 시온수도회는 12세기의 장미십자회를 시작으로 14세기에는 플라멜을 중심으로 그랜드 마스터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르네, 보티첼리, 다빈치, 아이작 뉴턴, 샤를 노디에, 위고, 장 콕토에 이르기까지 그랜드마스터들은 성배의 수호와 예수혈통의 보호를 임무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삶도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빈치코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인간예수의 삶의 진실을 밝히는 데에만 그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현실의 기독교주의를 부정하고 그들이 앉은 자리에서 끄집어내어 역사적 단죄를 내린 다음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바뀌는가? 기독교 이면의 역사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자 복음의 길이어야 비로소 그 코드는 이 세상과 피안을 연결하는 생명의 줄이 된다. 그래서 허구의 세상에서 시비를 따지고 허우적댈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진실한 모습을 찾기 위한 코드로 바꾸어 낼 때 다빈치 코드는 다시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 그 코드는 바로 내 삶의 비밀을 여는 열쇠이고 마음의 본래면목을 알게 하는 문에 접속하는 코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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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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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는 힘의 언어로 쓰여진 박제품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에 의해 쓰여진 역사이다. 그 기독교는 예수사후 4세기경 니케아종교회의를 통해 대주교들이 모여서 교황선임권과 황제선임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지역적인 기독교사와 이면의 기독교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조작된 것이다.  자신들에게 변함없는 부와 권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절대화, 신격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고, 그 절대자인 예수에 이르는 길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의 확고한 지위를 꿈꾸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가 가진 인간적인 면을 포함한 이면적인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서 지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빼앗기고 이교도라는 허울을 둘러쓰고 탄압받게 되면서 지하의 비밀조직으로 숨어들면서 그 생명을 유지해가게 된다. 다빈치 코드는 바로 이러한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에 대한 코드이다.

시온수도원이라고 불리우는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를 비밀리에 보존하고 전승하는 임무를 띤 비밀단체는 예수의 사랑하는 연인이자 아내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후 프랑스로 망명할 때 이미 예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는 예수의 혈통을 이어가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그 딸이 프랑스의 메로빙거왕조를 이루게 되고 비밀리에 그 후손을 지켜가는 것과 성배의 보존이 시온수도원의 임무가 된다.

그랜드 마스터 자크 소니에르가 기독교 극단주의 조직인 '오푸스 데이'의 행동대원 사일래스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소니에르가 죽어가면서 남긴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는 말때문에  하버드 대학교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소니에르의 손녀 소피와 함께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시온수도원 비밀조직과 오푸스 데이 그리고 이를 조종하면서 성배의 비밀을 찾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는 티빙간의 성배를 쟁취하기 위한 음모와 갈등이 펼쳐진다.

이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를 파헤친 다빈치 코드는 작년에 미국에서만 700만부 이상이 팔리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유럽에서 종교적 빅뱅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대중적인 소설로 만들어질 수 있는 역사적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에 이미 이 소설의 결말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기도 하였다. 중세만 하더라도 이런 상상력조차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미 종교적인 다원주의와 기독교 내에서의 자성적 목소리와 성서의 내용을 둘러싼 비판과 모색이 결국 종교적인 다원주의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상황이 이젠 기독교의 바탕위에 선 국가들에서 이러한 작품을 탄생시켜내었던 것이다.

몇 번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 그들은 쐐기돌의 비밀을 풀어내고 그 쐐기돌의 메세지를 따라 도착한 곳이 로슬린 성당이었고 그 곳에서 성배의 진실은 파헤쳐진다. 하지만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성배의 진실은 없었다. "사실 시온은 성배가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유지해 왔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봉사하는 수수께끼이자 경탄이지요. 성배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배의 아름다움은 우아한 그 천성에 존재하는 거예요."

역시 그 말이 맞다. 훌륭한 결론이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기독교의 주류역사의 거짓과 기만을 들추어내는 것이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들의 권력과 부가 지탱하고 있는 기반의 명분을 허물어 뜨릴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명분과 기반을 쌓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고 해서 나는 믿음을 저버릴 것인가? 나의 종교적 믿음이 형상에 치우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믿음이 깨어지겠지만 그 믿음이 진실로 예수의 참된 말씀에서 찾는 것이라면 무엇이 과연 달라지겠는가?

따라서 성배는 일반인들에게 단지 '위대한 개념'일 뿐인 것이다.

시온 수도원의 십자가는 네 다리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이다. 그것은 남과 여가 하나님의 말씀아래 평등함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주류의 역사가 대접받는만큼 버려진 이면의 역사도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편향된(물질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우리들의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의 십자가를 간직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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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2-0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근본적으로 픽션의 장치를 이용합니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문학의 매력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허구의 꿈과 상상력이 먹고 삽니다.

다빈치코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소설속의 성배입니다. 코드는 무언가의 숨김이고 드러내고 싶은 베일입니다.

그 코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 마음속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빈치 코드...달팽이 코드는 무엇입니까?

삶은 사실이지만 또 그 속의 살아있는 허구때문에 꿈이 됩니다. 소설속의 진실을 맏고 싶은 만큼 삶은 허구 속에 허덕입니다.

진실과 허구의 게임에서 벗어나는데까지 마음의 비밀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빈치코드가 어떻게 달핑이코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회적 코드가 개인에게 내면화 되듯이 개인적인 코드가 사회를 이끌어 가게끔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접점에 우리가 알고 싶은 성배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모두가 성스러운 핏줄의 후손이라는 것을 개달을 수 있을 때까지..코드는 우리들의 삶에서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속의 코드를 만들고 소설속의 코드가 삶으로 튀어나와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인생이라는 코드는 진실과 허구 사이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허구같고 허구가 진실같은 저마다의 코드에 속지말아야 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 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본래 모습이 없는데 뚜렷한 모습으로 우리 사이에 유령처럼 떠돕니다.
 
한국의 탈레반 - 자주외교 대 동맹외교의 힘겨루기
김종찬 지음 / 새로운사람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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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대체 노무현 정부는 시민들의 개혁열망을 정부정책으로 모아내어 한국사회를 잘 꾸려가고 있는 것일까? 때로는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여러 가지 국내외적인 정부정책들이 결국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러한 정책들이 의도한 결과를 순조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은 어떤 사건들에 대해 은폐, 왜곡된 신문기사와 기만의 대중매체속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늘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정당, 대기업과 재벌, 신문사와 방송사 등 문화권력에 의한 정보조작을 밝혀내고 그 기만의 베일을 벗겨내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싶은 욕구가 우리들에게 늘 있어왔다. 이 책은 진실과 객관적인 사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김종찬, 생소한 석자의 이름을 갖고 있는 그는 신문과 방송언론을 세밀하고도 비교적인 분석을 통해 그 이면에 숨겨진 정부와 기업들과 미국의 강경보수주의 등 각 집단들이 갖고 있는 이해관계의 실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의 행동과 여론을 다루는 동기와 기술에 대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파고들어 우리들에게 그 얼개를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노무현 정부가 가진 자주외교와 북핵문제에 접근하는 방법과 이라크 파병 및 이런 사건들을 둘러싼 각 국가간 국내 집단간의 이해관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한국의 탈레반'이라고 하는 제목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 나름대로 자주적인 외교(균형적 실리외교를 지칭함)를 펴고자 하는 한국의 이른바 개혁 관료들이 가진 폐쇄성과 배타성을 미국 강경 보수주의자들이 바라본 시각에서 사용된 용어이며, 그것이 가진 문제점들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이전의 북미정책에서 대북정책을 따로 떼내어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어진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국제적 상황과 북핵문제에 나서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북한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결국 자신의 국내에 있어서의 정책의 무능을 숨기면서 남북관계의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6자회담의 가시적이고 형식적인 성과에 무분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러한 앞뒤없는 정책이 결국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한 '대중동구상'전략에 있어서 '한국의 이라크 파병'이라는 어리석은 선택을 함으로써 편승하게 되고,  대신에 북핵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중재적 역할을 인정받으려고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대립되는 북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말장난으로 넘기려고 함으로써 더욱 나쁜 상황만을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자주외교의 명분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중국의 중재에 6자회담의 전망을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중국은 북핵문제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게 됨으로써 자신들이 챙길 것을 미국과 북한과의 쌍방관계에서 찾으려 하게 되었고, 우리는 아무런 북핵문제의 성과없이 중동과 북한에 돈을 쏟아붓게 되었다.  결국엔 모든 노력과 돈을 써가면서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답답하고 무능력한 외교적 실패만 만들어내었다.

그런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대선에서 케리가 이끄는 민주당이 당선되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나름대로 시민단체를 통해 부시낙선운동을 벌이지만 결국 부시의 재당선으로 한국 자주외교의 앞날 또한 더욱 어두워지게 되었고 한반도의 불안한 정치형국은 더욱 우리들의 앞날을 불안하게 한다. 그런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는 더욱 미국의 강경 보수주의의 압력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이것이 노무현 정부의 보수주의적인 전향을 낳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모으는 정보가 물론 여러 출처를 가지고 있겠지만 이렇게 신문기사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사건의 내막과 구조에 대해 자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여 앞으로의 전망도 볼 수 있게 하는 그의 눈은 날카롭다. 노무현 정부 후반으로 갈수록 변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정부정책(외교정책, 경제정책)과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애초에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갖고 있는 그 마음과 달리 보이는 뭔가가 저자의 혜안을 통해서 보다 자세하고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수십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가 이런 그의 혜안들을 보여주고 있고, 앞으로의 정부정책과 한국사회의 미래까지도 내다볼 수 있게끔 하므로 그에 대한 좀 더 많은 관심이 내게서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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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5-01-2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찬, 누군가의 리뷰 가운데에서 "누구누구는 가라, 김종찬 오라"는 리뷰를 보았는데... 정말 읽어보고 싶은 책을 만드는군요. 한번 보아야겠습니다. 님의 리뷰를 보니.. 더더욱^^ 김종찬, 한쪽에 메모를 해 둡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달팽이 2005-01-2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열린사회의 적님...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분이라 반갑군요...
 
동경대 강의록
사카이야 다이치 지음, 최현숙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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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퇴역공무원이 동경대 학생들을 놓고 강의한 이 책은 일본사회의 변화 발전과정을 통하여 본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을 이론화시켰으며, 앞으로의 일본사회에 도래할 지가사회라는 개념을 통해서 현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진단, 분석하고 앞으로 준비해야 할 바에 대해 수도의 이전과 호연공동체의 개념으로서 정리하고 있다. 그는 학자가 아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상당히 폭넓고 세밀하다. 학부때에 전공한 경제학이 그의 세상을 보는 큰 밑천이 되고 있음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사회분석의 기본틀과 미래사회의 전망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틀이 경제적 사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피터 드러커나 앨빈토플러의 미래사회분석서들과는 조금 다른 점을 가진다. 오히려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라고 하는 필립 암스트롱과 존 해리슨의 공동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가 전후 자본주의 경제의 재편성과 발전을 주요영역으로 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확장의 영역이 인류역사에서 앞으로 다가올 21세기의 사회에 관한 것이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물론 미래사회학자들은 여기에서 제외한다) 틀지워진 학문영역의 제한을 받지 않고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영역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분석에 의해 일본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을 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가 말한 지가사회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동시대에 나온 다니엘 벨이나 앨빈토플러, 이후의 피터드러커나 폴케네디, 제레미 리프킨(이 사람은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사람이다)등의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지가사회란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이며, 앨빈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며 정보화혁명이다, 그리고 피터드러커의 지식기반사회이며 폴 케네디의 신산업혁명이며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과 접속의 시대이다. 이들의 개념도 지가사회와 그 내용면에서 더 풍부하면 풍부했지 덜하지 않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접속의 시대에서 소유는 사라지고 접속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듯이 지가사회에서는 역시 소유의 시대라고 명명되어진 규격대량생산사회의 퇴보와 관련산업의 축소, 인구구성의 변화를 포함한 사회변화가 진행될 것이다. 그 사회에서는 지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한 사회가 될 것이다는 그의 견해는 이미 특허나, 상표, 브랜드와 지적재산권의 가치가 커져가고 있는 사회현상에서 증명되고 있다. 소비자의 소비패턴도 이제는 단순히 제품이나, 브랜드 뿐만 아니라 그 상품을 통해서 체험또는 경험할 수 있는 내용들이 주된 소비가 되고 있다.

앞으로의 변해가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한 첫번째 방법으로서 수도의 이전을 들고 있다. 세계에서도 가장 수도기능의 집중이 심해서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대표적인 나라로서 그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들고 있다. 따라서 도쿄로의 행정기능과 중추관리기능 각종 경제, 정치, 문화적 기능의 집중현상이 앞으로의 지가사회에서는 인간의 지혜를 발휘하는 데 그래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접속의 시대에서는 모이고 독점된 것에서 뭉쳐져 있는 꼬여버린 실타래를 칼로써 끊어내고 필요에 의해 가볍게 접속하고 풀어내는 유연한 접속체제와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호연공동체의 성립이다.(그가 내놓은 개념중에서 아주 참신하면서도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사회에서 가족공동체나 국가조직을 포함한 기업조직 등 여러 생산조직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호연조직이라고 하는 같은 기호를 가진 조직들이 많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서로간의 접속과 공유를 통해 필요한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인생까지도 공유하게 되는 의식공동체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근대사회 경제의 구성원리인 물질적 만족과 합리성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고 인간존재의 발전을 위해 함께 하는 의식공동체의 형성과 그 발전이 미래사회에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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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보람의 창조
이이다 후미히코 지음, 김종문 옮김 / 자유문학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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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아픔으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 자신이 병에 걸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들처럼 보다 많은 부와 높은 지위를 가지지 못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에 불만이 있는 사람, 하루하루의 생활이 그저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활력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가치에 대해 눈뜨지 못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 누구든 각각의 삶은 자신에게 있어 꼭 필요한 배움의 과정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사는 보람이라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생에 들어서기 전 이미 계획되어진 것을 발견하는 것이 된다.

이이다 후미히코 교수는 경영심리학자로서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그가 자칭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보람있고 멋진 삶을 살게 해주는가?"에 대한 의문에 답을 내리고 있다. 이 책은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지는 삶에 기뻐하고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최면요법을 통한 자료를 통해서 먼저 보여주고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윤회가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더불어 인간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물음도 던지게 된다. 그것은 내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서서 그것을 경험하며 그 기억을 간직하는 무엇인가가 지금 내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중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넘어가는 인생의 구조에서는 생과 생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최면요법을 통해서 얻은 자료들 중 객관적인 것을 추려서 모아놓았다.

사실 객관적이다, 과학적이다 하는 것이 존재를 파악하는 방법 중 드러난 현상을 파악하는 방법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언어적 표현 자체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후미히코 교수는 드러나지 않은 영적 세계를 드러난 현실의 역사에서 검증가능하고 최면요법의 피험자 중 다수의 사례로 나타난 경우를 지극히 학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미국과 일본 유럽 등의 유명도가 있는 정신의학자(우리나라에도 김영우박사 등이 있다)들의 연구내용들을 바탕으로 우리 인생의 구조와 삶의 의미에 대해 아주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리를 잘 해놓았다. 그리고 내용이 좀 충분치 못하긴 하지만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결론으로까지 잘 도출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학자로서의 역할까지 충실히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내린 결론은 스피리추얼한 인생관(인간의 본질이 정신 또는 마음이라고 가정하여, 정신적인 풍요함을 추구하는 관점)을 가지고 break through적 사고방식(모든 것에는 의미와 가치가 있고 표면적으로는 실패, 좌절, 불운과 같이 보이는 것도 모두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순조로운 시련이다는 신념을 가짐으로써 그 시련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뛰어넘는 것과 같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의 시련을 마음편하게 뛰어넘고자 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한계도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의 전생이나 영혼의 마스터를 인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없을 뿐더러 그런 기회가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온전한 내면적인 체험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이다. 자기의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체험이 있어야 비로소 삶과 세상의 의문들이 비로소 해결되어지고 그런 해결이 자신의 삶의 의미도 보람도 제대로 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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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5-01-17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글샘 2005-01-1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보람은 창조하는 사람에게 있는 거 같네요.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달팽이 2005-01-1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글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