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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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햄버거가 전세계인의 주식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개인 파산자가 산더미처럼 불어가고 있는 지금, 노무현 정부에 의해 다시금 보수주의적 정책으로 회귀되고 있는 노사관계에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행복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가? 1848년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제기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NO'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저자는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과 전태일의 삶에 영향을 받고 맑스주의에 의한 삶을 아직껏 살아오고 있는 이른바 세간의 시선으로 본다면 깝깝하고도 융통성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의 삶속에서 동지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삶의 투쟁과 사상들, 변해가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들을 새롭게 정리해내고 많은 동양적 사상과 지혜들에 대한 폭넓은 독서와 함께 유연해지고 넓어진 생각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축으로서 꼿꼿이 유지되고 있는 현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맑스의 삶과 그의 문제제기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기본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그것이 옷을 조금 바꾸어 입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에 대한 생각들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게 한다.

우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이것은 노동관에 대한 변화를 의미하는데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노동형태도 많이 변화되어서 이젠 제조업에 종사하는 육체노동자 뿐만 아니라 정신노동자 및 사무직 노동자 등...자본의 지배하에 '소외된 노동'을 영위하는 모든 계급 계층들이 이에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요즘식의 말대로라면 20:80 사회에서 필요없는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자본의 편에 종사하는 경영노동 및 이와 유사한 형태의 노동도 바뀌어진 사회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협동노동조합에 의해 운영되건 국가에 의해 운영되건 또는 전교조의 노조전임자처럼 그렇게 운영되건....사회내에서는 필요한 노동이므로 지금은 비록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지만 바른 처우로 바뀌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까지 포용하는 노동관을 갖추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음으로 인류사회가 계급사회에 접어들고 나서부터 그 사회가 붕괴되는 데에는 역사적 주체임의 인식과 더불어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힘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문이다. 그것은 단지 수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역사발전의 법칙 속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힘의 등장을 말한다. 부르조아는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그 자본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듯이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할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소멸시키고 도래할 역사적 법칙 속에서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노동자 정당이라고 하기엔 대의제민주주의의 한계를 느끼는 나로서는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없고, 다수의 폭력혁명이라는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라는 전태일의 글에 나타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것은 더욱 확장되어 이 자본의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육체가 고통당하고 마음이 상처받아 인간성이 파괴되는 자본가계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만들어가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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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사람들
케빈 베일스 지음, 편동원 옮김 / 이소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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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의 병적기록이 잘못되어 내가 다시 군대에 잡혀가게 되는 일....남자들이라면 어쩌면 한번쯤은 이런 악몽아닌 악몽에 시달려 본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꿈속일 뿐이고 깨고난 후 일과를 마치고 친구들과 술한잔을 기울이며 안주거리로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현실이라면 얘기는 아주 복잡해진다. 그 때 우리는 군대의 상명하복식 질서에 편입되어 자유의지를 상실한 한 명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노예제 하면 흔히들 고대의 로마사회나 스팔타쿠스 또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인류역사에서 사라져버린 한 기록들로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예제가 허울만 달리하고 세계화가 깊숙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현대사회에서도 존재한다면 그대는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저자는 '채무노동'이란 이름의 허울뿐인 노동계약서 속에는 사기와 기만에 의해 유린되는 인간의 자유와 생명이 있으며, 다 써버리고 난 후 일회용품처럼 내버려지는 노예적인 삶이 전세계의 도처에 퍼져 있으며 그 노예제는 세계화의 경제 속에 깊이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채무노예의 형태는 성 매매업, 임금노동자의 노예로의 전락, 노예제의 문화와 전통의 지속된 형태 등 사회와 문화에 따라서 다르게 형성되지만, 그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교육받지 못하고 사회의 극빈층에 해당되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못하여 일정한 사회조건 하에서는 언제든지 그들의 지위가 자본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과연 이렇게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마음대로 짓밟고 희생시키는 경제체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야 하고 이러한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나 스스로의 자각이 우선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사회문제의 모든 경우가 그러하듯 노예제 종식에 있어서도 우선적으로는 문제의 당사자인 '채무노동자'자신의 주체적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 사회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그것과 더불어 바른 의식을 가지고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한 사회의식(사회적 밈)의 성숙도 갖추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형된 노예제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경제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노예제에 의해 생산된 상품을 아무런 생각없이 소비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노예제의 유지와 영속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피와 희생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 후 일회용품처럼 폐기처분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간의 존엄성을 그리고 우리의 존엄성을 짓밟고 폐기처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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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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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가 경제 주체의 한 구성원이 됨과 동시에 교육 주체의 구성원이 된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란 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제 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동시에 그 사회속에서 교육되어지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라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제적 삶이란 자본주의의 이윤증식의 메커니즘에 휩쓸린 '질주하는 돈의 삶'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동차문화와 패스트푸드를 위주로 한 '속도와 경쟁'의 삶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이 속도와 경쟁의 삶에는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좀 더 높이'라고 하는 구호 속에 우리는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근원적 물음을 놓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들의 삶에 대해 한번 늦추어보거나 멈추어 서서 성찰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으로서 교육혁명을 제안한다. 나로부터 이루어지는 의식혁명을 통한 삶의 실천적 나아감이 이 사회의 거대한 오류의 질주하는 기차로부터 내가 내리는 방법이고 나아가서는 그 기차에 탄 사람들을 모두 내리게 하고 기차를 폐기시키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옆집 아줌마가 상징하는 바는 아마 우리 사회의 엄연하고도 냉정한 경제질서의 논리일 것이다. 이러한 옆집 아줌마의 힘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우리들의 깨인 의식이자 실천의 첫발을 내딛는 용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늘 자신의 내면적 욕구나 자유에 의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진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다. 그래서 사회가 요구하는 바, 국가와 민족이 요구하는 바, 그 요구 속에 도사린 자본의 논리와 음모를 알지 못하고 우린 우리의 진정한 내면적 욕구를 버려야만 했고, 그러한 삶은 결국 외면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를 갖게 되더라도 늘 허무하고 빈 것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타인에 의해 강제된 삶이었지 자신의 삶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젠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요구의 부름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적전치의 삶이 아니고, 돈의 노예된 삶이 아니고, 타자에 의해 강요된 삶이 아닌, 참된 삶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한다. 이것이 잘못된 삶이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 내가 생각하는 옳은 삶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아이 자신이 가진 선택권을 잘 행사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고 그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 그것이 교육혁명의 출발점이다.

또한 교사로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름대로의 반성도 해본다. 과연 나는 지배이데올로기나 국가 이데올로기를 학교에서 학생에게 단순히 전달하는 자본의 외판원은 아니었는가? 내가 그런 교육내용을 만드는 지식창조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잘못된 지배이데올로기를 볼 수 있는 눈과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기 위해 그것을 조작하고 다듬는 재단사나 디자이너 정도는 되지 않아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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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제임스 앨런 지음, 공경희 옮김, 김미식 그림 / 물푸레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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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떤 시련을 대하거나 병이 들어 고통의 파도에 휩쓸려 괴로워하고 있을 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도대체 나한테 일어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때로는 그것을 재수가 없다고 치부하거나 운이 나쁘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좋은 일들을 접할 때에 저사람 오늘 땡 잡았군, 운이 좋군 하고 보이는 현실 이면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곤 한다. 현대 명상문학의 고전이라 불리우는 제임스 알렌의 이 책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생각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우주적 쇼라고 말한다.

자신의 성격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 건강과 삶의 목적과 성취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 생각들이 모여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살아오며 겪었던 병과 상처와 상실감들은 정확이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났으며, 하루 하루 내가 당면하는 갈등과 문제 역시 나의 마음가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간간이 들어 있는 김미식 화백의 그림 또한 알렌의 생각을 따라가며 보기에 좋았다. 특히 두 가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데 하나는 뿌리부터 줄기와 가지가 모두 그려진 나무 한 그루였고, 또 하나는 마지막으로 나와있는 수많은 갈매기의 비상하는 그림이었다. 나무그림이 주는 메세지는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는 기반은 보이지 않는 땅 속의 뿌리에 있듯이 우리 삶의 보이는 물질적 현실을 형성하고 지탱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삶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나름대로의 정신적 세계를 펼쳐서 각자의 꽃과 열매를 피워낼때 저마다의 날개를 달고 비상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후자의 그림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 있던 어느 환경에 처해 있든 세파에 시달리고 급류에 휩쓸리는 우리 영혼을 구제하는 삶이란 우리 가슴 속 웅크리고 있는 참된 자아를 깨워 그로 하여금 우리 몸이라는 배를 움직일 방향키를 두 손에 쥐어주는 일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삶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폭풍의 한가운데의 고요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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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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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일대의 '니나 신드롬'을 일으켰던 이 문제작은 니나라고 하는 한 여자의 일생과 그를 사랑했던 20살 연상의 슈타인의 사랑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전체주의와 획일주의에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한 여자의 일생 속에 담긴 무거운 역사와 그녀의 어깨에 드리워진 가혹한 인간관계의 망이 그녀를 삶의 극한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하지만 고통의 한가운데에는 그 고통이 일지 않는 태풍의 눈과 같은 고요한 영역이 존재하고 그 영역 속에서는 삶의 시련들을 마치 타자의 눈으로 조명하게 하는 뭔가가 있음을 보여준다. 니나의 인생여정에서 겪어야 했던 가혹한 시련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원하지 않는 아이의 출산, 자살 기도, 나치의 탄압 속에서도 '미련없이 선택하고 그 선택된 삶을 깊이 받아들이고 후회없이 부딛히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해방될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니나에게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바쳤던 슈타인의 사랑도, 니나의 삶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듯이, 결국엔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위한 여정이었음을 알게 되고, 이것은 니나의 언니로서 이 글의 주인공인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진실로서 남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에너지를 외부로 쏟으며 뭔가 인생의 결과물을 남기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나의 내부로 향한 에너지였으며 그 세월의 결과 보다 다채롭고 성숙해진 나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나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린저의 생각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어느 정도의 자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와 굴레를 참지 못하고 지금도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는 그녀는 이탈리아의 삶이 바로 개인의 자유와 삶의 느슨함이 존재하는 국가라고 말한다. 삶의 진정한 모습이란 바로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온갖 제도적 망과 국가주의적 굴레가 드리워진 속에 잃고 있던 우리의 여유와 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여유와 틈이 우리를 현실의 삶의 폭풍에 휩쓸리지 않고 그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우리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교훈을 배우게하여 우리 영혼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별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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