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틱낫한 지음, 오강남 옮김 / 모색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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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낫한 스님의 책을 오랫만에 들었다. 일생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 전쟁 종식을 위해 노력하신 분, 전쟁이 끝나자 전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은 두려움과 공포를 사랑과 자비로서 감싸안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종교인 불교를 사람들에게 심어놓기 위한 승려만은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과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세계의 인류가 자신이 자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믿는 종교의 뿌리로 돌아감으로써 모든 종교가 반목과 적대감에서 벗어나 상호간의 이해와 사랑을 높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것을 원했다.

  프랑스의 보르도지방에서 플럼빌리지를 운영하고 계신 스님은 우리들의 참된 존재는 지금의 드러난 세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국토와 서방정토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숨쉬며 살아가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기쁘고 행복한 바로 이곳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부처님과 만나는 법은 '마음 다함'이라고 한다. 숨쉴때는 온전히 숨쉬는 것을 느끼고, 걸을 때는 온전히 발걸음에 온 마음을 집중하고, 먹을 때는 음식에 모든 마음을 집중하는 것, 바로 현재에 온 마음을 기울여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마음 다함은 마음 없음이 된다. 온마음을 모르는 마음으로 만들고 생각과 관념을 떠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묻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과 더욱 가까워진다. 그 곳이 바로 우리의 참된 고향이다.

  우리가 보는 작은 생명체 하나에 들어있는 온 우주를 보는 것, 그래서 나와 그 작은 생명체 하나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 모든 생명체의 육신은 사라져도 그것의 본체는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그리고 생겨나지도 않음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내 눈 앞에 있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찰을 필요로 한다. 내 눈앞에서 느티나무 작은 잎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그 잎새사이로 언뜻 비쳐지는 하늘, 이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한다. 나무아래로 시원한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오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틱낫한 스님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듣는다. 내 속에 있는 진정한 내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스님은 지구에 사는 온 인류가 타인과 타종교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버리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지구인이 보다 성숙한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남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의 뿌리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어떤 종교든지 그 원래 뿌리는 순수하고 인간 존재의 본래모습과 닿아 있으니까. 그 종교의 뿌리에서 멀어지면서 우리는 서로가 다르고 독립된 개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원래 나무를 보라. 그 뿌리는 대지 흙으로 서로 같은 영양분과 에너지를 받으며 자라지 않는가?

  자신의 존재 밑바탕까지 보아야 그 많은 종교가 바로 그 밑바탕에 이르는 하나의 길일 뿐,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대지 흙으로서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되고 서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줄기를 타고 가지로 갈수록 잎으로 갈수록 우리는 자신이 독립된 개체인양 생각하고 자신의 물질적 삶이 전부인양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희생시키면서 정작 중요한 자신의 밑바탕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삶은 늘 역설적이다. 물질적 삶에 치우칠수록 자신의 정신적 삶은 황폐해지고 자신을 버릴수록 오히려 더욱 자신의 본래모습을 되찾는다. 원래 참된 진리는 역설적이지 않은가? 길 없는 길, 문 없는 문을 지나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가는 여정은 세상 모든 곳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으나 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오늘 나는 내 몸 담은 이곳에서 대도로 가는 길을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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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 - 간디학교 교장 양희규의 '행복한 작은 학교' 이야기
양희규 지음 / 가야넷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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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대안학교인 '간디학교'가 어떤 배경에서 누구에 의해 계획되고 설립되어 왔는지 그리고 어떤 교육이념과 철학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이 땅에서 교육자로서 살아가는 내게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만나고 제도교육 속에서의 그들의 드러나지 않은 고통과 상처를 보고 있는 자로서 과연 행복한 배움의 터가 있을까? 라고 하는 의문 속에 이 책을 신청하였고, 이 책이 도착한 오늘 바로 읽어갔다.

  양희규 교장선생님의 어린 시절 제도교육에 대한 불신과 상처들은 참다운 교육에 대한 꿈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때로는 순응해버리고 그럼으로써 포기해버린 내 어릴 적 꿈이었고, 내 청춘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묻혀진 시간들이었다고 한다면 저자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다음 생을 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 나와는 다른 점이었다. 꿈과 상상력을 말살시키는 교육현장에서 그가 느낀 배신감과 좌절은 단지 배신감과 좌절에 머무르지만 않았고, 참된 꿈과 상상력이 살아있는 배움터에 대한 구상으로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실현으로서의 간디학교가 현재의 대안 교육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학창시절의 제도교육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교육실천가의 마음 속에 담겨지고 다시 세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어떤 선이 있고, 그것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져야 한다는 시비의 판단이 생기는 순간부터가 어쩌면 교육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교육은 자연처럼 스스로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잘못된 사회구조속에서 상처받고 비뚤어진 아이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자연 속에 그들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벤포스타, 어린이공화국에서 보았듯이 아이들은 아이들이 아니며 정신적으로 어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과 신뢰감 그리고 사랑이 그들을 가장 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열쇠임을 알게 된다.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아 비폭력주의, 자치주의, 노작교육, 정신적 성숙, 전인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간디학교의 교육이념도 부럽지만 늘 3-5킬로의 자연속을 걸어다니면서 노동하고 자발적인 욕구에 의해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으며 그러하기에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어른들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쩌면 그들로부터 배우게 되면 이 사회가 더욱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묻게 한다. 나는 과연 정말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교육자로서 과연 행복한가? 하고 말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나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한 번도 나 자신의 본래모습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이가 어찌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나는 아이들에게 행복함을 나누는 교사인가? 불행을 얹어주는 교사인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표류가 생각난다. 우리가 문제아라고 낙인찍었던 바로 그 아이들,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내적 욕구를 발견한 뒤에 그토록 무섭게 노력하고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 과연 우리들은 외부의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 얼마나 많은 천재들을 얼마나 많은 소중한 생명을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사실 따지고 보면 교육자인 우리들이 바로 제도적인 교육을 받고 영혼이 굳어버린 문제아들이다.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삶으로써 가르쳐줄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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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3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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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록, 글의 일정한 순서나 형식없이 써내려간 글이라는 의미다. 수필형식으로 보여지는 이 책은 근대적 작가로서 "운문에는 지용, 산문에는 상허(그의 호)"라고 불릴만큼 그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42편의 제목으로 쓰여진 이 글들은 이태준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깊고 투명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뿐만이 아니다. 글쓰는 형식에는 문외한이던 내게 글이 단지 마음만 잘 담아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잘 담겨지기 위한 필연의 형식을 발견해내는 것도 역시 글쓰는 이의 몫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하였다.

  우선 그의 사람과 사물, 자연을 대하는 마음에는 우리 옛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깊은 관찰과 자아와 집착을 비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대상과의 깊은 교감이 우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언어들이 일정한 배열을 갖추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문체가 화려하고 기교가 많은들 무엇하겠는가. 우선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의 울림없이 나온 글들이 어찌 타인의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글에는 우선 작가의 마음이 담긴다고 했을 때 그 마음없이 타인의 마음을 공명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묵, 십분심사일분어, 자연과 문헌, 묵죽과 신부 등등의 작품에서 드러난 그의 세상을 보는 방식은 이미 삶의 멋과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탐구심이 바탕된 탐구자이자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그의 글을 맑은 정신으로 읽다보면 그의 글에서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거의 없을 뿐더러 그가 선택하는 어휘 하나 하나가 아주 압축적이면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가장 직설적인 언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문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독자의 마음 속에 일으키는 마음의 파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문체의 선정에 대한 직감적인 포착이 엿보인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바로 들어갔다가, 때로는 넌지시 둘러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주제에 접근해버린 것이라든지....이런 다양한 방식에 따라 그것이 주는 느낌도 물론 달라진다.

  역시 글의 대가는 직관적인 글쓰기를 한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맞추다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는 글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글 전체의 느낌이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글은 작가의 마음속의 직관에 의해 포착된 글들이 직관적인 에너지를 통해 분출할 때 자연의 선율을 타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잦아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직관을 계발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한 작품 이면에 얼마나 많은 습작과 고통의 세월이 쌓여진 것인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재능과 노력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듯, 세상을 격물하는 마음이 어떤 상을 그려내고 그 상을 따라 언어화시키는 작업의 독창성과 숙련도에 의해 작품은 그 빛깔을 달리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이태준의 작품들은 물을 관찰하는 그의 마음과 그것을 일정한 형식의 글로 엮어내는 재주까지 모두 배워야 할 고전과도 같은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의 이 책이 고완이 되는 것이다. 새롭게 되살려야할 글쓰기의 텍스트가 되는 고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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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프로젝트 - 당신을 안내하는 마지막 메시지
장휘용 지음 / 대양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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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성장 프로젝트로서의 가이아 프로젝트는 우주 속의 특별한 행성으로서의 지구라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성장계획이고 우주의 성장계획이다. 영혼 성장의 특별한 체험장으로서의 지구에서 태어난 내가 가이아 프로젝트의 마지막 시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5차원의 세계로 바뀌는 지구에서 나는 나의 별을 찾아 떠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 지구에 남아서 나의 영혼의 여행을 계속해나갈 것인가?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은 늘 내 인생에 걸쳐 풀어지지 않는 그렇다고 목으로 넘겨 삼켜지지도 않는 수수께끼였다. 나아가 이 지구라는 별의 존재 의미와 죽음 후의 세계 그리고 우주라고 하는 거시적인 세계에 대한 물음은 때로 나의 의식을 오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몸의 차원에서 벗어나 더욱 넓고 깊은 존재로서의 나의 바탕을 묻게 했다. 그동안 읽었던 몇 권의 책으로 다 답할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 가이아 프로젝트라고 하는 이야기로서 모두 풀리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황당무계하다거나 무협지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아주 특별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많은 미래예언가들이 지구의 물질적 삶의 종말을 예고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적 종말이 아니더라도 많은 지각변동과 함께 많은 인류의 희생과 지구적 삶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책도 지구의 생성 의미와 인간 존재의 의미, 우주의 생성과 변화 발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이처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책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에서의 물질적 삶이 얼마남지 않은 절박한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리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에너지로 나를 빨아들였다.

  20세기 후반에서 와서 지구상에서 많고 다양한 영성서들이 대량으로 출판되고 이것이 물질적 삶에 치우친 지구인들에게 삶의 균형을 맞추는 메세지로서 갑자기 쏟아져나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불어 인류역사상 오래된 문명에 대해서 밝혀지지 않는 미스테리들이 비공식적이고 은밀하게 전수된 내용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뭔가 심상치 않은 공통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얼마남지 않은 우리들의 마지막 삶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이 책이 제시하는 대로 모든 종류의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존재에 대해, 우주에 대해 모르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모르는 마음은 몸에 갇히거나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사념체에 의해 갇혀지는 것이 아닌 우주끝까지 펼쳐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을 대하고 인식함을 말한다.

  그것은 선심초심에서 말하는 선심이고 그것이 또한 가이아 프로젝트의 마지막 경험에서 우리가 체험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의식의 질적 비약의 방법이다. 설령 그것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삶의 종말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것에 의한 경험이 이 지구라는 특별한 별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런지도 모른다. 이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순간에 그것을 직접 체험하는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기쁨이고 고마움이 될 수 있도록 각자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이 책 또한 하나의 맹목적 신념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절박한 메세지마저 버릴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나름대로의 이유와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내가 지구에 남든 나의 별로 돌아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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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 - 케임브리지 대학 노교수가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전하는 인류 성찰의 지혜
앨런 맥팔레인 지음, 이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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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유수한 대학에서 문화인류학 계통의 학문을 한 사람으로서 그가 손녀딸에게 주는 글은 감동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저명한 대학의 이름난 교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마치 편안한 동네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녀딸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얘기한다. 글의 내용도 평생 학문을 한 사람의 글이라기보다는 편안하고 쉽게 쓰여져서 손녀딸이 가슴으로 읽을 수 있게 써내려갔다. 하지만 내용은 녹녹하지 않다. 녹녹하지 않다는 말이 논리적이고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30년 학문이 한 주제의 5-6페이지의 내용에 쉬우면서도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듯 산업화로 인한 핵가족의 도래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가족에서 밀려나가버렸고, 전통사회에서는 삶의 지혜를 조언해주고 방향을 인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지식이 분화되고 전문가만이 대접받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빨라져버린 정보화사회에서 정보매체를 다루는 기술을 접하지 못한 그들은 의사소통의 통로마저 잃고 외롭고 고독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에게도 반드시 올 노년에 자신의 손녀딸에게 이렇게 삶의 아름답고도 성숙한 메세지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노년을 미리 꿈꾸게 하고 있는 것이다.

  30년간의 세계각지에 떠난 여행이, 그리고 평생에 걸친 진리에 대한 탐구가 그에게 남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제도나 틀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다를 수 있고, 그 다양함은 인간이 쌓아온 선택의 산물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도 우리들의 선택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주어진 사회적 구조물로서의 어떤 정형화된 삶의 모습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삶은 어떤 것이든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것도 선택하에 놓여져 있고, 사랑도 마찬가지다. 섹스와 몸의 욕구에 대한 문제도, 학교와 조직, 불평등, 지식과 개인적 가치, 시민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 인류의 미래 등 28편의 인생의 주제들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서 다양하게 열려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네 인생을 온전히 누리라는 메세지이다. "세상에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자유롭고 인생의 열려진 가능성의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할아버지가 손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말로서 이보다 아름다운 말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랑한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네 날개를 마음껏 펴라." 우리들의 삶이 위축되고 불행해지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의 씨앗때문이 아니던가? 자신의 삶을 열린 무한한 가능성 속에 던지고 모험 속에 놓음으로써 우리는 삶의 정말 중요한 가치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그 삶이 우리들의 영혼을 더욱 살찌우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인생과 학문에 대한 그의 다양하고 폭넓은 지혜가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구원에 대한 면에 있어서는 일종의 편견이 작용하여 무한히 열린 정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닫혀진 느낌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더라도 그것으로 다하지 못하는 삶의 중요한 자물쇠는 아직 열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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