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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에 달빛 들면 - 조선 선비, 아내 잃고 애통한 심사를 적다
송시열.이인상 외 지음, 유미림.강여진.하승현 옮김 / 학고재 / 2005년 4월
평점 :
아침부터 펼쳐든 이 책을 읽으면서 애틋하고 슬픈 감정을 억누르며 읽어내려가다가 오후 들어 비가 내리고부터는 결국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단지 조선 시대의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서 기구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내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도 힘들고 고달픈 삶을 견뎌내면서도 선비의 아내답게 절개를 지키고 예를 갖추어 남편과 집안을 봉양했던 여인들의 마음씀씀이가 나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나라의 부름으로 먼 타향으로 떠나야만 하는 남편의 가슴도 찢어지지만 그런 남편 앞에서 만류하지 못하고 속으로 아픈 가슴을 힘겹게 가누어야만 했던 그들의 마지막 삶이 너무나도 애처로워 한 장 한 장 이야기마다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형제의 상을 치루느라 늦어버린 아내의 상을 찾아 가는 텅 빈 산골짜기에 어둠이 스며드는데 상집 문은 굳게 닫혀져 있고 향불하나 켜져 있지 않은 아무도 없는 상가에서 남편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뿌렸을 것인가.
수십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읽어내고 늘 선비로서의 의와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자신의 장, 단점을 잘 지적해주어 바르게 인도해준 조선 선비들의 아내들은 그야말로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평생을 교우할 수 있는 벗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아무리 청렴하고자 할지라도 모든 살림을 주관했던 여인들의 동조가 없다면 어찌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마다할 수 있었을 것인가? 옛 선비들의 수기에는 여인들의 몫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네 선비들은 무슨 전생의 복을 많이 지었길래 이런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는 복을 누렸던 것일까? 잠자리에서 함께 글을 논하고, 함께 삶의 의미를 논하고, 함께 깊은 도를 논할 수 있는 아내가 있다면 삶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정말 그런 아내가 있다면 '지기'라는 친구들도 그보다 낫지 못할 것이 아닌가?
우리 조선 선비들이 그토록 아름다운 문장과 작품을 많이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여인들의 보이지 않는 내조와 격려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물론 그녀들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이루고내고자 했던 나름대로의 영적인 성장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이라는 뒷받침이 없었던들 어찌 우리 선비들의 곧은 절개와 빼어난 문장이 있었겠으며, 어찌 우리 선비들의 깊은 학문과 사상이 있었으랴.
있던 자리가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그 빈 자리의 존재를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는 말이 있다. 선비들이 지은 제문에는 하나같이 아내가 없어진 빈 자리에 자신의 의지할 데 없는 막막한 사연들이 적히지 않은 것이 없다. 가장으로서 돌보지 못한 가계를 대신하여 꾸리어나가고 온갖 집안일을 맡아 했으며 궂은 가사일과 아이들의 양육, 이 모든 일이 여인들의 몫이었다. 시부모에게는 좋은 며느리, 남편에게는 절개와 정절을 지키면서도 자신을 희생시키며 뒷바라지에 부족함이 없는 좋은 아내, 아이들에게는 인자하면서도 엄한 어머니, 이렇게 많은 역할들을 혼자 몸으로 다 감당해야 했으니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음은 당연한 것이고...작은 병이 죽을 병이 되어도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생사의 강을 넘어야했던 기구한 운명 속에서도 눈물 한 번 마음껏 흘리지 못하고 남몰래 닦아내어야만 했던 우리들의 여인들....
나에게서도 선비의 피는 흐른다. 과연 나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또 그녀는 얼마나 애처롭고 슬픈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현생의 내 아내가 혹시 그녀였을까? 그래서 이번 생에는 늘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것일까? 오늘따라 빗줄기는 자꾸만 굵어져만 가고, 깊어가는 저녁이 더욱 쓸쓸한데, 삶 속에서 한 번도 한을 풀어내지 못했던 조선시대 선비의 아내들의 영령이 지금 이 곳에도 떠도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