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 깨달음의 노래, 이현주 시집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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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말이 많아지면 보통 우리는 그 말이 꼬리내리는 곳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꼬여 있는 부분이 많을수록 말은 많아진다. 그래서 때로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이 좋을 때가 있다. 말이 단순히 자신을 묘사하는 것으로만 그 역할을 다하는 때가 있다. 화려한 치장도 필요없다. 없는 가식도 필요없다. 모든 수식을 벗어버린 그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말이 정직해진다.

  시는 언어의 압축성을 통해 세상의 진실과 존재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 담겨진 삶과 자연의 모습은 그것을 담아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각양각색이다. 이현주 목사님은 시를 산문쓰듯 한다. 별다른 기교없이 별다른 비유없이 일상의 담담하고 사실적인 글들을 적어내려간다. 하지만 그렇게 적어내려가는 것 역시 하나의 기교요 비유며 기법이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내면서 물을 물 그 자체로서 느끼려고 하는 마음이 포착해내는 세상에 대한 표현이이다.

  물 스스로와의 교감을 통해 드러나는 글들, 거기에서 우리는 삶을 허공을 바라보듯 한다. 존재의 빈탕을 바라보듯 한다. 인생을 살며 쌓여가는 경험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의 창, 그는 그 창을 통해 생활을 보려 한다. 그 창을 통해 생활을 인생이라는 직물 위에 엮어 놓으려 한다. 모르는 마음 속에 우리는 늘 현재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물을 접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태도가 우리를 보다 성숙하게 한다.

  이 목사님의 글을 읽은 것도 이젠 몇 해가 되어간다. 그의 글들이 처음 내게 남겼던 파장을 잊지는 못한다. 하지만 글들이 단순히 표현하는 바를 떠나 그 마음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숙제는 독자들 각각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개님의 익숙해지고 늘 대하는 표현방식에 무디어져 간다. 뭐랄까 그의 글에서 좀 더 확 가슴이 열리는 경험들을 찾고 있는 것일까? 표적을 향해 쏜 화살과도 같은 날카로운 명중을 바라는 것일까? 왠지 가랑비같이 젖어오는 촉촉함의 맛도 맛이지만 때로는 장대같이 쏟아지는 몸에 확실하게 느껴지는 시원함의 느낌도 그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장대비만 맞으면 빨리 싫증이 날 것도 역시 안다. 그래서 완급의 모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때로는 목사님에게서 화두와도 같은 긴박함과 날카로움 그리고 직설의 미학이 보고싶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언뜻 언뜻 보이는 그의 시에서 가끔씩 갈증을 해소하듯 보는 그런 표현이 조금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소리 "뎅"하는 그 한자만으로 가슴을 울려 오는 그런 직설, 어쩌면 이것도 지금 내 마음의 욕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그와는 별다른 부족함을 보는 것은 어쩌면 내가 내게서 보는 스스로의 부족함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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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1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정생님과 이오덕, 이현주 ,전우익 이 클럽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 분의 글을
읽지 못했어요. 간간이 잡지에 실린 글만 읽었을뿐 정식으로 만난게 없는데
이번에 님 리뷰로 보관함에 들어갑니다. 저처럼 말많은 여인네에게 필요한 책이군요.

달팽이 2005-06-1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소를 남겨주시면 남도의 끝 멀리서도 책 한 권 보내드릴까 하는데요...

2005-06-13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5-06-1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여우님에게 나의 흔적 하나를 남겼군요,...^^
 
풍수잡설
최창조 지음 / 모멘토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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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삶이 되었는가에 대한 인생이야기에서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풍수지리' 하면 좋은 땅 좋은 형세 하에서 명당자리를 고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는 풍수를 인간의 지리학이라고 본다. 풍수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인간의 마음이 또 풍수를 수용하는 태도를 결정하여 원래 갖추어진 풍수를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민감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수도천도의 이야기다. 현재는 좀 시기가 지난 느낌도 있지만 아직도 수도이전의 문제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과 관련하여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그는 대전이나 남쪽으로 이전보다는 통일을 대비한 수도 이전으로 교하에 통일 수도를 두자고 주장한다. "통일"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면 그의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차피 남, 북한의 서로의 주장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거치다보면 평양과 서울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실마리가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풍수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주로 풍수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만을 고려해왔다. 하지만 인간이 풍수에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의 건축기술이나 규모로 보아 왠만한 지형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다. 따라서 풍수의 고전이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너무 그것에만 매달려 인간의 의지와 마음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결론적으로 완벽한 땅은 없다. 다만 우리들의 삶과 잘 맞는 터잡기와 그곳에서 사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명당을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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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시와 사랑 이야기 진경문고 3
고형렬 지음, 이혜주 그림 / 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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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무감각해진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반드시 감정이 무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길을 거쳐가며 사람들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란 것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연따라 생했다가 인연따라 멸하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감정의 생멸의 과정을 통해 그것이 나에게 남겨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따라서 그 감정을 좀 더 여유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이지 그 감정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대학생활 때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자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열정이야 젊을 때만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자연과 생명을 느끼는 나의 감정은 확실이 보다 풍부해지고 다양한 색조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특정 감정에 빠져 전체적인 여러 가지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가질 수 없었던 젊은 날에 비해 좀 더 세밀하고 좀 더 전체적으로 풍경과 사람이 주는 느낌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경에서 간추린 21편의 이 이야기들도 인간의 사랑과 그 때문에 갖게 되는 슬픔과 기다림과 애절함의 사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삶의 애환과 정서의 이야기가 시적 형식을 빌어 250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는 별 변함이 없을까요? 그 때의 이야기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여전히 같은 감동과 정서를 전달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것을 어떤 형식을 빌어 후세에 전달하였기에 시공간을 넘어서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매력적인 부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옛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감정의 생멸과정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마음에서 느낄 수 있었고 또한 그것을 시적 형식을 빌어 주위의 지인들과 나눌 수 있었고, 또 이렇게 먼 후세에 까지 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었으니, 세월이 변한다고 해서 꼭 사람살이 멋과 재미가 더 좋아진다고만은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을 한 번 돌아봅시다.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때가 과연 일생 중 얼마나 될까요? 늘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우리들은 감정도 없이 우리 일생을 컨베이어 벨트에 실어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사람과 만나든, 마음으로 만나든,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보든, 마음 속의 영원성과 진리를 찾든 우리는 우리 삶에서 깨어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동물적인 것을 벗어나 인간으로서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 깨어 있는 그 순간만이 우리들의 삶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를 가슴떨리게 하는 그 무엇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자꾸만 만들어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간 순간 우리가 깨어 있다면 순간 순간 우리는 세상의 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깨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 인생의 의미지워짐을 말합니다.  마음 속에서 그것을 보는 눈이 만들어질 때 우리는 이제 이 시를 지은 이와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고형렬 시인은 시경을 읽는 자신의 독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시는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 의미를 갖는 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으로 시를 읽으며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일으키는 떨림의 색깔을 포착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경의 구절들을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함께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는 저자의 개성적인 면과 20년이 넘는 시단생활의 경력으로 풀어낸 맛깔스럽고 시원한 해석이 우리들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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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의 글을 읽으면 자꾸 제 인생 선배되시는분처럼 여겨집니다.

달팽이 2005-06-0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분한 말씀입니다. 파란 여우님. 늘 저는 종착역이 없는 인생길을 가는 아이일 뿐입니다.

어둔이 2005-06-0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자께서는 시삼백편이 사무사라고 했습니다. 사랑노래라고해도 아무런 삿됨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애가서가 솔로몬의 사랑노래라서 청교도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적잖은 당황을 느끼게 한것에 비하면 시경은 아예 옛선비들이 통채로 외우고 다녔지요. 두문화의 이질성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름모를 뭇사람들의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노래라면 그게 사랑이든 고통의 신음이든 모두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본 것이지요. 중용에서도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하고 드러나도 모두 제갈길을 찾아서 딱 맞아 떨어진 상태를 화라고 했습니다. 시삼백편은 그래서 사무사라 했겠지요 우리의 희비애락의 감정생활도 모두 그리되었어면 좋겠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를 새로난 나의 사랑노래로 읽기를 원합니다. 나는 금방 이책을 들었습니다. 이 서평이 주는 마음으로 깊이 잘 읽겠습니다.

비로그인 2005-07-0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습니다. 스크랩해갑니다. ^-^

달팽이 2005-07-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변치 못한 글을...감사합니다..

ppyoongu 2007-01-26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와 닿습니다....글 속에서 제 삶을 고요히 내려다 보게 되었습니다.

달팽이 2007-01-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깨달음의 연금술 - 나를 통하여 이르는 자유
게이트 지음 / 유란시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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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과 문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를 기웃거리며 허송세월한 오랫동안의 외유를 접고 잠시 내 안으로 돌아오리라는 작은 다짐과 함께 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런만큼 내 마음의 준비가 이 책을 읽어낼만큼 파동을 유사하게 맞추어보려고 했던 탓인지 책의 메세지가 내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었고, 모처럼 다시 오롯한 마음을 세워볼 수 있었다.

  마음은 만능의 보물상자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 명예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연따라 반드시 그리고 예고없이 허물어지게 되어있는 시한부 조건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우리가 상황으로써 받아들이는 외부의 조건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선택가능성을 제공해주어서 언제라도 한 생각 돌이키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무한한 사용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이, 예수님이, 그리고 인류의 전역사를 걸어갔던 수많은 깨우친이들,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글이 후대에 전해져 우리가 문자로서 그것을 접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져 그들이 깨달았던 경지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그 자체가 이 우주의 모든 현상과 마음의 폭을 담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마음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신비로운 물건(?)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는 가슴이 떨리고, 아름다운 절경 앞에서는 마음을 뺏긴다. 너무나도 기구하고 불쌍한 사연앞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서로를 죽이고 죽여야 하는 전쟁터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기계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상황에 즉해 우리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의 모든 폭의 감정과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 마음이 일어나는 그 곳에 참된 우리의 실재가 자리한다. 그 마음이 사라지는 그 곳에 진정한 내가 있다. 삶과 죽음이 없는 그 곳도 우리가 삶과 죽음을 만들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된다.

  이렇듯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 담겨질터인데 진정 그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알면 우리는 스스로 부처가 된다. 스스로 영원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구속과 환상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대자유인이 된다. 이 책은 그러기 위해서 가장 손쉽고 늘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탐구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도록 안내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책과 경전은 사구요 활구의 도리는 스스로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

 한 생각의 차이가 부처와 중생을 가른다. 한 생각의 차이는 우리에게 왔다가 지나가는 한 생각이 완전히 지나가버리기 전에 그것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잘 관찰하라는 것이다. 그 생각에 매달리지 말고 그 생각이 나오는 빈탕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빈탕에서 바라본 세상은 지금과 여전하지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는 도리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관찰은 바로 이 한 생각에 대한 관찰과 탐구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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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5-06-01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어도 예전에 받았던 만큼의 큰 감동을 받는 일은 적어진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이지만, <좋은 책을 읽는 것만으론 부족한 무엇>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참 좋은 느낌은 아직도 살아있네요.
리뷰를 못쓰고 있었는데, 대신(?)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달팽이 2005-06-01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그 부족한 무엇은 저에게도 필요한 것이죠...내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탐구정신...
 
옛시와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김풍기 지음 / 해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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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에 나는 시에 푹 빠졌다. 물론 내가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향유하며 즐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벗과 함께 시작한 휴대폰을 통한 다섯 줄 문자메세지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시공부는 삶의 미학을 넘어서 삶의 깨달음으로까지 지향되길 원한다. 하지만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가슴떨리는 감정을 발견하는 시 한편이 있다면 그것이 인생 속에 거품처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준다.

  내 가슴을 울리는 시는 이렇다. 조금씩 시에 대해 알아가면서 단 한 줄의 글에서 내 가슴을 흔들어 이 우주를 함께 흔들어낼 수 있는 마음의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시, 그런 시가 나는 무척 좋다. 한시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단 한 줄의 고양되는 감정의 마술이 없다면 시는 그저 아무렇게나 쓰여진 언어의 잡다한 정보에 그치고 말 것이리라. 때로는 그것이 글 사이의 여백에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담박하고도 평범한 글과 글 사이의 여백에서 그런 가슴 싸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으면 이것이 인생 사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시에 빠져들면서 몇 가지의 생각이 들게 되었다. 우선은 인생이라는 삶의 경험 속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삶의 깨달음과 눈 앞에 드러나는 또 다른 세상의 경험을 어떻게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깨달음은 그저 깨달음으로서 느낄 뿐이지 그것을 언어로 빌게 되면 이미 "도가도 비상도"가 되어버린다. 감정도 또한 그러하다 멋진 풍경 앞에서 압도당해 그 풍경 속에 자신을 잊고 서 있을 때의 감정을 어떻게 언어로써 다하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언어라는 형태를 통해 그 순간의 정황을 남겨두려고 하지만 사실 언어로서 남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박제된 마음 뿐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선택되고 마음이 담겨진 한 줄의 글을 보면 글쓴이와는 달리 또 읽는 이의 마음으로 빚어내는 새로운 세상과 감동이 있고, 그 속에 시의 매력이 놓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때로는 '화개장터'에 한 번도 가지 않고 '화개장터'라는 노래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글을 만들고 '흑산도 아가씨'를 만들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라는 글들을 만들어 내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이란 만들 때에는 만든 이의 세상이 되고 그것을 감상할 때에는 감상하는 이의 전혀 다른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문장 속에서도 자신의 가슴이 열리어 그것을 바탕으로 명문장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삶을 움직여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격물하는 자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래서 늘 글을 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언어의 미로 속에 빠져 그 글이 쓰여진 풍경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환상에만 집착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삶이 한바탕의 꿈이듯, 우리는 그 꿈 속에서 또 많은 작은 꿈들과 환상을 접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초적으로 늘 깨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고 보다 진실한 세상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 한시에서 삶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가 빠지지 않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시를 풀이하면   언어(言)의 사원(寺)이 된다. 언어의 가장 순수하고도 깊이있는 추구를 통한 삶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시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느낌이나 감정 또한 그 원인이 없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내가 비워진 상태에서 나를 통해 스치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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