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내가 원하는 대로 꾸기
스티븐 라버지 지음, 김재권 옮김 / 인디고블루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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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처하는 마음의 상태를 크게 분류하면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숙면의 상태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우리의 무의식과 현실의식이 서로 공존하며 우리 삶의 특별한 메세지를 전달해주는 공간인 꿈은 아주 특별하다. 꿈은 우리의 마음이 마음속에 창조해내는 이미지와 형상이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우리에겐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체험의 흔적을 우리 뇌속에 남긴다.

우리가 잠드는 과정은 죽음의 과정과 비슷하다고 한다. 먼저 우리의 몸의 감각들이 이완되어가고 마비되며 그 다음 의식도 점차 해체되어 간다. 그런 육감이 해체되고 나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의 존재를 지켜보는 무엇인가가 있다. 꿈이든 잠이든 죽음이든 현실이든 우리가 그 우리의 본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면 윤회의 미혹에 시달리게 됨은 매한가지다.

이 책은 심리학적인 연구방법에 의해 우리가 가진 표면의식을 한 껍질 벗겨낸 것에 그 의의가 있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만이 이 세상인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실인식 너머의 세상과 그것을 아는 나의 본래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책이다.

꿈은 우리의 현실인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창조적으로 생성되는 시뮬레이션이며 그것은 우리 삶의 문제점들을 상징과 은유로서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가 우선 강조하는 것은 '꿈 알아차리기'이다. 이것이 꿈임을 먼저 안다면 그 꿈에 능동적인 대응 뿐만 아니라 꿈의 조작 역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점이나 과제를 꿈에서 선험적으로 다루어볼 수 있고 그 똑같은 선험체험을 바탕으로 현실에서의 과제와 문제를 보다 잘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꿈을 통한 우리 마음과 몸의 치유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자신과의 만남으로 향하는 문이 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다만 학문적 구성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하고 있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실인식 아닌 다른 세상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 엄존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는 점에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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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04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아주 신비로운 영역인것 같은데.. 꿈을 소재로 한 책이 있었군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고 싶네요. 프로이트는 꿈이 미래를 예언해준다고 하는데... 물론 무의식의 반영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꿈에서 무엇인가를 예언해주고 있다고해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주 어려운일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꿈을 아주 자주 꾸는 편입니다. 그래서 악몽을 꾸고 난 후에는 하루종일 기분이 안좋곤하지요. 그 꿈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주는 것일까. 생각해보곤 하는데.. 저의 무의식을 제가 의식할 수 없듯이 꿈을 해석하는 것도 아주 어려운작업이 되곤하죠, 하지만 꿈이 자신과의 만남으로 향하는 문이라는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아마 전 제 자신과 자주 만나고 싶어서 꿈을 자주 꾸나봅니다. ^-^;

달팽이 2005-07-0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님께서 보시고 몸으로 배워보신다면 악몽이 망치는 하루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단기간에 되지는 않습니다만...세상 현실이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깔을 띠고 나타나듯이 꿈도 그것이 현몽이건 길몽이건 악몽이건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한 어떤 메세지이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거울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먼저 편견으로 작용하여 나쁜 꿈이라고 단정짓기 전에 꿈에 대한 나의 순수하고도 투명한 직감과 느낌을 느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형화된 악몽이란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저는 제가 꿈에서 죽는 것을 경험했는데도 그것이 기분나쁜 것이 아니라 아주 마음이 투명해지는 꿈이었으며 그 죽음이후에도 지속되는 나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에 더욱 삶에 대한 힘이 솟아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아직은 미지의 베일에 가려 있는 꿈에 대한 도전, 해보세요...뭔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5-07-04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뎃글도 퍼가서 올리겠습니다. ^-^ 아주 좋은 뎃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 사람들의 지혜
단정자춰 지음, 성진용 옮김 / 호미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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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장주접몽에 보면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내가 나비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일생을 거치면서 20-30년의 세월을 잠으로 보낸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세월을 차지하는 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이 우리 인생에 주는 메세지가 있음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이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 한 권 있다. 중국어로 달라이라마라는 이름을 가진 단정자취 스님의 티베트 세계관에 의한 꿈의 이야기 속으로 이 책은 우리를 초대한다.

먼저 우리가 잠드는 과정은 죽음의 과정과 흡사하다 우리의 오감이 해체되고 이완되어가는 과정과 의식의 해체과정은 죽음의 순간에도 체험되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업에 의해 오염된 의식으로 말미암아 꿈에 들어가기 전 광명의 나타남을 알지 못한다. 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우리는 진정 우리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알 수 있다면 꿈도 인생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의 수행이 잘 되어 있다면 오감과 의식이 해체되고 난 다음 우리에게 남은 본래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래 존재를 모르고 인생의 미망 속에 허덕이게 된다면 중음의 바르도 속에서도 매한가지의 경험이 있을 따름이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우리 일생의 수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잠과 꿈을 또한 우리 마음 수행의 공간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꿈 속에서 이것이 꿈임을 알아내고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의 인생이 꿈임을 알아내고 나의 진정한 본모습을 찾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꿈은 상징과 은유로서 우리 삶에 중요한 메세지를 전달하기도 한다.나도 인생에 있어 뭔가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명징한 꿈을 몇차례 꾸었다. 그리고 그 꿈들은 논리와 언어를 떠나 신기하게도 나에게 주는 교훈과 메세지를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달하였다. 문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방식을 내가 과연 그 무엇으로 그것을 아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그것을 아는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매일 밤 죽음의 과정을 거치며 다음날 아침 탄생의 과정을 거치는 중음의 어디엔가에 있을 나의 본래의 모습을 마음 속 흔들리지 않는 곳에 두고 또 다른 생(하루)을 맞이하는 가운데 나의 생명의 빛이 더욱 밝아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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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레프 톨스토이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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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각 단계에서 우리는 늘 행복함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중요한 지표가 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톨스토이의 조금 색다른 이 소설은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며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색다른 이유는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에서 늘상 다루고 있던 종교적인 삶을 떠나서 그리고 사회적 차별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떠나서도 아주 사소하면서도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 부부가 이루어가는 삶의 행복을 그야말로 우리 삶의 행복의 전형으로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관습이 매일 우리의 삶을 고정된 형상으로 석화시켜가고, 우리의 정신은 자유로움을 상실하여 아무런 열정도 없는 평탄한 삶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마 결혼생활이 중반기로 접어드는 세상의 모든 부부들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일 것이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이런 문제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르게이 미하일리치의 아내가 된 마샤는 이런 일상적 삶의 관성에서 의식의 화석화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새로운 삶의 활력소로서 사교무대를 찾게 되는 과정과 그 사교무대에서의 화려한 생활속에서 일시적 삶의 기쁨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시작은 끝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그녀는 쇠퇴하는 자신의 사교계에서의 위치와 그로 인한 삶의 또 다른 화석화에서 다시 가정을 찾게 되고 이미 가족에서 예전에 있었던 삶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결혼 초기 생활의 행복했던 시절들로 돌리고 싶으나 이미 그럴 수는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허무해한다.

그녀가 결혼 전 포크로브스코의 옛집에서 보내며 세르게이랑 나누는 후반부의 대화 속에서 그녀는 삶의 진실된 행복은 삶의 단계 각 각에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해내어야 하는 보물과도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당신은 잎새와 풀이 비에 젖는 것을 보고 그것들이 부러웠지. 당신 자신이 풀이 되고, 잎새가 되고, 비가 되었으면 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야. 아름답고 발랄하고 행복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삶의 각 단계에서 변화해가는 모습을 수용하고 그 곳에서 변화된 사랑과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세르게이의 말은 삶의 관성에 타락한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결혼한 지 일년이 다되어가는 나의 결혼생활에서도 사랑의 자리는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 서로에게 남겨져 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랑은 모두 씻겨져가고 없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텅 비어있을 것 같은 그 자리엔 여전히 변화된, 가슴앓이하고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열정은 없어도 내 삶을 지탱해가는 평화로움과 행복함이, 사랑이 모습을 달리하며 웅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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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울다
제럴드 L. 싯처 지음, 이현우 옮김 / 좋은씨앗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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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단란한 한 가정에 별안간 닥친 사고는 그 가정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린다.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 구성원의 정체성과 자아마저 상실시킨다. 이러한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왜? 나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당혹스러워 한다. 급격하게 변해버린 그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앞에서 충격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때로는 그 상실이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황폐하게 하여 남은 생애를 무의미하게 보내게 하거나 남은 자의 삶을 단축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예고없는 불확실한 사고는 누구에게나 닥쳐온다. 다만, 인생의 길에서 일찍 만나느냐 늦게 만나느냐의 문제이고 급격히 죽음으로 치닫는가 아니면 천천히 다가가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은 자신의 일부를 파괴시킨다.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그 관계 자체를 파괴시킴으로써 자아를 파괴시킨다. 하지만 파괴 속에는 창조가 도사리고 있다. 파괴의 상실감에 아무런 것도 보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볼 수 없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인생의 길에 느닷없이 닥친 사고와 불행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이후의 삶에 의미부여하는 가치를 달리할 수 있다.

싯처는 상대편 운전자의 잘못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 세 명을 동시에 잃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을 존재하게 했던 정신적 관계망들을 완전히 해체시킨 이 사건은 그와 남은 자녀들의 삶을 불행속으로 던져 넣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상실감 속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고 삶의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 사고는 그로 하여금 점차 남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그의 모습을 기대했고 또한 파괴된 관계망을 대체할 새로운 관계망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과 믿음이란 이름으로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그 상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의 영혼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것은 그 사고를 일으켜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상대편 운전자를 용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그리고 자신의 이어지는 삶에 도움과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어 갔다. 비록 죽은 자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하고 갔지만 살아 남은 자들에겐 아직 남은 삶에 대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자녀들의 삶, 그리고 자신의 남은 삶은 그 처참하고도 수용하기 힘든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렇게 수용은 용서로 용서는 사랑으로 그 사랑은 저자의 영혼을 성장의 길로 돌아서게 하고 비로소 그는 자기 삶이 가진 전체적인 시각을 갖고 생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왜 나는 아닌가? 하는 물음 속에 나도 언젠가 맞아야 할, 아니 오늘일지도 모를 그 사고와 상실감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비체험을 하게 하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과연 나는 그런 상황에서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발휘해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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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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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별세 소식을 일간지를 통해 알게 된 후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나서야 이 책이 손에 잡혔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주말을 이용해 찾은 순천의 선암사에서 나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속에서 그 흔적을 간직한 모습을 선연하게 볼 수 있었더랬고, 문득 관촌수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글은 시대의 질곡과 역사적 아픔을 자신의 성장과정을 통해 사실적이고도 고백적으로 쓰여졌다. 이 글이 나의 감성속을 깊에 파고든 것은 잘 정제되고 세련된 맛이 없이 투박하고 흙투성이의 글이지만 왠지 어릴적 세차게 비오는 날 밤에 아랫목에 손을 찔러 넣고 텔레비전을 보던 어릴적 기억을 되살려 놓기 때문이다.

물론 할아버지의 삶과 생각들이 한국의 양반사회의 고리타분한 모습과 비실용적이고도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가 그리던 것은 단지 그런 보수적이고 낡은 옛 양반사회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신분의 벽을 허물고 정을 느꼈던 옹점이와 대복이의 만남이 그러했고, 단 한 번 뿐이었지만 충격적인 표현을 써가며 되살렸던 아버지의 탈선도 아마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인간적인 면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사회가 각박해질대로 각박해진 지금...그가 떠난 뒷 자리에 그의 글이 주는 따스함의 여운이 이토록 오래 남아있는 까닭은 그의 글 속에 베어 있는, 아니 그의 삶 속에 자리했던 오래된 날들에 대한 인간적인 기억 때문은 아니었는지 싶다. 자신의 오래된 개인사의 여백 속에 위치한 삶의 아름다움과 그 생명성이 전근대적인 자연적인 삶과 그 속에서의 인간미에 대한 아련해지는 그리움으로 드러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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